4월 마지막 날 소천 하신 한독 약품 명예회장이신 고 김신권 회장님을 회상합니다
5월 1일 노동절날로 휴무의 시작된 날이라 낮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 밸이 요란하게 잠을 깨운다
현 한국 메디카 백일석 부사장님( 영세식때 제가 대부였음)의 전화다
김신권 회장님께서 소천하셨고 장례식장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이라고
알려주었다.
1973년 군대를 제대한 내가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가 한독약품 입니다
당시 중구 영락교회 앞 쌍용 빌딩 9층에서 입사 필기 시험 을 합격한후
면접 시험을 볼때 처음 뵈었다.
매서운 눈초리에 비해서 온화한 얼굴 처음 면접시는 아주 무서운 분으로
느껴졌다.
그후 신년 시무식때 를 제외하곤 뵙기 무척 힘든 분이었다
당시는 문성환 부사장님이 대개의 업무를 처리 하시고 사원들과는 늘 접촉 하시니
고 김신권 회장님께서는 사장님이 셨는데도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75년 10월 까지 짧은 회사 생활을 하고 나의 사업을 해보겠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내가 영진약품 개발상무 시절 아마도 1995년 경에
일양약품과 영진약품 간에 상표분쟁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당시 크게 힛트해서 잘 팔리는 영비천을 모방해서 영천디라고 영진에서
만들어 판매했다
영비천 복제품은 영진 영천디 말고도 30여 회사에서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이 제품은 약품이 아니라 식품이므로 광고 규제를 받지 않아서인지 광고의 힘을타고
엄청 인기가 좋은 제품이었는데 복사품이 많은데다 상품명도 거의 비슷했고
포장도 비슷하게 만들어 판매하니 오리지날 회사인 일양 약품이 화가 날만도 했다
그래서 모든 복제품들을 상표법 위반으로 고발해서 많은 회사들이 복제품 생산을
중단했는데 오직 영진약품만이 영천디를 계속 판매하고 있었다
당시 특허도 개발부 담당이라 내가 책임지고 상표분쟁에 대처해야만 했다
1심 재판에서 불행하게도 영천디가 졌다. 영천디는 상표등록을 못하게 된것은
경상북도에 영천이라는 도시가 있기 때문이였지 영비천과 비슷해서 상표등록이
거절되지 않았기에 특허청에 이의 신청하여 등록을 진행하다가 이런 문제를 당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량 회수 처분을 받아서 백만병 이상을 판매정지 가처분을 받았다
회사 체면도 문제지만 이 품목을 판매하던 영업부도 치명타를 입었다.
영천디의 상표문제는 영진약품에 입사하여 개발부를 맡은후 계속된 문제였다
이문제를 해결하려고 특허청을 자주 방문했으며 일양약품 의 민형사고발로 인하여
송변호사에 의뢰 했으나 1차에서 패소하고 이렇게 복잡하게 당하기 시작했다
일양약품에 당시 담당 임원은 선배이신 김연수 전무님이신데 임원 회의에서 이건으로 논의
하면 모두가 강성 발언해서 어떻게 배려 해줄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권투시합은 링위에서 2사람이 시합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구경꾼들이라 열심히 치고 또 때리라고 주문하지 화해 하라고는 절대로 안하면서
자신들은 이 싸움을 즐기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선후배가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아마도 일양약품은 14억 정도 들어갔으니
영진은 이보다 많은 경비를 넣였을것이다.
재판이라는것은 송사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불필요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2차 때는 변호사를 바꾸어서 진행하기로 하고 우선 화해 라기 보다는
배려를 부탁하려고 김부회장님을 모시고 일양의 송사장님을 찾아갔으나 이것 도 헛탕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또 하다가 생각난게 전관예우를 받을만한 변호사를 구하지 않으면
아주 큰 낭패가 올것 같았다 .
그래서 윤영철 변호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 이분은 나중에 헌법 재판소 소장 까지 하신분이고
내가 전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백흥호 약사님의 친척되시는 분이라 백약사님의 전화 지원도
받아서 동 사건의 수임을 맡아주셨다.
공판날이 되어서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자기 예감에 이 사건은 이미 물건너간겄 같다고 하면서
그래도 가보자고 갔더니 재판 결과는 이사건은 현재 특허청에서 검토중인 사안으로 한 사건을
공공기관에서 두가지로 나누어서 판결 할수 없으니 특허청 같은 전문기관의 판단에 따라야
하므로 특허청 결정 날때까지 무기한 연기한다 라고 우리에게 아주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일양측 변호사들이 이건 전관예우라고 하면서 투덜대면서 재판정을 나갔다. 그땐 정말로 통쾌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서 영천디 판매는 어려웠다. 어떻게 하든 이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고민이 많았다. 이문제의 핵심은 일양약품의 정회장님 마음을 돌리지 않고는 어려웠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문제다. 그렇게 많은 경비에 변호사 4명이 동원된 이사건을 그리 쉽게
해결해주겠는가?
고심하면서 퇴근하다가 당시 한독 약품 상무로 재직중인 장석구 상무가 생각났다
그래서 일양 약품 정회장님과 가장 가까우신 고 김회장님을 떠올렸다.
고 김신권 회장님께서 전화해주시면 풀리지 않을까?그래서 친구인 장상무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업계에서 서로 송사로 피를 볼게아니라 사이좋게 대화로 풀어갔으면 어떤지를
고 김신권 회장님께 부탁드려 달라고 했다.
퇴근길에 전화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양 김연수 전무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무조건 이 일은 없었던것으로 하자고 한다. 그리고 모든 민형사 고발은 오늘 바로 취하
하겠다고 했다. 고 김신권 회장님 덕분에 이일은 아주 간단히 끝났으며 이일을 고 김생기 영진약품
회장님께 보고 드렸더니 그옛날 초창기에 두분사이에 오해가 있었다고 하면서 본인이 직접 전화해서
함께 식사하면서 감사했고 저와 고 김종인 부회장님이 한독 약품 고 김신권 회장님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들리면서 무려 6년 정도 끌었고 15억이상의 비용이 들어간 송사의 영천디 사건은 막을 내렸다
고 김신권 회장님의 큰 배려가 없었다면 이렇게 잘 끝낼수 있을까 ?
지금 생각해보면 큰절을 몇번해도 모자라는 아주 큰 은혜를 내가 입었는데 돌아가시니 눈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그리고 이사건의 해결을 해주신 큰 공을 지금 영진의 누가 기억하겠는가.
고 김신권 회장의 넓은 도량과 아량이 아니면 양사는 지금도 철천지 원수로 지낼것이다.
그후 모든 복사제품을 퇴출시킨 영비천도 차츰 시장에서 인기를 잃어가서 지금은 역사속으로 넘어간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영진구론산 바몬드와 일양 원비디의 대리전을 치루느라 내 마음고생 참 많이 했다
고 김신권 회장님 부디 극락 왕생하시어 이 어려운 제약계를 보살펴주시길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