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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후집(柏後集) 김기수(金基洙)생년1818년(순조 18)몰년1873년(고종 10)자치원(致遠)호백후(柏後)본관상산(商山)특기사항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이만각(李晩慤), 권헌정(權憲貞), 홍우경(洪祐慶), 이재정(李在鼎) 등과 교유
柏後集卷之六 / 雜著 / 通校中文
伏以茅谿文先生。道學淵源之正。忠勳德業之卓。信乎爲本鄕夫子也。不幸二百年矜式之所。一朝見毁。士林之慨鬱。當如何哉。竊伏聞頒敎文字。先賢長德之涉於寃撤者。許以追配於賜額之院。我聖朝崇儒重道之意。特寓於存拔黜陟之際。是誠道學重明之會也。鄙等於此。隱有所商度者。夫以茅翁之道德勳業。追配於道山。恐不爲無據。而第惟本院旣是額院。則勢將叫閽得請然後。可保無逕庭專輒之患。然今若决意治疏。則事力有不逮之端。若又坐於力綿。遂寢其事。則竊恐荏䒣之頃。轉失機會。而吾林抑鬱之情。將無以得申矣。反復思量。未得其便。玆敢覼縷。此盖斯文大節拍也。不可以一二意見有所執守。請自校中亟定會期。爛加商確。而因復廣收道論。務歸至當之歸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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柏後集卷之一 / 詩 / 道山書院講會韻
歲丙寅(1866,고종3)七月。佯夷猝犯畿堧。江都失守。京師戒嚴。至十月始退去。時西學大熾。執法者不能止。以斥邪扶正之意。行會八方。設四書朔講於校院。不佞濫叨本院講長。於是賦其事而識之。
吾道淵源載六經。百家蝟起割門庭。舜禹言心垂統緖。尼思論性炳丹靑。攘除巨害如洪水。開發羣蒙似曙星。鴨東不幸來西敎。安得洪鍾警衆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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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緯 | 1554 | 1631 | 丹城 | 順甫, 純夫 | 茅谿, 茅溪 |
鄭蘊 | 1569 | 1641 | 草溪 | 輝遠 | 桐溪, 鼓鼓 | 文簡 |
河弘度 | 1593 | 1666 | 晉州 | 重遠 | 謙齋 |
전기류 | 鄭必達 | 1611 | 1693 | 晉州 | 可行, 德膺, 士兼 | 八松 |
金千鎰2 | 1622 | 1696 | 善山 | 伯剛 | 松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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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桐溪集)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자휘원(輝遠)호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조목(趙穆), 정구(鄭逑)의 문인. 남인(南人)의 중진(重鎭)
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許 燉 上先生書
許燉 | 1586 | 1632 | 金海 | 德輝 | 滄洲 |
積歲曠候。一拜無緣。恒切星斗之仰。何幸特霈 天恩。按節南臨。七十州大小蒼生。擧皆歡欣鼓舞。如赤子之見慈母。枯木之遇陽春。則于嶺有光。實非偶然。而有關於國家之休戚矣。日昨拜昌詩氏。聞伏審氣候萬福。區區喜慰。曷可勝達。燉跧伏窮廬。親又老病。學不加進。昏惰日甚。趁未趨候於棠陰之下。實出緇衣誠薄。悚恨悚恨。第文敬公寒暄金先生建院事。擧措至重且大。不可容易經始。伏念令公尊賢衛道之誠。有以負士林之倚重。則必自知審處。而蓋崇山僻在。士論多岐。頃於海寺之會。又以初六巡到之日。有齊訴之議。願令公相時量宜。以副多士之望。幸甚。忘僭先容。伏增惶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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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年譜 / [附錄] / 文簡公桐溪先生年譜
辛丑。顯宗大王二年賜額龍門書院。以前年儒生疏請也。
현종 | 3 | 1662 | 임인 | 康熙 | 1 | - | 居昌 道山書院에 賜額하다. |
壬寅。賜額居昌道山書院。居昌儒生以寒暄堂,一蠹兩先生遺蹟在山際洞。上疏建院以祀之。配以先生。因卽賜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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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집(茅谿集) 문위(文緯)생년1554년(명종 9)몰년1631년(인조 9)자순보(順甫), 순부(純夫)호모계(茅谿)본관남평(南平)특기사항오건(吳健), 정구(鄭逑)의 문인. 오장(吳長), 윤경남(尹景男), 조응인(曺應仁) 등과 교유
茅谿先生文集卷之三 / 雜著 / 山際洞立院創䂓
文敬公寒暄金先生,文獻公睡軒鄭先生。兩先生並生一世。相與講會之地。在我境內鰲戴山下。故老相傳。至今在人心口。而不得立一祠。豈非吾鄕之大可羞者耶。世愈久而尙賢之誠愈切。巷巷曲曲。人心憤欝。是雖秉彜之所發。而亦豈非待時而然哉。玆定創立任事之人。誠願諸賢。不日同起。興工竣役。洗前羞而倡後學。不勝幸甚。
大槩工役之作。基址之定。財糓之聚。不可不僉議而後集。來二十七日。鄕中父老凡有志而懷憤者。皆會於山際兩先生所會之地。以定如何。若不於始事相議以處。而後有私議。以撓大事。則是人絶不可同事。亦願僉丈裁焉。
茅谿先生文集年譜
인조 | 6 | 1628 | 무진 | 崇禎 | 1 | 75 | 議建書院於山際洞 |
毅宗烈皇帝崇禎元年 仁祖六年 戊辰 先生七十五歲 與鄕人議建書院於山際洞。山際洞在吾道山下。寒暄,一蠧兩先生講會之地也。先生唱議立院。將以尊先賢而唱後學。至分定任事之人。而事竟不諧。後鄕人踵而成之。賜額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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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집(謙齋集) 하홍도(河弘度)생년1593년(선조 26)몰년1666년(현종 7)자중원(重遠)호겸재(謙齋)본관진주(晉州)
謙齋先生文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 過先賢所遊亭臺有懷 幷序
광해군 | 9 | 1617 | 정사 | 萬曆 | 45 | 25 | 權克義의 딸과 혼인하다. ○ 6월, 「南冥集」刊役을 위해 滄洲와 덕천에서 만나다. |
丁巳秋。余遊伽倻之紅流洞。觀孤雲遺躅。自紅流道天嶺。踰一峴。卽鵝林地也。路左有溪。谿上有亭臺。其地山擁錦繡。川明組練。泉石淸麗。眞所謂奇絶處也。昔寒暄,一蠹兩先生。相邀遊息于此。講論道義。至今稱說。將與杏壇舞雩同其傳。豈非幸也。嗚呼。人亡世遠。仁義路荒。先輩麗澤論道之地。不過爲行路商賈所遊憩。甚至行人裂帛。亂掛亭上樹枝。以瀆溪神。若巫覡之於神堂然。噫。唐堯氏抵壁於壑。壑亦所當羞。況此溪其肯受路人之褻慢乎。顧見淸流決決。若有溪神所怒者然。有嘆久之命。僕持鎌芟去。追想往事。不能無介然於懷。乃序其事而詩之。詩曰。
行盡千巖萬壑秋。鵝林境上獨遲留。向來喫緊論文地。山自崢嶸水自流。
倻山路接鵝林地。中有亭臺水石垠。忍見前脩麗澤處。謾敎行路褻溪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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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齋先生文集卷之七 / 祭文 / 道山書院奉安文
箕封瓜割。蠻觸乾坤。無往不復。有啓眞源。本朝龍興。不絶注邍。藍靑茜絳。
粤若寒暄。門庭小學。作聖之根。學醇履篤。氣和言溫。天德將成。一氣之元。
恭惟文獻。實出同門。志同道合。考亭南軒。孝源百行。聲徹天閽。割鷄花林。懸懸末村。相邀此地。一席講論。麗澤同心。斷金蘭薰。沂洛及泗。流蕩無垠。坑灰再熱。莫此時昏。七日而得。豈曰含冤。
百年有半。人亡道存。地不忍荒。愈久難諼。爰侐有廟。繚以崇垣。
玆配文簡。元鎭強魂。涓吉妥靈。斯文益尊。剛鬣之腥。玄淸其樽。陟降于獻。昭晢蒿焄。佑我後學。思皇鳳騫。其始自今。永世彌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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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송집(八松集) 정필달(鄭必達)생년1611년(광해군 3)몰년1693년(숙종 19)자가행(可行)호팔송(八松)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정온(鄭蘊), 조경(趙絅)의 문인. 조희일(趙希逸), 김세렴(金世濂), 구봉서(具鳳瑞), 임유후(任有後) 등과 교유
八松先生文集卷之四 / 書 / 與李侯 泰英○丙申(1656,효종7) *李泰英(1612~?) 甲午(1654,효종5)來丙申(1656,효종7)去
효종 | 7 | 1656 | 병신 | 順治 | 13 | 46 | 봄, 예조 좌랑이 되다. |
伏以尊尙之擧。雖出於後學。而優崇之典。實係於觀風。昔者武夷五曲之院。知縣陳樵建之。建陽三桂之院。縣令劉克莊建之。徽州紫陽之院。郡守韓補建之。崇化同文之院。總管張光祖建之。其餘若阮德柔之建湛盧。沈倫之建星溪。趙宗正之建泉山。錢古訓之建薌江。王俁之建石門。劉珙之建嶽麓。皆或以邑倅。或以使臣。而爲鄕人倡。故事得以有緖而功得以易成。至今書之爲美事。惟我縣之有先贒故蹟亦尙矣。以文獻公實紀觀之。則寒暄金先生之在陜川冶爐縣。與一蠧鄭先生之出宰安陰。同爲一時。因兩地之中而累與約會。占泉石之勝而徜徉晤語。則今加祚縣之山際洞。卽其地也。噫我兩先生生幷一世。志同道合。爲東方道學之唱。崇報之隆。至於從祀文廟。則其造詣之深。踐履之盛。非後生所暇形容其一二。而方一時相須之殷而相得之樂也。惠好從頌於山際水涯之外。其留連咳唾之餘。其許多議論。有功於斯學者。不知其幾。而心學有處之論。後學招徠之戒。未必不發於是時也。草木知遇。雲烟含態。聞風者可以興想。行過者莫不景慕。則斯地之不可與尋常境界埋沒於天壤間者亦明矣。世有名一善一行之士。爲時之所嚮愛。則其密邇英爽之地。必矜式而俎豆之者。誠以秉彜好德之人心。自有所不能已者也。况我兩先生論道之所。而至今鞠爲寬閒之濱者。豈非斯文之欠典而斯境之不幸哉。噫公論之在世也百年乃定。自弘治甲寅(1494,성종25)以迄于玆。盖百有三歲(163)矣。從前我一邦父兄師友之有志而未就者。始乃大定於今日。是固吾人尊尙之誠。無間於前後。而將崇重之擧。必有待於閤下也。閤下下車以來。治成制定。百廢俱興。事關輿誦。靡不畢擧。况斯文之重風敎之地。百世以俟者。而可得辭其責乎。伏望深惟公議之難遏。與夫事機之不可失。或資其工力。或藉之財地。以聳動萬人瞻聆。作新一方氣象。使陳劉諸子。不獨專美於千載之上者。惟閤下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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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松先生文集卷之四 / 䟽 / 道山書院請額䟽 己亥
효종 현종 | 10 5월즉위 | 1659 | 기해 | 順治 | 16 | 49 | 龍山의 집이 퇴락하여 湖西의 長溪縣으로 거처를 옮기다. ○ 完學 敎授가 되다. |
伏以塵泥賤臣。沐浴菁化。待文之興未幾。而若喪之痛遽至。攀髯莫及。號天無所。日月幾何。山陵已過。謳歌所屬。文敎當先。建白未遑於曩日。修擧方勤於初政。臣等苟有所請。失今不言。則無以彰先王大有爲之志。而成殿下不愆忘之德。故是敢纓冠
足。不憚遠來而叫呼於悲疚之下。伏惟聖明察其志而採其請焉。臣等謹按國朝褒祀之典。在昔中廟朝丁丑。先儒臣文正公趙光祖啓於經筵曰。士習變化之道。豈無其方。如金宏弼,鄭汝昌褒奬則可以扶植斯文矣。是年八月。臣鄭光弼等獻議。金宏弼,鄭汝昌學𧗱醇正。踐履篤實。世所罕出。例贈未足褒異。禮曹請以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金宏弼家在玄風。鄭汝昌家在咸陽。各其境內。掛榜知委。使學者知國家褒賢重道之意。臣等伏惟金宏弼,鄭汝昌道學之正。爲東方百世之宗師。則先正臣旣言之矣。固非後學所可容易形容其萬一。而當時褒奬之典。亦可謂至此而無以加矣。然而臣等之所不能無慨然者。當聖旨之初降。而二鄕人士無有以先師講道之地。仰復四聦。使致祭之所。止於家廟而已。厥後玄風道東,咸陽蘫溪二書院之建。皆於所居之鄕。例爲刱設。而又實非兩先臣相聚講道之所。竟使祖宗優崇表異之盛意。不得盡行於當時。則斯文之不幸。聖朝之欠典。無有大於此者。夫所謂兩先臣聚講之所。乃臣等所居鄕吾道山之山際洞卽其地也。當成廟甲寅。時鄭汝昌宰於安陰。金宏弼家於陜川。以玆山爲兩地之中。且有水石之勝。五六載之間。累與約會。徜徉信宿。從容晤語。阻面不至旬日。猶恐其或相離也。今於文獻公實紀觀之則可見矣。噫古今如許其寥濶。而兩先臣之生同一時焉。山川如許其渟峙而兩先臣之會同一地焉。則天之作斯境以待斯人者。固非偶然。而况其留連從頌之暇。許多議論。有功於來學者。又可旣耶。自二先臣旣去之後。山若增而高。水若增而潔。東西之行過於是者。莫不竦然起敬起慕。則欲求置祠之所。舍此其誰。而窮鄕僻遠。旣不聞聖旨於當時事。故荏苒遷就。又未免湮沒於此日者。雖斯境之不幸。而亦豈有待而然歟。噫公論之在天地。百年乃定。自弘治以至于今。盖百有餘年。而適値我先王大振作之日。於是天之所慳地之所秘。前聖之所未發。後學之所嘗齗齗者。翕然相聚以定。乃於其山之側而得一地焉。將以爲俎豆矜式之所。且先正臣文簡公鄭蘊精忠大節。日月乎天地。梯航乎截壑。玆我邦亦其游息之地。故附享之議。人無異辭。功役旣始。未及上達。而先王遽棄羣臣(1659)矣。嗚呼痛哉。嗚呼痛哉。臣等伏見殿下丕承前烈。思弘大業。至於崇德象贒之擧。靡不盡心。况先朝之所命兩先臣之所俎豆。百歲而以俟今日者。殿下烏得以辭其責乎。伏乞聖明深惟師道之尊。與夫時會之不可失。亟賜兪音。保其營就。光之寵額。使鄕邦可祭之地。不至於埋沒而後已。則所繼者先王志也。所行者殿下事也。豈特一山一郡之榮而已哉。不勝瞻天祈懇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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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송집(八松集) 정필달(鄭必達)생년1611년(광해군 3)몰년1693년(숙종 19)자가행(可行)호팔송(八松)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정온(鄭蘊), 조경(趙絅)의 문인. 조희일(趙希逸), 김세렴(金世濂), 구봉서(具鳳瑞), 임유후(任有後) 등과 교유
八松先生文集卷之二 / 詩 / 偶閱退溪先生丹陽山水可遊者記。因憶鄕園。感而有作。並序
人之遊山水者盖寡。而山水之可遊人者亦難得。先輩於山水可遊處。必表而出之者。乃其所以志也。余舊居娥林龍山。山水儻所謂可遊處者非耶。大槩修道之山。蜿蜿數十里。兩水束一峽而來。峽盡而村開。村窮而水會。長林暎其口。大野亘其前。羣山環衛。雲興霞蔚者其周數十里。名區異觀。在在皆勝。西源之勝。始自飛湫而下。窈而爲酒巖。合而爲二水灘。幽曠而爲廣石巖。滀而爲鼎淵。灣而爲鉢灘。東源之勝。始自飛流川而下。澄而爲洗耳巖。隱而爲卧龍巖。淸爽而爲落帽㙜。二水之交爲亭曰八松者最佳。廣設書舍。以容來學。林之外又築一石臺。名以宿雲。南對原泉精舍。沿流而下十里。有龍槽石。此則勝之在川者然也。源西之山。起自普海山。卓爲白雲峯。峙爲金貴城。結爲朴儒山。是爲村之案對。源東之山。起自牛頭山。分爲石槽嶺。蜿爲飛鷄山。秀爲吾道山。環爲霜嶺。是爲村之水口。此則勝之在山者然也。若論前人古迹則朴尙書邦龍,鄭提學竱,成司諫子諒皆居于此。今有遺址。余有詩落帽臺西司諫墓。八松亭北寶文庄。盖偶吟也。吾道山下有山際洞。乃寒暄一蠧兩先生講道之所。今有書院。朴儒山之頂。有處士朴儒舊居。白雲谷中有石室。牛頭山中有瀑㳍龍湫之勝。絶頂巖罅。有義相坐定庵址。此其大略也。余今避水患。移家于西北。追思舊遊。因感而題。
修道迤南一舍地。有林回處有村呈。山蹲五鳳當軒舞。川合雙琴遶屋鳴。牧地路緣靑壁入。陂田人帶白雲耕。眞遊在處風光別。無畫無詩不敢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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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 현종(顯宗) 원년(1660) 2월 19일
익산(益山)에 있는 김장생(金長生)의 사우(祠宇)에 사액하는 건
1. 익산(益山)의 유학(幼學) 이광저(李光著)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도덕(道德)이 순정(純正)하고 학문(學問)이 매우 깊어서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사림들이 사우를 건립하고서 액호를 청하는 일은 진실로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간청하여서 이미 연산서원(連山書院)에 선액(宣額)하였으니, 거듭하여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어진 선비를 존숭하는 중대한 일이므로, 해조(該曹)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순치(順治) 17년(1660) 2월 19일에 행 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조형(趙珩)이 담당하였는데, “이미 거듭 설립한 곳이니, 많은 선비들의 청원(請願)을 들어줄 수는 없으나, 지금의 경우에는 특별히 원하는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蘊)의 서원에 사액(賜額)하는 건
1. 거창(居昌)의 유생(儒生) 이주영(李周英)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의 도덕과 학문이 동방 백세(東方百世)의 종사(宗師)인 것은 다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정온(鄭蘊)의 충절 또한 공론이 모두 받들어 칭송하는 바로서, 유림들이 반드시 서원을 세워 편액을 걸고자 하는 것은 공경하고 흠모하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두 현신(賢臣)과 정온의 서원은 이미 사액하였으니, 누차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일이 어진 선비를 존숭하는 중대한 일에 관련되어, 해조(該曹)가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미 거듭 설립한 곳이니, 많은 선비들의 청원(請願)을 들어줄 수는 없으나, 지금의 경우에는 특별히 원하는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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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道山書院 顯廟壬寅 賜額祭文。[李殷相製進。]
현종 | 3 | 1662 | 임인 | 永曆 | 16 | - | 安陰縣에 세워진 書院이 龍門書院으로 사액되다. ○ 山際洞에 세워진 서원이 道山書院으로 사액되다. |
象賢崇德。王政所先。表異忠節。風敎所關。廟焉而享。人用矜式。多士所懷。嘉號宜錫。言念文獻。篤志力行。沈潛義理。踐履高明。奮乎絶學。爲世儒宗。文敬輩出。志合道同。硏窮五經。發揮微言。大明體用。功巨斯文。至如文簡。守道抗節。雖遇塵霧。惟懷霜雪。一生忠直。千古罕覿。相繼挺生。惟國之光。風聲所及。聳動多方。眷彼南土。有嚴斯宇。合堂腏食。籩豆楚楚。模範于士。藏脩是資。顧予嗣服。恨不同時。諸生來籲。特允其請。菁莪有育。棫樸斯盛。爰揭懸額。于以妥靈。嗟我章甫。瞻此儀形。茲遣禮官。式陳泂酌。不昧者存。庶幾來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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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道山書院春秋享祝文[金千鎰]
道合朱呂。地同婺陽。一祠幷享。千古茲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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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 卷九 / 慶尙道 居昌
祠院
道山書院。 顯宗庚子(1660,현종1)建, 壬寅(1662,현종3)賜額。 ○金宏弼, 鄭汝昌, 李彦迪。【俱見文廟。】 鄭蘊。【見廣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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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庵文集(전암문집)姜鼎煥(1741 ~ 1816) 道山書院重修時三先生位版移安告由文 還安告由文
道山書院重修時三先生位版移安告由文
廟宇滋久上漏旁攲夙宵惶懍亟謀葺治玆涓吉辰 移安講堂敢告厥曰奉以周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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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安告由文
補漏撑攲廟貌維新不遠而復神人胥欣玆用吉辰 式陳豆籩冀垂鑑格俾永萬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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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庵文集(전암문집)姜鼎煥(1741 ~ 1816)典庵文集卷之五序白文甫家藏世譜序...道山書院諸老人莫不尊敬於處士曰孝哉若人 人無間言於是定耆老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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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文甫家藏世譜序 余少也見外舅春窩白公公方考閱白氏世譜曰我 東白氏系出扶餘貫稱大邱者非吾派也以水原爲 貫鄕而顯于世者有三派焉休庵公玉峯公及吾祖 忠壯公是已餘派當爲別譜而獨居昌新谷宗人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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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水原而其幾世諱仁武與吾祖諱二景諱仁豪同 其仁字則似是同爲行列而考其前後昭穆皆不合 焉便同姜氏御史公殷烈公瞻字之同而昭穆不孚 也此莫非程夫子所謂宗子法壞則人不知來處以 至流轉四方往往親未絶不相識者歟雖然有所慨 然者新谷宗氏之家以孝聞于世久矣而居昌士友 一辭稱美又以士流見稱於嶠南則京外諸宗以爲 別譜者蓋由於宗法壞而不相識者也余在傍而對 曰世或有如許派譜者周愼齋不過三四世系而不 害爲名賢則新谷白氏雖不入於水原三派之譜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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亦不害爲孝友家也
其後數十餘年余僑居于居昌 與新谷密邇蓋嘗聞知於昌之士友則自仁武公以下世世入黌堂之儒案而與鄕先生幷列爲錄則其有望於鄕黨可知也
往歲設鄕老會始見新谷處士於道山書院諸老人莫不尊敬於處士曰孝哉若人 人無間言於是定耆老會序次非七十以上莫敢入 依司馬公耆英會故事雖不滿七十新谷處士以孝 行卓異必參於是序中至今傳以爲美事一日有兩少年袖家藏譜牒請序于余見知爲新谷之子若孫也不敢以不文辭以所聞於外舅公及鄕人之所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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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者爲之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