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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齋先生實記(존재선생실기)郭䞭(1551 ~ 1597)
別友人 丁酉八月初一日
廟堂平昔講經綸 此日男兒有幾人 滄海血流腥滿地 臨分相勗在成仁
又
別後干戈阻 何由聞好音 行裝獨倚處 須記歲寒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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勋业频看镜,行藏独倚楼
江上日多雨,萧萧荆楚秋。高风下木叶,永夜揽貂裘。
勋业频看镜,行藏独倚楼。时危思报主,衰谢不能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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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藏独倚楼”的意思及全诗出处和翻译赏析
精选回答问题:
“行藏独倚楼”出自哪首诗?
答案:
“行藏独倚楼”出自宋代释绍嵩的《山居即事》, 诗句共5个字,诗句拼音为:xíng zàng dú yǐ lóu,诗句平仄:平仄平仄平。
“行藏独倚楼”全诗
《山居即事》
衰落暗成病,如何不白头。
百年长扰扰,万事祗悠悠。
耕凿资余力,行藏独倚楼。
却因虚淡极,忽觉此生浮。
分类:
“行藏独倚楼”全诗拼音读音对照参考
shān jū jí shì
山居即事
shuāi luò àn chéng bìng, rú hé bù bái tóu.
衰落暗成病,如何不白头。
bǎi nián zhǎng rǎo rǎo, wàn shì zhī yōu yōu.
百年长扰扰,万事祗悠悠。
gēng záo zī yú lì, xíng zàng dú yǐ lóu.
耕凿资余力,行藏独倚楼。
què yīn xū dàn jí, hū jué cǐ shēng fú.
却因虚淡极,忽觉此生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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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藏独倚楼”平仄韵脚
拼音:xíng zàng dú yǐ lóu
平仄:平仄平仄平
韵脚:(平韵) 下平十一尤 * 平仄拼音来自网络,仅供参考;诗句韵脚有多个的时候,对比全诗即可判断。
“行藏独倚楼”的意思《山居即事》释绍嵩 翻译、赏析和诗意
《山居即事》是宋代释绍嵩创作的一首诗词。以下是诗词的中文译文、诗意和赏析:
中文译文:
山居的生活真是一件奇妙的事情,
日渐衰落,暗暗成为一种病态,
如何才能不让头发变白呢?
百年来一直困扰不已,
万事只是轻轻悠悠地过去。
辛勤耕耘和艰苦劳作是我的力量来源,
行走和隐居只能依靠孤独的楼阁。
然而,因为虚幻和苍白到了极点,
我突然觉得这一生是多么虚浮。
诗意和赏析:
《山居即事》是一首表达诗人在山居生活中的感慨和思考的诗词。诗人通过描绘自己的生活境遇,表达了对时光流转和人生虚幻性的思考。
诗词的开头,诗人形容山居的生活是一种奇妙的事情,然而却暗示了衰落和病态的状态。这种衰落的感觉可能是指自然的凋零和个人的老去。诗人随之提问,如何能够抵挡衰老,保持青春不衰呢?
接着,诗人表达了对于时光流逝的感叹。百年的时光长河中,人们所经历的事情只是轻描淡写地过去了,显得无关紧要。这种感觉可能是对于个体命运的渺小和对于世事变迁的无力感的抒发。
随后,诗人转向描述自己在山居生活中的辛勤劳作和孤独隐居。他通过耕凿和行藏来表达自己的劳作和隐居的方式。行走和隐居的过程中,唯有倚靠孤独的楼阁,寻找内心的支撑和宁静。
最后,诗人突然觉察到生命的虚幻和苍白。他意识到自己所追求的一切,包括辛勤劳作和隐居,都是如此虚浮,没有真正的实质。这种觉悟可能是对于人生意义和价值的思考,对于一切追求和付出的反思。
《山居即事》通过描绘山居生活的衰落和思考时光流逝的虚幻性,表达了诗人对于人生意义和价值的思考。诗词中的意象和抒发,以及对于生命虚幻性的思考,给予了读者一种对于生活和人生的深度思考和感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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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시집 제4권 / 시(詩) / 원외랑 정우를 보내며〔送鄭寓員外〕
그대 마음이 유 땅에 봉해져도 만족해함을 아노니 / 知君心已足封留
쉴 땐 쉬고 갈 땐 가며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았네 / 得坎乘流非苟求
전원으로 돌아갈 때 정장역의 말 여전하고 / 歸去依然鄭莊馹
떠나는 모습은 중선루의 모습이 아닐세 / 行裝不是仲宣樓
엄숙한 얼굴엔 절로 지초와 난초의 덕이 있고 / 嚴顔自有芝蘭德
수골은 가을 녘 소나무 계수나무와 높이를 다투리 / 壽骨高爭松桂秋
국화는 아마도 중양절이 지나 피리니 / 黃菊應開後九日
술잔을 들 때가 오면 자득할 만하리라 / 稱觴節迫可夷猶
[주-D001] 정우(鄭寓) :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고려 우왕 때 간의(諫議) 벼슬을 하다가 지윤(池奫)의 무리가 탄핵하여 경상도 죽림에서 수자리를 살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신하로 지목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먼 지방에 방치되었다.[주-D002] 쉴 땐 …… 가며 : 상황에 따라 진퇴의 거동을 정하는 일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47 〈가의전(賈誼傳)〉에 “물결을 타면 흘러가고 구덩이를 만나면 멈춘다.〔乘流則逝 得坎則止〕”라고 하였다.[주-D003] 정장역(鄭莊驛) : 한(漢)나라 정당시(鄭當時)는 자(字)가 장(莊)이다.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있을 때 매번 쉬는 날이 되면 장안 교외 여러 곳에 역마를 가져다 놓고 빈객을 접대하였다. 후대에 정장역은 손님을 좋아하는 주인이 빈객을 접대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주-D004]
중선루(仲宣樓)의 모습 : 중선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였는데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심정을 담아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호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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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다락에 …… 흩는다 | 3국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의 자(字)가 중선이다. 그는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등루부(登樓賦)〉를 지었으므로 악양루를 중선루(仲宣樓)라고도 한다. | 동문선(東文選) |
2 | 등루부(登樓賦) | 한(漢)나라 말기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하자 호북성(湖北省) 당양현(當陽縣)에 있는 중선루(仲宣樓)에 올라가 읊은 부이다. 《三國志 卷21 王粲傳》 | 동명집(東溟集) |
3 |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었으니 | 중국 땅이 최치원의 고국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선(仲宣)은 한나라 말기의 시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왕찬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산양(山陽) 사람인데, 박식하고 문장이 뛰어나 건안 칠자(建安七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일찍이 한 헌제(漢獻帝) 때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15년 동안 의탁해 있었는데, 이때 시사(時事)를 한탄하고 고향을 그리면서 중선루(仲宣樓)라는 누각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래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 동명집(東溟集) |
湖北省襄阳市襄城区内环路220号
仲宣楼位于襄阳城东南角城墙之上,为纪念东汉末年诗人王粲(建安七子)
史料记载:仲宣楼始建于东汉,明末万历年间,襄阳知府周绍稷修楼成。清.雍正间副史赵宏恩重建。乾隆二十五年署知府胡翼重修。后毁于战火(民国初年),1993年,襄阳市政府在原址上恢复仲宣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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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崔晛)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訒齋先生文集卷之九 / 雜著 / 郭義士錄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余於十年前。聞南鄕有一佳士。曰郭䞭。養靜其字也。願與之交而不可得。壬辰亂初。列邑波坼。龍御西巡。監司守令曁鎭將武人。皆從風遠遁。莫敢交鋒。未聞有一人操弓矢冒白刃而前者。忽聞有郭再祐,郭䞭,趙宗道諸人。首先唱義。募得死士若干。與義兵將金沔,鄭仁弘。協心討賊。屢摧其鋒。賊之不敢專力西向。分屯自守而江右十數邑之保存。湖南一道之完全者。以此也。余於是時。尤偉其人。非白面一書生。歲甲午春。巡察使韓公。啓請屯田于蕩敗諸邑。以爲補軍興活遺民。所係極重。非存心濟物者。不可任以事。迺博採士論。公以自如道察訪。兼屯田差使員。余以有司。受其約束。最以同事得接爲幸。其人也。貌恭而志剛。言訥而行方。謙若不足而處事誠。與物無忤而取舍明。蓋仁厚而篤實者也。九月。朝廷選公爲安陰縣監。以公之才且賢能。蘇殘救廢也。其行也。余往商山。作序以贐之。自此闊別三四年。雖未見其治官事狀。以此人推此心。其爲政可知矣。及丁酉。倭賊再蹂湖南。行長一運。自順天已犯南原。淸正一運。自蔚山拳甲南歸。鼓其怒氣。直犯黃石山城。城縣地也。乃湖嶺之交。體察使李公。奉朝命築此城。遏截兩南之咽喉。以公素得民心。爲守城將。以金海府使白士霖有武才。爲出戰大將。趙宗道亦以咸陽郡守。新遞寓居縣地。以國家號令不可規避。率家屬入城。數人約誓爲死守計。余其時。適在眞寶縣廨。聞黃石城陷。語邑宰李公軫曰。噫郭養靜必死矣。李曰何哉。曰余知郭之爲人。必不偸生。俄而李見馳報曰。君言驗矣。郭䞭,趙宗道一家。俱極其慘禍。獨大將不死耳。余竦然髮豎。不覺長慟一聲。悲其死壯其節曰。白士霖以大將獨免。必嫁禍於二人。而先自遁去耳。或曰。強弱不敵勢也。豈可以守死善道。責之武人乎。士霖之不死。安知其將欲有爲也。余曰。人心若此。國之崩陷無怪也。旣以大將爲名。死於其城分也。又與二人。約與同事生死共之義也。渠若預料必敗。將避其鋒。則與二人議以同去宜也。今乃陽爲固守之形而陰謀自脫之計。遺慘禍於二人。必斬士霖以徇。然後可以快一時公論。噫刑賞不擧久矣。吾知士霖必不受誅。猶有不泯者公論也。從當得其實。其冬。余到南鄕。南鄕諸士子。語其詳。城陷之前日。士霖潛放軍糧。散給降倭及手下交通軍三百餘名。以結其心。乘夜縋下其一家于北門。北門軍。因北踰城逃潰。士霖於亂軍中遁去。有士卒奔告郭公。公手拔白刃。擬空大呼曰。白士霖逃耶。又曰。大將雖去。我當以死守之。敢動者有此劍。趙公病臥幕中。聞大將已去。初以爲未信。使人尋之不得。城已一空。賊從東門入。唯南門軍民。以主將尙在。不敢去。趙謂郭曰。將走軍散。城且陷矣。矢死不去者。惟我二人。男兒惟有一死耳。不可爲不義而生。當與君北向再拜而決。但妻子死之無益。可令出去。郭曰。此我之素志也。其子履常,履厚。其壻姜遵曁安陰下吏等。交進泣勸曰。事已無可奈何。宜速出城。郭叱曰。有死而已。誰敢勸我出城者。爾等死非職分。去矣去矣。郭之二子。執手訣曰。父已必死。吾等誰爲生耶。遂不去。二公恬然不變。腰揷弓箭。爲射賊計。俄而白刃如電。郭公與趙。俱死於兇刃。
履常履厚。抱其父罵賊。幷被害。
姜遵已率夫人及妻。出城得免。
郭之長女。柳文虎妻也。與履常之妻愼氏。俱出城伏草莽間。文虎被虜。
郭氏哭曰。父死而生者。爲夫在也。夫已俱亡。復何所待。遂自縊林中。
愼氏聞履常死。亦自縊死。
聞者莫不嗚咽流涕曰。慘矣。禍之至於此極也。韙哉。忠孝貞烈之萃于一門也。卞門忠孝節義成雙。郭氏兼有焉。此其古今之所罕聞。亂後死義之卓然尤著者。而人或以士霖之生爲智免。郭趙之死爲傷勇。嗚呼。彼獨何心哉。賀蘭未斬。雷南之目。不瞑於地下。士霖猶在。將何以慰二公之忠魂耶。君子之死也。亦自盡其道而已。不以人之死不死爲加損。而當二公之約與死守也。渠獨棄城而遁。二公之憤。應不減於南八之抽矢射浮屠也。趙公。余於少時見之。卓犖不羈。勇於爲義。不苟同於俗者也。亂初。與招諭使金公。竭誠奮義。在晉城有詩云。崆峒山外生雖樂。巡遠城中死亦榮。已見其素定矣。臨亂倡義。以節自終。可謂無愧矣。巡察使陳其梗槪以聞。命追贈郭䞭兵曹參議。宗道司僕正。白士霖白衣從軍。赴蔚山戰有罪。拿鞫于京。尋得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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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壽男 | 1552 | 1592 | 晉州 | 仁叟 | 忠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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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愚伏集) 정경세(鄭經世)생년1563년(명종 18)몰년1633년(인조 11)자경임(景任)호하거(河渠), 승성자(乘成子), 석총도인(石潨道人), 송록(松麓), 우복(愚伏)본관진주(晉州)초시문숙(文肅)개시문장(文莊)특기사항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이전(李㙉), 이준(李埈)과 교유
愚伏先生文集卷之十七 / 碑銘 / 贈兵曹參判郭公神道碑銘 幷序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國家昇平百年。城復于隍。中外恬憘。忘戰已久。猝遇壬辰之變。如河流橫潰。汎濫衝決。所過城邑。不能爲蕭葦之防。遂致三都失守。五廟成灰。自古兵戎之禍。未有慘於此者。獨賴先王禮義之化浹人心髓。凡列于士夫者。皆知賊之不可從。君父之不可背。雖堅脆不敵。恇怯駭散。而終無一人開門迎納。詣壘投降者。至於爲國捐軀。橫屍戰場者。往往而有焉。此又前史之所罕也。然其死也或激於倉卒意氣。或迫於事勢窮蹙。則可謂之殺身。而于成仁有歉焉。求其無歉於是者。則指不能以屢屈。而安陰縣監郭公卽其一也。公之守黃石山城也。爲縣僅二朞。而恩信惻怛。已孚於民。都體察使李公元翼以黃石爲湖嶺咽喉。賊所必爭。法當守。以公忠實而剛毅。且得吏民心。必能守。遂隷以三邑兵。使扼其吭。且以公書生不習兵。令金海府使白士霖助之戰。公乃修治哨堞。積儲糧械。爲死守計。且與士霖約。分城以守。公守西南。士霖守東北。明年賊大至。門于南。公躬督戰。晝夜不懈。士霖欲棄城走。陰使人餂之曰。賊盛而逼。豈不怖哉。公厲聲曰。吾已分死無怖矣。士霖知不可說。乘夜縋下其妻子。卽與手下兵遁。軍吏走報曰。白公已逃。請速出。公曰。此奴訛言熒惑。當斬。使人視之。城東北空矣。於是城中波析。不可禁遏。子壻及吏民等皆號泣以請曰。事已至此。願早爲計。公笑曰。此城乃吾死所。何計之更爲。指軍器曰。不可以籍寇命。悉焚之。明日賊登城。公毅然踞胡床。神色不變。竟遇害。嗚呼。不旣從容矣乎。謂之無歉於成仁者非耶。當是時。棄城而不死。亡陣而享爵祿者。前後相望。公所熟見。士霖之終不伏軍律。亦童子之所知也。惟其熊魚之辨。素定於平日。而心之所安。在於死職。故視士霖如盜賊犬彘。視雨砲電刃如飮食裘葛。不攝不亂。終不開後門以死。嗚呼壯哉。蓋公自寇深以後。以死難自許。一家女婦等亦皆佩以小刀曰。卽有不幸。以此自決足矣。前伏節數十日。與友人別有詩曰。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勖在成仁。至今讀之。凜然有生氣。其素定之堅確。於此亦可槩矣。是以。當時有識之知公者。聞黃石陷。莫不愕然失聲曰。嘻養靜其必死矣。養靜非苟活者。其志節之見必於人。有如此者。公諱䞭。養靜其字也。世爲玄風人。高祖諱安邦。益山郡守。以淸白稱。曾祖諱承華。進士。與寒暄同遊佔畢門。祖諱𤧞。嘗在都下應擧矣。己卯禍作。掃跡南歸。杜門不出。妻兄尹豐亨在銓地。擬一官貽書誚之。竟不爲所汚。幾及禍而免。考諱之完。妣草溪鄭氏。進士玉堅之女。公自少嶷然。有成人局量。及長。從遊師友間。知內外輕重之分。則雖爲親在。不免爲擧業。實無榮達念。親歿。遂不復詣場屋。築書室扁曰存齋。日處其中。專精硏究。有疑則資之勝已。亹亹不怠。一切外物。泊然不入心。雖妻子凍餒。夷如也。壬辰。金公沔糾合義兵。公素相善。佐軍幕。補益弘多。觀察使金公誠一聞其賢。以軍勞上。除自如道察訪。癸巳兵荒甚。餓殍滿野。公管諸邑屯田事。悉心經紀。得粟甚多。全活人不可紀。甲午秋。朝廷拔擢才俊。以不次待公。授安陰縣以去。丁酉。死黃石。年四十七。公之死也。子履常,履厚抱持公罵賊。賊幷斫之。女隨其夫柳文虎走出城。夫爲賊所獲。哭曰。棄父出。爲夫也。夫被執。何用生爲。縊于樹以死。皆公之敎誨式穀。能有以似之也。事聞。先大王懿之。命幷旌其閭。贈公兵曹參議。遣官祭之。履常,履厚俱贈佐郞。廢主朝。加贈公參判。今上卽位。又遣官致祭。軫其無後。特賜守冢人。公天姿粹美。性質醇愨。忠厚樸實。坦易明白。謙若不足而操執固。與物無忤而取舍辨。見人有一善一藝。誠心喜好。必爲之奬成乃已。遇鄕人俗子。亦不爲畦畛。與之由由。而終亦無自失焉。家居。篤於行義。事親盡其誠。怡愉于兄弟。睦姻于族黨。敎子女必以孝悌貞信。冠昏喪祭。必遵用禮經。嗚呼。玆其爲守死善道之本歟。初娶全基遠女。生男二。卽履常,履厚。女二。長卽柳文虎妻。皆無子。季適縣監姜遵。有三男五女。後娶安守恭女。無子。始公之喪。公之弟參奉赾伏匿行入城。收瘞于城外。後數月。葬之玄風縣西花山先兆傍。後十年。諗于公之友朴君惺誌其竁間。又以書及朴君誌來屬余曰。吾仲氏之行。其大者在人耳目。子無不知。其細者。朴君非華而不實者。觀於誌而可徵。願得子一言刻石墓道。使有以不朽。惟吾子幸惠圖之。余惟公之不朽者自足以霆轟宇宙。與天壤俱弊。奚待乎揄揚。而又豈余之所及耶。獨念公嘗以勸相沿牒。屢往來于尙。尙之大夫士無不悅公之德。至今吃吃不離口。余時糊口湖中。未及際晤。常茹恨在心。尙覬他日得一執贄定交。當歡如平生。旣而聞公之死。則宿昔之願。不可得以償矣。爲之潸焉以悲。而仰公所立。又不啻如中河之砥柱。則輒爲之收涕而擊節焉。士固有曠世而神交者。況同時耶。余於公。直面目不相接耳。參奉君之所以屬筆於余者。意必以是歟。則又何可以蕪拙辭耶。遂掇朴君之誌。附以所聞於士友者。敍之如右。系以銘曰。
有氣浩然。充塞穹壤。人孰不受。患不能養。士方平居。說義說仁。禍福所怵。或棄君親。不見義重。但見生大。見豈不及。咎在氣餒。惟公所存。剛大以直。旣見死所。如矢赴的。勇往不顧。賁育莫奪。形毀理全。奚怨奚怛。父子四人。樑棟三綱。歷觀載籍。孰此煒煌。何彼不仁。謂公傷勇。死於封彊。聖所折衷。黃石之山。屹爲南紀。使山若礪。公名不死。
우복집 제17권 / 비명(碑銘) / 증(贈) 병조 참판 곽공 준(郭公䞭)의 신도비명 병서
나라가 태평을 누린 지 100년이나 되어 성(城)이 모두 무너져 해자(垓子)가 되고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면서 전쟁을 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임진년의 변란을 만나 왜적들이 마치 강물이 마구 범람하면서 강둑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이 쳐들어오자, 그들이 지나치는 성읍(城邑)들이 모두 소위(蕭葦)의 제방(堤防)조차 될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오묘(五廟)가 잿더미로 화하였다. 예로부터 있었던 전란의 참혹스러운 화 가운데 이보다 더 참혹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선왕(先王 선조)이 편 예의(禮義)의 교화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흡족히 스며드는 데 힘입어,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왜적을 따라서는 안 되고 군부(君父)를 등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비록 견고하고 나약함이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 탓에 겁을 집어먹고 놀라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끝내는 한 사람도 문을 활짝 열고서 왜적들을 받아들이거나, 보루로 달려가서 투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전쟁터에서 죽어 시신이 된 자도 왕왕 있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또 전 시대의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혹 창졸간의 의기(意氣)에 격동되어서 죽었거나 혹은 사세가 궁박한 데 몰려서 죽었거나 하였을 경우, 살신(殺身)하였다고는 할 수가 있으나 성인(成仁)하였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여기에 대해 부족한 점이 없는 사람을 구해 보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데,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공(郭公)이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킬 때에는 현(縣)을 맡아 다스린 지 겨우 2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은혜롭고 측달스러운 마음이 이미 백성들에게 미더움을 받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황석산성은 호령(湖嶺) 지방의 요충지여서 왜적들이 반드시 빼앗으려고 할 것이니, 법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공이 충실하고 강직하며 또한 아전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반드시 능히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드디어 세 고을의 군사들을 공에게 주어 그들을 데리고 왜적들의 목을 조르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또 공은 서생(書生)이라서 병법(兵法)에 익숙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공을 도와서 싸우게 하였다. 공은 이에 성채와 성가퀴를 수리하고 군량과 병기를 쌓아 두고서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을 하였다. 그러고는 백사림과 약속을 맺고서 성을 나누어 지켰는데, 공이 서쪽과 남쪽 방면을 지키고, 백사림이 동쪽과 북쪽 방면을 지켰다.
그다음 해에 왜적들이 대거 쳐들어오자, 공은 남쪽에 있는 성문에서 몸소 밤낮없이 싸움을 독려하여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백사림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자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공을 꾀기를, “왜적들이 잔뜩 몰려 쳐들어오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자, 공이 화를 벌컥 내면서 소리치기를,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몸이므로 조금도 두렵지가 않다.” 하였다. 백사림이 공을 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밤을 틈타 그 처자들을 밧줄에 매달아 성 밖으로 내보내고는 곧바로 수하의 군사들과 더불어 도망쳤다. 군리(軍吏)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백공이 이미 도망쳤으니 속히 나가십시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놈이 거짓말로 현혹시키니 목을 쳐라.” 하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성의 동쪽과 북쪽이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성안 사람들의 사기가 모두 꺾이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들과 사위 및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들 울면서 청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찌감치 계책을 정하소서.”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성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계책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병기(兵器)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가 없다.” 하면서 모두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그다음 날 왜적들이 성 위로 올라오자 공은 의연히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신색(神色)을 조금도 변치 않은 채 있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아, 이것은 이미 차분한 마음으로 죽음에 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일러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루었다고 해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겠는가?
그 당시에 성을 버리고서도 죽지 않고 진(陣)에서 도망치고서도 작록(爵祿)을 누리는 자들이 전후로 잇달아 있어서 공이 충분히 본 바이다. 그리고 백사림이 군율(軍律)에 복죄(伏罪)되지 않을 것임은 어린아이들조차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웅어(熊魚)의 분별은 본디 평소에 정해져 있는 바였으며, 마음에서 편안한 바가 직분을 수행하다가 죽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백사림을 보기를 도적이나 개돼지처럼 보았고, 쏟아지는 포탄과 번뜩이는 칼날을 보기를 음식이나 갖옷과 같이 보았다. 이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지러워지지도 않아 끝내는 뒷문을 열고 도망치지도 않고 있다가 의연히 죽었으니, 아, 장하기도 하다.
대개 공은 왜적들이 깊이 쳐들어온 이후로 국난(國難)에 죽기로써 스스로 허여하여, 온 집안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모두 작은 칼을 하나씩 차게 하고는 말하기를,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것으로 자결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였다. 절의(節義)에 죽기 수십 일 전에 벗에게 준 이별시(離別詩)에 이르기를,
묘당에서 평상시에 경륜 강구하였건만 / 廟堂平昔講經綸
오늘날에 남자답게 죽을 사람 몇몇이랴 / 此日男兒有幾人
창해에는 피 흐르고 땅엔 온통 비린내니 / 滄海血流腥滿地
헤어지며 서로 간에 인 이루자 권면하네 / 臨分相勖在成仁
하였는데, 지금도 그 시를 읽어 보노라면 늠연하여 기운이 생겨나는바, 공이 평소에 정한 바가 단단하고 확고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당시에 공에 대해서 잘 아는 식견이 있는 자들이 황석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들 깜짝 놀라 목놓아 울면서 이르기를, “아 양정(養靜)이 반드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양정은 구차스럽게 살아남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바, 그 지조와 절개를 다른 사람들이 기필하는 바가 이와 같은 점이 있었다.
공의 휘는 준(䞭)이고 양정(養靜)은 자(字)이다. 대대로 현풍(玄風)에서 살아 현풍인이 되었다. 고조는 휘가 안방(安邦)으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는데, 청백(淸白)으로 칭해졌다. 증조는 휘가 승화(承華)인데, 진사(進士)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다. 조고는 휘가 미(𤧞)인데, 일찍이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자취를 거두어 남쪽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처형인 윤풍형(尹豐亨)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일관(一官)에 주의(注擬)하자, 편지를 보내어 꾸짖어서 마침내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화를 당할 뻔하다가 겨우 면하였다. 선고의 휘는 지완(之完)이고, 비(妣)는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진사 정옥견(鄭玉堅)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우뚝하여 성인과 같은 국량(局量)이 있었다. 장성함에 미쳐서는 사우(師友) 간에 종유하여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분별을 알았다. 이에 비록 어버이가 살아 계시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를 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실제로는 영달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드디어 다시는 과장(科場)에 나아가지 않고 서실(書室)을 짓고는 존재(存齋)라고 편액(扁額)을 내걸고 날마다 그 속에서 지내면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부지런히 힘쓰면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체의 외물(外物)에 대해서는 담박하기만 해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비록 처자식이 추위에 떨고 배고프게 지냈으나, 태연하기만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김면(金沔)이 의병을 규합하였는데, 공이 평소에 그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군막(軍幕)에서 보좌하면서 도움을 준 바가 아주 많았다. 이에 관찰사로 있던 김성일(金誠一)이 공의 현명함을 듣고는 군공(軍功)이 있다고 아뢰어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에 병란과 흉년이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여러 고을의 둔전(屯田)을 관할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 경영하여 곡식을 얻은 것이 아주 많았다. 이에 목숨을 구해 살린 사람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갑오년(1594) 가을에 조정에서 재주 있는 사람을 발탁하면서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공을 대우하여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해 내려가게 하였다. 정유년(1597)에 황석산성에서 죽으니, 나이가 47세였다. 그때 아들인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공을 끌어안고 왜적들에게 욕설을 퍼붓자, 왜적들이 그들까지 모두 죽였다. 딸은 남편인 유문호(柳文虎)를 따라 성을 나와 도망치다가 남편이 왜적들에게 사로잡히자, 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를 버리고 성 밖으로 나온 것은 남편을 위해서였는데, 남편이 사로잡혔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는 모두가 공이 자식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잘 가르쳐서 능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공에 대한 일을 아뢰자 선대왕이 아름답게 여기고는 모두에게 정문(旌門)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공에게는 병조 참의를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이상과 이후에게는 모두 좌랑을 추증하였다. 폐주(廢主) 때에 이르러서는 공에게 병조 참판을 더 추증해 주었다. 금상(今上 인조)이 즉위하고서는 또다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후사가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묘를 지킬 사람을 하사해 주었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정성스러웠다. 또한 충후(忠厚)하고 박실(朴實)하였고, 화평하고 명백하였다. 그리고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겸손하였으나 지조를 잡음은 단단하였고, 상대방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으나 취하고 버림에 구별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착한 점이나 한 가지 재주가 있는 것을 보면 성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여 반드시 끝까지 다 이루도록 장려해 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시골 사람이나 속인(俗人)을 만나더라도 역시 경계를 두지 않은 채 그와 더불어 즐겁게 지냈으나, 끝내는 역시 자신의 체신을 잃지는 않았다.
공은 집 안에 있으면서는 의(義)를 행하는 데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제들과는 화락하게 지내고 종족들과는 화목하게 지냈다. 자녀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효제(孝悌)와 정신(貞信)으로 가르쳤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경(禮經)을 준용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켜 도(道)를 착하게 한 근본이 된 것이다.
공의 초취 부인은 전기원(全基遠)의 따님이다. 이분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으니 바로 이상(履常)과 이후(履厚)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바로 유문호(柳文虎)의 아내이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다. 둘째 딸은 현감 강준(姜遵)에게 시집가서 아들 셋에 딸 다섯을 두었다. 후취 부인은 안수공(安守恭)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다.
처음에 공의 상(喪)을 치를 적에 공의 동생인 참봉 근(赾)이 몰래 성안으로 숨어 들어가 시신을 거두어 성 밖에다가 임시로 장사 지냈으며, 몇 달이 지난 뒤에 현풍현(玄風縣) 서화산(西花山)에 있는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 공의 벗인 박성(朴惺)에게 고하여 공의 묘에 묘지(墓誌)를 지어 묻었다. 그러고는 또 편지와 박군(朴君)이 지은 묘지를 나에게 가지고 와 부탁하기를, “우리 중씨(仲氏)의 행실에 대해서는 큰 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박군이 화려하게 꾸미기만을 힘쓰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니, 그가 지은 묘지를 보면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해 주는 한마디 말을 얻어 묘도(墓道)의 비석에 새겨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고자 한다. 그대는 부디 이 일을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공이 영원토록 전해지는 것은 우주 간에 우레 소리를 내기에 충분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토록 전해질 것인바, 어찌 치켜세워 천양(闡揚)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으며, 또 어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내가 홀로 생각하기에, 공이 일찍이 연첩(沿牒)을 하면서 백성들을 권면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상주(尙州)를 왕래하였으므로, 상주의 사대부들이 공의 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말이 잠시도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당시에 내가 호중(湖中)에서 입에 풀칠하면서 지내고 있었던 탓에 미처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하였기에, 그것이 항상 마음속의 통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뒷날에 한번 예를 올리고서 교분을 맺어 평생 즐겁게 지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공이 죽었다고 들었는바, 지난날에 품었던 소원을 이룰 길이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 그러고는 공이 수립한 바를 우러러 생각해 보매 또 황하(黃河) 가운데의 지주(砥柱)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문득 눈물을 거두고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다.
선비에게는 참으로 시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교제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시대 사람이겠는가. 나는 공에 대해서 단지 면목을 직접 뵙지 못하였을 뿐이다. 참봉공이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 뜻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즉 내가 또 어찌 글솜씨가 거칠고 졸렬하다는 핑계를 대고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드디어 박성(朴惺)이 지은 묘지(墓誌)를 참고하고 사우(師友)들을 통해서 들은 것을 덧붙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런 다음 명(銘)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호연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있어 / 有氣浩然
천지간에 어디에고 꽉 들어찼네 / 充塞穹壤
사람치고 누가 이를 안 받았겠나 / 人孰不受
제대로 못 기르는 게 걱정이라네 / 患不能養
이 세상의 선비들 다 평상시에는 / 士方平居
인과 의에 대하여서 떠들어 대네 / 說義說仁
그러다가 화와 복에 겁을 먹고선 / 禍福所怵
어버이와 임금 모두 내팽개치네 / 或棄君親
의가 정말 중하단 건 보지 못하고 / 不見義重
단지 목숨 중하다는 것만을 보네 / 但見生大
보았다면 어찌 미치지 못하겠나 / 見豈不及
잘못은 기 쪼그라든 데 있는 거네 / 咎在氣餒
생각건대 우리 공이 보존한 바는 / 惟公所存
강건하고 큰 것으로 올곧게 했네 / 剛大以直
이미 자신 목숨 바칠 곳을 알고서 / 旣見死所
표적 향해 날아가는 살같이 갔네 / 如矢赴的
뒤 안 보고 용감하게 나아갔나니 / 勇往不顧
분육조차 뜻 빼앗을 수가 없었네 / 賁育莫奪
몸은 비록 죽었지만 도 지켰나니 / 形毁理全
그 무엇을 원망하고 슬퍼했으랴 / 奚怨奚怛
공의 부자 네 사람이 함께 죽어서 / 父子四人
삼강 오륜 지탱하는 기둥 되었네 / 樑棟三綱
서책 속에 실려 있는 사적을 보니 / 歷觀載籍
어느 누가 이와 같이 환히 빛나랴 / 孰此煒煌
어찌하여 저 어질지 못한 자들은 / 何彼不仁
공이 용맹 때문에 몸 해쳤다 하나 / 謂公傷勇
나라 강토 지키다가 목숨 바침은 / 死於封疆
성인께서 괜찮다고 말한 바이네 / 聖所折衷
황석이라 아득 높은 저기 저 산은 / 黃石之山
우뚝 솟아 영남 지방 진산 되었네 / 屹爲南紀
세월 흘러 저 산 숫돌 같이 되어도 / 使山若礪
공의 이름 영원토록 안 없어지리 / 公名不死
[주-D001] 소위(蕭葦)의 제방(堤防) : 쑥대와 갈대로 만든 제방으로, 아주 엉성하여 쉽사리 무너지는 제방을 말한다.[주-D002] 삼도(三都) : 한성(漢城), 개성(開城), 평양(平壤)을 가리킨다.[주-D003] 오묘(五廟) : 제후(諸侯)의 영묘(靈廟)로, 시조(始祖)와 이소(二昭)와 이목(二穆)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천자(天子)는 칠묘이다.[주-D004] 황석산성(黃石山城) : 경상남도 안음현(安陰縣)의 황석산에 있는 산성으로,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안음 현감으로 있던 곽준은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이곳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주-D005] 웅어(熊魚)의 분별 :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하겠다는 뜻으로,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분별을 말한다. 웅(熊)은 곰의 발바닥이고, 어(魚)는 생선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곰의 발바닥과 생선을 다 좋아하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하겠고, 생(生)과 의(義)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지마는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하였다.[주-D006] 일관(一官) : 일명(一命)과 같은 말로, 처음으로 관등(官等)을 받고서 되는 관원을 말하는데, 보통 9품관을 가리킨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는 일명에서 구명(九命)까지의 관직이 있다.[주-D007] 연첩(沿牒) : 관원들이 관직에 임명하는 임명장을 따라서 여기저기 외직으로 돌아다닌다는 뜻이다.[주-D008] 지주(砥柱) :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흐르는 황하의 한복판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의 거센 물결에도 굳건하게 서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난세(亂世)에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쓴다.[주-D009] 분육(賁育) : 옛날에 힘이 장사라고 소문난 용사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으로,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힘에는 오확(烏獲),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에는 분육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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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逑 | 1543 | 1620 | 淸州 | 道可 | 寒岡, 泗陽病叟, 檜淵野人 | 文穆 |
寒岡先生文集卷之十二 / 祭文 / 祭郭存齋 䞭 墓文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嗚呼。人固有一死。死非人之所免。而幸不幸存乎其間。死於可死而無媿乎本心者。是得死之正理而爲幸焉。死於不必死。或可死而不死。反之心而不能無媿者。是不得死之正理而爲不幸焉。然則養靜之死。其惟可死而死。得死之正理。無媿於本心而爲幸者乎。其惟爲吾道之光。而爲在世朋友所共增氣於悲傷痛哭之中者乎。養靜之爲人。淳厖而閎厚。溫恕而寬平。朋友之所共稱服。以爲不可及者。而養靜則常欿然自以爲不足。益求所以進進不已。蓋養靜之學所造。實有朋友之所不能盡知者。當壬辰之變。與平日相許士友。共倡義兵。辛勤顚沛。以抗一方。屹然爲南中有人。已足以聳四方之聽。而爲後世之所追想矣。及丁酉醜寇之再突。則獨守孤城於窮山。主將潛遁於半夜。萬兵盡潰而無存。安坐待賊。凝然不動。左右親屬。力勸姑避。而竟無回撓之意。從容不屈。以成其仁。至兩子同死。而女子子又復死於其夫。忠孝節義。凜然俱著。一代綱常之義。遂盡出於養靜之一家。不惟養靜之死處得其正理。而無媿乎本心。抑兩子一女之死。俱無媿乎其心。而皆得死之正理。朋友之傷慘罔極者如何。歎息增氣者如何也。僕之追隨相愛三四十年矣。切磋磨礲之益。豈尋常交好之比哉。遊宦千里。雖臨風長痛者。不勝五內之如割。而尙未秉一炷之香。以寓平生之懷。宿草今日。滿目悽涼。追思疇昔。笑談之樂。琅然精靈。如在左右。嗚呼養靜。奈何奈何。嗚呼養靜。其實有不死者存焉。顧豈不爲幸甚而增吾道之光哉。其與悠悠䰟飛於劍鋩者。不足相較。况可死而不死者類。其又奚說哉。
한강집 제12권 / 제문(祭文) / 곽존재(郭存齋) 준(䞭) 의 무덤에 올린 제문
아, 사람은 진정 한번은 죽는 것으로, 죽음을 그 누구도 면할 수 없지만 그 죽음이 다행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하는 차이는 있습니다. 죽어도 될 만한 상황에 죽어 자기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죽음의 올바른 이치를 얻어 다행스러운 죽음이 되고, 반드시 죽지 않아도 될 처지에 죽는다거나 혹은 죽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도 죽지 않아 자기 마음에 반성해 볼 때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는 자는 죽음의 올바른 이치를 얻지 못하여 불행한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양정(養靜)의 죽음은, 죽어도 될 만한 처지에 죽어 죽음의 올바른 이치를 얻음으로써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어 다행한 죽음이 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더 나아가 그 죽음이 오도(吾道)의 찬란한 빛이 되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벗들이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속에서도 모두 기운을 얻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양정의 사람됨은 순박하고 후하며 어질고 너그러워 벗들이 다 같이 탄복하여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는데, 양정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 부족하게 생각하여 끊임없이 더 진보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정의 학문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벗들이 완전히 다 모르는 점이 있습니다.
임진년의 변란을 당하여서는 평소에 서로 알고 지내던 사우(士友)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온갖 고난을 겪으며 한 지역을 방어함으로써 남쪽 지방의 뛰어난 인물로 대두되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히 사방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후세 사람들의 추앙과 흠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유년 왜적이 다시 침략을 감행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주장(主將)이 한밤중에 도망가고 수많은 군사도 다 궤멸되어 남아 있지 않은 외로운 성을 적막한 산속에서 홀로 지키며 전혀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앉아 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좌우의 친족들이 우선 몸을 피할 것을 극력 권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적의 손에 죽음으로써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두 아들까지 함께 순절하고 딸이 또 그의 남편이 적에게 잡히자 죽음으로써 충효와 절의가 다 늠름하게 세상에 드러나 한 시대 삼강오륜의 도리가 마침내 양정의 한 집에서 다 나왔습니다. 이는 양정의 죽음이 그 올바른 이치를 얻어 양정 자신의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두 아들과 한 딸자식의 죽음도 다 그들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 그들도 죽음의 올바른 이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벗들의 끝없는 슬픔이 과연 어떠하겠으며 탄식하며 기운을 얻는 것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나는 공과 서로 어울려 사귄 세월이 3, 4십년이나 됩니다. 절차탁마하여 얻은 도움이 어찌 여느 벗의 경우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오장육부가 찢어질 듯하였으나 천리 타향에서 벼슬살이하느라 한 가닥의 향이라도 피워 평소의 애절한 심정을 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 해 지난 무덤을 찾아와 보니 눈에 들어오는 주위의 모습이 온통 처량한데, 저 옛날 함께 담소하던 즐거움을 회상하니 공의 맑은 영혼이 좌우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 양정이여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아, 우리 양정은 몸은 죽었으나 사실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이 어찌 매우 다행스럽고 또 오도(吾道)의 빛을 보태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덧없이 칼끝에 넋이 날아가 버리고 만 저 수많은 자들과는 서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인데, 더구나 반드시 죽어야 할 처지에도 죽지 않은 저 부류들이야 또 말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주-D001] 곽존재(郭存齋)의 …… 제문 : 곽준(郭䞭)의 자는 양정(養靜),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곽지완(郭之完)의 아들로 작자보다 3년 연하이다. 임진왜란 때 병사(兵使) 김면(金沔)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서 인근 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47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이때 그의 두 아들인 곽이상(郭履常), 곽이후(郭履厚)가 아버지를 몸으로 감싸 보호하다가 적의 칼에 죽었고, 유문호(柳文虎)의 아내인 그의 딸은 남편이 적에게 잡히자 목을 매어 죽었다. 본 제문은 작자가, 그가 죽은 지 여러 해 뒤에 현풍현 서쪽 화산(花山)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참배하며 지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愚伏集 卷17 贈兵曹參判郭公神道碑銘》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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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보다 3년 연하이다->작자보다 8년 연하이다
*鄭逑 1543 1620 淸州 道可 寒岡, 泗陽病叟, 檜淵野人 文穆
*郭䞭 1551 1597 玄風 養靜 存齋 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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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집(藥泉集) 남구만(南九萬)생년1629년(인조 7)몰년1711년(숙종 37)자운로(雲路)호약천(藥泉), 미재(美齋)본관의령(宜寧)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송준길(宋浚吉)의 문인. 소론(少論)의 영수(領首)
藥泉集第二十九 / 雜著 / 嶺南雜錄
壬寅二月十八日到玄風。曾聞玄風士人郭泰載。乃郭存齋䞭之養曾孫。守靜讀書云。問諸邑人則賑恤監抄有司中所謂郭泰亨者。乃泰載之兄云。余使泰亨傳言於泰載。將於去路歷見。十九日行十餘里許。歷入郭泰載家。泰元,泰亨,泰載,泰道兄弟四人出見。泰元設食數器。行酒數巡而罷。泰載形容枯槁。眞所謂山澤之癯。而言語氣度。頗安詳。靜修可人也。泰元語多輕颯。無足採者。然余問道內人才誰爲最賢。答曰卲子云一人之生。當千萬人之生者。聖人也。以此言之。合千萬人之智則可以當聖人也。到今世道日降。人才日下。一人之生。當數十人之生者亦少。自朝家如欲收拾人才。唯當廣收諸人。博採衆智可也。至於拔萃出類之才。未之聞也。余仍謂泰載曰聞尊刻意篤志。專業古人之書。必有發爲著述者。傾蓋相許。不可以疏外自居。敢請一見。泰載固辭不出。仍出郭存齋遺事一卷。一時名人。或爲祭文或爲碑碣。稱道甚盛。泰元言存齋平生。多有著述。而臨難死節時。盡逸於兵燹。其遺詩三首。得於他人家云。其題皆云次人韻。
一曰 至理從來不待繁。一般西覺厭煩喧。疏家儻未明歸趣。後學何由透聖言。
二曰 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勉在成仁。
三曰 別後干戈阻。何由問好音。行藏獨倚處。須記歲寒心。
觀其下二詩。可知其胸中早辦一死。可謂非苟言之。亦允蹈之者也。余又問泰載曰朝廷憂勞民事。至遣御史。而余以不才。當此重任。且未諳本道物情事勢。未知何以則可。且道內之人。聞朝廷下送御史。則必預自相議曰御史如是則可。如彼則非。所謂如是如彼之論。願得聞之。泰載曰道內荐饑。公私赤立。卽今民命之尙得保存者。亦是朝家及本縣城主軫念撫摩之德也。然念穀物將盡。無可以繼之。御史若宣布德意。使飢民雖至於死亡。不以爲怨則可矣。至於轉移穀物。以無爲有。推羨補不足。御史必有素定之計。草萊跧伏之人。何敢知也。
到晉州。聞河義興弘度居在德川曹南冥書院下二十餘里許。欲與相見。三月一日夕後。到河義興家。河公出延而坐。厖眉皓髮。頗有古朴眞實之風。仍問賑恤可行之策則辭不知。問鄕人所欲願者何事。答曰鄕人無他願。唯欲朝廷數遣有風力暗行御史耳。問大同法便否。答曰若行大同。凡物皆當貿易。貿易當使官吏爲之。其間侵責小民之事必多。若然則小民必尤困矣。仍請見所著文字。則出示本州牧使趙錫胤碑文及繼庶母中服喪不服喪辨。且問朝政得失。則云凡世間事。跧伏之人。何能聞何能知。第似聞近日曆法乖錯。以外夷妖誕之法。廢萬古常行之規。是可嘆也。凡二十四氣。例爲次次漸退。以至閏月。而今時憲曆則二十四氣。或進或退。大非古法云。余曰小生亦聞此法。雖未知恰當測候。而亦非元無意義者也。自春分至秋分之間則日輪躔次近北。故自下視之。其度闊遠。自秋分至春分之間則日輪躔次近南。故自下視之。其度狹小。雖二十四方位各有其處。而天形圓而日輪隨之。故日晷長短。以此有異。而節氣之或進或退。亦由於此。是以時憲曆法。自春分至秋分之間。節氣亦長。自秋分至春分之間。節氣亦短。而至於兩至則古曆今曆未嘗有異。未知丈細考及此否。河公曰僕非知曆法。只見堯典注釋。素知節氣漸退而成閏。今見新曆。有駭前聞故云矣。槩觀河公頗淳謹讀書之人。而似無發用之才。且己老病。不堪爲世用。然深藏自修。敎誨後進。左右列侍。有儼然氣象。亦可敬也。余問道內人才可用者。則以
陝川士人裴一長。德川書院下居朴㬅。草溪居前縣監權克敬。固城居前監察李德耇爲薦。而裴朴以學行。權以吏才。李以直道云。
到安東。往宿壽洞丁生時栻家。丁生云此村山勢周遭。大川前廻。極是名村。壬丁年間。天將出來。來到此處。問曰此地當出天下名人。未知曾前何許人居此地。邑人以上洛公金方慶對。天將曰此一國名人。而非名天下者。更有何人。邑人曰此外未有功業聲名過上洛者。天將曰若然物華天寶。亦足當人傑地靈。未知此地有可稱奇賣否。答曰此地人善織龍文席。一國之最。而每歲亦貢天朝。未知此亦應地理耶。天將嘆曰然。凡物名天下者。非寶而何。山川明麗。以有此故也云。其言極是詼誕。而錄之聊以廣異聞。丁生又云我國所產石硫黃。雜於沙土。不能用。若與牛猪等肉脂。交合鎔化則可以去滓。試之良驗云。硫黃乃軍需最切者。貿於外國。每患不足。此言如其果然。可聞諸掌武備者也。
到榮川。舊聞本郡字民樓下。有金生書白月棲雲㙮碑。就見之。碑石猶完而刻畫刓缺。殆不堪模打。碑石旁有刻小誌云余少時得見金生筆迹於匪懈堂集古帖。愛其龍跳虎臥之勢。而傳世恨不多。及來于榮。聞隣邑奉化縣有碑。獨存於古寺之遺墟。金生之書也。余惜希世之至寶埋沒於草莽之間。而無人收護。野牛之礪角。牧童之敲火。咸可慮也。遂與郡人前參奉權賢孫共謀。移轉而安置於字民樓下。繚以欄檻。固其扃戶。苟非打模之人。使不得出入。恐其妄有犯觸也。由是金生之筆迹。廣傳於時。而搢紳好事之徒。爭先賞翫。噫。千百年荒谷之棄石。一朝輸入大廈而爲世所寶。夫物之顯伏。亦有其數歟。余雖才能薄劣。不及昌黎之博雅。此物之遇賞則固不異於岐山之石鼓。夫豈偶然哉。正德四年秋八月。郡守洛西李沆記。朴訥書。余觀其石極厚。後面想必有所刻。使人覆而見之。題云新羅國石南寺故國師碑銘。後記門下法孫釋純白述。末端大書云顯德元年歲在甲寅七月十五日立。字體酷肖金生。而縝密不及。且是下面久當地氣。訛缺益甚。中間多有不可辨志之字。邑子云壬丁年間。唐人來此久留。晝夜模打幾數千本。時當日寒墨凍。故加以熾炭。因此多傷。其後熊天使化之來也。未渡江前。先送人乞白月碑印本。朝中諸人不知碑石在於何處。更問天使。始知所在。別送差官。印出以贈云。東人之不好事不好古。可謂甚矣。嗟乎。所謂朗空大師。不知何許釋子。而乃託金生之字。使其碑文傳諸久遠至今。而且流入中華。爲天下絶寶。凡人之欲傳於後者。顧不可愼所託耶。歐公所謂浮屠老子詭妄之說。特以字畫之工。不忍遽廢者。信然矣。且念安東之龍文席。猶能專山川淸淑之氣。則今此一片石。雖頑然無語。不見聲色臭味之可樂。其光價之貴重。非特百倍過而已。然則此地之流峙扶輿磅礴。其亦鍾精於此。而更不得孕育人傑。爲世之瑞耶。抑何其寥寥也。且觀李公所記則其時蓋覆深簷。可謂至矣。今則委諸鼠壤之中。所謂欄檻扃戶。無復存者。其爲銷鑠。反甚於敲火礪角。著手摩挲。令人興感。後到星州。與尹牧使衡覺語及白月碑事。牧使言某人曾爲榮川守者。以親舊多請印送白月碑。憤其爲邑弊。乃以碑石所置之處爲馬廐。使糞壤堆積。掩埋。人不得下手模打。碑石之多缺。欄檻之盡毀。在於其時云。且有一事與此相類者。牧使曾爲襄陽府使時。求得韓石峯安平諸人書。且得宣廟御筆。命匠梓木以置。遞歸之後。有一府使。於出官之初。卽使吏取刻本板積置庭中。以斧斫之。加之以火。座首進拜。且請曰城主必以印本乞丐之多爲苦。有此焚燒之擧。其在省弊之道。實爲恰當。而其中一板。乃宣廟御筆。亦使斧斫火燒。極似未安。民請取去民家。不貽官中之弊如何。府使曰果是御筆則焚燒未安。置之庫中地排之下。使人不得易出。且使速朽可也云。人情之乖異。乃有如此者。余聞此言。其人之愚智賢不肖。有不足多言。而足爲客中一笑之話柄耳。且念張儀受笞於楚相。范睢折脅於魏齊。孫子臏脚於龎涓。人猶如此。物何足歎。昭陵蘭亭。斷軸於溫韜。廣明菩薩。被燒於黃巢。而後世之人。猶能傳而翫之。不爲泯絶。則物之神寶。自有鬼神之撝呵。豈一時人力所可得磨滅耶。此足爲白月碑慰辭耳。
到義城。壁上有英憲公金之岱詩。云聞韶公館後園深。中有危樓高百尺。香風十里捲珠簾。明月一聲飛玉笛。煙輕柳影細相連。雨霽山光濃欲滴。龍荒折臂甲枝郞。因按憑欄尤可怕。此乃本邑太守女子發狂所誦而傳世者。句語淸奇。眞可以動鬼神矣。後到淸道郡。有古事屛載英憲公事。兒時爲父替戍北方。所枕楯鼻題以一絶。有忠孝可雙全之句。爲趙沖所賞。拔軍還。擢科狀元云。公聞韶閣詩所謂龍荒折臂甲枝郞因按憑欄尤可怕者。尋常未解。見此始知龍荒折臂。指征戍時事。甲枝郞。猶言狀元郞。因按憑欄。言因按察本道。來憑此欄也。雖未決知其果然。而聊以記之。以爲質問之資。
星州先生案。有所謂諸末者。問諸尹衡聖則云丙子亂後久居此地。聞此人事甚詳。此人乃固城常漢。因壬辰亂。猝起擊賊。所向無前。與郭再佑並稱。而聲名且出其上。朝廷特授本州牧使。未久身死。功業不大顯云。且言當交鋒對壘之際。勇氣軒軒。鬚鬢皆上指如蝟毛之磔。賊人望而畏之如神云。嗟乎。朝廷方有求訪人才之命。而尙不得一人可以塞吾責而應上須者。不知今日更有斯人否。然苟非當亂時自見其才。則余雖一日十遇。無以知其所蘊如彼。余雖幸知而聞諸朝。朝廷亦無以信其果然而必用。其必終於埋沒而已。尹衡聖卽牧使之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