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생기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 표훈대덕에게 자주 고민을 털어놓았다. 결국 경덕왕은 새로 왕비를 맞아 들여 늦게 아들을 보는데 성공했다. 왕의 늦둥이 아들 건운이 5살에 태자로 책봉되고, 8살에 왕위에 올라 혜공왕이 됐다. 어린 왕이 등극하자 어머니가 섭정을 하게 됐고, 경덕왕 대에 안정적으로 왕권을 강화했던 체제가 무너져 다시 귀족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왕권을 둘러싼 정쟁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혜공왕 즉위 4년에 대공과 대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찬 김은거를 중심으로 왕의 군사들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김은거는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시중에 임명됐다. 이때 시중이었던 김양상은 반란에 관련이 있다는 책임으로 물러나야 했다. 770년에 김융이 혜공왕의 인사정책 등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융의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김은거는 시중에서 물러나야 했다. 768년 시중에서 물러났던 김양상은 귀족들의 세력을 모아 774년에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상대등이 됐다. 김양상의 반대파이자 친 혜공왕 세력으로 분류되는 김은거와 이찬 염상 등은 김양상에 반대해 두 차례나 크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다. 780년에는 김양상의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으려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김양상과 김경신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때 김양상과 김경신 일파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어 혜공왕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경덕왕이 애써 얻은 아들이 8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8년만에 죽음을 당하면서 신라시대 최초의 왕 시해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신라 하대의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1천 년 신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왕을 시해한 김양상은 김경신의 추대를 받아 스스로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이 됐다. 선덕왕 김양상은 내물왕 10대손이다. 선덕왕의 아버지는 성덕왕의 사위로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이다. 선덕왕이 시해한 혜공왕과는 외사촌 간이다. 반란을 진압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었던 김경신은 상대등에 임명돼 병권은 물론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내물왕의 11대손이었던 김경신은 다시 선덕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38대 원성왕이 됐다. 본격적인 왕권을 둘러싼 전쟁의 막이 올라 신라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