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성지와 순교자
광희문 밖 순교자의 영광이 빛나는 문
광희문(光熙門)은 1396년(태조5)에 한양 도성을 창건할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이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세워진 문(門)으로 동대문에 더 가까운 동남동쪽에 위치한 남소문(南小門)에 해당된다. 그러나 1457년(세조3) 한강나루로 쉽게 접근하기 위해 오늘날의 장충단길에서 한남동 쪽으로 가는 사이에 또 다른 문을 세우고 남소문(南小門)이라 불렀으나 이 문은 풍수지리의 불리함과 실용성이 적어 개통 12년 만인 1469년(예종1)에 폐쇄되고 말았다. 그 후 남소문으로는 광희문만이 남아 남소문으로 불렸다. (광희문,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 중 하나. 문의 좌우 성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 복원되었다.)
광희문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다가 1711년(숙종37) 문루를 중건하고 곧 ‘광희문’이란 현판을 달게 되었다. 한편 청계천의 물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 등에 가까웠기에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더 자주 불렸다. 이 남소문은 도성 내 백성들의 시신이 성밖으로 나가는 출구였으므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 도성 내 중부에 위치한 좌·우포도청, 형조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병사, 장살 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 가족 친지들이 즉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중부 서원(中部書員) 등에 의해서 광희문 밖으로 운반되어 버려졌다. 광희문은 이때부터 순교자의 영광이 빛나는 문이 되었다.
좌·우포도청의 옥과 형조의 전옥과 순교자들 서울의 좌·우포도청의 옥과 형조의 전옥 등은 박해시기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모진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며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일찍이 자신의 옥살이 체험을 바탕으로 ‘감옥’이야말로 이 세상에 현존하는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 안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온갖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매를 맞아 죽거나 목이 졸려 죽었다. 굶주림과 역병으로 옥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1878년 좌포도청에서 신자들과 함께 옥살이를 하던 리델 주교는 건장한 신자 2명이 굶주림과 학대로 옥사하고, 고열에 시달리던 한 신자가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가 옥졸에게 쇠침을 박은 몽둥이로 가슴을 죽도록 맞아 숨을 거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찬 감옥에 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세상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온순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조용한 천주교 신자들을 매일 상당수 목 졸라 수백 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그 옥졸에게 들었다고 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비참한 옥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고통을 겪었으며, 아무 말 없이 다른 죄수나 옥졸의 욕설을 참고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멸시하고 욕설까지 하며 괴롭히던 다른 죄수가 병들자 그를 밤낮으로 따뜻하게 보살펴, 마침내 그 죄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청하여 영육 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옥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며 서로 순교의 의지를 북돋아 주어 다른 죄수들과 옥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옥은 더 이상 고통스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준비하는 영신의 수련소였고, 외교인들마저 회개시키는 복음의 전파소가 되었다.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묻힌 거룩한 주검의 주인공들도 모두 좌·우포도청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기어이 하느님의 사랑을 훌륭하게 증거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화관을 차지한 분들이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광희문 밖 거룩한 터 광희문은 시신(屍身)을 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광희문 밖은 박해시기에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들 가운데 794위의 순교자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곳이다(서종태, 「광희문성지의 실체 규명과 순교자 영성」, 제1회 광희문성지 학술심포지엄, 2017.11.25 참조).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각각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 병인양요(1866),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2) 등으로 거듭 박해가 격화되던 때에 순교한 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거주지가 확인되는 750명 가운데 서울 신자는 309명, 충청도 신자는 213명, 경기도 신자는 158명 순이었다. 이어 강원도 신자가 39명, 황해도 신자가 13명, 경상도 신자가 12명, 평안도 신자가 3명, 함경도 신자가 2명, 전라도 신자가 1명이었다. 이처럼 서울·충청도·경기도 순으로 거주자가 많은 것은 박해를 격화시킨 병인양요의 진원지가 서울이었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충청도 덕산에서 발생했으며, 병인양요가 경기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아가다· 최경환(프란치스코)· 민극가(스테파노) 등 13위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 한이영(라우렌시오)· 정철염(가타리나)·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다)· 우술임(수산나) 7위 도합 20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이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바르바라)· 김이우(바르바라) 2위와, 1867년 순교한 송 베네딕도 가족 3위, 도합 5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황석지(베드로)· 최영수(필립보)· 이윤일(안토니오)· 피 가타리나· 최지혁(요한)· 이병교(레오) 등 1833~1879년에 순교한 25위가 ‘하느님의 종’에 올라 시복·시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처럼 광희문 밖은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의 시신이 유기되고 묻혔다. 그 중에 794위에 달하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사실은 조선시대에 서울의 중부·남부·동부 관내에서 적발된 무연고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 묻었던 관례와, 중부 관내에 자리한 좌·우포도청의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지고 매장된 구체적인 사례들의 확인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가 서려 있는 광희문 밖 성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매장된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영혼이 천당(天堂)에 오르는 언덕 광희문 밖에는 기해박해(1839) 때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 1839.9.12) 성인을 비롯한 다수의 순교성인과, 1867년 순교한 송백돌 베드로 등 병인박해 순교복자, 1833년 순교한 황석지 베드로 등 하느님의 종들도 포함되어 있다. 광희문성지는 한국에서 단일 성지로서는 그 이름이 알려진 가장 많은 순교자들 794위의 시신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성지이다. 또한 이곳의 아리랑고개는 속칭 송장고개라고도 불리는데 그 수많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영혼이 이 세상과 작별하고 하늘로 오르던 고개라는 것도 살필 수 있다.
광희문 밖 카다콤바에서 피어나는 순교영성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광희문성지에 순교자현양관이 세워지자 많은 순례자들이 순례하고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광희문 주변 외교인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와 그들의 손에 떡과 과일을, 철물을 만드는 분은 호미, 낫 같은 소박한 작은 선물들을 들고 순교자현양관 안으로 들어오곤 한다. 성모상 앞에 그 선물들을 내려놓고 두 손 모아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 이곳 광희문성지는 더 이상 죽은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와 천상의 순교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공감하는 영적 소통의 광장이 되고 있다.
이곳은 더 이상 깜깜한 지하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가득 찬 비통한 지하 무덤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스한 은총과 축복의 햇살을 받으면서 죽은 이와 산 이가 기도하는 속에 일치하며 신자와 비신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참된 부활의 현장이 되고 있다.
우리는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묻힌 거룩한 신앙선조들의 순교 영성을 되살리는 지상의 카타콤바(catacomb)로 광희문성지를 개발하여 오늘의 작은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이 건립되었고 계속 순교자 영성을 현양하는 데 매진할 것이다.
1.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광희문(光熙門)은 박해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체포된 수많은 교우들이 서울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와서 가혹한 고문과 형벌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던 이름 모를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 문밖으로 내던져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 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으며, 그때마다 문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가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버려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임이 데레사,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가타리나 성녀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려진 후 신자들이 거두어 매장하였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 베드로의 시신 역시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서울 성곽은 조선 시대 축성 기술의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호국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과 함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재위 4년만인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도성 둘레에 성곽을 쌓아 이듬해 서울 성곽의 원형을 완성했습니다.
서울 성곽은 총연장 18㎞에 이르는 대형 급 성곽으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습니다. 광희문은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는 조선의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다. 광희문은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때 묘소 관리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서, 일단 그 시신을 서울 성곽 밖으로 이전시켜 묘를 장만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내보낼 때는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게 되어 있어서 광희문을 시구문, 즉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불렀습니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몇 차례 개축을 거쳐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1915년경에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습니다.
그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대로 수축할 때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여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다. 당시 퇴계로 확장 공사로 원래 위치보다 15m 남측으로 옮겨졌습니다.
2.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소문 중 하나로 동남쪽에 있었던 문이다. 광명(光明)의 문이라는 뜻에서 광희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조 5년(1396) 8월부터 9월까지 행한 2차 도성 수축 공사 때 다른 문들과 함께 누각을 올려 완성했다. 일제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다른 이름
광희문을 수구문(水口門)이나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청계천(오간수문)·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이라고 했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이라고도 했다.
문루
다른 서울성곽의 문과 달리 광희문의 원래 문루는 약간 특이했다. 보통의 문은 홍예와 붙어 있는 반면, 광희문의 문루는 나무 기둥으로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시체문
광희문에는 도성의 시체 행렬이 종종 통과하곤 했다. 그 이유는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사소문(四小門)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였다.
당시엔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 하여,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수구문 돌가루'라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었다.
오늘날
지난 2월 광희문이 39년만에 문을 열면서 구가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은 2층 문루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광희문성곽코스'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