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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하늘언어교회 특집메시지
그동안 저희 하늘언어교회에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기존 교회에서 간과되고 있는 성경적인 가치들, 현시대 교회가 잃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성경적인 본질들을 부각시켜서 성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하늘언어교회가 어느새 5개월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제가 평범한 조건을 가진 신학자였다면 평범한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조건은 너무나 타인과 다르고 경험과 지식과 관점 등 접하는 모든 세계가 상당히 독특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역설을 낳고 그로 인해 성경과 신앙에 대해서도 상당히 색다른 세계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이것을 흔히 육체적 핸디캡으로만 치부한다면 남보다 못 보고 못 듣는 것으로 일축할 위험이 크지만 이러한 조건을 학문과 배움에 남다른 도구로서 활용하면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세계에 눈을 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특수 조건을 공부와 배움에 적용해서 기존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알려주지 않는 수많은 성경의 본질과 중요한 가치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기 위해 본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엄밀히 분석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원래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하늘나라의 진리 즉 하늘나라의 도였습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기독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도는 세상나라가 줄 수 없는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하나됨을 이땅에 실현해가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라.
너의 가족, 교회, 집단의 사람뿐 아니라 그 외의 사람들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그렇게 해서 이러한 하늘나라정신이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해라.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하려고 했던 원래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늘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나라의 도가 실현되는 곳에는 옹졸한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나 흑백인종차별 같은 것이 발붙일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가진 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장애인 비장애 인간의 차별도 없고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이 복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는 놀라운 이상이 생동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나라 도의 복음이 조직화 되고 체계화되면서 종교권력과 야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화된 체계는 그것을 유지하고 위계질서를 만들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세상의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모든 종류의 부정부패를 필연적으로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복음대로라면 부자가 교회에 가면 가난해져야 하고 가난한 이가 교회에 가면 덜 가난해져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권력집단이 된 종교에서는 부자는 계속 부자로 남고 가난한 이들은 계속해서 가난한 채로 살게 됩니다.
즉 종교화된 기독교에는 하늘나라의 이상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현실과 세속의 금권과 권력이 반드시 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복음 안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이 없어져야 하지만 종교화된 체계 안에서는 그것이 없어지면 체계가 힘을 잃고 흐지부지되기 때문에 평신도 중심의 교회들이 번번이 맥을 못추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존 교회의 문제를 탈피하려고 수많은 이상적인 개혁교회들이 일어났지만 똑같은 인간들이 새로운 조직을 구성한다고 해서 정말로 새롭게 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길은 기존 교회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리면서 성경적 본질을 부단히 일깨워가는 길입니다.
우리 하늘언어교회가 바로 그러한 일석이조의 비전을 품은 원대한 포용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기존교회를 깎아내리고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교회와 그 이전교회와 모든 기독교의 장점을 포괄하면서 그 위에 가장 핵심적인 하늘나라정신을 구현해가기 위한 이상을 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도 완전하지 않지만 장점이 있고 가톨릭과 동방교회도 그러하기에 개신교, 가톨릭, 동방교회의 모든 장점을 배우고 통합하는 것이 우리교회의 방침입니다. 그리고 그 세 기독교가 놓치고 있는 성경의 본질까지 지향함으로 사실상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상적인 교회가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성경과 신학적으로 최대한의 비전을 품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부단히 기존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지만 성경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면들을 계속 공유해왔습니다. 앞으로도 나눌 내용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취지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다가 상처받고 나온 이래 모처럼 신앙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극찬을 해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저의 목회를 위해 최대한 가진 달란트를 동원해서 협조해주시겠다고도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메시지를 조회하지 않거나 아무런 피드백이 없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물론 모두가 피드백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본인에게 맞으면 동참하는 것이고 맞지 않다면 억지로 동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반응들이 갈리기 때문에 앞으로는 좀 더 세련된 메시지와 소통방법을 찾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좋은 작용을 최대화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예배와 활동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수십년을 똑같은 패턴으로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그러한 활동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거의 신경을 안 씁니다.
교회의 예배와 활동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신경써야 할 중요한 이유는 그로 인해 사람들이 깊은 신심을 갖게 되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상처와 안티까지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친가와 외가가 온통 목회자로 넘쳐났던 니체가 어째서 신이 죽었다는 선언을 했을까요? 그것이야말로 맹목적으로 기존교회의 틀에 따라 강행했던 종교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니체가 만일 목회자들의 집안이 아니고 보통 가정에 태어났다면 그토록 극렬한 안티행각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교회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행위들이 도리어 사람을 안티로 만들거나 상처입은 가나안 신자로 만드는 예가 갈수록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분들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부작용과 반작용은 참된 복음을 전하는데 막대한 방해와 걸림돌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심각한 이유때문에 교회의 예배와 전도 등 종교활동들을 반성적으로 점검하면서 섬세하고 세련되게 다듬어가야 합니다.
저희 하늘언어교회가 그러한 반성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부단히 고민을 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같지 않은 교회, 교회를 넘어선 교회로서 종교화보다는 진리화에 기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최선을 다해도 실제 작용면에서는 반드시 부작용과 반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유한성 때문이기도 하고 받아들이는 분들의 특수한 경험세계와 인식구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은 부작용이 아니더라도 메시지를 여유있게 읽을 여력조차 없이 삶에 지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런 메시지는 고사하고 성경 한 줄 읽는 것도 큰일인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작용과 다양한 특성을 가진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가끔씩은 점검을 하면서 활동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회하지 않는 분들께는 민폐가 되지 않도록 더 이상 발송하지 말아야 하기도 하고 조회하는 분들중에도 그 무언가의 요소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시다면 그런 점도 참작해서 메시지를 더욱 다듬어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매주 한 번씩 보내는 것도 너무 빈번하게 여겨진다면 격주로 하거나 한달에 한번으로 조정해보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에서 하늘언어교회의 1차 활동을 오늘로서 방학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교회를 기획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깊은 공부가 필요하고 기존교회라도 함부로 지적을 하는 것도 어느 한에서 조절을 해야 하는데 제가 미흡해서 과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를 반성하며 보다 내실있고 성경적인 메시지로 여러분께 다가갈 수 있도록 잠시 쉼표를 찍을까 합니다. 물론 쉼표는 중단이 아니라 돌아봄입니다. 저의 지나친 기존교회 비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가? 진리로서의 기독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등 기존에 책이나 자료가 없기에 스스로 공부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템포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번에 쉼표를 찍으면 또 언제 찾아뵐지 미지수입니다. 다음주에라도 주님이 전하라고 하시면 기존처럼 메시지를 보내드리겠지만 주님이 침묵하시면 억지로 메시지를 작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존 교회의 큰 문제중 하나가 한번 틀을 만들어 놓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아가 침체되어 도저히 설교할 기분이 아님에도 매주 예배시간이 되면 무조건 기계적으로 선포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멘탈의 손상을 유발할 수 있는 시스템 중심의 관습입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참자아가 아닌 거짓자아로서 설교하고 기도해야 하기에 속마음은 몹시 차갑고 암울해질 위험이 커집니다. 그럴 때는 한 주나 여러 주를 쉬기도 하고 하느님과 단독으로 한없이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합니다.
기존교회는 이러한 유연성을 거의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가능한 곳이 바로 맞춤형 대안교회인 우리 하늘언어교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믿음 충만하거나 기쁨은 넘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여린 가슴이 갈갈이 찢겨져서 도저히 설교할 기분이 아닐 때도 있고 수많은 이웃들이 물난리로 고통당할 때는 열광적인 설교를 자제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체계를 만들어 놓으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한결같이 뜨거운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 앞에 참으로 낯부끄러운 상태일 수 있겠죠.
그러나 우리 하늘언어교회같이 체계 위에 사람이 있고 체계가 사람에 봉사하는 구조에서는 제가 마음이 상심되어 도저히 강론을 준비할 수 없을 때는 조용히 침묵으로 지나갈 수도 있고 당분간 교회 활동을 쉴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거의 1인교회, 저 자체가 곧 교회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의 성전인 것과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결국 여러분 모두는 걸어다니는 1인교회입니다. 저희 교회는 제가 1인교회이면서 기존교회처럼 이름과 간판을 가진 공식적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개존교회인 동시에 대안교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융통성 때문에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하는 모든 유연성이 가능한 교회입니다.
자, 그럼 우리교회의 1차 활동을 방학하는 차원에서 몇마디 짧지만 굵은 메시지들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상당히 생소하고 난해한 개념들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면들이 타성에 젖은 우리의 신심에 돌을 던져서 새로운 변화를 향한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서양의 하느님과 동양의 하느님
서양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에 목숨을 건 사람들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신학자들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계신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신학이론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는데 모든 원인을 있게 한 그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다 이런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증명이 될까요? 수학 문제라면 증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증명이 불가능한 존재여서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하느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도 증명이 불가능하니 있다고 하건 없다고 하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러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증명을 강제로 믿게 하려하고 만일 신이 없다고 하면 큰일날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서양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설교를 하는 분들은 한결같이 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데 온갖 에너지를 다 소모합니다. 본인 자신도 완전히 믿지 못하는 존재를 남에게 믿게 하려는 심각한 모순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있다 없다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거나 비유적인 용도여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법상 여러가지 모순을 내포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초논리적인 언어인데 그런 분을 인간의 언어로 증명하겠다는 것은 논리 위에 계신 분을 논리 안으로 끌어내리는 무모함이 도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있음과 없음
우선 있다는 말을 살펴봅시다. 여기에 성경책이 있다는 것은 성경책이 여기에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은 예전에 없다가 누군가 만들어서 생긴 것이고 언젠가는 폐기되어 없어질 물건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죠. 조영찬은 태어나기 전에는 없던 존재였는데 태어나서 수십년 존재하다가 죽으면 다시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영혼은 존속될 수도 있고 부활 때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이 생각하는 있다라는 말은 사실 없음과 맞물려 있는 상대적인 있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존재는 절대적인 있음입니다. 태어난 적도 돌아가실 일도 없는 영원한 분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아는 있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완전한 있음을 가리키는 동사가 없기에 그것을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없이 계신 하느님 등 기형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있지도 없지도 않으시며 있기도 하시고 없기도 하시다는 말장난 같은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있음을 가리킬 개념 자체가 우리 언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초월된 있음에 대해서는 굳이 있다고 증명하려고 달려들면 오히려 있음의 차원을 깎아내리는 폐단이 따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올바른 관점은 억지로 증명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히 증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과 같이 모든 개념을 뛰어넘는 무한하신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한자를 억지로 있음이니 없음이니 하는 유한한 언어로 규정하려고 하게 되면 오히려 인간의 무능함과 그런 언어로 인해 다투는 추한 모습만 부각될 소지가 있습니다.
초논리적인 세계는 초논리적인 것으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논리화하고 확증된 것처럼 말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억지스러운 증명이 되므로 이는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만드는 것입니다. 초논리적인 언어는 옳고 그름이 아니고 믿음과 소망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내가 옳네 네가 옳네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심마저 손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에 대해 말씀을 전할 때는 확증이니 확신이니 이런 증명언어들을 가급적 내려놓고 그분의 신비에 대한 본인의 자각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공유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확신이나 뜨거움을 연출한다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공히 하느님에 대한 진정성을 상실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3. 맞춤형 대안 신앙이란
우리 하늘언어교회의 모토는 ‘맞춤형대안교회’입니다. 기존교회에서 도저히 은혜를 못받을 정도로 심각한 갈증을 겪는 분들은 더 이상 사람에게서 감동이나 도움을 구할 단계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상처받으면 가톨릭으로 가고 가톨릭에서 상처받으면 동방교회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동방교회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개종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겠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동방교회가 몇억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교파나 교회를 바꾼다고 해서 상처가 회복되고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교회나 교파를 가건 반드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완전한 은혜를 원한다면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서 설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세상에 속하는 현실 교회중에서 비교적 나은 교회에 다닐 수밖에 없지만 정신은 무한하신 하느님과 단독으로 독대를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현실 교회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 신앙을 구축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바로 맞춤형 신앙입니다. 본인에게 맞는 패턴이 어떤 것인가를 계속 찾아보면서 이 현실 속에서 가장 나은 교회나 신앙의 패턴과 정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존 교회를 너무 과하게 다니면 종교중독, 하느님중독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종교를 갖지 않는다면 세속화의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단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가장 무난한 교회를 다니되 한 달에 1,2번 정도로 제한하는 등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수위의 교회 출석을 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교회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매주 출석을 요구하거나 새벽 예배까지 강권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적절하게 중용을 지키려고 하는 목회자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 교회를 찾아서 적절한 거리 내에서 출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맞춤형 출석이 되겠죠.
맞춤형은 성경 읽기, 헌금내기 등 모든 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예로 든다면 가장 읽기 좋은 번역본으로 매일 1장씩 읽거나 매주 1장씩 읽는 등 본인의 그릇에 맞게 읽는 것입니다. 대신 전혀 안 읽어버리는 것은 본인 영혼을 위해 큰 손실일 수 있으니 아주 가끔이라도 성경 읽기는 지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특정 교파에 안주하기 어렵다면 가끔은 가톨릭 미사에도 가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물론 가톨릭야말로 사람을 종교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는 위험성은 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개신교보다 열린 자세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면도 있으니 경계할 부분은 경계하고 배울 점은 과감하게 배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기도하는 자세도 천찬만별입니다. 보통은 어느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하느님은 어느방향에나 계시기 때문에 그런 자세도 사실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했다고 하는데 그런 자세도 해보고 자기에게 맞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차라리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묵상을 하거나 반드시 누워서 잠자듯 깊은 기도를 해보는 것도 괜찮은 자세입니다.
이처럼 맞춤형이란 어느 특정한 부분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할 수 있고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방편을 찾아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4. 쟁반구원론
쟁반구원론이란 성경적인 구원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제가 만든 신조어입니다. 신학박사로서 여러가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들을 설명하려다 보면 기존에 없던 개념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쟁반 구원론이란 하느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 가장 낮은 자를 구원하심으로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의지를 나타내 보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쟁반에 여러 접시를 올려놓았을 때 쟁반 위의 한 접시만 들어 올리면 그 접시 안의 음식만 옮겨지게 되는데 만일 쟁반을 들어 올리면 쟁반 안에 있는 모든 접시와 음식이 옮겨지게 된다는 이치에서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를 비유로서 나타내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구원론들은 접시 구원론입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접시들을 들어 올려서 옮기는 작은 구원들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가장 소외되고 밑바닥 인생인 나병, 중풍병, 군대 귀신들린 자 등 사람들이 가장 꺼려하는 이들을 통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면 그보다 사정이 나은 이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모두 구원의 범주에 들지 않겠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와 장애인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서 구원하면 그 혜택이 장애인들에게 갈까요? 안 갑니다. 노동자를 구원하면 그 혜택은 노동자에게만 한정됩니다.
그런데 만일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과 여러가지 복지제도를 만들면 그 혜택은 노동자들에게도 미칩니다. 즉 장애인을 위한 여러가지 편의시설 덕분에 노동자들도 더 안전하게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혜택을 누린다는 것이죠. 청각장애인을 위해 발명된 전화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게 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전체를 구원하려면 가장 못살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성서적인 쟁반구원론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교회들은 접시구원론으로 후퇴한지 오래입니다. 선교는 반드시 해외선교만 의미하고 가까이에 있는 장애인 선교는 선교로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일이 거의 없어져 가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교회 조직들은 예수님이 아니어서 군대 귀신을 축출하는 등의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을 원조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재정을 체계 유지에 쏟아부음으로서 사실상 세상과는 단절된 상태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조차 막아버리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다시금 쟁반구원론이라는 원대한 본질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5. 가장 낮은 곳에서 힐링거리 찾기
나보다 여러모로 조건이 나은 이들이 즐기는 것들은 내가 즐길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난도의 격투기는 그러한 체력과 젊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노약자는 꿈도 못 꾸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노약자가 즐길 수 있는 것은 힘 있는 자들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저 같은 시청각장애인이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힐링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쟁반구원론적인 입장을 실현하려면 가장 소외된 자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거리들을 많이 만들고 개발해야 합니다.
6. 무협지와 구원론
무협지라하면 보통 신앙인들은 무식하고 저급한 폭력 소설정도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무협지의 큰 줄기는 한결같이 구원론에 있습니다. 악한 이들이 쳐들어오고 싸움을 걸어오면 내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즉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내 사람들을 지킬 방법이 싸우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처한 한계 안의 구원론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을 감수하는 친구를 찾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무협지에서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 너무나 눈물겹고 절절하게 묘사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협지와 구원론이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놀거리나 즐길 거리가 극도록 빈약한 이들에게 무협지만한 읽을거리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고루한 신앙으로 읽을거리를 함부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읽을거리나마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7. 하늘언어교회의 1차 활동을 마치며
저희가 이러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나오면서부터입니다. 15 년간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이렇게 온라인사역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쓸 말은 그동안 신학공부를 하면서 축적된 것이 좀 많았기에 앞으로 몇년이고 계속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위에서 밝힌 이유 즉 이 메시지들이 사람들에게 좋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해야하기에 이렇게 가끔씩 쉼표를 찍을 때도 있어야 하겠지요.
맞춤형 대안교회라는 것은 아직 실례나 선례를 접한 적이 없고 특히 저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대안교회에 대한 사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한 신학지식과 성경지식을 총동원해서 스스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게 글을 써서 아내에게 주면 아내가 깔끔하게 교정도 하고 음성 엔진으로 녹음도 해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맞춤형 대안교회의 개척로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가, 주변에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존 교회들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그것을 유지하는데 동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동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스템이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으로 작용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 공부가 짧고 학식이 빈약해서 많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매번 정독하시고 반응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얼마나 큰 힘을 얻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지 않는 분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템포 쉬면서 좀 더 밝고 행복한 상호작용을 구현하면서 소통하고 공유할 길을 모색해가려고 합니다.
이 부족한 글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느끼는 분들은 짧은 카톡이라도 보내주시면 2차 활동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글들이 맞지 않는 분들은 직접적으로 구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내셔도 좋고 기존처럼 무반응하시면 다음에 구독자 명단 작성할 때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덥고 힘든 날들 감내하시느라 고생들 많으셨고 이 부족한 글들을 보아주시느라 또한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제가 좀 더 깊어지고 좀 더 성숙된 필체로 찾아뵐 때까지 모두들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첫댓글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온전히 닮기 위한 뭄 부림이 있었고 비록 발은 땅을 딛고 살았어도 하늘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하늘나라가 아닌 땅의 것 즉 성경에 없는 그들만의 율법이 만들어졌고 하늘의 신령한 것은 사라지고 땅의 기름진 것만을 찾아 가는 종교화가 되어 가고 있어 안탑갑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에 편식 성향이 있고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정치하고 영업행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미워했는데 말입니다. 오해는 없으시길 바래요 저는 주님의교회와 목회자들를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귀한 댓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의롭게 살고자 결심해도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없거나 미약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이 주셔야 가능하니까 결심하고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스스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달란트가 있지요.
5개에서 1개까지 다양하지만 0개인 사람은 성경에는 없더라고요.
1개를 초라하게 여기고 묻어 두느냐 그 1개나마 최대한 선용해서 좋은 열매를 맺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지상과제가 아닐까 싶네요.
자작시도 꾸준히 써나가다보면 점점 시인스러운 자질이 발달하게 될 것이고
영성도 꾸준히 가꾸어가다보면 예수님의 향기가 가을 코스모스처럼 만연해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모든 달란트를 총동원해서 행복하고 그윽한 가을을 일구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늘언어교회 주일예배 말씀이 삶에 양식이 되고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다 좋은데 너무 길어요 ㅎㅎ
감사합니다. ♡뽕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