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 월곡리 명곡(성주 제일의 양택?, 두사충이 극찬한 곳)
1.벽진이씨 집성촌 명곡
* 벽진이씨 6세손 이실까지는 벽진 수촌(樹村)에 세거하였고 7세손 이방화(李芳華)가 고려 인종 때(1109~1146) 당(송나라?)풍수의 소점에 따라 홈실(홈실, 호음곡, 酉谷)마을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고손 산화(山花,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사람들은 그가 지은 산 꽃 시를 보고 山花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이견간(李堅幹, 11세손)이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순황제가 홈실(虎音谷)을 명곡(椧谷, 물이 부족할 염려가 있으므로 물을 끌어 써라는 뜻)으로 개명(改名)해주었다. 원래 홈실(명곡)이란 월곡저수지 윗 쪽에 있는 5개의 자연부락을 의미하였다. 현재 저수지 옆 산화공원에 명곡동천(椧谷洞天)이란 표지석이 있다.
* 15세손 이건지의 5형제(이휘경의 아들이고 이방화의 8대손이다)가 크게 번성하여 숙질간에 8판서가 배출되자(1450~1500년경으로 추측)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큰집과 셋째는 칠곡으로, 넷째는 창녕으로, 다섯째는 밀양으로 이주하였다.
* 2백년 뒤 21세손 浣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1, 임란의병장, 선산도호부사)이 1622년 두사충을 대동하고 명곡을 탐사하였던 바, 두사충이 성주 제1의 명당이라 함에 따라 칠곡에 살던 산화 후손들이 이주하여 부흥했다. 특히 이언영은 7남3녀를 두어 부흥의 기틀이 되었다.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이 50명이었다고 하며 박사 수십명이 배출되었다 한다. 전체 약 60여호가 있는데 그 중 50여호가 벽진이씨로 추정되고 빈집이 상당히 먆다. 현재 완정고택에는 公의 13세 종손이 거주하고 있다.
2. 명곡지도
아래의 1~5가 사람이 사는 명곡동천이다. 1(신계)은 평범하다. 2(도산)는 문곡서원(월곡리600, 산화 이견간을 배향)이 있는 곳인데 봉소형의 명당이지만 국이 좁아서 현재 들어선 20여호의 기와집으로 가득하고 확장할 여지가 없다. 3(이동인 듯?)은 물이 내려가 것이 보이지 않은 미와로 된 곳이 좋다. 4(내곡인 듯?)는 고려말 山花 후손이 살았던 곳이고 5(제남)는 임란 후 두사충이 잡아준 양택이다.(3.4의 동네 이름은 틀릴 수 있다)
* 명곡동천(椧谷洞天)---동천은 산천으로 둘러 싸인 아름다운 작은 동네를 말하는데 5개의 동천이 명곡(자연지명은 홈실)을 이루고 있다.
* 표지석---월곡저수지 상단 길가에 있다.
3. 옛 명곡동네(지도표시4, 내곡?)
* 7세손 이방화가 1100년대에 입향하였고 11세손 산화(山花) 이견간이 1317년 중국황제로부터 명곡이라는 지명을 하사받은 이래 유명해졌고 15세손 때 8판서가 배출된 다음 1400년대 말경 동네를 떠났다. 살던 마을 떠난 이유에 대하여, 입향조 이방화가 풍수의 말에 따라 자손이 크게 번성하면 떠나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라 하나 계곡물이 범람하여 마을이 폐허가 되었으므로 부득이 이주하였다는 의견이 다수설이다.
* 지도 표시4를 보면 계곡이 깊고 경사가 진 반면에 언덕은 높아서 물이 범람할 지형이 아니다. 다만 홍수 때 거센 물살이 계곡을 깊이 파고 내려가서 마을 통행이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곡의 당판은 아래쪽으로 경사가 지거나 골 바람을 맞는 지형이므로 길지가 아니다. 임란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450년간 비어 있었다고 보인다. 지금 내곡 일원에는 주택 3가구가 있는데 두집은 농사집으로 사람이 살고 있으나 한집은 전원주택인데 폐가가 되어가더라. 무엇인가 매력이 없다는 말이 된다.
* 내곡의 지형---
4 제남(완정고택과 정언 고택, 월곡리809와 806)
* 이건지 5형제가 1500년경 내곡을 떠난 뒤 이언영이 1622년경 두사충을 대동하고 제남 완정고택 터를 잡은 사실은 기록이 있는 것 같다. 이에 관하여 어떤 브로그의 글을 인용한다(감사합니다)
벽리(碧李)가 명곡을 떠난 뒤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입거(入居)하여 6형제가 모두 수만석부자가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유씨 이후에는 야성송씨가 살았다. 임술년(1622년 광해14년)정월에 완정 이언영(李彦英,1568~1639)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 1588~1673) 양공(兩公)이 술사(術士)두사충(杜思忠)을 대동하고 산화선생고기(山花先生故基)인 명곡(椧谷)을 방문했는데 두(杜)씨가 동네 입구에서 재배(再拜)하면서 “이 곳은 횡기(橫旗)가 앞에 펄럭이고 있는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으로 실로 희귀한 명당이다”하면서 성주의 5 명기(名基)중 마땅히 제1이라 했다.
그러나 유씨 6형제가 수만석의 부자로 살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예전에 만석꾼이 되려면 농토를 2백5십만평 소유하고 1천평의 대지에 창고와 하인주거지 등 10여동의 건물을 보유해야 되는데 내곡에 그러한 주거용 면적이 없다. 유씨와 송씨가 부유하게 살았다면 왜 흔적없이 사라졌겠는가?
* 장군패검형---앞산 봉악산은 장군검이고 담장뒤는 장군대좌라는 견해도 있다.
* 혈장---
* 완정과 정언고택---정언고택이 혈장을 많이 점하고 있고 완정고택은 주거용 건물 일부가 혈장을 점하였다. 그런데 건물규모를 보면 완정고택이 몇 배로 크다. 제강서당은 정언고택에서 관리하는 것 같은데 전성시에는 학생이 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정언공의 종손이 돌아가시고 빈 집이 되었다. 도산마을 문곡서원 옆에도 서당이 있다.
5. 발복의 근원은 어디인가?
*1(신계).3(이동)은 길지급이고 3(도산)은 국이 좁아 초등명당이며 4(내곡)은 평범하고 5(제남, 완정과 정언고택)은 중등중급명당이다. 다시 말하면 성주 제1의 양택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발복을 보면 중견 관리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어서(정승집이 없으므로 솟을 대문집은 없다) 성주 제1의 양택이라 할 수 있다. 풍수등급은 중등중급인데 발복은 중등상급 수준이라는 결론이 된다. 명석한 머리와 교육열이 명당의 등급을 뛰어 넘은 것이다. 작은 산골에 서당이 두 개나 있고 며느리를 볼 때는 학교성적을 본다고 한다. 참고로 성주 5대명당이란 명곡외에 수륜리 윤동마을, 칠봉리 사도실,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창평 웃갓마을을 말한다.(2024.6)
첫댓글 성산 이씨 집성촌 한개민속마을도 분석 부탁드립니다.
한개마을은 최근에도 가서 보았는데 기와집으로 가득하였을 뿐 명곡처럼 서당과 서원이 있다든지 아산 외암마을 처럼 부자와 가난한 집이 어우러진 인간미가 있다든지 경주 최부자집처럼 하는 애국 애민의 정취가 있다든지 하는 특색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간산의 재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