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순례 - 전김인문묘(傳金仁問墓)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로 전해지는 고분이 선도산 자락 무열왕릉 동편에 있다. 외형은 원형볻토분으로 봉분의 높이는 6m, 봉분 직경은 29.9m, 둘레는 91m이다. 봉분 자락에는 괴석을 쌓은 호석이 둘러져 있으며, 서북쪽에는 괴석으로 된 받침석 5개가 호석에 기댄 채 노출되어 있다.
전김인문묘는 1930년대 이전가지만 하여도 각간묘 또는 김양묘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31년 김유신, 최치원, 설총을 모신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모서리에서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비문을 판독한 결과 비문의 6번째 행에서 다음과 같은 명문이 확인되었다.
○...祖文興大王知機其神多...
할아버지 文興大王께서는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림이 신과 같은 분으로 …
<김인문묘비>
할아버지 문흥대왕이 누구인가? 이를 알려면 다시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읽어야 한다.
○元年, 夏四月, 追封{尊}ꄲ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원년 여름 4월, 작고한 왕의 부친을 문흥대왕, 어머니를 문정태후로 추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기사>
문흥대왕은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의해 왕으로 추봉된 용춘이 아니던가.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요, 문무왕과 김인문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가 문흥대왕이니 이 묘비는 바로 김인문의 묘비이다. 뿐만 아니라 비편의 크기가 묘 앞에 있는 귀부의 비신 홈과 크기가 일치하였다. 이때부터 김인문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인문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중략)<孝昭大王{孝照大王}>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窆于京<西原>.
연재 원년 4월 29일, 당 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6세였다. (중략)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 각간을 추증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연재 2년 10월 27일 서울 서원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전>
현재의 김인문묘는 서울의 서쪽 들판이라 볼 수 있어 사실과 부합하고 있다.
1968년 두계 이병도는 이 무덤을 김유신묘라는 주장을 펼쳤다. 먼저 무덤의 양식이 무열왕릉과 같다는 점을 들었다. 661년에 사망한 무열왕릉과 673년에 사망한 김유신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김유신을 모신 서악서원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덤 가까운 곳에 재실을 세우는 조선시대의 전통과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서악동 귀부 뿐 아니라 사천왕사터 동서 귀부의 크기도 김인문 비편의 크기와 같다고 한다.
김인문묘비도 전체가 발견된 것이 아니고 비편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김인문묘비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조선 중기 낭선군 이우가 편집한 대동금석서에는 김유신 묘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과 김인문의 행적도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장산군주를 지냇으며 평양성 전투에 식량을 전하는 등 통일전쟁에 참여했다. 또 한 비문 내용 가운데에 22년동안 중국에서의 활동 기록이 없다는 점도 김유신 묘비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귀부의 양식으로 보더라도 690년대에 사망한 김인문 묘비의 귀부가 679년에 창건된 사천왕사터 귀부가보다 선행양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유신은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김인문에게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문무왕릉이 동해의 해중릉으로 조성되면서 왕릉 조영 양식이 단절되었다. 전후를 비교할 대상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전김인문묘
▲전김인문묘
▲전김인문묘
▲전김인문묘
▲전김인문묘
▲호석
▲호석
▲귀부
▲귀부
▲귀부
▲귀두
▲귀갑
▲귀부 앞발
▲귀부 앞발
▲귀부 뒷발
▲귀부 뒷발
<2008.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