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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창건기
竹磵 宏演도 제2의 수선사인 선원사 주지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양사 쌍계루의 기문을 청할 때 청수와 함께 하였던 無說 逌至였다. 無說 逌至는 演西堂이라는 호를 지녔다. 이는 태고 보우가 演西堂이 無說이라는 두 자를 題號로 정하였다거나, 목은 이색의 다음 詩題 가운데 ‘演無說’라는 글귀를 통해 알 수 있다.
2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五 | 五言古詩 | 分題得九曲溪送友[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3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五 | 五言古詩 | 分題得九曲溪送友[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4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五 | 五言古詩 | 分題得種柳橋。送友省親。 | 석굉연(釋宏演) | 1478 |
5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奉和思謙題西宇鍊師山水圖[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6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奉和思謙題西宇鍊師山水圖[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7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舂米行 | 석굉연(釋宏演) | 1478 |
8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題騘馬飮水圖 | 석굉연(釋宏演) | 1478 |
9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題飮馬圖 | 석굉연(釋宏演) | 1478 |
10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八 | 七言古詩 | 秋夜宿蔣山寺 | 석굉연(釋宏演) | 1478 |
11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十七 | 七言律詩 | 題劉仙巖[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12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十七 | 七言律詩 | 題劉仙巖[釋宏演] | 석굉연(釋宏演) | 1478 |
13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十七 | 七言律詩 | 送人之臨江 | 석굉연(釋宏演) | 1478 |
14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十七 | 七言律詩 | 遊紫淸宮 | 석굉연(釋宏演) | 1478 |
동문선 제5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 ‘구곡계’의 제목을 얻어 벗을 보내며[分題得九曲溪送友]
석굉연(釋宏演)
시내 꽃은 곳곳에 피고 / 溪花處處發
시내 물은 굽이굽이 맑도다 / 溪水曲曲淸
꽃이 피니 세월 가는 것이 아깝고 / 花發惜年華
물이 맑으니 갓끈 빨기에 마땅하도다 / 水淸宜濯纓
시서를 강론하던 땅에 / 睠言詩書地
유유히 돛대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 悠悠櫂歌聲
천 년의 무이시는 / 千年武夷詩
고정(주자 (朱子))의 이름이 그리워라 / 懷哉考亭名
고도하여 전철을 계승할 것이니 / 高蹈繼前轍
어찌 평생의 맹세를 저버리랴 / 寧負平生盟
해 늦게 방황하니 / 歲晩此翺翔
매화와 대에 얼음과 눈이 밝도다 / 梅竹氷雪明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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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굉연(釋宏演)의 《죽간집(竹澗集)》
太古和尙語錄 下
無說
演西堂 以自號無說二字 敬奉御筆求讃
點畫如星列 龍蛇爭屈折
又是天中露 垂珠滴秋月
將來貯玉盤 珍玩無時節
禪師道不群 才藻多奇絶
聲名滿天下 言行雙如一
儒釋慕玄風 塵緣盡灰滅
嘿嘿待來機 安然自怡悅
就中親密意 無以可宣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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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5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 ‘종류교’의 제목을 얻어서 부모님께 문안 가는 벗을 보내며[分題得種柳橋送友省親]
석굉연(釋宏演)
그대를 양류교에서 보내며 / 送君楊柳橋
그대에게 양류 가지를 주노라 / 贈君楊柳枝
양류는 줄 만한 것이 아니지마는 / 楊柳不足贈
생각하는 것은 이별에 있도다 / 所念在別離
그대가 돌아감은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 君歸果何爲
흰 구름을 바라보는 생각이 유유하네 / 悠悠白雲思
채색옷이 진실로 즐겁기는 하나 / 綵衣固自樂
도를 배우는 것을 늦게 하지 말며 / 學道莫遲暮
반수의 미나리 캐고 캐어 / 采采泮中芹
흐르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오 / 流年莫虛度
[주-D001] 채색옷 :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칠십에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채색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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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8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 사겸의 서우련사의 산수도에 쓴 시에 화답하여[奉和思謙題西宇鍊師山水圖]
석굉연(釋宏演)
산을 그리려면 화산ㆍ숭산을 그리고 / 畫山須畫華與嵩
물을 그리려면 창해 동쪽 끝을 그려라 / 畫水須極滄溟東
선옹의 새 의장이 조화의 솜씨를 앗아 / 仙翁新意奪造化
붓 끝에 우수수 가을 바람 일었네 / 筆底颯颯生秋風
다래덩굴 돌벼랑 3백 척 꼭대기에 / 蘿梯石磴三百尺
앙상한 늙은 나무 창공을 버티었네 / 槎牙老樹撑蒼空
나는 샘이 졸졸, 돌들이 삐죽삐죽 / 飛泉娟娟石鑿鑿
산뜻하고 찬란해서 시인의 눈이 트이네 / 淸輝粲爛開吟瞳
노관이 갔고, 소리도 죽었을망정 / 老關往矣小李死
당대에 명수 없다 누가 이를쏜가 / 孰云當代無良工
가슴속의 구학이 워낙 울툭불툭하거니 / 胸中丘壑自磥砢
먹으로 그려 내니 무궁할싸 그 정묘 / 揮洒墨妙精難窮
우리 집은 송산 밑 / 我家有屋松山下
이 그림 황홀히 삼한에 와 떨어졌네 / 此圖恍墮三韓中
객지에 있는 사람 멀리서 바라보니 / 自緣遊子遠在望
흰 구름 날마다 갠 봉에서 생기네 / 白雲月日生晴峯
[주-D001] 노관(老關) : 후량(後梁) 관동(關同)은 산수도(山水圖)의 명가(名家)로 추산한림도(秋山寒林圖)가 있다.[주-D002] 소리(小李) : 당(唐) 이사훈(李師訓)이 산수 화가로 유명했고, 그 아들 소도(昭道)도 산수를 잘 그렸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리(大李), 아들을 소리(小李)라 불렀다. 또 전촉(前蜀)의 산수 화가 이승(李昇)도 촉(蜀)의 산수를 그려 절묘했는데, 당(唐) 이사훈(李師訓)의 필법을 얻고도 더 유려(流麗)했으므로 사람들이 소리장군(小李將軍)이라 불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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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 충청도(忠淸道) / 임천군(林川郡) / 【불우】
普光寺。在聖住山。有此君樓。○元朝危素重創碑:“昔三韓大浮圖圓明國師謝絶世榮,歸求其志。高麗國王遣宰相張沆追及於林州,州故有普光寺,溪山幽勝。耆宿、惠湛、達閑等與尙書田冲用遮留國師於此,其門人三千餘指,室屋不足以容。楊廣道按廉崔君玄佑率其官屬,謀爲增葺。遠近聞風而至施者雲委,僧寮、賓館、倉庫、庖廚無不畢備,爲屋凡百餘間。師之伯氏判典客寺事致仕金君永仁、仲氏重大匡平陽君永純感激發願,家童百口、田百頃歸于寺。久之,蔚然爲大道場矣。其後師示寂,謂其徒紹珠等曰:‘寺旣重新,汝等以勿散席,甲乙而主之。’ 於是其徒以受師志,相繼無窮也。因都城禪源報恩禪寺住持宏演來,求書其事。宏演之言曰:‘吾少也,受經玆寺,紀述之託,誠不敢後。’ 於是從宏演得師之始終而竝書之。師諱冲鑑,字絶照,號雪峯。髫齕時,已不茹葷,與群兒嬉戲,以帛製伽黎衣爲佛事。稍長稟命父母,祝髮於禪源寺,禮慈悟國師以爲師。年十有九入選,登上上科。一旦喟然嘆曰:‘雖復脩持十方如來淸淨敎理如恒河沙,只益自勞,曷若脩無偏果?’ 乃舍所事,卽拂衣遊諸方。宿留吳楚,聞鐵山瓊禪師道行甚高,迎之東還,執侍三載,瓊公甚期待之。及瓊公辭歸,師主龍泉寺,始取百丈海禪師禪門淸規行之。後住持禪源寺者,十有五年,弘楊宗旨,爲國矜式。其來普光也,寔再紀至元之二年。越四年八月二十有四日,將入滅,戒門人毋立碑造塔。遽沐浴更衣,跏趺端坐。紹珠進曰:‘請和尙爲衆說法。’ 師曰:‘末後一著,汝等有分薦取。’ 言訖,翛然而逝。世壽六十有五,僧臘五十有八。生在前至元之十有二年乙亥乙酉朔辛酉日也。余嘗論佛氏之學,西出於天竺,乃不遠數萬里,被于東海之表,何其盛矣?而其卓然樹立如圓明師者,宜其設之益昌而益明。若普光之寺,世世以師爲楷,則尙惡有墮廢之時也耶?庸欽次之,而系以銘曰:高麗開國三韓墟,滄海浩渺連東吳。西瞻身毒各天隅,何年貝多傳梵書?學者悟明心地初,瓊公飛錫來此都。圓明國師侍起居,曹溪正宗須力扶。一言妙契萬念除,謂有非有無非無。死生一致不可渝,普光大刹鳴鍾魚。金碧炫晃雲霞鋪,翩翩學者承風趨。優游食息明眞如,精藍鬱鬱師已殂。勒銘紀述昭楷模,乾坤淸夷化日舒。天子萬壽當禎符。” ○康好文詩:“水石千年地,香燈一畝宮。老僧談寂滅,童子禮圓通。嶺上雲多白,窓間日已紅。欲尋居士窟,飛路迥盤空。”
보광사(普光寺) 성주산(聖住山)에 있는데, 차군루(此君樓)가 있다. ○ 원 나라 위소(危素)가 지은 중창비(重創碑)에 옛날 삼한(三韓)의 대부도(大浮圖)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세상의 영화를 사절하고 돌아가서 그 뜻을 추구하니, 고려 국왕이 재상 장항(張沆)을 보내어 임주(林州)까지 쫓아갔는데, 이 고을에는 예부터 보광사가 있어 산수가 그윽하고 경개가 좋았다. 기숙(耆宿)ㆍ혜잠(惠湛)ㆍ달한(達閑) 등이 상서(尙書) 전충용(田沖用)과 더불어 국사(國師)를 이곳에서 붙들어 머무르게 하니, 그 문인이 3천 명이나 되어 그 집으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최현우(崔玄祐)가 그 관속을 거느리고 증축을 도모하니,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시주(施主)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승료(僧寮)ㆍ빈관(賓館)ㆍ창고(倉庫)ㆍ포주(庖廚)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집이 무릇 1백 여 칸에 달하였다. 또 국사의 백씨(伯氏)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 치사(致仕)한 김영인(金永仁)과 중씨(仲氏) 중대광 평양군(重大匡平陽君) 김영순(金永純)이 감격 발원(發願)하여 가동(家童) 1백 명과 전답 1백 경(頃)을 절로 돌려주니, 성대한 한 도량(道場)을 이루었다. 그 뒤에 국사가 시적(示寂)함에 임하여 그의 문도 소주(紹珠) 등에게 말하기를, “절을 이미 거듭 새롭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법석(法席)을 흩어지게 하지 말고 갑(甲) 을(乙)의 차례로 이를 주관하라.” 하였다. 이에 그 문도들이 스승의 뜻을 받아 무궁하게 서로 이어 나가기로 하였다.
도성선원 보은선사 주지(都城禪源報恩禪寺住持) 굉연(宏演)이 와서 그 사실을 써 주기를 요구하는데, 굉연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이 절에서 불경을 배웠으니, 이 사실을 기록하는 글의 부탁은 실로 맡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굉연으로부터 국사의 시종(始終)을 모두 듣게 되어 아울러 이를 쓰는 바이다.
국사는 휘(諱)는 충감(沖鑑)이요, 자(字)는 절조(絶照)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어려서부터 이미 소식(素食)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가사(袈裟)를 만들어 불사(佛事)의 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서 머리를 깎고는 자오국사(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승과(僧科)를 보아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다시 저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교리(淸靜敎理)를 항하사(恒河沙)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고만을 더할 것이다. 어찌 무편과(無偏果) 닦는 것만 하랴.” 하고, 드디어 종사하던 바를 버리고는 즉시 옷을 털고 일어나 사방에 노닐 제, 오초(吳楚)에 머물다가 철산(鐵山) 경선사(瓊禪師)의 도행(道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아 동국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시니, 경선사가 심히 그에게 기대하였다. 경선사가 하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국사는 용천사(龍泉寺)의 주관이 되어 처음으로 백장해 선사(百丈海禪師)의 선문청규(禪門淸規)를 취하여 이를 행하였고, 뒤에 선원사(禪源寺)의 주지(住持)로 15년 동안 있으면서 크게 종지(宗旨)를 선양하여, 온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보광사로 올 때는 다시 지원(至元)을 기원(紀元)으로 하던 해였는데, 그 뒤 4년을 지나 8월 24일에 장차 입멸(入滅)하려 할 때에 문인들에게 경계하여 고하기를, “비(碑)를 세우거나 탑(塔)을 만들지 말라.” 하고 문득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가부좌(跏趺坐)로 단정히 앉았다. 소주(紹珠)가 앞으로 나아가서 여쭙기를, “청하건대 화상(和尙)께서는 중생(衆生)을 위하여 불법을 말씀해 주소서.” 하니, 국사가 말하기를, “말후(末後)의 일착(一著)을 너희들은 분(分)이 있거든 취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아무 계념(係念) 없이 조용히 가니, 이 세상에서 누린 수가 65세요, 승랍(僧臘)이 58년이었으며, 탄생한 것은 지원(至元) 12년 을해(乙亥) 을유삭(乙酉朔) 신유일(辛酉日)이었다. 나는 일찍이 논하기를, “불씨의 학(學)이 서역 천축(天竺)에서 나왔는데 수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동해의 밖까지 입혀졌으니, 어찌 그리 성한고. 그러나 우뚝하게 공을 세운 것이 원명국사 같은 이는 베푼 것이 더욱 창성하고 더욱 밝아지리라. 보광사는 대대로 국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어찌 타락하고 폐해질 때가 있으랴.” 하고, 공경히 이를 기록하고, 또 이어 명(銘)하기를, “삼한(三韓) 옛 땅에 고려에서 나라 세우니, 아득한 바다 저편으로 동오(東吳)와 연하였다. 서쪽으로 신독(身毒 인도) 바라보매 하늘 모퉁이에 각기 있는데, 어느 해 패다(貝多)에 쓴 불경을 전했던고. 배우는 이 마음자리 처음을 깨달아 밝혔네. 경선사(瓊禪師) 석장(錫杖) 날려 이 나라에 왔으며 원명국사(圓明國師)가 기거(起居)를 모시었네. 조계(曹溪) 정종(正宗)을 힘써 붙들었고, 한 마디에 미묘하게 알아들어 온갖 생각을 쓸었네. 있다 하자니 있는 것 아니요, 없다 하자니 없는 것 아니로다. 죽고 사는 것이란 일치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이네. 보광 큰 사찰 종어(鐘魚)가 울리니, 금벽(金碧)이 화려한데 운하(雲霞)가 깔렸도다. 편편(翩翩)한 학자들이 소문 듣고 달려오네. 조용히 먹고 숨쉬면서 진여(眞如) 밝혔도다. 절 융성한데 국사 이미 갔도다. 기록하여 새겨서 공덕 모범을 밝히노라. 건곤(乾坤) 태평하여 덕화가 빛나리. 천자(天子)의 만년장수 상서[禎符]에 합하리라.” 하였다.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수석(水石) 천 년 땅에 향등(香燈) 일묘(一畝)의 불이도다. 늙은 중 적멸(寂滅)을 강론하고, 어린 동자는 관음(觀音)에게 예드린다. 산마루 위엔 흰 구름도 많은데, 창문 사이에 해가 이미 붉었구나. 거사(居士) 숨은 굴속을 찾으려 하니 나는 듯한 높은 길이 공중에 서려 있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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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忠淸道) 우도(右道)○공주진(公州鎭) / 임천군〔林川郡〕 / 사찰(寺刹)
향덕사(香德寺) 일명 오덕사(五德寺)라고 한다.
향림사(香林寺) 모두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동자복사(東資福寺) 성흥산(聖興山)에 있다. 절 앞에 석장(石檣 돌 돛대)이 있다.
서자복사(西資福寺) 건지산(乾止山)에 있다. 절 남쪽에 석장이 있다.
용연암(龍淵菴) 남당나루 서쪽의 사인암(舍人巖) 위에 있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강을 굽어보고 있으므로 경치가 뛰어나다.
서부도암(西浮圖菴) 성주산(聖住山)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성주산에 있다. 절에 차군루(此君樓)가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고려의 승(僧) 충감(沖鑑)이 중국에 들어가 오(吳)ㆍ초(楚) 땅을 노닐다가, 철산(鉄山)의 경선사(瓊禪師)를 스승으로 삼았다. 경선사와 함께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가 3년 뒤에 경선사는 하직하고 돌아갔고 충감은 남아 국사(國師)가 되었다. 15년 만에 다시 중국에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충혜왕(忠惠王)이 사람을 보내 뒤쫓아 임주(林州)까지 가서 그를 만류하게 하였다. 이에 충감이 이 절을 증축하고 거주하였으며 이곳에서 시적(示寂)하였다.” 하였다. 원나라 위소(危素)가 지은 〈중창비(重創碑)〉가 있다.
○ 고려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수석은 천년 내려온 그 땅이고 / 水石千年地
향등은 일 묘의 궁 안이로다 / 香燈一畝宮
늙은 승은 열반을 담론하고 / 老僧談寂滅
어린 동자는 관음에게 예 드리네 / 童子禮圓通
산마루 위에 드리운 구름 희디희고 / 嶺上雲多白
창문 틈새로 비치는 해 이미 붉어라 / 窓間日已紅
거사 숨은 굴을 찾으려 하니 / 欲尋居士窟
나는 듯한 높은 길이 공중에 서려 있네 / 飛路逈盤空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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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 석전총설(釋典總說) /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고전간행회본 권 39) / 사찰(寺刹)
고려의 중 굉연(宏演)이 찬한 《도선전(道詵傳)》에 “처음 도선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불법을 배울 때, 일행선사가 삼한(三韓)의 산수도(山水圖)를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병이 나면 혈맥(血脈)을 찾아 침(針)도 놓고 뜸질도 하면 낫듯이, 산천(山川)의 병도 그와 같아서 혹 절을 건립하여 불상을 세우고 탑을 세우면 마치 사람에게 침 놓고 뜸질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비보(裨補)라 한다.’ 하였는데, 뒤에 도선이 5백개의 사찰을 비보하였다.” 했으니, 지금 곳곳에 있는 석불(石佛)ㆍ부도(浮圖)가 아마 그때에 세운 것인가 보다. 지금 사찰을 따져보건대, 8도(道)의 해협이나 산 구석구석에 사찰 없는 데가 없어, 크고 작은 절이나 암자의 숫자가 무려 천여 곳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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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峯類說卷十八 / 外道部 / 禪門
高麗僧宏演撰道詵傳曰。初道詵入唐。學於一行。一行覽三韓山水圖曰。人若有病。尋血脉。或針或炙則愈。山川之病亦然。或建寺立佛立塔。則如人之針炙。名爲稗補。後道詵建裨補五百剎云。今石佛浮圖處處有之。蓋亦其時所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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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3권 / 시(詩) / 수안 방장(壽安方丈)에 연무설(演無說), 섭백경(聶伯敬)이 한자리에 있었다.
수안 방장에는 털끝만 한 먼지도 없어 / 壽安方丈無纖塵
말에 내려 당에 오르니 내 마음 기뻐라 / 下馬登堂怡我神
단구 선생은 필법이 대단히 신묘하고 / 丹丘先生筆法妙
늙은 선사 죽간은 시어가 새롭구나 / 竹磵老禪詩語新
다과로 손 만류함은 절로 속세를 떠났고 / 茶瓜留客自離俗
사람 비추는 그림은 자못 실물에 가깝네 / 圖畫照人殊逼眞
다만 한스러운 건 석양에 문을 나서매 / 只恨斜陽出門去
험난한 벼슬길에 방향이 희미함이로세 / 宦途嶮巇迷路津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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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14권 / 시(詩) / 인하여 무설(無說)을 생각하다.
소상 동정호 두루 보고 바닷가에 당도해라 / 遊遍湖湘到海涯
돌아온 뒤엔 시구가 온 경성에 가득했네 / 歸來詩句滿京華
지금은 병석에 누워 아무 일도 없는지라 / 如今臥病無他事
도를 묻는 사람이 와서 차만 마시는구려 / 問道人來只喫茶
[주-D001] 무설(無說) :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 무설 장로(無說長老)를 가리키는데, 그는 진원산(珍原山) 가상사(佳祥寺)에 있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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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89권 / 서(序) / 증조명상인시서(贈祖明上人詩序)
정도전(鄭道傳)
무설대사(無說大師)가 병이 들어 진원산(珍原山) 가상사(佳祥寺)에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왜적이 절로 쳐들어오니, 모두 겁을 내어 사방으로 도망가다가 혹은 죽고 혹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대사의 제자 조명(祖明)이 대사를 업고 달아나 겨우 몸은 화를 면했다.
나는 들으니, 백성이란 임금과 스승과 아비로서 사는 것이니 섬기는 것도 한결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을 바칠 뿐이라 한다. 이는 유자(儒者)의 말이다. 불교인은 가정과 세상을 떠나서 어버이도 버리기를 내던지 듯하니, 그 나머지야 의당 생각조차 못할 것 같은데, 왕왕 스승과 제자간에 은혜와 정의가 돈독하고 극진하여, 급하고 어려운 경우에 부닥치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인인(仁人)ㆍ의사(義士)보다 나으니, 조명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하다. 이는 이 마음속에 의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어 없애려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친척을 이별하고 인륜을 버리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는 또한 무슨 마음이랴. 비록 그러하나 인신에 공감되는 것은, 내 편에서 먼저 발단(發端)하면 저쪽의 반응이 진실로 말려고 해도 말지 못할 바 있으리니, 마땅히 시(詩)를 읊은 자가 많음직도 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재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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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 제3권 / 서(序) / 조명상인에게 주는 시의 서[贈祖明上人詩序]
무설대사(無說大師)가 병이 들어 진원산(珍原山) 가상사(佳祥寺)에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그 절에 침입하였다. 모두가 겁을 내어 사방으로 흩어지다가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포로가 되기도 하였는데, 대사의 제자 조명(祖明)은 대사를 업고 도망쳐 겨우 몸을 화에서 면하게 하였다.
나는, ‘백성은 세 곳(군(君)ㆍ사(師)ㆍ부(父)를 말함)에서 삶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동일하게 섬겨야 한다. 그래서 그 섬기는 곳에 따라서는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라고 들었다. 이것은 유가(儒家)의 말이나, 절의 중들은 가정과 세상을 떠나서 어버이 버리기를 내던지듯 하니 기타(군ㆍ사(君師))야 의당 생각조차 못할 것 같은데도, 이따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은혜가 돈독하여, 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구원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도리어 인인(仁人)ㆍ의사(義士)의 위에 있으니 조명(祖明)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고 보면, 그 마음속에 의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어 없애려도 없앨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본에는 이(以)자가 이(而)로 되어 있다)
저, 친척을 이별하고 인륜을 버리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는 또한 어떠한 마음에서일까? 비록 그러하지만 인심(人心)이란 모두다 같은 것이어서, 내가 먼저 발(發)한다면 저쪽에서도 감응(感應)되어 진실로 하지 않으려 해도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을 것이니, 의당 시(詩)를 읊는 자가 많음직도 하다.
[주-D001] 그 섬기는 곳 : 오직 섬기고 있는 곳에서란 뜻으로 ‘아버지를 섬김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스승을 섬김에 있어서는 스승에게,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임금에게’라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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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97권 / 설(說) / 무열산인 극복루기 후설(無說山人克復樓記後說)
정도전(鄭道傳)
趙璞 | 15?? | 15?? | 漢陽 | 君售 |
여황(艅艎) 조생(趙生) 박(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고 말하기를, “이 기는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인데 누각이 용진사(湧珍寺)에 있다. 사람이 누관(樓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높은 데 올라서 먼 데를 바라보고 마음을 풀고, 눈으로 멀리 산천을 궁진하고 풍월을 이끌어서 유관(遊觀)의 즐거움을 도울 뿐이요 학문에는 관계가 없는데, 이제 이 누각을 극복으로 이름하였으니 무엇을 누(樓)에서 취한 것인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매어서 만나는 경우에 따라서 드러나니, 그 마음이 근심에 매어 있으면 비록 산천의 좋은 것과 풍월의 아름다운 것을 만나더라도 서글픈 감정을 도울 뿐이다.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南方)의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온 자는 갇힌 것으로 생각하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이지만, 좌천된 사람은 슬프게 생각하나니,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가는 곳마다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누관이 있으나 어찌 즐거울 수 있으랴. 만일 자기의 사욕을 이겨 없애고 천리를 회복한다면, 그 마음이 활달하여 천지와 더불어 그 큰 것을 함께 하고, 만물과 더불어 그 화함을 같이 하여, 넓고 커서 만나는 것에 따라 모두 즐거울 것이다. 그러므로 한 광주리의 밥과 표주박으로 궁벽한 촌간에 있어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안자(顔子)의 극복이 그것이다. 요컨대, 오직 어진 뒤에야 능히 그 낙을 낙으로 여기는 것이니, 극복으로 누를 이름한 것이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순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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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 제4권 / 설(說) / 무열산인 극복루기 후설(無說山人克復樓記後說) 이하 다섯 수는 금남잡제(錦南雜題)임.
여황(艅艎)【안】 여황은 나주(羅州)의 속현인데 지금은 혁파되었음. 에 사는 조생박(趙生璞)이 극복루(克復樓) 기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기문은 무열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이며, 이 누는 용진사(湧珍寺)에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누관(樓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높은 데 올라 먼 데를 바라보고 마음과 눈을 휴식시키며, 산천과 풍월로써 유관(遊觀)의 즐거움을 돕는 데 있을 뿐이요 학문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거늘, 이제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고 이름한 것은 누에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서 그 만나는 경우에 따라서 발하는 것이 다르다. 그 마음이 근심에 매여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을 만나더라도 슬픈 느낌을 도울 뿐이다. 영릉(靈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하지만 귀양 가는 신하[逐臣] 어떤 본에는 자(者)로 됨. 들은 감옥이라 생각하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인데도 좌천된 사람은 슬프게 생각했다. 그래서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어디를 가나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니, 비록 누관이 있더라도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느냐?
만일 자기의 사욕을 이겨 없애고 천리를 회복한다면, 그 마음이 활연(豁然)하여 천지와 더불어 그 큰 것을 함께 하고 만물과 더불어 화함을 같이하여, 넓고도 커서 만나는 것마다 모두 즐거울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을 마시며 궁벽한 시골에 있어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이가 있으니, 안자(顔子)의 극복(克復)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뒤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보면, 극복으로 누의 이름을 한 것은 그 근본을 얻었다 할 것이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7
三峯集卷之四 奉化鄭道傳著 / 說 / 無說山人克復樓記後說 以下五首錦南雜題
艅艎 按艅艎。羅州廢屬縣。 趙生璞。袖克復樓記來示予曰。此記乃無說山人所作。樓在湧珍寺。夫人之所貴乎樓觀者。以其登高望遠。遊心騁目。窮山川引風月。以資遊觀之樂而已。於學也無與焉。今玆樓以克復名。何取於樓哉。予曰否。不然也。人之憂樂。係之心而發之於所遇之境。彼其心有係於憂者。雖遇山川之勝。風月之美。適足以爲之傷感也。零陵之山。南方之最秀者也。而逐臣 一本作者 以爲囚。岳陽之樓。天下之壯觀也。而遷客以爲悲。苟失其本心則無往而不慼慼也。雖有樓觀。豈得而樂哉。若夫克去己私。以復天理。則其心豁然。與天地同其大。萬物同其和。浩浩蕩蕩。隨所遇而皆樂。故有以簞瓢陋巷而不改其樂者。顏子之克復也。要之。惟其仁而後能樂其樂也。其以克復名樓。得其本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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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 제2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용진사 극복루에 오르다[登湧珍寺克復樓]
【안】 용진사는 나주(羅州)용진산(湧珍山)에 있는데 무열(無說) 상인(上人)이 누의 기(記)를 지었음.
일찍이 산인의 기를 읽고서 / 曾讀山人記
극복루에 오르리라 생각했다오 / 思登克復樓
이끼 낀 오솔길을 더듬어 찾아 / 試尋苔徑細
깊숙한 동문에 들어를 왔네 / 來入洞門幽
천 길이라 고목은 빼어나 있고 / 古木千章秀
팔월이라 계곡은 가을이로세 / 深溪八月秋
번거로운 생각이 씻은 듯하니 / 灑然滌煩慮
여기서 오래 오래 머물렀으면 / 聊可此淹留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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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 나주목(羅州牧) / 【불우】
쌍계사(雙溪寺) 쌍계산에 있다. 신륵사(新勒寺) 금성산 장원봉(壯元峯)에 있는데, 일명(一名) 울아사(鬱牙寺)라고도 한다. 용진사(湧珍寺) 용진산에 있다. 절에 극복루(克復樓)가 있는데, 무설산인(無說山人)의 〈기문(記文)〉이 있다. ○ 정도전이 기문 뒤에 쓰기를, “여황(艅艎)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 극복루는 용진사에 있는데, 대체로 사람이 누각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마음을 즐기고 눈을 달리어 산천 풍월을 실컷 보아 유람의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니, 학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이 누각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난 신하는 감옥 같은 산이라 하였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壯觀)인데 귀양간 사람은 서글퍼했으니, 사람이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어디를 가나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누각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심(私心)을 이겨 천리(天理)를 회복하면, 마음이 넓어져 천지와 더불어 크기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로움을 같이하여 호호탕탕(浩浩蕩蕩) 만나는 곳마다 모두 즐겁다. 그러므로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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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문화유산 정자
극복루 克復樓
서구문화원
날짜 2020-04-28 10:22
광산구 본량동 산3-2 (용진정사 부근)
광산구의 용진정사湧珍精舍는 후석 오준선이 1917년에 지어 국난과 속세를 떠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졌을 용진사湧珍寺에 극복루克復樓가 있었다. 용진사는 북쪽편에서 가학정을 오르는 출발지에 암자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나 사라지고 없다.
용진사가 고려시대 있었던 사찰로 여겨진 근거는 삼봉 정도전이 전라도관사로 재임 중이었던 우정 조박과 함께 1935년에 용진사에 올라 머물며 시문을 남겼다. ‘樓在湧珍寺(이 누는 용진사에 있습니다)’라며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
1377년 2월 무열대사와 정도전이 새로 지은 누각에서 만났었다. 유배가 풀리자 봉화로 돌아가는 길에 무열대사 연서당演西堂 굉연宏演(1275∼1339)의 기문을 읽고 정도전이 후설을 썼다.
“여황艅艎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고 이름한 것은[今玆樓以克復名] 누에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何取於樓哉]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중략-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동문선 제97권에 전하고 있다.
정도전은 또 무열대사의 극복루기克復樓記에 감탄하였다. 그 내용은 “마음이 근심스러우면 좋은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에도 상심만 더하는 법, 그러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마음이 활짝 열려 항상 즐거운 것이니 극복루는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즐거움을 변치 않았던 안자의 요체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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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백양사 창건기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본
연구에 의하면 수선사 제10세 사주 혜감국사 만항과 雪峯 圓明國師 冲鑑(1274-1388)에 의해 받아들여진 몽산선풍은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와 그의 문도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충감의 제자이면서 나옹의 고제인 竹磵 宏演도 제2의 수선사인 선원사 주지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양사 쌍계루의 기문을 청할 때 청수와 함께 하였던 無說 逌至였다. 無說 逌至는 演西堂이라는 호를 지녔다. 이는 태고 보우가 演西堂이 無說이라는 두 자를 題號로 정하였다거나, 목은 이색의 다음 詩題 가운데 ‘演無說’라는 글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색이 수안방장에서 승려 演無說과 聶伯敬과 함께 자리를 하였는데 ‘丹丘先生은 필법이 대단히 신묘하고 竹磵老禪은 시어가 새롭구나.’라는 시를 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演無說은 竹磵 宏演인 것이 확실하다.
이렇듯 복구의 문도들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주요 역할과 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복구의 입적 직후인 1357년 복구의 문도들과 관계없는 若雲이 주지로 임명되어 그의 문도들이 백암사를 장악하자, 복구의 문도와 후손인 右副承宣 李岡 등이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이를 저지시켜 축출하였다.
그 후 백양사는 복구의 조카인 淸叟가 계승하게 된다.
청수는 이우의 3남이자 杏村 李嵒(1297-1364)의 막내 동생인 梅村 李澄이다. 「고성이씨족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찾아진다.
李澄 初名君保 性淸秀善松雪體 官至密直 號 梅村 出家號雲庵大禪 一云 梅堂和尙 恭愍朝人也
李澄은 초명이 君保였으며 性情이 淸秀하다고 하였다. 이에 호가 淸叟라고 불린 게 아닌가 한다. 이징은 조맹부의 송설체에 능하였으며, 密直의 관직에 올라 호를 梅村이라고 하였다. 출가 후 법명이 祖澄이며 雲庵(雲巖, 雲唵) 또는 梅堂화상이라, 三重大匡 福利君에 책봉되었다. 祖澄은 앞서 언급한 무설의 제자 祖明과 도반일 개연성이 높다. 청수는 그의 스승이자 삼촌인 복구가 ‘절을 부탁하여 뒷일을 맡게 하였다.’고 하여 그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佛菩薩 천인의 형상이나 經唄鐘磬의 선양과 곳집의 수입과 같은 것이 옛날에 비해 배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경술년(1370) 여름에 비가 심하게 와서 계곡 물이 넘치니, 누각이 미친 듯한 물결에 휩쓸려 붕괴됨에 청수는 다시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이를 이루어 내었다. 갈고 깎은 것이 법도에 맞고 채색도 알맞아 검소하지도 사치하지도 않다. 날마다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으니, 이 누각을 지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나와 자네가 다행히 누각 위에서 만나 친히 둘러보았는데 그냥 말없이 갈 수 있는가 하면서 기를 청하였다.
경술년(1370)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樓도 무너져버렸다. 淸叟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쌍계루는 청수의 스승 복구가 지은 것인데 1370년 여름에 폭우로 계곡에 물이 넘쳐 쌍계루가 무너져 버리자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다시 지었다.
그런 후 청수는 絶磵을 통하여 그 누각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였다.
李穡의 淨土寺 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지은 기문을 보였는데 자세하지 않으므로 이색에 다시 부탁을 하였다.
幻庵스님은 書法이 절묘하여 眞體를 터득하였다. 한때 그의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지만 반드시 시문을 보고 마음에 흡족해야만 붓을 들었다. 雲庵澄公 淸叟가 장성부에 있는 白巖寺의 樓閣을 중수하여 三峰 鄭先生에게 樓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三峰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雲庵의 문도인 絶澗倫師로 하여금 幻庵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 幻庵이 ‘이는 내가 쓸 만한 글이 못됩니다. 牧老가 세상에 계시는데 감히 누가 장문의 대작을 짓는단 말입니까’하였다. 그리고는 沙彌僧을 絶澗에게 보내 목은에게 가서 누각의 이름과 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牧隱이 絶澗에게 물으니 絶澗은 ‘절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고, 물은 절의 남쪽에서 합쳐집니다.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은 멀기 때문에 그 수세가 크고 작고합니다. 그러나 합수가 되어 못이 된 뒤에 산을 빠져 나갑니다.’라고 하였다. 牧老가 말하길 ‘그러면 雙溪樓라하면 되겠군.’하고는 붓을 들어 기를 썼다. 그 글은 한 점 더할 것도 없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내가 늙었구나, 밝은 달빛이 누각에 가득해도 하룻밤 그곳에서 묵어갈 수 없으니, 젊어서 길손이 못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幻庵이 글을 받아썼다.
청수가 정도전에게 누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자 ‘克復’이라 이름을 짓고, 청수의 문도에게 ‘기문은 환암에게 받으라.’고 하여 절간이 사미승과 함께 환암을 찾았다.
이에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받게 하고 자신은 누각의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이렇듯 환암도 백양사에서 머물렀던 듯하다. 이는 환암의 侍子였던 慶觀이 시를 남긴 사실에서 충분히 유추된다. 이에 의하면 경관은 법호가 ‘中谷’이었다. 경관은 환암의 비문에 湛圓, 紹安, 卍雨 등과 함께 등장하며, 환암이 국사 책봉을 꺼리자 수용하게 한 환암의 侍子였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에는 앞서 언급한 무설 죽간 굉연이 함께 하였다. 무설은 1375년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祖明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정도전(1342-1398)은 나주 유배기간 나주 聳珍山(해발 349m)에서 ‘湧珍山 湧珍寺克復樓記’를 지었다. 이 克復樓에 竹澗(竹磵) 宏演 無說이 記를 남겼는데, 그는 쌍계루에도 올라 시를 읊었다.
굉연은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조명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특히 김구용의 동생인 金齊顔(?-1368)도 無說에게 준 詩가 남아 있다. 무설은 특히 이색과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청수가 지은 누각에서 만났었는데, 유배 후에 다시 누각에 와서 무설이 지은 기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설은 원에 유력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북으로 燕都에서 놀고 남으로 江浙를 떠돌며 泗川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명산거찰이라는 곳은 거의 다 실컷 보았다.
위의 기문에서 보는 것처럼 무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원에 유력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처럼 그(竹磵 宏演)는 나옹의 고제로 幽谷 覺宏, 無及 覺信, 野雲 覺玗, 仲英 覺雄 등과 같이 원에 유력하였다. 혹 중국의 문집에 의하면 無悅이 원에 유력하였다고 하는데, 동일 인물이거나 도반일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수의 문도인 듯한 絶磵 益倫은 ‘삼봉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운암의 무리인 絶澗 倫師로 하여금 환암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에 의하여 더욱더 확실히 알 수 있다.
三重大匡 □군 雲菴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에 부탁하여 雙溪樓의 이름을 지었다. 또 三峯 鄭氏가 지은 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按] 李穡의 淨土寺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하였다.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絶磵 益倫은 혜근의 문도 가운데 竹磵 宏演과 더불어 ‘磵’字를 쓴 대표적인 인물이다.
松風軒이라는 당호로 불렸으며, 천마산 지족암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는 1376년부터 古菴 日昇이 주지를 맡기까지 회암사의 주지로 있었으며, 당시의 문인 이색에게 「檜巖寺修造記」와 「長城白巖寺雙溪樓記」라는 기문을 청한 바 있다. 그런데 이색이 「檜巖寺修造記」를 쓸 당시인 1379년(고려 우왕 5) 무렵에 주지 絶磵 益倫과 覺田이 후속불사를 담당하였는데, 나옹이 주도한 중창 불사 시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絶磵은 혼수가 주관한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靑龍寺에 가서 혼수를 만나 글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에 이르러 환암의 비문 건립에도 참여하였고, 法王 華嚴宗都僧統 雪悟와 나옹의 문도인 絶磵 益倫도 무학 자초와 더불어 태종대 함흥에 머물고 있는 이성계를 환궁하게 하여 이성계 세력과 태종 세력과의 알력에서 빚어진 갈등을 푸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신사년(1341)봄에 제산의 석덕을 불러 모아 轉藏法會를 닦음으로써 낙성하였다. 문인 牧 등이 각기 한 가지 씩 일을 맡아 慶讚會를 베풀되 오직 근엄하게 하였다. 경찬회 첫날 伽梨和羅 등의 물건을 베풀며, 약 10일간 修法하여 布施 功德住를 遷度함이 풍성하였으며, 粧校를 건 것도 특수하여 士女와 老幼가 修敬함이 지금과 같은 것이 예전에는 없었다. 나 法豕는 대중의 維那직책을 맡아 성대한 일을 보고 감히 이 榜을 들어 祝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회에 나아간 禪流를 아래에 열거한다. (至正 元年 辛巳(1341) 四月 日)
백양사 경찬회는 1341년 4월 복구의 문인 牧과 維那 法豕 등이 주관하여 인근 사찰의 승려들을 불러 모아 개최하였다. 그 후 1348년, 1353년, 1409년에 각기 실시되었다.
여말선초 백양사의 사세 규모를 짐작케 하는 것으로 전장법회에 참여한 규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양사를 비롯해 전라도 인근의 승려들이 100여 명에서 150여 명 가량 참여한 규모였다. 즉, 1341년(고려 충혜왕 2) 제1차 전장법회에 知識 83명과 道者 70명, 제3차 전장법회에 知識 46명과 道者 52명, 1409년 제4차 전장법회에 知識 55명과 道者 45명이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