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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13-21을 보면서
2024년 7월 14일 / 마 14:13-21
마 14:13-21 / [5천 명을 먹이신 이적;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예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곧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혼자서 광야로 가셨다. 그러나 군중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동네에서 나와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엄청난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측은히 여겨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와서 말하였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 여기는 빈들이어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에 들어가서 음식을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셨다. 17)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에게는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며 제자들이 의아해하자 18) 예수께서 `그것을 이리 가져 오너라' 하시고 19) 군중을 풀밭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20)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빼고도 남자만 5천 명 가량이 되었다.
1.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 가운데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의 육신적 궁핍함과 영적 갈급함을 동시에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 및 구속주로서 구속의 대상인 인간의 연약함과 필요를 알고 계시며 이를 채워 주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게 해 준다.
측은지심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성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좇아 빈 들까지 따라온 큰 무리의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 14:14).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자비심을 보게 된다. 어찌 보면 예수께서는 빈 들까지 당신을 따라온 무리를 귀찮아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빈 들로 오신 이유는 바로 당신을 세례 요한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하는 헤롯 안디바의 위협과 군중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평온한 휴식을 취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온한 휴식을 빼앗은 이 방해꾼들을 귀찮아하시며 돌려보내셨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귀찮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 중에 있는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무한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한 번도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외면하신 일이 없으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즉 미워할 자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귀찮아 할 자를 귀찮아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는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야말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한날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기려고 하는 큰 죄를 저지른 인간이 완전히 진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다.
약 2:14-17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15) 여러분의 친구 한 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16)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 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이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6:9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라고 안드레가 보고했다. 따라서 아이의 손에 있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한 아이가 그 도시락을 드리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셨을까?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하였던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 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는 풍족한 역사가 임한 것이다. 그 아이라고 그 도시락을 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아이가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내놓을 생각을 하였을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못 먹더라도 예수님이 드시도록 드려야겠다.’라는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마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자 이적이 일어났다. 원어 성경에는 ‘유로게오’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다는 말이다.
2.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가 주라'고 말씀하신다.
16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제의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단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그처럼 굶주린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굶주린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처럼 영적으로 또는 육체적·물질적으로 굶주린 자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으며(눅 4:18-19),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요 21:15-17). 따라서 성도는 언제나 영적으로 육적으로 굶주린 자들에 대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나와는 상관이 없노라’라고 하며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그를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에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과 같다고 하셨다(마 25:41-4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가 주라' 고 말씀하신다. 육체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복음을 나눠주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명령 앞에서 결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으니 줄 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고 또 필요하면 더욱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는 우리가 그 영육 간에 굶주린 이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리를 위하여 기꺼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고, 그래서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을 통하여서도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정녕 우리는 모두 '너희가 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늘 기적과 같은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한다..
3.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결과가 아니라 최선의 과정을 요구하신다.
17절과 18절을 보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들이 가진 것은 단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대답하자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당신에게로 가져오라고 하셨다. 즉 그들이 가진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당신께 드리면 그다음 일은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당신께 드렸을 때 그것으로 여자와 아이들 외에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엄청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만도 열두 바구니나 되게 거두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최고의 결과가 아니라 최선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오천 명이 훨씬 넘는 무리를 먹이는 최고의 결과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리는 최선의 과정을 요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는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바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하여 만족해하시며 당신이 친히 최고의 결과를 이루시는 것이다.
3년 6개월의 기근이 끝나기까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공궤하였던 사르밧의 과부를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기 위한 많은 곡식이나 재물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식량 전부인 한 줌의 가루와 조금의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그것을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올 것만을 요구하셨다. 즉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엘리야를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역사하셔서 기근이 끝나기까지 그녀의 가루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녀의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게 하심으로써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능히 엘리야를 공궤하는 최고의 결과를 이루게 하셨던 것이다(왕상 17:8-16).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는 가능하지도 않은 최고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당신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만을 요구하신다. 그러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혹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자포자기하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최고의 결과로 이끄는 가장 좋은 비결이다.
눅 19:20-22 /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그가 떠날 때 받은 그 돈만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저는 이 돈을 안전하게 간직해 두었습니다. 21) 저는 주인님이 제 이익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주인님은 지독하신 분이라 남의 것을 빼앗아 가고 남이 심어 놓은 곡식까지도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까?’ 22) 왕이 노하여 호통을 쳤다. ‘이 몹쓸 종놈아, 내가 지독하다고? 그러면 너에게 네 말대로 해주마! 네가 나를 그렇게 지독한 사람으로 알았다면 23) 왜 그 돈을 은행에 맡겨 두어 최소한의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하지 않았느냐?’
눅 21:1-4 / 예수께서 성전에 서서 부자들이 헌금궤에 돈 넣는 것을 지켜 보고 계셨다. 2)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돈 두 닢을 넣었다. 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이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 4) 그들은 쓰고 남은 것 중에서 얼마를 넣었으나 이 여자는 가난한 중에서도 가진 것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4. 사람과 사람의 자원으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17절을 보면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즉 자기들이 가진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 그것으로는 오천 명이 훨씬 넘는 무리를 먹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이 말은 참으로 합당한 말이다. 어떻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들의 이 말은 합당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중대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비록 그들 자신의 능력과 자원으로는 그 일을 행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들 자신의 능력과 자원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려 함으로써 결국 그 명령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 할 때 장벽에 부딪히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과 자원만으로는 도저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가 없다. 만약 사람의 능력과 자원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설계도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최첨단의 우주선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빈손으로 장비도 재료도 없이 우주선을 만들 수가 있을까? 땅바닥에 우주선 모양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여행을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을 공급받지 않고 빈손으로 이룰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 하나님의 일을 하는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니 상상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에 비유하시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고 말씀하셨다. 즉 포도나무의 가지가 그 나무를 떠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과 자원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자원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자원과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비결이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다. ‘예수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하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인들의 전적인 믿음과 헌신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막 10:27 /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5.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
17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무리의 먹을 양식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즉 자신들이 가진 것은 단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므로 오천 명이 훨씬 넘는 무리에게 먹을 양식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단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일축(一蹴)하려 하였다. 즉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까지도 제한하려 하였다.
그런데 여러 경우에 있어서 우리도 이러한 잘못을 범하게 된다. 우리의 능력과 자원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에게 자원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일들을 불가능하다고 단정짓는가 하면 또 때로는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가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처럼 우리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모세는 비록 팔십 세의 노인이요, 가진 것이라고는 양 떼를 모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을 때 그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던 애굽을 초토화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그 땅에서 끌어낼 수가 있었다. 또 사사 기드온도 이스라엘의 이름없는 가문에 속한 자로서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포도주 틀에서 타작할 만큼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행했을 때 그는 단 300명의 군사로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을 무찌르는 대역사를 이룰 수가 있었다(삿 7-8장).
그러므로 우리들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뜻, 명령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그의 뜻대로 행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무한한 전능자이시며 실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만큼 알 수 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만약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제한받으실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제한하는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전능을 경험할 수 없다.
믿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알아갈 때는 그분이 알려주시고 보여 주시는 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우리의 믿음은 늘 상식과 경험을 넘어선다.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며 ‘네가 잉태할 것이라’라는 말씀은 마리아의 상식으로 이해하란 말씀이 아니었다.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라고 묻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 같은 것은 없었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었고 마리아는 그것을 믿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의 상식과 경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지만, 마리아는 믿었다.
눅 1:34-38 /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처녀인 내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35)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가졌다.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임신한 지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 37)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사라졌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에게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려주셨고,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믿음은 늘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었다.
아브라함만 해도 인간의 자연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까지 시간을 끄시다가 결국 하신 말씀이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하겠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애를 낳을 수 없음을 알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는 상태였다. 우리 같았으면 하나님이고 천사고 상관없이 버럭 화를 내며 지금 장난하시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해와 상식을 넘어서서 믿어버렸다.
창 15:6 / 아브람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굳게 믿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믿는 아브람을 흐뭇하게 생각하시고 그를 인정해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 속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를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리로 이끌어가시며 우리의 믿음의 영역을 넓혀가신다. 이제부터는 내가 아는 상식이나 이해 범위 안으로(이 정도까지만, 여기까지만) 믿음을 제한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싶고 당신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한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개념을 과감히 하나님 앞에서는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우리는 고아나 과부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우리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이끄시는 대로 내어 맡기고 우리의 의지를 사랑하는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받으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완전하고 안전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길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우리가 깊이 알기를 원하신다.
롬 4:18-22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실 것이며 그 아들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창 15:5). 19) 그의 강한 믿음은 자신의 나이가 이미 백 살이 다 되어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거나 아내 사라 역시 아기를 갖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하는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20) 염려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강하게 자라 아직 그 일이 실현되기도 전에 자기에게 베풀어질 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약속도 실행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2) 아브라함의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죄 없는 자'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 70인 역 창 15:6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잠 3:5-6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6. 나눔은 모든 사람으로 풍성케 하는 비결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나눔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속성이 곧 나눔이기 때문이다. 나눔 신앙의 하이라이트는 성찬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마 26:26-28).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은 나눔을 통한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나눠 주심으로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해주셨고,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연합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나눔은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는 모든 성도를 하나가 되게 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와 일터 등 모든 영역에서 나눔을 실천하며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은 없는 자들에게 나눔을 행하라고 아주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0-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9).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니라(잠 28:27).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전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억탈(抑奪)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겔 18:16).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처럼 성경에는 나눔의 은혜와 축복, 기적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나눔은 기적을 낳는다는 메시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병이어 기적이다. 19절과 20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가져온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위하여 축사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그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떡과 물고기가 그냥 쌓여 있을 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떼어 주실 때에 엄청난 양으로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크고 중대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풍성케 하는 비결은 ‘쌓아 둠’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이다.
'나눔'은 풍성케 되는 비결이다. 하찮은 보리 떡과 물고기가 나누어질 때 오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배를 채우고도 남았던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는 비록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누어질 때 엄청난 양으로 배가되어 모든 사람으로 풍성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 준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교회에 들어온 이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 또 그들 중에서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은 그 발과 집을 팔아서 그 판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는데 사도들이 이 돈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핍절함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가 있었다(행 4:32-35).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서로 나누기보다는 쌓아 두려고만 하고 있다. 그들은 풍성함의 비결을 ‘나눔’이 아니라 ‘쌓아 둠’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고 헌금이 많이 쌓이면 그것을 선교와 구제를 통하여 많은 사람과 나누려 하기보다는 땅을 사고 저축고를 늘리는 등 쌓아 두기에만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쌓아 두는 자들이 아닌 나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질이 쌓이면 물질, 시간이 남으면 시간 그리고 양식이 남으면 양식을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쌓아 두지 않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또한 우리 이웃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첩경이다(마 7:12, 눅 3:11, 히 13:16).
7.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무리가 먹고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들였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들이게 하셨을까?
그분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5천 명이 넘는 수를 충분히 먹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에는 우리를 향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귀하고 신성한 것이다. 따라서 쓰고 남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헛되이 낭비한다면 그것은 죄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 및 양식 사용과 관련하여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들이 쓰고 남은 재물, 혹은 양식들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남는 재물들로 불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사치와 쾌락을 즐기기 위해 허비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먹지도 못할 만큼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서 그 남는 음식들을 쓰레기로 버리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헛되이 낭비하는 죄악이자 빈궁한 자들의 물질을 갈취하고 굶주린 자들의 양식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고 남도록 무엇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헛되이 낭비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남는 물질이나 양식들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 혹 우리가 쓰고 남는 물질이 있다면 그 물질이 가난한 자들, 헐벗은 자들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또 양식은 항상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양만을 만들고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에 힘써야 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것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 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다.
벧전 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광야까지 좇아온 무리를 먹이실 때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사용하셨다. 이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들이 없이는 그 무리를 먹이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재료들이 없이도 능히 그곳에 모였던 모든 무리를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제자들이 가진 재료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그 제자들이 당신의 일은 오직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자발적인 헌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의 자발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물질만이 아니다.
♬ 213장 1.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2. 손과 발을 들이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3.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하소서
4.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5.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를 위해 봉사하게 합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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