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점점 들면서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봄비처럼 마음을 적셔온다. 아쉬움과 회환을 깊이 되새기는 시간과, 생로병사는 자연의 순리라고, 피상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살았다. 자식으로서의 부족함을 인사치레로 살아온 거 같아 슬픈 마음이 든다.
뇌수술 하루 전 큰 아들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죽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육군 병참학교를 졸업하시고 하사로 군 생활을 하셨다. 25살에 하사 계급장과 함께 어머니와 신식 결혼식을 올리신 멋쟁이 아버지 셨다.
군에서의 직책은 보급관으로 군인들의 물품 지원 담당과 군에서 필요로 하는 보급을 맡아 하셨다. 군 생활 중 6,25 전쟁이 일어났고, 평양까지 올라가셨다.
실탄과 수류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하고 ,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땅벌들이 모아둔 토종꿀을 드시고 며칠간 기절도 했다고 했다.
다부동 전투에도 참여하신 우리 아버지, 전쟁이 끝나고 화랑훈장. 무공훈장도 받으셨고 특무상사로 인정받으셨다.
준위로 진급될 무렵 장교 시험을 포기하시고 군에서의 꽃. 다이아몬드로 남았다고 했다. 힘든 장병들을 위하여 배려와 용기를 주셨고 인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갑작스런 전역 후 사회생활도 군인정신으로 열심히 사셨다. 방직회사와 목재소에 직원으로 들어갔지만 어머니의 병간호와 4남매의 가장역할은 무거웠으리라.
회사를 그만두시고는 자전거로 큰 얼음 덩어리를 싣고 와 톱으로 잘라서 영업집마다 배달 일을 하시느라 수고하신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유공자이십니다.
뇌츌혈이 왔을 때 초기대응을 제대로 못한것이 후회가 된다 . 지식 부족으로 아버지는 곹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어머니도 정신이 없는 상태라 다른 방법을 쓰다 늦게 되었고 나 역시 직장생활로 인해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수술 전 날 밤에는 휠체어를 타고 복도에서 서성이며 헛소리를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꽃들이 만발한 꿈을 꾸었다고 하시며 지금도 여기에 꽃밭이 있고, 사위를 보고는 높은 분이 오셨다며 망상 증세를 보이셨다. 그때 이미 아버지의 영혼은 현충원에 가 계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버지의 강한 정신력 덕분에 동생 둘도 육군. 해군 장교를 마쳤고, 손자들도 전역해서 병역명문가 집안이 되었다. 현과 문 앞에는는 "6.25 참전유공자의 집" 팻말이 밝게 달려있다.
아버지 돌아 가신지 20년이 지났고 , 늘 이때 쯤이면 손자.손녀들과 아버지 계신 현충원에 모여 오월의 꽃들과 함께 했었다.
엄마는 아버지 터 닦아 두신 보훈병원에서 오늘도 치료중이다. 아버지가 함께 간호 해주실거라 믿는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형제들과 의논하여 어머니 계신 병원에서 모이기로 했다.
아버지의 자녀들도 이제는 고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살아 계실 때 못한 효도, 후회하는 마음으로 병원에서 가족들과 조촐하게 식사하며 많은 추억담으로 그리워하겠습니다. 아버지도 오시죠?
첫댓글 훌륭한 아버지를 두셨습니다. 어버이 날이 되면 부모들이 그립지요.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늘 누구 에게 나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