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는 속담이 있다. 외상은 현금 같은 재화를 건네지 않아도 되니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중요성과 가정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큼에도 잡아먹을 수 있다니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미묘하다.
현금으로는 아까워서 도저히 소비할 수 없는 거래가 외상 거래 이면 씀씀이가 달라진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모든 거래의 대부분이 외상으로 이루어 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한 농산물은 즉시 현금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곡식이 자라도록 기다려야하고 수확을 하여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말리고 다듬고 손질하여 상품이 되기까지 많게는 수십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현금화 할 수 있는 재화가 농산물뿐인 시절에는 외상 거래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쌈지 주머니엔 모서리가 접히고 닳고 낡은 수첩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 하여 외상장부였다. ‘남천댁 고등어 80원, 오징어 30원 제사’라고 적혀 있었다.
볼펜이나 기타 필기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연필로 또박 또박 적어 내려간 장부였다. 그런데 그 외상 장부가 참으로 곤란할 때가 있었다. 연필로 적어서 서너 달이나 심지어 6개월 혹은 1년이 넘어 갚을 때는 연필로 쓴 것이 흐려져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외상을 적는 다는 것이 바쁜 농사일과 겸하다보니 기장하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5일장에 가지고 다니다가 갑작스런 소낙비에 장부가 망가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다보니 장부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요즘 같이 컴퓨터에 저장 되어 있다면 ‘걱정도 팔자’라고 하겠지만 당시로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낙비에 망가지거나 분실될 때면 외상 장부를 복원해야 했다. 그럴 때면 초등학생이던 나는 어김없이 복원 팀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한글 실력이 아버지 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외상을 가져 갈 때 보지도 못한 어머니에게 역정을 냈다. 본동댁 시아버지 제사 때 무엇 무엇을 가지고 갔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뒤집어쓰면서도 신경이 날카로워 질대로 날카로워 진 아버지 역정을 말없이 받아 넘겼다.
사실 아버지의 학력은 무학 이었다. 당시는 맏이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재산 상속이 이루어지던 시절 이었다. 일제 강점기 면소재지에 신교육 기관인 소학교가 들어섰고 학령기가 넘었지만 큰 아버지부터 소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할아버지 지휘 아래 어린 나이에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한글을 깨우칠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나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와 겨울철만 다니던 서당 덕분에 맞춤법이 전혀 맞지 않는 한글 장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몇날 며칠을 두고 복원한 장부는 그렇잖아도 외상값 액수와 품목 차이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서당의 주요 과목 가운데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이 있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 충렬왕 때 추적(秋適) 이 중국의 고전에서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모아 편찬한 책으로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널리 읽혀온 고전이다. 중국의 고전이라 하면 유가(儒家)의 사서오경(四書五經)만을 생각하기 쉬우나 이 명심보감에는 유불선(儒彿仙) 각 분야의 사상을 담은 명언, 명구가 실려 있어서 동양(東洋)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서당의 주요 교재 였다.
아버지 이야기로는 서당에 다니는 학동은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여자들이 다니는 서당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글은 배워서 어디다가 쓰겠느냐는 의식이 팽배한 시절이었기에 여자들은 겨우 기초적 문자만 배웠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남•녀 모두 한자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고 여자가 글을 배우면 되바라진다고 하여 그 수는 적었고 대부분은 집 안에서 개인적으로 언문(한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일반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여자들도 서당에 가서 언문 등을 공부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할머니들 상당수가 소학교가 아닌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학교를 중퇴한 경력으로 한글을 깨우쳤으나 아버지 앞에서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니 외상장부 복원에도 크게 관여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성경책을 읽던 어머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버지는 술을 먹은 날이면 어김없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은 반드시 필요한 글이니 고리타분한 글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꼭 읽어보라”고 했다.
명심보감 계선편( 繼善篇)에는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爲禍이니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화를 준다."는 내용이다. 이 문장은 아버지에게서 수백 번을 넘게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의 외상 장부가 복원 되고 실랑이가 벌어지면 대부분이 아버지의 완패로 끝이 났다. 외상값을 억울하게 못 받는 날이면 아버지는 “공자님 말씀에 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조상 제사지내고 제물 값 갚지 않는 악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화를 준다”고 자위 했다.
이제 전자카드가 생겨서 외상 거래는 찾아보기 어렵다. 외상 거래에서 생겨나는 애환 서린 에피소드는 무수히 많다. 외상장부 때문에 속을 끊인 아버지가 너무나 생각난다. 짧은 한글 깨우침에 필기구와 장부도 변변찮던 시절 아버지의 위로는 오직 하늘이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