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신(神)의 존재성, 구원 등과 관련된 종교적 내용과 더불어 개인과 사회, 집단들이 규정한 양심적 판단이라는 도덕적 측면까지 다루고 있는 역사는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과학과도 다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H Carr, 1892~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사회 중심의 역사를 정의하였다. 이러한 역사 인식에 있어 사회주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북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 그 역사의 시작과 편찬 작업은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산하에 25명으로 구성된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설치를 결정하고, 1948년 10월 2일 동 위원회가 조직된 다음, 1949년 1월 13일 교육상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29명의 편찬위원이 선임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주로 일제의 식민 사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과 민족사의 시발로서의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우실하,『동국공정의 선행 작업들과 중국의 국가전략』, 도서출판 울력, 2004. pp.57~58) 그러나 북한의 역사는 실줄과 날줄처럼 거의 모든 것이 김일성 정권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돼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출발한 현대사이다.
이러한 북한에 대해 2003년부터 4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세계종교문화를 강의한 바 있는 미국 아이오와 심슨대(Simpson College) 종교철학부 신은희 교수는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북한 사회는 다른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특히 기독교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죠. 북한에도 봉수교회나 칠골교회(반석교회) 등이 있지만, 북에서 교회는 일종의 문화선전을 담당하고 복지물자를 조달하는 기관일 뿐이에요. 북한 주민들에게는 이미 주체사상이 가장 감동적인 영성이요 종교이며 신앙이 되어버린 겁니다.”(출처:「신동아」2007년 2월호)라는 평가가 북한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窓)일 수 있다.
또한 신은희 교수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 사회를 고유한 민족종교를 신봉하는 또 다른 종교사회로 해석하는 그의 관점은, 남한 사람들에게 문화적 다양성이란 관점에서 북한을 이상한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회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는 일단 공평하게 바라보자고 주장한다. 다원적으로 바라보고 대화하면서 비판은 그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북을 제거의 대상으로, 주체문화를 위반의 문화로 보지 말고 북한 사회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신동아」2007년 2월호)는 측면을 고려할 때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과 그 속에서 존재하는 북한불교의 역사는 신은희 교수가 “주체사상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단계를 거쳐 현재는 북한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북한 내에 존재하고 있는 전통종교에 관한 역사이기보다는 “북한의 국가종교인 주체사상이 스스로를 정립해 나가고, 제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잠재적인 경쟁자인 기존 전통종교들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한국종교문화연구소: news letter No.159 2011.5.24. http://kirc.or.kr)에 대한 기록이고, 이러한 북한사회 속에서의 종교의 역사는 앞으로 여러 인접 학문의 연구를 통해 다시 조명되어야 할 부문이 많이 있다.
북한의 종교정책
1948년 공식 등장한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약 20년간 사회주의 건설에 모든 역량을 결집했다. 그로써 북한의 종교 또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복무해야 하는 내재적 이유로 말미암아 종교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북한 주민들의 종교에 대해 “종교를 장려하지도 박해하지도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1949년 7월 내각 제21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이 언급한 종교에 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물론 국가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를 믿지 말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여서는 안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의 비과학성을 깨닫고 스스로 예배당에 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의 해독성과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과 함께 세계는 어떻게 발생 발전하였는가,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담화와 강연을 자주 조직하며 자연과 사회발전의 법칙을 통속적으로 해설한 도서를 많이 출판하여 근로자들 속에 널리 보급하여야 합니다. 문화선전성에서는 과학서적을 많이 출판하여 보급하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하겠습니다.”(김일성,『문화선전사업을 강화하며 대외무역을 발전시킬 데 대하여』,「김일성저작선집」,제5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80, p.154 ; 김흥수․류대영,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다산글방, 2002, pp.64~65에서 재인용.)
위와 같이 북한은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에 대한 중립성을 강조하면서, 1948년부터 1999년까지 4차례에 걸친 헌법의 개정을 통해 종교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고치고, 주민들에게 종교 활동을 허용하는 등 종교사의 객관적 서술을 보이고 있다. 종교에 대한 북한의 헌법과 법률이 주민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은 북한 당국이 종교 내지 불교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북한에서는 종교에 대한 구체적 정책의 집행과정을 당의 결정이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북한의 법체계와는 달리 당의 결정은 주민 생활의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는 북한이 주장하는 목적과 입장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의 해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늘날 북한의 종교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북한의 역사서와 그 밖의 출판물 그리고 제3국에서의 회의, 방북 등의 방법으로 북한종교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할 수 있다. 북한에서 출판된 역사서와 여타 문헌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종교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는 학자들이 종교에 대한 평가를 옳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쓴 책들을 보면 종교가 나쁘다는 것을 론증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교가 무슨 큰 역할이나 논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를 비롯한 불교의 중들을 굉장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나 유교가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많은 도움을 준 것처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문화가운데 있는 불교문화나 유교문화를 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들어와서 우리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원래는 불교나 유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발전에서 큰 지장을 받았다고 하여야 하겠는데, 우리의 력사가들은 문제를 반대로 풀고 있습니다. 종교문화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것은 우리 학자들이 많이 연구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남아있는 절간이나 향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력사적 유물들에 대한 평가도 잘하여야 합니다. 지난날의 유물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김일성,『학생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참된 후비대로』,「사회과학의 임무에 대하여」, 조선노동당출판사, 1969. p.511 ; 김흥수․류대영,『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다산글방, 2002, p.112에서 재인용.)
이러한 종교에 대한 입장은 김일성에 의해 제기된 “문화혁명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사회로부터 이어진 문화적인 후진성을 일소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를 조속하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북한의 사상』,「태백총서 11」,도서출판 태백, 1988, p.131.)는 북한에서의 문화혁명의 기본 방침을 토대로 유교, 불교, 도교 등 전통적인 종교 사상은 모두 ‘뒤떨어지고 반동적인 것’이고 ‘착취계급을 위해서 복무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했다.
또한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해 전투적인 태로도 임할 것을 강조하면서 정신적, 물리적으로 북한 사회주의에 침투하여 체제를 붕괴시키려 하기 때문에 ‘모기장을 치고’ 이들의 문화적 침투에 대비해야 한다.”(김병로, 『북한사회의 종교성 ;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종교양식 비교』, 통일연구원, 2000, p.92.)고 주장한 바와 같이 사상의 오염으로부터, 정신문화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종교를 부정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종교는 1992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해 9월 10일에 개정된 북한의 헌법 제68조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 98년 개정헌법에서는 삭제됨)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통일원, 『‘92년 개정 북한사회주의 헌법』, 1992. 9. 10. ; 고태우,『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민족문화사, 1989. p.42.)
이 헌법에 의거하면, 북한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종교와 관련된 활동을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1998년 9월 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에 “공민은 거주 여행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제75조 조항을 신설함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그 동안 거주지 이동의 제한으로 받아왔던 종교생활의 불이익을 덜게 되었다.
그렇지만 북한의 종교상황은 1992년 북한의 헌법에서 종교관련 조항이 개정된 이후, 1998년 다시 개정한 헌법에서도 거의 변동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헌법에서 볼 때 종교와 관련되어 있는 조항인 제68조를 살펴보면, 북한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북한정권이 운영하는 종교정책을 파악할 수 있다.
북한은 1972년에 헌법을 새로이 개정하면서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은 완성했다고 평가하면서, 정권 수립과 체제 유지에 필요한 종교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곧 종교의 변화를 유도하였고, 각종 법률과 제도를 통해 종교 자유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의 신종교정책은 1990년 이전 통제된 형태의 종교지형 위에서 내적으로 북한식 문화혁명의 ‘종교 개조사업’이라는 실질적 과제와 외적으로 국제외교와 조국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종교교류 유대’라는 실천적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북한불교의 역사
북한에는 남한과 달리 불교의 여러 종파가 없고, 오직「조선불교도연맹」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맹은 1945년 해방이후 한 두 차례에 걸쳐 단체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은 1945년 11월 26일 결성된「북조선불교총연맹」을 모체로 1955년경에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각 시․도위원회를 공식 조직화한 단체이다. 1945년 당시 총연맹은 김세률, 유빈암, 한영규 스님 등 총 16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고 연맹원 375,438명으로 창립되었다.
1945년 11월 26일에는 북조선불교도총연맹과 북조선불교연합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12월 26일 북조선불교도총연맹이라는 단체명을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로 변경하고 공식 창립되었다. 그 당시 북조선불교도총연맹은 김세율, 한춘 스님 등이 불교의 통일단결과 신앙의 자유를 주요한 강령으로 정하고 창립했다. 위원장에 김세율, 부위원장에 한춘, 장상봉, 위원에 김세율, 김해진, 장범석 스님 등 30명으로 구성하였다.
이 연맹은 1948년에 중앙상무위원회를 조직 개편하여, 중앙상무위원으로 김세율(金世律), 유빈암(柳貧庵), 한영규(韓永圭), 박준하(朴俊夏), 이보화(李普和), 정찬종(鄭贊鍾), 신경동(申炅動), 이명교(李明敎), 정동선(鄭東善), 백만호(白萬鎬), 박용화(朴龍化), 이명도(李明道), 공락문(公洛文), 김영저(金永渚), 이필상(李弼相), 박장일(朴章一) 등 총 16명을 선출하였다. 이후 조선불교도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북조선불교도총연맹 조직은 초대 위원장에 김세율 스님을 선출하였으나 1948년 이후 김숭격 스님이 맡았으나 전쟁이 끝나고 1963년부터 2대 안숙용 위원장이 1978년까지 위원장을 지내다가 1980년 9월에 해임되었다.
오늘날 조불련의 역사는 3대 위원장 박태호 대선사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5월 5일부터 위원장을 맡아오던 박태호 대선사가 2005년 11월 11일 갑자기 입적하게 됨에 따라 2006년 5월 8일을 기해 공식 취임한 4대 위원장 유영선 대선사가 2007년 말까지, 그 후 심상진 대선사가 현재 5대 위원장으로 2008년 7월 30일 공식 취임하여 현재까지 조불련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조선 불교통일」과 「교단혁신과 자주독립 촉진」 등을 강령으로 1945년에 창립된 이 연맹의 강령을 살펴보면, ① 전조선불교의 통일단결과 신앙 자유의 확보를 기한다. ② 교단 자체의 혁신을 단행하며 대중을 교화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을 촉진한다. ③ 신민주주의에 입각하여 국내 제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와 보조를 같이하여, 세계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을 기한다.(북조선불교도총연맹 강령 13항) ④ 불타정신을 선양하여 사회사업, 문화사업의 향상 발전을 기한다. ⑤ 불교도의 노동정신을 앙양시켜 국가산업․경제부흥 발전사업을 방조한다.
그리고 1949년에 수정한 조불련의 강령을 살펴보면, “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과 정부 정강을 받들고, 이것을 철저히 실천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며, 조국의 국토 완정과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적극 노력한다. ②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일체 외래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앞잡이인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교단 반역자들과 과감히 싸우며, 일본제국주의의 사상 잔재와 봉건 유습을 철저히 숙청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③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의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 일환으로서 모든 민주과업을 성실히 실천한다. ④ 조국의 국토를 방위하며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민군대에 대하여 극력 원조한다. ⑤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며 다른 민족의 독립을 존중하는 소비에트 국가 및 제 민주주의 국가의 인민들과의 친선을 적극 노력한다. ⑥ 불교도들에게 노동정신을 함양시킴으로써 조국 부강을 수립함으로써 민족문화발전에 기여한다. ⑦ 불교문화를 민주주의 방향으로 이끌며, 시대에 적응한 신교학을 수립함으로써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강령으로 활동해 온 조불련을 보면,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동조 또는 협력하는 조직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불교는 민족문화유산으로 분류되는 사찰, 목석조물, 탱화 등 불교문화재를 다량으로 보유함으로써 북한 정권의 수립 초기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지고 협조관계를 요구받게 된다.
북한에서의 종교는 1950년 6월 26일 김일성 주석이 전쟁 동참에 대한 방송 연설을 한 후 참여하게 된다. 북한불교계도 1950년 7월 15일 평양에서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 등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연합회의를 열고 1,300명이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한다.(정태혁, 『북한의 종교』, 국토통일원, 1979, p.29)
또한 강원도 안변 보현사와 석왕사 등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사찰과 신도들은 당시 화폐로 수 백 만원의 성금과 1만 수천 여점의 각종 위문품을 인민군에 보내고 파괴된 도로와 교량, 철도복구에 참가했다고 한다.(심상진,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 조선불교도연맹중앙위원회, 평양인쇄공장, 2001.p.22.)
기독교계는 1950년 8월 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각 교단 대표와 신자들이 모여 ‘평양시 기독교 교역자 궐기대회’를 열고 “미 제국주의자들의 범죄적 죄악”을 규탄하는 한편으로 여러 날, 여러 장소에서 규탄 기도회와 궐기대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다. 천도교의 경우는 그 당시 교단의 최고지도자로 있던 최동오(남한에서 육사교장, 외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후 북한으로 망명한 최덕신의 부친으로 김일성이 수학한 화성의숙 교장을 지냈으며, 일제시기 광복군 장군을 지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북한 천도교를 대표하면서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이산가족 남한방문단 단장을 맡았던 류미영 위원장의 시아버지이다)는 남하한 인민군을 따라 자진 월북하고 말았다.
그 당시 각기 불교단체들의 활동으로 연합기구적 성격을 띤 조불련이 1960~70년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조직사업으로 참가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활동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1972년 9월 3일 조불련 2대 안숙용 위원장이 담화문을 발표(《로동신문》1972년 9월 4일자)하면서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
그 후 조불련은 1976년 7월 26~28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에 홍화두 부위원장 등 2명 참가의사를 밝혔으나, 일본 정부의 입국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으나 조총련불교도위원회(위원장 장태성)의 지원을 받아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조불련은 1982년 8월 5일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불교도평화의에 처음 참가하여 5.18 광주사태와 10.27법란 등 한국문제를 특별건의문으로 채택하였으며, 1981년 7월 인도·스리랑카·태국·버마·스리랑카 등을 처음 방문하고 국제 교류에도 나섰다.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1980년 9월 27일 전원회의와 11월 25일에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실질적인 체계를 이루고, “전체 불교도들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할 데 대한 새로운 통일강령의 실현을 위하여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자”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실천 목적사업을 설정하였다.(《로동신문》, 1980년 9월 28일과 11월 26일.)
또한 1984년 8월 21일 조불련은 제8차 확대전원회의를 열고 점점 증대하는 불교교류와 종교․문화재관리 활동을 대비해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재선출하고 시도 지부를 결성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했다.(이지범,「불교평론」,2000년 겨울호, p.255.) 그리고 1983년 3월 2일자로 조불련이 ‘남조선 불교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는 등 남한 불교계와 처음으로 접촉을 시도했다.(《로동신문》, 1983년 3월 3일.)
1984년 6월에는 묘향산 보현사의 대웅전과 만세루 등 유적을 복원하고, 고려대장경 역경(번역) 사업을 1980년부터 추진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리고 1985년 12월 26일에는 평양 용화사에서 ‘창립 40주년 기념 중앙보고대회’를 개최하고, 북한의 21개 정당·사회단체 종교단체 공동명의로 핵군축 및 핵전쟁 방지를 위한 원칙적 합의를 발표한 미·소 정상회담의 결과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당과 사회단체로까지 활동을 넓혔다.
1986년 8월에는 북한 종교단체로서는 최초로 외국 종교단체인 소련불교 대표단, 9월에는 중국불교 대표단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국제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1986년 12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제15차 네팔총회에서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WFB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 총회에 WFB 한국본부 임원단이 참가하여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불교가 첫 교류를 가질 기회가 있었으나 서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헤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조불련의 국제교류는 1987년 7월 3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국제불교도평화행진’ 개막 행사로까지 확대되었다. 국내에서는 1988년 1월 10일 보현사에서 ‘조국통일기원법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같은 해 5월 5일 종전(終戰)이후 공식적인 종교행사로 ‘석가탄신일 기념법회’가 묘향산 보현사에 최초로 봉행하였다. 이 사실은 1988년 5월 6일 《평양방송》이 취재 보도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 국제불교도평화행진 개막행사(1987.7.3. 묘향산 보현사). 출처: Cultural Relics Publishing House Pyongyang. DPRK, 1991판)
그 후 김일성 주석이 1989년 1월 1일을 기해 ‘민족통일 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한 다음, 1989년 5월 30일 조선종교인협의회(위원장 최덕신)가 북한종교계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989년 7월 1일~8일까지 평양에서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 개최됨에 따라 그해 7월 3일 조불련은 평양축전에 불교대표 3명을 파견하고 각국의 청년·학생·종교인들과 친선활동 전개하는 한편으로, 평양시 모란봉구역 용화사에 각국에서 참가한 청년·학생 불교도들을 위한 환영의식을 거행했다.
북한 승려교육기관인 ‘불교학원(佛學院)’의 학인스님들은 1990년 7월 중국불교협회의 초청으로 베이징, 상하이 등 여러 도시의 불교유적지 등을 견학하였으며, 1990년 8월 31일에는 조불련 중앙위원회와 각 시·도위원회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묘향산 보현사에서 ‘조국통일기원법회’를 개최하고, “조선불교가 호국불교임을 강조하며, 통일을 통해 지상정토를 세우자”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1991년 1월 23일 평양 용화사를 비롯하여 보현사, 표훈사 등 4대 사찰에서 ‘성도절 및 조국통일기원법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고, 1991년 2월에는 평양 광법사가 다시 복원(준공)됐다.
▲ 통일타종법회(1991년 4월 8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봉행한 통일타종법회 왼쪽 두번째 도안 스님, 세번째 보현사 주지 최형민 스님. 그 오른쪽이 법타 스님이다. 출처: 『평불협 창립 10돌 백서』
분단 46년 만에 1991년 10월 미국 LA에서 남북해외불교지도자 조국통일기원합동법회를 가졌다. 1991년 10월 28일~11월 10일까지 ‘제1차 남북 및 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불교도합동법회’는 조불련·한국불교종단협의회·한불협가 주최·주관한 행사로 미국 LA에서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해외동포불교지도자 70여명이 역사적으로 만난 행사이다. 이 법회에는 한국의 16개 종단대표가 참석하고, 조불련 대표 4명, 일본의 조총련계 조불협 대표 3명과 민단계 한불련 대표 4명, 미국에서 미주평불협과 한불협 등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 1991년 10월 30일 미국 LA 관음사에서 봉행한 제1차 남북 및 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불교도합동법회. 출처: 『평불협 창립 10돌 백서』
이후 1992년 5월 10일을 기해 금강산 표훈사와 묘향산 보현사, 구월산 월정사 등 전국의 사찰에서 석탄절 기념법회를 봉행하고 찬불가 합창 및 탑돌이 등 불교의식을 처음으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일본의 불교 단체들과 친선협회를 결성하는 등 남북 불교교류와 국제 교류활동을 하고 있다.
1991년 미국 LA행사 이후 단절되었던 남북한의 불교교류는 총련 재일본조선 불교도협회(약칭:조불협)의 서태식 회장 주선으로 1994년 6월 2일 동경 진여산장에서 일조불교친선협회 초청으로 같은 기간에 일본을 방문한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과 심상진 서기장(5대 조불련 위원장), 국제부장, 유영선 평양시 부장(4대 조불련 위원장)과 만나면서 다시 시작되었고, 1995년 4월 평불협 특사(평불협미주본부 고문 이정산, 상임부회장 장지현)의 방북을 계기로, 조불련은 1995년 5월 북경 남북불교회의를 시작으로 평불협·불추위·진각종 등 남한 불교계의 초청 및 제3국의 접촉을 잇달아 가졌다. 1997년도부터는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공동발원문을 채택하고, 평양 광법사와 서울 조계사에서 동시법회를 열고 있다.
조불련은 1990년대 이후 국제적인 교류활동 보다 남측의 불교계와의 교류와 협력을 주요사업으로 진행하면서, 1997년 12월 평불협과는 국수공장 설립합의서를 체결하고, 황해도 사리원시에 금강국수공장 설립하였다.
이 시기로부터 남북한의 불교교류는 단순 직접교류에서 협력적인 단계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불교계의 평신도회장으로 불리는 고 윤이상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의 역할은 북한불교의 직접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해방이후 북한에서는 윤이상선생 천도재(1998.11.4. 평양 광법사)가 처음 공개적으로 봉행되었고, 북한스님들은 남한 불교계(평불협미주본부 고문 이정산, 부회장 장지현)와 염불의식을 함께 주관했다.
이후 거의 매년 추모법회를 가지는 한편, 불교신도인 이수자 여사는 1997년과 1998년에 걸쳐 북한 전역의 사찰을 참배하고 북한 당국에 건의한 것을 계기로 북한 스님들은 1999년 상반기부터 묘향산 보현사 스님들의 삭발 및 평상시 법복 착용, 염불의식 광경이 남측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조불련 등 북한불교의 역사에는 1989년 7월에 열린 ‘평양축전’이 하나의 단초를 제공하였으나,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종교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첫째, 2000년 10월 9일~14일까지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참가한 남측 13개 정당․사회단체들과의 공식적으로 교류를 가진 것. 둘째, 2002년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서울을 공식 방문하게 된 것. 셋째, 2003년 3.1민족대회에 참가한 것. 넷째, 개성 영통사와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그리고 다섯째는 교류의 파트너십을 갖은 조계종 총무원장(2005년 법장스님, 2007년 지관스님, 2010년 자승스님)이 현 직함으로 평양을 방문해 교류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분단이후, 1986년 9월 2일~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국제문제위원회(CCIA) 주관으로 남북 기독교인들이 처음 만나 교류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규모가 크고 실질적인 문화 교류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북한주민의 종교적 심성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2000년에 가까워지면서 북한의 종교정책이 서방세계에 적극적으로 개방화 정책을 취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를 대외교류 창구로 활용하려는 의도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북한종교의 현실적 문제는 당국 차원에서나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공식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종교적인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 종교적 심성이 부재한 것이 한계일 수밖에 없다.
종교학자 막스 뭘러(Max Muller)가 “종교가 제도화될 때 특히 그것이 강력한 국가의 종교가 되었을 때 낯선 세속적인 요소가 원래의 토대를 침해하며, 인간의 이해관계는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의 가슴에 품었던 순수성과 단순성을 해친다.”(막스 뭘러,『종교의 과학에 대한 변명』, 젝크 워덴버그,「종교의 연구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 볼륨.1.(Mouton, the Hague, Paris : Mouton & Co. ; 1973), p.88.)고 주장했듯이, 북한 주민들이 현재까지 종교에 매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은 향후 통일시대에 있어 불교계의 근본적인 목적임과 동시에 과제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북한지역의 사찰과 불교문화재가 남아있고, 그리고 1만 명을 넘는 불제자들이 신행생활을 하고 있으며, 북한의 지도자들이 종교와 불교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들로부터 남북한 통합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주 내용: ‘조선불교도연맹’ 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