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29) 하진의 절명
어느 날...
서량 자사(西凉 刺史)로 있는 동탁(董卓)에게 밀서가 날아들었다.
동탁은 일찍이 황건적 토벌 당시에 황보숭과 함께 사령관이었지만,유독 싸움에서 계속 패하여 문책을 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십상시 일파를 교묘하게 매수하여 견책을 면하는 동시에, 황건적 섬멸 후에는 오히려 벼슬이 높아지기까지 하였다.
그런 덕택에 지금은 서량 자사로서 이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동탁은 군사를 거느리고 시급히 낙양으로 올라오라는 하진의 밀서를 받자 혼자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이제야 천하를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 왔구나! )
동탁은 즉시,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둘째 사위인 중랑장 우보(中郞將 牛輔)를 시켜 서량을 지키게 하고, 휘하의 모든
장수를 총동원하여 급히 낙양으로 출발하였다.
동탁이 대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어사 정태(侍御史 鄭泰)가 깜짝 놀라 하진에게 달려왔다.
"장군님! 서랑에 있는 동탁에게도 군사를 보내라는 밀서를 보내셨습니까? "
"응! 보냈네! "
"어쩌자고 간교한 기회주의자인 동탁을 낙양으로 부르셨습니까? 그 자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게 무슨 걱정인가? 그렇게 매사에 겁이 많아 가지고서야 어찌 천하 대사를 도모한단 말인가? "
하진은 오히려 세상을 다 아는 듯이 큰소리만 치고 있었다.
정태는 어이가 없어 한숨만 쉬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지장 노식(智將 盧植)이 말했다.
"나는 동탁이란 인물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자는 간교한 사람이오. 그자가 궁중에 들어오면 반드시 환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외다."
그래도 하진은 고개를 가로젖는다.
"그대들 처럼 의심이 많아 가지고서야 천하의 영웅들을 어떻게 다룬 단 말이오? 모든 일은 염려 말고 내게 맡기시오."
"....."
노식과 정태는 어이가 없어, 아연할 뿐이었다.
한번 그런 일이 있자, 노식과 정태는 하진이란 인물에 환멸이 느껴져서 벼슬을 버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칩거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뜻있는 유능한 고관들은 제각기 벼슬을 버리고 고향등으로 낙향해 버리고 말았으니, 하진의 주위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 동탁의 군사들은 낙양에서 멀지 않은 승지라는 곳에 이르렀고, 하진은 사람을 보내어 동탁과 그의 군사들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동탁의 군사들은 그곳에 진을 치고 눌러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동탁의 맏사위아자 그의 모사(謨士)인 이유(李儒)의 계교에 따라, 동탁은 군사들을 하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도성내의 동정만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장양을 비롯한 궁중에 남아 있는 십상시들은 하진의 책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네들이 먼저 선수를 쓰지 않았다가는 모두가 전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시급히 수하 병사들을 무기를 갖추게 시켜, 장락궁 가덕문(長樂宮 嘉德門)안에 매복시켜 놓고, 하 태후를 찾아가 울면서 호소하였다.
"태후 마마! 저희들은 하 장군님 때문에 꼼짝 없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희들을 살려 주시려거든, 하 장군님을 황궁으로 불러들이셔서, 태후 마마께서 저희들을 죽이지 말라는 분부를 직접 내려 주시옵소서."
고지식한 하 태후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즉석에서 하진을 입궐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하진이 태후의 부르심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주부(主簿) 진림이 말린다.
"태후의 부르심은 아무래도 십상시들의 꼬임수 같으니, 장군께서는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진은 이런 경우일수록 큰소리를 치기 좋아하는 위인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마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원소가 말한다.
"십상시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난 판국인데, 장군님은 어째서 위태롭게 황궁에 들어가시려 합니까? 기어이 들어가시려거든 십상시들을 먼저 문밖으로 불러내고 나서 들어가십시오."
그 소리에 , 하진은 크게 웃는다.
"하하하, 궁중의 병폐를 다스려 천하를 호령하는 나에게, 십상시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만약 내가 십상시가 무서워 입궐을 하지않았다는 소문이 한번 퍼져 보게! 그러면 천하의 영웅들이 나를 뭘로 알겠나?"
웬일인지 하진은 이날따라 유난스럽게 큰소리를 쳤다.
이렇게 하진이 기어코 입궐을 고집하므로 원소와 조조는 정병 오백 명을 거느리고 하진을 호위하며 황궁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대궐 문앞에서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께서 계시는 곳이니, 군대를 대궐 안으로 끌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진은 호위병을 남겨 둔 채로 대장군의 위풍을 뽐내며 당당하게 문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덕문 안에 이르렀을 때, 장양과 단규가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 걸음으로 마주 나오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하진을 꾸짖는다.
"하진 이놈 듣거라! 네 본시 백정질이나 해먹던 놈이 오늘날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 누구의 덕인 줄 아느냐?
너의 누이동생을 영제에게 추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거늘, 네가 우리의 은혜를 몰라보고 도리어 우리를 해치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있단 말이냐!"
하진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얼른 뒤돌아 도망갈 길을 찾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궁문은 이미 첩첩이 닫혀 있는 데다가, 미리 매복해 있던 십상시의 군사들이 일순, 파도와 같이 덤벼드는 바람에 하진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목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누이동생의 후광으로 일약 대장군에 자리에 올랐던 하진은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후환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못 했던 탓에, 그가 죽여 없애려 했던 십상시에게 어이없이 절명하고 말았으니, 하진이야말로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영웅 호걸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