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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흑백사의 출현 이때 비류신은 혼수상태에 있으면서 한편으로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칠 일 간이나 이곳에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 황량한 묘지에 날씬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의 예리한 눈초리는 곧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비류신을 발견했다. 그러자 몹시 놀란 듯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비류신의 등 뒤로 사뿐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대뜸 자기 등에 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비류신도 이때 누군가 등 뒤에서 장검을 빼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이때 뒤에서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지 말아요! 그랬다간 당장 죽을 줄 알아요!” 비류신은 갑자기 등 뒤 요혈에 가벼운 통증을 느꼈다. 그러자 곧 한 가닥 열류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대뜸 그것이 피라는 것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냉랭히 물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인간 세계요,아니면 지옥이오?” 등 뒤의 사람은 그의 기묘한 물음에 어리둥절했다. 비류신이 혼미 속에서 깨어났을 때 마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였다. 주변이 땅거미가 질 무렵이라 어둑어둑한 것을 보고 죽음 속의 광경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비류신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열심히 살폈다. 거기에는 낯익은 무덤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요 아니면 귀신이요?” 등 뒤에서 별안간 은방울 굴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음산해서 그런지 그 웃음소리도 한 가닥 귀기가 서려있는 듯이 느껴졌다. 비류신은 등 뒤에 있는 것이 여자 귀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상시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오싹하도록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저승의 한 친구 같은 생각이 들어 별로 무서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등 뒤 사람은 다시 한바탕 웃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여기는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이에요. 나는 사람이면서 귀신도 되지요.” 비류신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잡으러 왔구려.” 그리고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중상을 입어 죽어가는 몸이오. 우리는 평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나를 죽이려 하오?” 뒤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죽어서도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죽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당신을 죽이려는 이유는 바로 당신 품속에 있는 잔금섭혼신편 때문이에요.” 비류신은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그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생에 대한 애착이 다시 용솟음쳤다. 뒤에서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비류신은 가볍게 한숨 쉬며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는 퍽 생소하구려. 누군지 알려 줄 수 없소? 어떻게 내 몸에 잔금섭혼신편이 있는 것을 알았소?” 비류신은 점차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진기를 끌어올리려고 애썼지만 허기 때문에 중도에서 갑자기 중단되고 말았다. 등 뒤의 여자는 비류신의 말을 듣자 기쁜 듯이 은방울 같은 목소리로 웃었다. “정말 그토록 얻기 힘든 그 채찍을 이처럼 손쉽게 얻게 되다니… …” 비류신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등 뒤의 여자는 비꼬듯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얼간이에요. 그러니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본래 당신이 소대호의 제자인 비류신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그러나 내가 슬쩍 유도하는 말에 당신은 대뜸 걸려들었어요. 이젠 됐어요. 잔금섭혼신편은 틀림없이 내 것이 됐군요.”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계략에 넘어간 것을 알고 아차 싶었다. “나는 이미 죽을 사람이오. 내게 먹을 것 좀 줄 수 없소? 죽어도 배부른 귀신이 되게끔 말이오.” 비류신은 자기가 진기를 끌어올릴 수 없는 것은 허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느껴졌다. 지금 당장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죽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냉정하고 오만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그는 채찍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대가 음식을 먹을 기회를 준다면 곧 원기를 회복할 수 있으며,다시 기회를 봐서 처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등 뒤의 여자도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듣자 쌀쌀하게 웃었다. “나는 잔금섭혼신편이 필요하지, 당신의 목숨은 필요 없어요. 채찍을 내게 준 다음 음식을 먹어도 늦지 않을 거예요.” 비류신은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은 채 억지로 허기를 참았다. 그리고 계속 운기조식을 해 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등 뒤의 여자는 재촉을 했다. “어서 채찍을 내게 주시오.” 비류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이미 내게 이 채찍을 준 사람 앞에서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채찍을 남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 했소.당신이 이것을 가지려거든 나를 먼저 죽인 다음 맘대로 가져가시오.” 등 뒤의 여자는 비류신의 당돌한 말에 냉소를 쳤다. “당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니 그렇다면 당신을 먼저 죽이는 수밖에!” 말과 동시에 비류신은 등에 매우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마 그 여자가 등에 대고 있던 장검에다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비류신이 황망히 소리쳤다. “잠깐!” 등 뒤에서 싸늘하게 반문이 터졌다. “왜? 죽기가 싫은 가요?” 비류신은 매우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죽음 같은 것은 두렵지 않소. 그러나 이렇게 죽기는 싫소… …” 등 뒤의 여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죽겠단 말이오?” 비류신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죽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고, 나는 무공을 하는 사람이니만큼 당연히 영웅적인 행동으로 힘껏 싸우다 죽어야 하오.” 뒤의 여자는 몹시 화난 모양으로 냉랭히 물었다. “당신이 내게 도전하는 거예요?”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영웅은 죽는 한이 있어도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당신이 만약 비겁하게 나를 죽인다면 당신은 응당 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옳을 것이오.” 비류신은 이쯤 되고 보면 상대방이 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등 뒤의 여자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비류신! 당신은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의 무공과 황천선구의 무공을 비교할 때 어느 쪽 무공이 높다고 생각해요?” 비류신은 이 말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당신은… 황천선구… …?” 등 뒤의 여자는 냉랭히 웃었다. “내가 만약 황천선구라면 당신은 벌써 뼈다귀도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오.” 비류신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내가 누구냐고 묻기 전에 먼저 누구의 무공이 더 고강한 지 어서 대답하시오.” 비류신은 묵묵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것은… 좀… 말하기 곤란하오.” 그녀는 대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소대호의 무공이 못하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비류신은 화를 벌컥 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시오!” 등 뒤의 여자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큰소리치지 말아요! 이 아가씨께서는 황천선구의 수제자란 말이오. 바로 지옥혈녀 흑백사예요. 지금 당신이 살고 싶다면 어서 채찍을 내게 주시오. 그리고 다시 무공으로 내 손에 들어온 채찍을 뺏어가도록 해요. 만약 끝까지 내주지 않겠다면 나는 무정하게 당신을 단 칼에 찔러 죽이겠소. 어서 마음대로 정하시오.” 비류신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생각했다. ‘내가 만약 채찍을 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나를 단번에 찔러 죽일 것이다… …” 그는 주저하기 시작했다. 등 뒤의 지옥혈녀 흑백사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째서 결정을 하지 못하지?” 비류신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것은 극히 어려운 문제인데 어찌 간단히 대답할 수 있겠소.” 그녀는 마침내 화를 냈다. “만일 일 년 동안 생각해야 한다면 나보고 그 일 년을 꼬박 기다리란 말이오? 우리 이렇게 합시다. 당신은 역시 죽는 편이 좋겠어요. 당신이 죽은 후 내가 무덤을 아름답게 잘 꾸며 주겠어요. 그리고 매년 청명 때마다 잔디를 심고 한바탕 통곡을 해서 당신의 적막한 심령을 위로해 주겠어요. 어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죽어도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자아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호호호.” 비류신은 가슴이 뜨끔해 급히 외쳤다. “잠깐! 아가씨, 나는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소.” 흑백사는 검을 거두고 피식 웃었다. “죽기가 정말 싫은 모양이군요? 그러고도 무슨 죽음을 두려워 않는 영웅이라고 큰소리치지요? 차라리 짐승만도 못하군요.” 비류신이 그녀의 비웃음에 변명했다. “결코 죽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요. 첫째는 채찍을 뺏기고 싶지 않고, 둘째는 나에게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이오.” 흑백사는 까르르 웃었다. “당신은 아직 처자와 작별 인사를 못했다든가 아니면 혹시 애인과… …” 비류신은 싸늘하게 꾸짖었다. “허튼 소리 마시오! 나에게는 아직 처자도 없고 애인도 없소.” 흑백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퍽 외로운 사람이군요?” 비류신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그거야 당신에게 처자가 없고 애인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요? 사실 당신 같은 남자에겐 반드시 많은 여자가 따라야 하는 것 아닌 가요? 내 말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처럼 철석같은 심장을 가진 사나이는 빨리 죽어야 해요. 하루라도 더 산다면 많은 소녀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아니면 실연을 당할 것이니 역시 당신은 죽어야겠어요.” 비류신은 이 말을 듣자 흑백사가 매우 야만스럽기는 하나 천진하고 재미있는 여인이라고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퍽 아름답고 귀엽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류신이 불쑥 물었다. “내 당신을 돌아다 봐도 되겠소?” 흑백사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안되오! 그러나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돌아다보세요.” 비류신이 힘없이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채찍을 먼저 주겠소. 하지만 당신이 곧 달아나면 어떻게 하지?” 흑백사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달아나면 그만이지 뭘 어떻게 해요?” 비류신이 화난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비겁한 수단으로 채찍만 뺏고는 달아날 작정이군. 그것이 어찌 정당한 방법이오?” 흑백사도 야무지게 대꾸했다. “왜 이래요? 내가 달아나기라도 했나요?” “아직 달아나진 않았으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걱정이 되지 않소!” 흑백사가 즉시 말을 받았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나 흑백사는 그렇게 내뱉은 말에 대해 신용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더구나 당신의 무공은 나보다 별로 나을 것 같지 않으니까… …” 비류신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파 기운을 차릴 힘이 없소. 내 이 채찍을 줄 테니 나에게 음식을 배불리 먹게 해주시오. 그런 후에 서로 겨루어 누가 채찍을 차지할 것인지 결정을 합시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녀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비류신은 기진맥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당신의 말을 믿겠소.” 그러나 갑자기 흑백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왼쪽 팔을 누군가에게 잡혔고 천기요혈(天機要穴)마저 눌렸던 것이다. 비류신의 귓가에 몹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매미를 덮친 범아제비 뒤에는 참새가 노리고 있다는 격으로, 혹 아가씨가 저 사람의 잔금섭혼신편을 가지고 있다면 내게 맡기시오.” 비류신은 이때 품속에서 막 채찍을 꺼내려고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 때문에 곧 중지했다. 그리고 품속을 뒤질 때 갑자기 생각난 비상용으로 간직했던 마른 음식을 허겁지겁 입 속에 넣었다. 그는 뜻밖의 음식에 기뻐했다. 그것을 본 흑백사가 황급히 소리쳤다. “비류신, 먹어서는 안돼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류신은 또 다시 아픔을 느꼈다. 곧 한 줄기의 피가 등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는 엉겁결에 입에 들어있는 음식을 꿀꺽 삼켜 버렸다. 흑백사는 화를 발끈 냈다. “청풍명사, 당신의 수법은 너무 교활하고 교묘하군요!” 흑백사의 왼쪽 팔목 맥문과 등의 요혈을 누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청풍명사 청룡백호였다. 그는 평소 자기의 무공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는 데도 강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흑백 양도의 사람들과 골고루 사귀고 있었다. 비류신은 등 뒤에 나타난 사람이 청풍명사라는 것을 알자 몹시 놀랐다. 당시 강호 무림의 인물들은 확실히 교묘하고 종잡을 수 없으며 그 기술이 귀신같았다. 그들의 출현은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는 것 같아 도저히 방비할 도리가 없었다. 청풍명사는 가볍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말 한번 잘 했군! 하지만 당신의 요사스러운 점도 아마 나 못지않은 것이오.” 흑백사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무슨 말이오? 내가 약속이라도 어겼단 말이오?” 청풍명사는 여전히 웃는 낯을 풀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기 곤란 하군…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변하는 것이어서 추측하기 어렵지.” 흑백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들었다. “옛날 나를 믿을 수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이 소식을 내게 알려줬나요? 왜 채찍을 독점하려는 거였지요?” 청풍명사는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아가씨, 걱정 마시오. 나는 여전히 옛날의 생각대로 채찍집만 가지고 채찍은 수고한 대가로 당신에게 드리겠소.” 비류신은 이때 다시 마른 음식을 한 주먹 꺼내서 입 속에 털어 넣었다. 흑백사가 또 다시 소리쳤다. “왜 그렇게 자꾸 먹지? 또 한 번만 먹었다간 이 장검으로 배를 갈라 버리겠소.” 그녀는 다시 날카로운 검 끝으로 그의 등을 쿡 찔렀다. 비류신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먹을 것을 갖고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한 번 먹을 때마다 콕콕 찌르니 이런 고역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계집애, 나를 이렇게 못 살게 구니 좀 있다가 내 너를 반쯤 죽여 버리겠다.’ 청풍명사가 흑백사에게 차갑게 쏘아 붙였다. “함부로 망동하면 정말 죽여 버릴 테요.” 그러나 흑백사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신의 무공이 나보다 얼마나 더 낫다고 큰소리치는 것이오.” 청풍명사는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소. 꼭 알맞은 적수가 되겠지… …” 흑백사가 다그쳐 물었다. “그런 줄 알면서 어찌 나를 단번에 죽이겠다고 했지요?” 청풍명사의 안색이 대뜸 험악하게 변했다. “믿을 수 없다면 한 번 시험해 볼까.” 흑백사가 갑자기 물었다. “당신의 무공은 비류신보다 얼마나 더 센가요?” 청풍명사는 건성으로 웃더니 호통 쳤다. “망할 계집애!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야? 나는 하루 종일 오리사냥을 해도 오리에게 눈알을 뺏기지는 않아! 나 하고 한 번 겨루고 싶다면 내가 악독하게 나온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는 그녀를 누르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흑백사가 앙칼지게 외쳤다. “더 이상 힘을 주어 나를 괴롭힌다면 비류신을 놔버리겠소!”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묘하게 됐군!’ 그는 두 손으로 마른 음식을 움켜쥐고 잽싸게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풍명사는 그 말에 흠칫했다. 그는 곧 힘을 늦추고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을 놔주면 당신은 살 생각을 버려야 해. 자! 어서 채찍을 내놓으라고 재촉이나 하시오.” 비류신은 계속 먹어치웠다. 그러자 그는 완전히 허기를 면하게 되었다. 급히 운기조식을 하자 돌연 한 가닥 진기가 단전으로부터 온몸에 분수같이 솟아올라 골고루 퍼졌다. 샘물 같이 솟아오른 진기는 열두 요혈을 통과하여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으로 스며들었다. 전신의 피는 그 진기를 따라 들끓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마음속에 초조와 불안이 일었다. 이때 흑백사가 꾸짖듯 소리쳤다. “비류신! 빨리 채찍을 내놓지 않겠소?” 비류신은 예리한 검 끝이 등을 찌르고 있어 몹시 아팠다. 그러나 몸속에서 진기와 피가 강렬히 들끓고 있었으므로 큰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진기가 온몸에 충만해지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이때 장검은 또 다시 냉혹하고 사정없이 그의 등을 콕콕 찔렀다. 비류신은 흥! 코웃음을 치고 나서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청풍명사가 그 말을 받고 나섰다. “비류신! 시치미 떼지 말고 빨리 내놓게!” 비류신은 딴전을 피웠다. “무엇을 내놓으란 말이오?” 청풍명사는 사납게 소리쳤다. “잔금섭혼신편!!” 비류신은 갑자기 앙천대소했다. 그 웃음소리는 우렁차게 퍼져 구름을 뚫을 듯했으며, 골짜기에 메아리쳐 울렸다. 그의 웃음 속에 무한한 기쁨과 비할 데 없는 격동이 서려 있었다. 흑백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미친 듯 웃지요?” 비류신은 힘차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에 스스로 경축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들 두 사람이 곧 죽게 될 것이 기뻐서 그렇소.” 흑백사는 다부지게 쏘아 붙였다.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니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지?” 그녀는 즉시 들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 비류신의 왼쪽 어깨의 마혈(麻穴)을 탁 쳤다. 비류신은 왼쪽 어깨를 비스듬히 얻어맞고 부지중에 신음소리를 냈다. 견정혈(肩井穴)은 인체의 서른여섯 곳 대혈 중 일곱 마혈 중의 하나이다. 비류신은 진기를 가다듬고 출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흑백사에게 선수를 뺏기어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가다듬었던 힘은 즉시 상실되었고 땅에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정신이 말짱 하였으므로 주위의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흑백사의 신법은 지극히 빨랐다. 그녀는 검신을 비스듬히 하여 비류신의 견정혈을 번개같이 내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 왼손에 힘을 주어 팔꿈치로 뒤에 있는 청풍명사를 힘껏 쳤다. 청풍명사는 흑백사가 비류신을 견제하고 동시에 또한 자기를 공격할 줄 생각도 못했었다. 또한 흑백사의 동작은 비호같아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아귀가 한 가닥 장력으로 튕겨지고 말았다. 청풍명사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흑백사의 천기요혈을 누르고 있던 오른손에 더 한층 내력을 가했다. 그러나 자기보다 상대는 더 빨랐다. 흑백사는 청풍명사가 갑자기 습격해 올 것을 미리 짐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잽싸게 몸을 날려 청풍명사가 경력을 뻗치기 전에 왼쪽으로 피했다. 청풍명사의 날카로운 장력은 곧바로 비류신의 뒤통수로 날았다. 비류신은 지금 혈도를 찔려 있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설사 그가 자유로운 몸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무시무시한 경력에 격중당한다면 당장 죽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혈도를 찔린 비류신은 도리 없이 흑백사 대신 청풍명사의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백사는 역시 비범한 사람이다. 그녀는 몸을 날려 번개처럼 피신할 때 오른발로 비류신을 힘껏 걷어찼다. 비류신은 걷어차이며 일 장 가량이나 날아갔다. 그녀에게 걷어차이는 순간 제지당했던 견정혈이 즉시 풀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묘지를 휩쓸고 몰아오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재빨리 몸을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흑백사와 청풍명사는 맞붙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이 서로 격출하는 절묘한 일장, 일초는 매 초식마다 하늘을 가를 듯 격렬한 경풍을 발하고 있었다. 이때 흑백사는 장검을 이미 검집에 꽂고 빈손으로 적과 맞서서 싸우고 있었다. 청풍명사는 얼굴에 냉소를 띤 채 왼쪽 손가락을 쫙 펴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곧바로 흑백사의 복결혈(腹結穴)을 찌르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머리 요혈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흑백사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몸을 약간 흔들며 육 척 멀리 날아갔다. 그러나 발이 채 땅에 닿기 전에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지르며 다시 비호같이 덤벼들었다. 그녀의 피하고 덤벼드는 신법은 신속하기가 마치 전광석화와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공격과 반격이 동일한 한 동작처럼 눈부시게 빨랐다.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돌아오면서 쌍장을 동시에 발동하여 일월쟁휘(日月爭煇)의 초식으로 곧바로 청풍명사에게 덮쳐왔다. 흑백사는 비록 여성이지만 장력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또한 내가의 상승 불혈수법(拂穴手法)을 일신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풍명사도 그녀를 소홀히 대하지 못하고 감히 가까이 맞서지 못했다. 그는 몸을 질풍같이 돌려 흑백사가 맹렬히 덮쳐오는 틈을 타서 그녀의 뒤로 돌았다. 여전히 다섯 손가락을 쫙 펴서 그녀의 뒤통수를 찌르려 했다. 흑백사는 재빨리 부감창해(府瞰滄海)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녀는 상반신을 구부려 제비같이 날쌔게 그의 일격을 피했다. 그리고 또 다시 교묘하게 몸을 돌려 오른쪽 손과 왼쪽 손가락으로 청풍명사의 가슴과 복부의 장대(壯坮)와 신궐(神闕)의 두 혈도를 습격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이 신속하고 날카로운 격투를 본 비류신은 그들의 무공이 한결같이 비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놀랄 만한 상승의 무학이었던 것이다. 무학의 길은 실로 그 높고 깊음을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지금 더욱 절실히 느꼈다. 비류신은 한편 그들의 격전을 구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시 열심히 품에 지녔던 마른 음식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잠깐 동안에 흑백사와 청풍명사는 벌써 사오십 초를 겨루었다. 그들의 무공은 싸울수록 더욱 날카롭고 더욱 사나워 그 속도는 피차를 가려내기 힘들 만큼 빨랐다. 비류신은 암암리에 힘을 모으고 있다가 마지막 판에 이르렀을 때 적을 격파시키리라 결심했다. 그는 배불리 먹고 난 후 눈을 돌려 주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그러자 대뜸 오른쪽 사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무덤 위에 흰 옷을 입은 깡마른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밤중 희미한 별빛 아래 비류신의 눈이 아무리 예리하다고 해도 그 사람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비류신은 다만 무덤 위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흰 옷의 윤곽만을 알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