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二十九 章 아들과의 대결
울창하게 우거진 산길을 말을 탄 무사 셋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온 듯 입고 있는 장삼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이는 흑의무사가 우두머리인 듯한 회의사내에게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오늘 중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긴 글렀는데 좀 쉬었다 갑시다, 형님!" 회의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좋은 생각이다. 마침 배도 출출하던 참인데."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만, 이게 무슨 냄새지?" 흑의무사와 또 다른 백의무사도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킁킁대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의 콧속으로도 아주 기막힌 냄새가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글쎄요, 기막히게 구수한 걸로 봐선 뭔가 굽는 냄새 같은데요." 코를 벌름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갑자기 눈을 확 부릅떴다. 멀찌감치 떨어진 숲의 공터에 산돼지를 모닥불에 걸어놓고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눈앞이 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는 바로 이화가 아닌가? 이화는 사내들이 군침을 삼키며 음침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맛있게 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회의무사는 횡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화가 있는 공터를 가리켰다. "그, 그러니까 지금 저기 보이는 저것이……." 흑의무사가 재빨리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노루 아니면 멧돼지 통구이가 분명합니다." 회의무사는 음침하게 웃었다. "통구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멍청한 놈! 하기야 너희 같은 잡새들이 어찌 황새의 깊은 뜻을 알리오" 그의 시선은 멧돼지 통구이를 맛있게 뜯고 있는 아리따운 이화의 몸매를 훑었다. 이제 십 오륙 세의 나이로 성장한 이화는 성숙한 몸매에 비록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놀랍도록 빼어난 미색이었다. 바삭바삭! 이화는 한창 맛있게 고기를 뜯다가 발자국 소리를 듣자 입 안에 든 고기를 얼른 삼켰다. 그리곤 주위에 널려 있는 뼈다귀들을 재빨리 한쪽으로 치우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옆으로 손을 쓱 내밀며 말했다. "성아. 어서 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은 털투성이의 투박한 손이 아닌가? 그 손은 결코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의 정겨운 손이 아니었다. 이화는 그제야 고개를 쳐들고는 눈앞에서 징그러운 음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회의사내와 그 일행들을 발견하곤 질겁했다. "어맛!" 회의사내는 이화의 보드랍고 예쁜 손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아이고 요놈의 손, 귀엽기도 해라." 이화는 매우 당황하여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서 이 손놓으세요." "흐흐흐, 멀리서 볼 때보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미인이시군! 몸매는 아예 예술이고 말이야." 이화는 파랗게 질리며 사색이 되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회의무사는 음산한 눈빛으로 이화를 협박했다. "피차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얌전히 굴어. 수틀리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흑의무사도 능글거리며 거들었다. "명심해 두라고 아가씨, 우리 형님은 한번 한다면 두 번도 하시는 분이니까." 이들의 표정에서 이화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는 공포로 인해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회의사내는 비 맞은 참새 마냥 오돌오돌 떨고 있는 이화를 와락 끌어안으며 음소를 발했다. "알아들었으면 냉큼 안길 일이지 뭘 꾸물거리나?" 이화는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여 극렬하게 발버둥쳤다.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흐흐흐……. 고년 보기보단 꽤 앙칼진 데가 있군!" 회의사내는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한쪽 구석에 가서 고기나 뜯고 있어!" 흑의무사는 멧돼지 통구이를 들고서는 숲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후, 수고하십쇼, 형님! 하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십쇼!" 백의무사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매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난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좋은데!" 퍼퍽! 순간 숲 쪽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은 미간에 거센 충격을 받으며 두 눈을 홱 까뒤집었다. 그리고는 잠시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숨통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회의무사는 하얗게 질려 있는 이화의 꽃잎 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서서히 갖다대었다. "자, 이젠 보는 사람도 없으니 내숭은 그만 떨고……." 퍽! 이번에는 그의 뒤통수에 거센 충격이 가해졌다. 충격으로 눈이 흡떠진 회의무사의 뒤통수에는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회의무사는 잡고 있던 이화의 몸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더니 땅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처박았다. 이화는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 누가……?" 사방을 둘러보던 이화가 흠칫했다. 저만치 떨어진 어두컴컴한 숲 속에 흑의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챙이 넓은 흑립에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고 등에는 검은색 검을 메고 있었다. 한마디로 검은색 일색인 여인이었다. 이화는 여인을 쳐다보며 밝게 웃었다. "여협께서 절 구해주셨군요? 그렇죠?" "여자 몸으로 혼자 있을 곳이 아니다. 어서 산을 내려가도록 해." 그런데 이 목소리와 면사 속으로 희미하게 내비치는 모습은 바로 연해월이 아닌가? 그녀가 어찌 이런 모습으로 강호를 횡행하고 있단 말인가? "아, 아네요. 실은 동행이 있는데 물을 뜨러 자리를 비웠어요." "이화!" 이때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화는 반색을 하며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 사람이에요, 이젠 안심하셔도!" 다시 고개를 돌려 면사여인을 바라보던 이화는 말끝을 흐리며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면사여인이 오간 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로 사라지셨지?" "이화!" 한 줄기 흑영이 숲에서 쏘아져 나와 이화의 곁에 내려섰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어느덧 미소년으로 성장한 남궁진성이었다.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이화!" 이화는 발치에 죽어 있는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번만 물 뜨러 갔다간 귀신이 업어가도 모르겠네." 남궁진성은 놀란 얼굴로 시체들을 휘둘러보았다. "이자들이 너한테 몹쓸 짓을 했구나, 그렇지?"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몹쓸 짓을 당했으면 내가 죽지 이자들이 왜 죽어?" 남궁진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말되네." "어떤 여협이 나타나서 구해주고 가셨어. 그분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여협? 어떤 분인데?" 이화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나도 못 봤어. 네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존함만이라도 알아두는 건데." 남궁진성은 이화가 별탈이 없다고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놈의 강호는 도무지 한시도 마음놓을 겨를이 없다니까." 중얼거리는 남궁진성의 코앞에 이화는 손을 바짝 내밀었다. 남궁진성은 흠칫하며 이화의 손을 가리켰다. "뭐야?" "물 뜨러 간 거 아니었어?" 그제야 남궁진성은 당황해했다. "그게 그러니까, 비명소리 때문에 급히 오느라 물주머니를……." 이화는 짐짓 표독스런 표정을 짓고는 남궁진성을 노려보았다. 정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면사여인이 바로 남궁진성의 어머니인 연해월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냥 스쳐보내고 말았다. *** 컹컹컹!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연해월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둥근 만월이 천공의 중앙에 떠 있었다. '결국 여기를 다시 오고 말았어.' 지금 그녀가 묵고 있는 곳은 소주의 청하객잔(靑河客棧)이란 곳이다. 위지강과 맨 처음 만나기로 약속했었던 바로 북경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보름……!' 연해월은 쓸쓸한 얼굴로 창문을 다시 닫고선 침상으로 다가와 그대로 엎어졌다. 그녀의 뇌리로 그 옛날 위지강과 보냈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이때 창문 밖에서 술 취한 취객이 부르는 구성진 가락이 들려왔다. 연해월은 눈을 번쩍 뜨며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정유?" 그녀는 재빨리 창문가로 향했다. 밤거리의 저쪽, 십여 명의 호위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화려한 교자 위에 앉아 기생을 양쪽에 끼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사내가 있었다. 무리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목청껏 노래를 뽑아대는 사내의 모습이 달빛 아래 확연히 드러났다. 순간 연해월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무정유를 목청껏 불러대는 사내는 다름아닌 남궁사였던 것이다. "멋있어요! 아주 일류명창이라구요!" "역시 대인님은 멋쟁이세요!" 남궁사의 가슴에 안겨 있던 기생들이 손뼉을 치며 아양을 떨었다. "핫하하하, 좋아 좋아! 나에게는 호랑이 같은 마누라도 없으니 마음껏 마시고 놀아보자꾸나." 고개를 젖히고 마구 대소를 터트리던 남궁사가 일순 흠칫했다. 객잔 이층 창가에 쓸쓸히 서 있는 연해월을 발견한 것이다. 남궁사의 동공이 있는 대로 확대되면서 연해월의 모습이 환영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남궁사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젠장, 내가 취하긴 취한 모양이군. 헛것이 다 보이다니!" 문득 고개를 가로젓던 남궁사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는 취기가 싹 달아난 얼굴로 다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객잔의 창문은 닫힌 후였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남궁사는 흥분된 기색으로 창문을 향해 솟구치며 외쳤다. "잠시 기다리거라." 순식간에 남궁사의 신형은 창문을 뚫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서 좌우를 살펴보던 남궁사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월!" 그는 우울한 얼굴로 탁자에 앉아 있는 연해월을 떨리는 음성으로 불렀다. 만성객잔은 많은 손님들로 매우 시끌벅적하고 혼잡했다. 오후인지라 뒤늦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과 벌써부터 한잔 술이 동한 한량들로 객잔 안은 초만원이었다. 객잔 안의 구석진 탁자에는 서너 명의 무사들이 입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도 남도맹에 가입하려고 왔단 말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두고 보라고! 내일 이맘때쯤이면 이 황달추(黃達酋)도 당당하게 남도맹의 식구가 되어 있을 테니까." "쯧쯧, 꼴뚜기가 뛰면 뭐도 뛴다더니만……. 이 사람이 그 짝이네그려." "누가 아니래? 요즘 가뜩이나 형편도 어려운데 조의금이나 준비해야 되는 건 아닌지 몰라." "악담을 해라, 악담을!" 이때 객잔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두 사람이 급하게 들어섰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한 사람은 죽편을 땅에 꽂아놓은 듯 매우 마른 체구에 홍의(紅衣)를 걸쳤고 다른 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공처럼 둥근 체구에 남의(藍衣)를 걸치고 있었다. 한창 떠들어대던 무사들이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기겁을 했다. "나… 남홍쌍사(藍紅雙邪)!" "맙소사,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저 노마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홍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사를 향해 말했다. "헉… 헉……!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죽자고 달려왔으니 여기까진 못 쫓아오겠지?" 남사도 숨을 헐떡이며 근처의 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 모르니까 대충 목만 축이고 가세." 그는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놈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한시바삐 남도맹에 가입하는 수밖에는 없어." 홍사도 마주앉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허긴 제깐 놈이 아무리 돈에 눈이 뒤집혀도 남도맹까지 찾아올 수는 없을 테지."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십 년 전에 강호를 좁다 하고 누비고 다니던 이들을 이렇듯 고양이 쥐 몰 듯하는 인물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남도맹이 아니라 설사 지옥이라도 내 손을 벗어날 수는 없소." 이때 저쪽 구석진 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흑의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인물, 위지강이었다. 남홍쌍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맙소사!" "우리보다 한발 앞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위지강은 그들의 경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남홍쌍사는 바짝 긴장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떡할까?" "어떡하고 말게 뭐 있어! 이럴 땐 그냥 튀어야지!" 두 사람은 동시에 객잔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은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어느새 한 손에 술잔을 든 위지강이 입구를 막아선 채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남사는 공포로 질린 얼굴로 위지강에게 사정했다. "우, 우리 협상하세! 얼마를 주면 우리를 못 본 척해 줄 수 있겠나?" 홍사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매달렸다. "우리한테 걸린 현상금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겠네! 어때, 그 정도면 솔깃한 제안 아닌가?" 그러나 위지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술잔을 두 사람에게 척 내밀며 무심하게 말했다. "저승길에 술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시시오." 남홍쌍사는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 나머지 동시에 검을 뽑아들고는 득달같이 위지강을 덮쳤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네놈 재간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도 남홍쌍사의 명성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마!" 패액! 팩! 그들의 검날이 위지강의 정수리와 옆구리를 향해 무섭게 짓쳐들었다. 그러나 위지강은 매섭게 다가오는 검날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객잔 안의 무사들과 손님들은 그런 위지강을 쳐다보며 기겁을 했다. "저, 저런."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위지강이 술잔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천룡신검은 경천지대삼결 중 제일결인 폭뢰낙수를 펼쳐내었다. 번쩍! 검광이 눈부시게 작렬했다. 계산대의 주인과 객잔 안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일직선으로 뻗어내고 있는 위지강의 검 끝에 술잔이 내려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홍쌍사의 목 언저리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위지강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명주의 고장이라 그런지 과연 술맛이 일품이군." 목이 잘려진 남홍쌍사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위지강은 품속에서 검은 보자기를 꺼내 두 개의 수급을 싸맸다. 그는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맨 뒤 계산대의 주인에게 은덩이 하나를 꺼내주었다. 위지강이 사라지고 나자 객잔 주인의 눈빛이 한순간 야릇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는 이내 투덜거리며 목 없이 널브러져 있는 남홍쌍사의 시체로 다가갔다. "죽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고." 그는 시체의 발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선 끙끙대며 계산대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놈의 장사를 때려치우던지 시체 치우는 종업원을 따로 두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그는 등으로 내실 문을 밀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시체를 안쪽으로 들여놓은 객잔 주인은 방문을 쾅 닫으며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를 질렀다. "에이, 재수 없어." 그러나 그의 눈은 방안 한쪽에 놓여 있는 새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장 안에는 전서구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한번 살펴본 뒤 붓을 들고선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썼다. 이어 전서구의 발목에 매달린 조그만 대롱에 종이를 둘둘 말아 넣은 뒤 창문을 열고 전서구를 날려보냈다. 눈부신 태양 속으로 사라지는 전서구를 객잔 주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두두두두! 다섯 필의 준마가 잠송과 주청산 등을 각각 태운 채 질풍처럼 내달렸다. 세월의 경과로 인해 이들은 보다 완숙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었다. 주청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채 잠송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요?" "북경!" 호랑평이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거긴 적의 심장부가 아닙니까?" 축악은 잠송에게 힐난조로 말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북경에 심어놓은 밀정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주청산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손으로 쳤다. "그건 아까 출발할 때 이미 했던 얘기고 내 말은 그놈의 급보가 무슨 내용이냐는 말이오!" 잠송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없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석옥성에게 물었다. "막내는 왜 아무 말이 없느냐?" 석옥성은 씨익 보기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둘째 형님을 이토록 서두르게 만들 수 있는 일은 하늘 아래 오직 한가지밖에 없으니까요!" 잠송은 달리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알았으면 됐다! 좀더 서두르도록!" 선두를 박차고 달려나가는 잠송과 석옥성의 뒤에서 주청산과 호랑평, 축악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축악이 주청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얘긴지 감 잡았소?" 주청산은 얼굴이 벌개지며 씨근벌떡거렸다. "그래 잡았다! 하도 많이 잡아서 이젠 돌아버릴 지경이다. 됐냐?" 그들을 태운 다섯 필의 말들은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리며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갔다. *** 남궁진성과 이화는 북경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남궁진성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가 내 고향이다, 이화!" 북경의 번화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산기슭 아래 거대한 성채가 자리해 있었다. 남궁진성은 그곳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성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어. 지금은 남도맹의 깃발이 꽂혀 있지만……!" "아까 한 말 진짜야?" "무슨 말?"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북경에 가도 아버지는 만나지 않을 거라 했던 말 말야." "진짜야." "보고 싶지 않아? 벌써 팔 년을 못 봤잖아." "보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아냐." 그들은 관도로 접어들었다. 저쪽 맞은편에서 세 명의 무사가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보면서 하늘에 맹세했거든, 가문의 흉수 마도수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베겠노라고……. 그러기 전에는 나를 아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이화의 얼굴은 잔뜩 수심에 차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시선으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바보!' 이때 다가오던 무사들이 그들과 스치며 나누는 대화에 두 사람은 흠칫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자네가 잘못 본 거 아냐?" "글쎄 틀림없이 마도수였다니깐 자꾸 그러네!" 남궁진성이 저만치 걸어가는 무사들을 향해 신형을 홱 돌려세웠다. "옛날에 혈랑팔겁을 끌고 와서 북경을 발칵 뒤집어놓을 때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검은 옷에 흑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뱃속까지 들여다볼 듯한 그 투명하고 맑은 눈빛하며." 이때 말을 하던 무사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무사는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진성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소?" 무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친구는 뭐야? 어디서 건방지게 남의 어깨를……." 순간 그의 눈알이 홱 불거져 나왔다. 남궁진성이 그의 목을 거칠게 움켜쥔 것이다. "캑!" 남궁진성은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렬한 눈빛을 폭사시키며 차갑게 물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목뼈를 분질러 버리겠다. 어딜 가면 마도수를 만날 수 있나?" 남궁사와 연해월은 탁자에 마주앉아 있었다. 남궁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말해주시오! 한사코 나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이유가 무엇이오?" 연해월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만 하는 거죠?" "우린 부부니까, 당신은 내 아내고 난 당신 남편이니까." 연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녀는 굳어 있는 남궁사를 지나쳐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차가운 월광이 창문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돌아가세요. 남궁사의 아내였던 여자는 이미 죽었어요." 남궁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근 십 년 만에 만난 부부의 대화가 왜 이렇게 삭막하고 찬바람이 불어야 하는 거지?" 연해월은 굳은 얼굴로 창 밖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난 당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였어요. 아무리 독하고 모진 년이지만 가슴이 아프다 못해 썩어서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못살아요." 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휙 돌아서서 남궁사를 직시했다. "알아요? 성아는 당신 핏줄이 아니란 말이에요!" "알고 있었소!" "당신……?" 남궁사의 말은 연해월을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의 업보라고 생각했소. 내가 죽도록 사랑해서 선택한 여자고 그 여자의 아들이었기에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소." 연해월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성아, 그 녀석을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오. 가끔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 훨씬 많았소." 남궁사는 연해월을 쳐다보며 간곡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이오. 내 아내로 돌아와 주시오." 연해월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뇌리에는 그 옛날 위지강이 약속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 기다려. 연해월… 내가 갈 때까지 꼭. 파파파팟! 울창한 나뭇가지 위를 스치듯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흑영들이 있었다. 일신에서는 하나같이 냉혹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는 십삼 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차림새나 분위기는 중원인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혈운십삼랑(血雲十三狼). 이들은 바로 동영(東瀛) 출신의 혈운십삼랑이었다. 삘릴릴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혈운십삼랑은 일제히 신형을 멈추었다. 혈운일랑이 비스듬히 몸을 날리며 외쳤다. "저쪽이다." 나머지도 비조처럼 몸을 날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공터에는 낡고 부서진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 정자의 난간에 기대앉은 위지강의 입에는 옥소가 물려져 있었다. 위지강을 발견한 혈운십삼랑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내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좌우로 나뉘어져 위지강에게 접근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물처럼 녹아서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위지강은 이들의 접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피리만 불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지면을 가르며 다섯 갈래의 검기가 무서운 속도로 위지강을 향해 쏘아져왔다. 위지강은 옥소를 입에서 뗀 뒤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들었다. ""무성무적(無聲無跡)의 경지나 다름없는 잠형둔(潛形遁)의 인술(忍術)!" 그는 술병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다면 광동무림(廣東武林)의 골칫덩어리라는 동영(東瀛) 출신의 혈운십삼랑께서 이 먼 곳까지 마중을 나와주신 건가?" 정자의 마룻바닥이 뒤집어지면서 다섯 개의 혈운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검귀(劍鬼)!" "살(殺)!" 혈운은 위지강을 향해 무섭게 덮쳐갔다.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나도 예의는 갖추는 게 도리겠지. 비싼 술이니 부디 사양치 마시게." 위지강은 술병을 냅다 집어던졌다. 혈운일랑이 검을 후려쳐 날아오는 술병을 쪼개버리며 일갈했다. "허튼 짓 마라!" 술병이 쪼개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술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 바람에 술이 혈운오랑의 얼굴에 튀기면서 혈운이 잠시 멈칫했다. "절강의 명주 백로홍(白露紅)이라네, 친구들!"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뽑아들며 그대로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퉁겨져 나갔다. "폭뢰낙수!" 전광석화처럼 눈부신 검광이 폭포수처럼 혈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금성패왕이 천마검법과 자웅을 겨뤄보기 위해 창안했던 무공 중 제일결이 펼쳐진 것이다. 싸칵! 예리한 절단음이 들리며 위지강을 향해 밀려들던 혈운이 걷혔다. 혈운오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공에서 굳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지독한 경악과 불신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미간에서 피를 흘리며 검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기회다. 쳐라!" 정자 밖에서 혈운십삼랑 중 네 명이 신검합일의 기세로 날아들었다. 허공에서도 또 다른 네 명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 내렸다. '목숨을 도외시한 필살의 승부수! 의외로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친구들이로군!' 위지강이 천룡신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경천지대삼결 제이결, 섬멸진공수!" 천지가 검강 속에 파묻혀 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찬란한 검강뿐이었다. 세상을 온통 가득 채운 검강에 혈운팔랑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맙소사!" 무섭게 쇄도한 검강이 혈운팔랑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혈운팔랑의 몸뚱이는 산산조각으로 변해 허공 가득 흩뿌려지고 말았다. "값이 꽤 비싼 친구들이니까 당분간 술값 걱정은 없겠군!" 이때 그의 뒷덜미에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와 닿았다. "그러나 당신은 오늘 이후로 술을 마실 기회가 없을 것이오." 위지강은 흠칫하며 서서히 신형을 돌려세웠다. '내 이목을 속이고 이토록 가깝게 접근해 오다니……. 거기다 이 목소리로 봐서 기껏해야 열 대여섯 살 정도의 나이가 아닌가!' 위지강의 시선이 머문 곳은 정자와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남궁진성이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거목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저 아이는……!' 남궁진성은 검을 뽑아들며 차갑게 외쳤다. "천외천무쌍가의 후예 남궁진성이 가문과 가족들을 대신해서 묵은 빚을 받아내겠소." 후두두두, 후두두둑!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 하늘은 먹장구름이 뒤덮이더니 마침내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번쩍! 뇌성벽력 속에서 남궁진성은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위지강은 충격에서 헤어나 이내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왔다. "아직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죽여보지 못한 눈빛이구나.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돌아가라, 애송이!" 남궁진성은 살벌하고 비장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오직 한 사람을 베기 위해 갈아온 칼이오." 폭우가 쏟아졌다. 사정없이 퍼붓는 빗줄기는 금세 두 사람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애꿎은 피를 먼저 묻혔어야 할 이유가 없었소. 검을 뽑으시오, 당신의 목을 베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소!" 위지강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남궁진성을 응시했다. "풋내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오너라, 애송이. 네가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은 솜씨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가르쳐주마." 파앗! 남궁진성이 지면을 박차 전광석화처럼 쇄도해 들었다. 그의 칼날을 피하는 위지강의 내심에는 격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으면서… 또 어렴풋이 기다린 것도 사실이다만… 이것이 우리의 재회로구나, 아들아!' 가각! 목표물을 놓친 남궁진성의 칼날은 거목을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양단해 버렸다. '그토록 피눈물나게 수련을 했는데 옷깃 하나 벨 수 없다. 아직도 역부족인가? 그러나 이대로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위지강은 희미한 조소를 지었다. "벌써 지친 거냐? 아니면 밑천이 다 떨어진 거냐?" "천만에 이제 시작일 뿐이오!" 위지강은 무심하게 말했다.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해서 삼초를 더 양보해주마. 그 안에 날 베지 못한다면 네가 눕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남궁진성은 비와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바짝 긴장했다. '그래. 나는 아직 저자의 적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놈!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를 목전에 두고 이런 비참한 꼴을 보이다니!' 남궁진성은 참담한 눈빛이 되었다. 위지강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녀석, 이제 보니 떨고 있지 않느냐?" 남궁진성은 그 말에 흠칫했다. '떨고 있다고? 내가?' 그의 뇌리에 진면목을 감춘 채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던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 싸움을 하기 전엔 누구나 무서운 법이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면 오직 하나만 생각하라. 너는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떨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포기하는 비겁한 사내는 되지 않도록 하라. 남궁진성은 신형을 솟구치면서 절규하듯 외쳤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천마검법 제일초 용형뢰!" 용두 형태의 검기 수백 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녀석, 피나는 수련이 있었구나!' 위지강은 신형을 날려 검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나갔다. "애송이! 이제 보니 제법 쓸만한 재간을 감추고 있었구나!" 일초가 빗나가자 남궁진성은 천마용등보를 펼쳐서 허공을 평지처럼 밟으며 위지강과의 공간을 단축해 나갔다. "천마검법 제이초 겁륜풍!" 남궁진성의 신형은 회오리바람처럼 돌아가며 보이지 않은 채 수천 개의 검영들이 실타래가 풀리듯 나선형을 그리며 쏟아져 나왔다. 지면을 가르며 엄청난 기세로 쇄도해 드는 검영들을 바라보며 위지강은 만족한 눈빛을 했다. '좋아! 과연 너는 훌륭한 내 제자다!' "녀석, 그 정도 재간이면 어디 가서 밥벌이는 할 수 있겠구나." 위지강은 빛살같이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콰콰쾅! 지면이 거북이 등짝처럼 마구 갈라지면서 폭발하고 근처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남궁진성은 위지강이 숨돌릴 틈도 없이 신검합일의 자세로 풍차처럼 휘돌며 무섭게 쏘아져왔다. "최후다, 마도수!" 갑자기 엄청난 길이로 늘어난 남궁진성의 검날이 위지강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왔다. 위지강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초영비! 천마검법의 제삼초! 대단하다. 아들아.' 위지강은 왼발로 오른발을 찍으며 허공 까마득히 날아올랐다. 남궁진성의 공격에 맞은 나무들의 허리가 갈라졌다. 검기에 관통당한 바윗덩이들은 산산조각으로 폭발하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위지강은 가볍게 지면에 내려선 뒤 무표정하게 말했다. "좋은 솜씨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위험한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해!" 남궁진성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째서 죽이지 않는 거요?" 위지강은 고개를 돌려 담담하게 말했다. "네 목에는 아직 현상금이 걸려 있지 않으니까." 이윽고 위지강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궁진성은 점점 멀어져 가는 위지강을 노려보며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짐하듯 소리쳤다. "기억해 두시오, 마도수! 오늘의 이 모욕은 언제고 갚아주겠소! 그때까지… 죽지 마시오." 남궁진성은 신형을 폭사시켜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지강은 한없이 고독해 보이는 모습으로 빗속에 서 있었다. '그래, 그렇게 강해지거라! 그 날이 오면 마음껏 너를 안아볼 수 있겠지. 비록 죽은 다음이라도 마음놓고 너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겠지…….' 위지강은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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