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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왕룽은 성미가 급했으므로 일을 한번 결정해 버리면 한시라도 빨리 실행하지 않고는 결딜 수 없었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그는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처리해 버리고 아무 걱정없이 밭이나 둘러보고 낮잠이나 자면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는 맏아들에게 황부잣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고 전한 다음 모든 일을 주선하라고 일렀다. 또한 성안에 있는 둘째 아들을 불러서 거들게 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성안으로 이사했다. 먼저 렌화와 뚜챈과 그의 몸종의 짐을 옮기고 맏아들 내외와 그의 종들을 옮겼다. 그러나 왕룽은 곧 이사 가지 않았다. 그는 셋째 아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나서 자란 곳을 떠나는 것이 그가 생각한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빨리 옮기라고 권해도, "음, 음. 내 거처할 방이나 마련해 둬라. 맘이 내키는 날 가지. 손자놈이 나기 전에 가지. 갔다가 또 생각나면 이리로 오고......" 할 뿐이었다. 아들들이 자꾸 권해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 천치도 생각해야지. 그 애를 데려가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야. 아무튼 그 애는 내가 돌봐야지.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데려가긴 해야겠지만......" 왕룽이 이렇게 말한 것은 맏며느리가 지나칠 만큼 괴팍스러워서 이 천치 시누이를 근처에도 못 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임신하고부터는, "저런 애는 죽는 편이 나아요. 저런 애를 보면 뱃속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요." 하고 그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맏아들은 그의 아내가 천치 아이를 미워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공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되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동생을 장가 보낼 때까지 여기에 있겠다. 칭 서방을 시켜서 혼처를 구해 보라고 했으니까 그 일이 결말 날 때까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 집에 남게 된 식구는 왕룽과 막내 아들과 천치 딸과 그리고 삼촌네와 칭 서방과 머슴들 뿐이었다. 삼촌 식구들은 마치 자기 집이나 된 것처럼 렌화가 거처하던 뒤채를 독차지했으나 왕룽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귀찮게 굴던 삼촌만 죽어 버리면 어른에 대한 왕룽의 도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 뒤에 사촌을 쫓아내도 남에게 욕은 먹지 않을 것이다. 칭 서방과 머슴들은 바깥 채로 이사했다. 왕룽과 막내아들과 천치는 가운뎃방에 거처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건장한 여종을 한 사람 구했다. 왕룽은 갑자기 온몸에 피로가 엄습해 옴을 느꼈다. 세상일은 다 잊어버리고 밤낮 잠만 잤다. 그는 마음이 아주 평화로왔다. 그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막내 아들은 말이 없었고 아버지 곁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막내의 성질이 어떤지 왕룽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난 뒤에 왕룽은 칭 서방에게 둘째 며느리감을 구해 보라고 부탁했다. 칭 서방도 이젠 늙은이가 돼서 마른 갈대처럼 쇠약했다. 왕룽은 그에게 괭이나 쟁기 같은 것은 잡지 못하게 했다. 머슴이나 감독하고 추수 때 곡식 간수나 제대로 하라고 권했다. 그는 왕룽의 말을 듣자 세수를 하고 가장 좋은 푸른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인근 마을로 나가서 여기저기 색시감을 보고 와서 왕룽에게 보고했다. "내가 젊기만 하다면 장가 들고 싶은 색시가 있어요. 여기서 세 마을 건너서인데요. 마음도 좋고 몸도 건장한데다 살결도 아주 고와요. 그저 흠이라면 잘 웃는 게 흠이지요. 색시 아버지는 이댁과 혼사가 되기를 바라고요. 지참금도 요즘으로 보면 좋은 편이고 아버지는 지주예요. 그렇지만 나는 주인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확실하게 말 못하겠다고 못박아두었어요." 왕룽은 금방 승낙했다. 빨리 결말을 맺고 싶어 사람을 보내 이쪽 뜻을 전하고 혼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젠 막내 아들만 남았구나. 며느리를 얻고 사위를 보고 하는 걱정도 거의 덜게 된 셈이다. 이제부턴 편히 지낼 수 있겠군.' 혼약서를 주고받고 잔칫날까지 정한 그는 마음이 편해져 그의 아버지처럼 양지쪽에 나가 낮잠을 즐겼다. 칭 서방도 나이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거북해져 식사 뒤에는 졸기가 일쑤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농사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왕룽은 멀리 있는 토지를 가까운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 주고 싶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소작을 하겠다고 서로 먼저 청해 왔다. 소작의 조건으로는 수확물을 지주인 왕룽과 소작인이 반분하기로 하되 그밖에 왕룽은 참깻묵, 콩깻묵 따위 비료를 대어 주기로 했고 그 대신 소작인들은 왕룽 가족이 먹을 양식을 대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왕룽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농사일이 편하게 되었다. 때때로 그는 성안에 가서 그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방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날만 새면 아침 해가 뜰 때 열리는 성문을 빠져 나와 다시 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신선한 흙냄새를 맡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의 농장을 밟을 때면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왕룽에겐 다시 무거운 짐을 벗을 날이 왔다. 지금 이 집안에는 여종을 겸한 머슴 아낙네밖에 없기 때문에 사촌은 너무나 한적한 생활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자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북쪽에 전쟁이 벌어졌대요. 세상 구경도 하고 싶고 무엇이든 일해 보고 싶어 군대에 나가 볼 생각이에요. 군복과 어깨에 멜 외국제 총을 사게 돈 좀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왕룽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으나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는 아저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뒤를 이을 사람인데 전쟁터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기나 하니?" 그러나 사촌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죽을 데는 안 가요. 전투가 벌어지면 끝날 때까지 어디 숨겠어요. 이젠 이렇게 지내기도 답답해서 못 견디겠고 또 더 나이 먹기 전에 낯선 곳도 좀 구경해 둬야겠어요." 왕룽은 얼른 돈을 주었다. 이때만은 아무 고통도 없이 줄 수 있었다. 그는 사촌의 손에 은전을 세어 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잘됐다. 제가 전쟁을 좋아해서 가니까 달렸던 혹이 떨어지는 셈이다. 아무튼 전쟁은 어디에선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니까.'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전쟁터에 가면 죽을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니까.' 왕룽은 이런 생각이 얼굴에 나타날까 봐 매우 조심했으나 마음은 매우 시원했다. 숙모는 아들이 군인으로 나간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왕룽은 숙모를 위로하기 위하여 아편을 더 주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그 애는 반드시 군관으로 출세할 것입니다. 우리 가문을 틀림없이 영화롭게 할 테니 염려 놓으세요." 그 후로부터 집안은 지극히 평화로왔다. 숙부 내외는 밤낮 누워만 있고 성안의 집에선 왕룽의 손자가 태어날 날이 가까와졌다. 이날이 가까와 오자 왕룽은 성안 집에서 거처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뜰을 거닐면서 한 때 호세를 자랑하던 황부잣집에서 그의 처자와 며느리를 거느리게 되고 그리고 삼대째인 손자까지 낳는다고 생각하니 이상 야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실로 감개무량한 것이다. 마음이 이렇게 흐뭇해지자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썼다. 근사한 남국의 흑단 조각이 있는 탁자를 마련하거나 멋있게 조각한 의자를 갖추거나 보통 무명옷은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가족들 옷을 전부 공단과 명주로 해 주었다. 종들까지도 푸른 무명이나 검은 무명으로 말끔하게 입혔다. 그리고 맏아들의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구경을 시키는 것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또 왕룽이 먹는 음식도 차츰 사치스러워졌다. 그는 원래 마늘과 밀떡만 있으면 만족했으나 요즈음은 아침 늦도록 자고 또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음식에는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겨울의 버섯이라든가 남해 어물, 북해의 조개, 비둘기 알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 줄어든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 먹는 것만 가려서 먹었다. 그의 아들들도 렌화도 다같이 이런 것을 먹었다. 이렇게 모든 생활이 변한 것을 보고 뚜챈이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 내가 이 집에 살던 때와 똑같이 됐습니다. 내가 늙어서 영감님의 시중을 못 드는 것만이 다를 뿐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뚜챈은 힐끔 왕룽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못 본 채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를 황 영감과 비교하여 영감님이라고 하는 데에 매우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사치스런 생활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면서 왕룽은 손자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가 맏아들 방 가까이 가니 며느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나와서 그를 맞으며 말했다. "이제 산기가 보입니다. 그런데 뚜챈의 말을 들으니 산모 몸이 가늘어서 난산일 거라고 해요." 그래서 왕룽은 그의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아서 며느리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무서운 생각이 들 만큼 걱정이 되었다. 문득 부처님에게 빌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부리나케 향 파는 가게로 가서 향을 사 가지고 가까운 절로 갔다. 금빛 벽장 속에 관음보살을 모셔 놓았다. 그는 몹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 중을 불러 돈을 주며 말했다. "사내가 향을 피우긴 어색한 일이니 내 대신 향을 좀 피워 주오. 내 첫 손자를 볼 판인데 며느리가 성안 사람이고 몸이 가늘어 난산이라서...... 내 안사람은 죽고 없어 향을 피워 올릴 사람이 있어야지......" 중이 향을 꽂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왕룽은 별안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새로 낳는 애가 손자가 아니고 계집일 때는 어떻게 하나?' 그래서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부처님, 손자를 낳게 해주면 붉은 새 옷을 한 벌 올리죠. 그러나 만일 계집이라면 드리지 않을 테요." 그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절간을 나왔다. 거리에 먼지가 두껍게 덮여 있는데도 그는 정신 없이 성 밖 사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밭과 땅을 지킨다는 두 개의 찰흙 인형이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는 향에 불을 붙이며 중얼댔다. "우리들은 대대로 지신님을 섬겼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나도, 내 자식도 지신님의 시중을 받들어 왔습니다. 지금 내 손자가 태어날 예정인데 만약 그것이 아들이 아니라면 다시는 지신님을 안 섬기겠습니다." 그는 부처님과 지신님께 정성껏 축원을 하고 극히 피로한 몸으로 돌아왔다.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으니 목이 말라서 차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고 얼굴의 먼지를 훔치려니 더운 물수건이 필요해서 손뼉을 수없이 쳤으나 아무도 오질 않았다. 모두들 분주한 양 오가는데 그는 누구를 붙잡고 손자가 태어났는지를 물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거의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렌화가 뚜챈의 부축을 받으면서 뒤뚱뒤뚱 걸어왔다. 뚜챈이 웃으며 말했다. "자, 손자가 태어났어요. 모자가 다 건강하고 아기도 참 잘생겼어요." 왕룽은 그제서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손뼉을 치며 다시 한 번 크게 웃고 나더니, "암, 그래, 그렇지. 내 첫아들을 낳을 때도 이렇게 앉아 있었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렌화가 제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란이 첫아들을 낳을 때도 이렇게까진 애간장이 녹질 않았는데.' 그의 머리 속에 지난날의 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아내는 아무도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고통을 참으며 애를 몇이건 낳고 또 곧 들로 나와서 그와 함께 고된 농사일을 돌봤던 것이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배가 아프다고 어린애처럼 울고불고 악을 쓰며 집안 종들을 정신도 못차리게 굴고 또 제 남편을 문 밖에서 꼭 기다리게 하지 않는가. 왕룽은 지나간 옛 꿈을 회상하듯, 오란이 밭에서 일하는 틈틈이 가슴을 헤치고 젖을 물리던 정경을...... 젖이 넘쳐 흘러 땅에까지 흘러내리던 일들을 생각했다. 이런 일이 사실이었을까 싶게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때 맏아들이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자랑스런 듯이 들어왔다. 그리고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들을 낳았어요. 아들을요. 그런데 유모를 곧 구해야겠어요. 산모의 젖을 먹이면 어머니의 몸도 약해지고 얼굴 모양도 쭈그러져요. 성안에선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유모의 젖을 먹이거든요." 왕룽은 슬픈 듯이 대답했다. 왜 슬픈지 자신도 그 까닭을 몰랐다. "그래, 제가 키우지 못한다면, 꼭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아이가 태어나 한 달이 되던 날 아이의 아버지 왕룽의 장남은 잔치를 베풀고 그의 장인을 비롯해서 성안에 있는 저명 인사들을 빠짐없이 청했다. 그리고 수백 개의 계란을 붉게 물들여서 초대된 손님 전부와 선물을 보내 온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로 보냈다. 축연은 한결 즐겁고 잔치는 온 집안에 기쁨을 주었다. 잔치가 끝나자 장남이 와서 왕룽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집도 3대가 됐으니 가문을 위해서 조상의 위패를 모십시다. 우리집도 이만하면 대갓집이 되었으니 오늘 같은 경사에는 조상에게 제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룽이 대단히 기뻐하며 승낙했기 때문에 대청에다 사당을 모시고 위패를 몇개 세웠다. 왕룽의 조부의 것 하나, 그의 아버지의 것 하나, 그리고 왕룽 자신이랑 장남의 이름도 사후엔 그렇게 적을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 두었다. 장남은 향로를 사다가 차려 놓고 거기에 향을 가득 피웠다. 이 일이 끝나자 절간 부처님에게 붉은 옷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이 생각나서 그 길로 절에 찾아가서 중에게 상당한 돈을 주었다. 그 절에서 돌아오는 도중 신은 마치 은혜를 주기 싫어서 선물 속에 가시를 숨겨 두는지, 밭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사나이 하나가 달려와 별안간 칭 서방이 위독하니 빨리 와 달라고 소식을 전했다.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사내의 말을 듣고 왕룽은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내가 절에 가서 부처님에게만 새 옷을 바쳤더니 그 사당 지신 따위가 샘을 한 모양이구나. 까짓 것 이 들판에서나 세도를 부리지 삼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구 그런 짓을 해." 점심 준비가 다 되어 있었지만 그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렌화가 시원한 저녁때나 가라고 권하는 것도 뿌리친 채 집을 나섰다. 렌화는 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종을 시켜서 양산을 들고 따라가게 했다. 왕룽의 걸음걸이가 워낙 빨라 젊은 여종이 양산을 받쳐 들고 따라가기에는 힘에 겨웠다. 왕룽은 칭 서방이 누워 있는 방으로 황급히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찌된 일이냐?" 방은 머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경황 없이 말했다. "손수 타작을 하다가...... 늙은 사람이니 그만 두도록 해도......" "새로 들어온 머슴이 도리깨질을 잘못해서 칭 노인이 가르친다는 게 그만...... 늙은이는 안되는 일인데......" 왕룽은 분한 말투로 소리질렀다. "그놈은 앞으로 꿇렷!" 그들은 왕룽 앞에 그 사내를 끌어냈다. 사나이는 정강이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몸집이 크고 낯이 붉은 촌뜨기인데 뻐드렁니가 아랫입술에 퉁겨 나와 있고 황소 눈알처럼 눈망울이 둔한 멍청이였다. 떨고 있는 그 사나이를 향해 왕룽은 사정없이 뺨을 갈겼다. 그리고 여종이 가진 양산을 빼앗아 그의 머리를 마구 후려갈겼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노인이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그 노기가 말리는 사람 혈관으로 들어갈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칭 서방이 신음 소리를 냈다. 왕룽은 양산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소리쳤다. "이따위 멍청이를 데리고 있다간 칭 서방이 죽어 버리겠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애처롭게 칭 서방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의 손은 말라서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웠다. 이 손에도 피가 흐르고 있을까 의심이 날 정도였다. 평소 같으면 칭 서방은 청황색이었는데 지금은 검은 빛이 돌고 핏기조차 없어 보였다. 겨우 뜨고 있는 눈에는 안개가 가리운 듯 아무 것도 안보이는 표정이었고 숨소리도 매우 가빴다. 왕룽은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왔어. 관은 우리 아버지가 쓴 것보다 더 좋은 걸로 해 주겠네." 그러나 칭 서방의 귀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설사 그 말이 들렸다 해도 대답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몹시 괴로운 듯 헐떡이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왕룽은 그의 몸에 엎드려서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슬프게 통곡했다. 그리고 훌륭한 관을 사오게 하고 중을 불러 염불을 드리도록 했다. 그 자신도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랐다. 그리고 친척이 죽었을 때와 같이 장남의 신에도 흰 띠를 감게 했다. "칭 서방은 우리집 머슴이 아니에요? 머슴이 죽었는데 흰 띠를 감아요?" 장남이 투덜댔으나 왕룽은 사흘 동안 그렇게 하도록 했다. 왕룽의 생각엔 아버지와 아내를 묻은 가족 묘지에 칭 서방을 묻고 싶었으나 장남과 차남 모두 불평스레 반대하고 나섰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신 자리에 같이 묻는다니요? 안 됩니다. 저희들도 머지않아 거기에 묻힐 텐데." 왕룽은 이치로서는 그렇고 또 나이가 들고부터는 집안의 시끄러운 일에 말려 들고 싶지 않아 칭 서방을 가족 묘지 입구 가까운 곳에 묻기로 했다. 그것으로 그는 자기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젠 됐어. 칭 서방은 늘 우리 집을 돌봐 왔으니 죽어서도 그러겠지." 그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칭 서방 곁에 묻어 달라고 일렀다. 칭 서방이 죽고 난 뒤로부터 왕룽은 성 밖 땅을 둘러보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간혹 나갔을 때라도 칭 서방이 없기 때문에 적적한 생각만 들었다. 논둑길을 혼자서 걸을라치면 관절도 아프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는 일하는 것도 지쳤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토지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소작을 주었다. 그의 땅은 기름졌기 때문에 곧 처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조각 땅도 팔지는 않았다. 소작도 1년 계약으로 했다. 그의 땅은 언제나 그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처자 있는 머슴을 그 집에 있게 함으로써 아편에만 팔려 있는 삼촌 내외를 돌보게 했다. 그리고는 셋째 아들의 우울한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하였다. "자아, 너도 나와 함께 성안에 있는 집으로 가자. 딸아이도 데리고 가자. 내가 거처하는 곳이라면 그 애도 함께 있을 수 있지. 칭 서방이 죽고 나니 너도 섭섭할 게다. 그가 없으니 누가 저 애를 돌봐 주겠니. 누가 때리려고 해도 말려 줄 사람도 없을 테구, 밥 때가 되더라도 누구 한 사람 거들어 주지 않을 테구, 또 칭 서방이 없으면 네게 농사일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지." 그래서 왕룽은 셋째와 천치 딸애를 데리고 성안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 후로 그 토벽 시골집에는 오랫동안 거의 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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