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을 나와
지대가 조금 높은
위쪽 골목길을 걸어가면
먼저 김수경이네! 집이 있었네.
우리 어머니와 함께
강정 몰로 시집을 온 나이도 같은 어머니,
그리고 전기 공사 일을 하시던
김수경 아버지가 살던 집.
조금 더 가면
황남연이네! 집이 있었고,
그 옆에는
내 친구 전 경영이네! 집이 있었네.
그 집의 아버지는 놋쇠로
봉초 담배 대를 만드시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네.
그 시절의 마을은
집, 집마다 사는 모습은 달라도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비슷한 고단함을 안고 살았네.
다시 안길을 나와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일본으로 이민 간 도재네 집,
왼쪽에는 박 씨네 집,
그리고 우리 일가인 득춘 당숙네 집도 있었네.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 효현 할아버지 종가인
상훈이 형님네 집이 있었고,
왼쪽 언덕길을 오르면
사주를 잘 본다고 소문난
사주 박 씨네 집이 있었네.
그 집의 아들은 내 친구 박남영.
그러나 사주쟁이로 이름을 알린 할아버지의 집에도
웃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네.
친구 남연이 아버지인 아들이 결핵으로 고생하니
아버지의 마음도 친구의 마음도
병든 가족을 향해 무겁게 가라앉았겠지.
세월이 흘러
사주 박 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머니가 유사종교에 마음을 빼앗기고,
친구 남영이도 우체국에 근무하며
여호와의 증인 신앙에 깊이 빠져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지금은
그들의 삶을 자세히 알 수 없다네.
사람은 그렇게
한마을에서 함께 자라다가도
어느 순간
각자의 길을 따라
서로 다른 세상으로 흩어져 가는가 보네.
그런 마을에서
나는 어린아이로 자랐네.
부모님은
농사일에 묻혀 사셨고,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세상에 나온 아이였네.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시고
어머니도 논과 밭을 오가시며
하루 종일 흙과 함께 살아가셨지.
아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건넬 겨를도,
웃으며 안아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네.
그래서 어린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부모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
거칠어진 손, 농사일에 지친 어깨,
그리고
하루가 저물어 가는 고단한 저녁뿐이었네.
나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네.
말이 사랑을 대신하지 못하던 시절,
부모님은 땀으로 사랑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을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지 못했네.
밤이 찾아오면
마당 한쪽에는 모깃불이 피어올랐네.
하얀 짚 검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 연기가 밤공기 속으로 퍼지면
모기들이 조금씩 물러났다네.
어둠 속에 달빛 하나가 내려앉으면
우리 가족은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 앉았었네.
등불이라고는 달빛과 희미한 호롱 불빛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네.
누구네 논에 물이 부족했다는 이야기,
누구네 소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기,
올해 농사가 어떻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 어디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그때마다 모기가 달려들면
짝!
또 짝!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모기를 쫓았네.
그 손뼉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어느새 그 소리마저
마을의 음악이 되었다네.
나는 그 평상 한쪽에 앉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지
아버지는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고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네.
어린 나는
그 이야기의 깊이를 알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는
어쩌면 내가 평생 기억할
아버지의 가장 따뜻한 목소리였네.
그제야 지금의 내가 조금 알 것 같네.
우리 부모님은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흙을 일구어
자식의 밥상을 마련하셨고,
웃음을 자주 많이 보여주지는 않으셨지만
자식들이 평상에 앉아
달빛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도록
평생을 일하셨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는
설움과 땀방울만 보였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내가 늙어 뒤돌아보니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부모님의 사랑이었고,
그 고단했던 하루하루가 우리 형제들을 키워낸
부모님의 긴 사랑이었네.
나는 사랑을 모르고 자란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사랑 속에서 태어나
사랑 속에서 자란 사람이었네.
다만 그 사랑이
말이 아니라
땀으로,
밥으로,
농사로,
그리고 달빛 아래 평상에 앉아 있던
그 조용한 밤으로
내게 전해졌던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