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싣고 간 모자
김금자
나는 본디 모자와 내외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모자를 썼다 벗을 때면 어김없이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다시 매만지는 수고로움이 싫었기 때문이다. 내게 모자란 그저 뙤약볕이 정수리를 달구거나, 찬 바람이 두개골을 파고들 때나, 마지못하여 찾는 “멋”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기능적 도구에 불과하였다. 반면 내 친구의 일상은 모자로 가득 찬 전시장 같았다. 집 안 곳곳에 걸린 여러 종류의 모자들은 계절의 빛깔과 모양을 제각각 머금고 있었다. 그에게 모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었다.
기억의 책장을 넘기면 여고 시절의 붉은 함성이 들려온다. 수학 여행길에 교련복 차림에 반드시 써야 했던 빨간 모자이었다.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에서 그 모자는 유독 숨 막히는 굴레 같았다. 지독한 더위에 모자를 벗어 던지고 싶다는 간절함이 극에 달하였을 때, 정상에서 불어오는 장난스러운 바람 한 줄기가 내 모자를 휙 채어갔다. 찰나의 해방감 뒤로 시원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새로 모자를 사야 할 돈을 걱정하며 엄마의 거친 손마디를 떠올리던 나는 물건 하나에도 부모의 수고를 알던 애틋한 아이이었다.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던 겨울 방학이다. 남편 친구네 가족과 함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유람하는 길로 떠났다. 김해공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에서 일박이일 짧은 관광 후 일본 항공기 (JAL) 편에 실려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일본 야경 투어 중 생각보다 매서운 추위에 작은 가게에서 털모자 하나를 샀다. 난생처음 사본 수입 모자이었고, 처음으로 “예쁘다.” 는 이유로 쓰게 된 모자이었다. 평소 즐기지 않고 내외하는 사이였던 그것을, 남편은 귀한 선물처럼 사주었다. 나는 그 다정한 마음을 눌러쓰듯이 조심스레 모자를 썼다.
이탈리아 여행 베네치아의 물결 위에서 곤돌라를 탔다. 안내하는 분이 “모자와 스카프는 끈으로 묶거나 가방에 넣으세요”라 한다. 겨울의 베네치아는 회오리바람이 잦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늘 모자를 머리에 슬쩍 얹듯 가볍게 쓰는 습관이 있다. 나는 몇 번이나 “꾹 눌러 쓰라”고 말하였으나 바람은 그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남편의 모자는 짙푸른 물살을 타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까웠다. 모자도, 그 순간도, 괜히 상한 기분도, 베네치아 관광 내내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남편이 걱정되어 광장 근처 가게에서 또 하나의 모자를 샀다. 그렇게 가방 속에는 모자가 하나둘 늘어갔다.
스위스로 향하는 나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책 속 주인공이 되어 융프라우에 도착하면 하얀 설원과 그 눈부신 하늘 아래에서 우아하게 사진을 찍게 될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고산지대의 현실은 냉혹하다. 저혈압인 내게 융프라우의 공기는 숨을 조여오는 가혹한 압력이었다. 어지럼증과 구토가 반복되었고 풍경은커녕 발을 내딛는 것조차 버거운 사투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편은 “여기서라.” , “웃어라.”, “한 장만 더.” 를 외치며 셔트를 눌렀다. 하얀 설원 위에서 내가 산 모자를 쓰고 예쁘게 웃어주길 바랐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때 내게 모자는 얹어둘 힘조차 없는 차라리 무거운 짐이었다. 아름다움도 몸의 평안 뒤에 오는 사치임을 그날의 융프라우는 가르쳐주었다.
프랑스 센강은 또 다른 기대이었다. 한국에서 상상하던 밤은 낭만의 얼굴로 넘실거렸다. 야간 유람선 갑판 위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남편 따라 갑판 위로 나갔다. 그 시절에는 필름 갈아 끼우는 카메라이다. 필름 교체하던 짧은 찰나의 순간이다. 그 짧은 틈을 타 센강 찬바람이 내 모자를 낚아채 강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제법 비싸고 아끼던 모자이었다. 남편의 과한 열정이 원망스러워졌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만큼이나 마음도 헝클어졌다. 그때 내 곁에서 조용히 손잡아 주며 마음 달래주던 이는 중학생 아들이었다.
다음날 방문한 프랑스의 백화점에서 남편은 미안한지 다시 모자를 권하였다. 평생 모자를 멀리하던 내가 유럽의 길 위에서는 어느덧 모자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국 버킹엄궁에서 만난 근위병들의 검은 곰 가죽 모자는 장엄한 역사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왕실 여인들의 모자는 품격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할머니들이었다. 긴 치마에 단정한 코트 차림, 자신에게 꼭 맞는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걷는 그분들이다. 나이 듦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게 보이는 모습은 그때 내 나이 마흔셋의 내게는 깊은 이정표가 되었다. “나도 저렇게 우아하게 늙어 가리라.”는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2011년, 남편 회사 부인회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해 신생아 모자 뜨던 기억도 새록새록 하다. 저체온증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신생아들을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던 시간이다. 2022년까지 하고 모자 뜨기는 중단되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그 온기를 이어 간다. 커피 몇 잔의 유혹을 참으면 보람된 삶을 유지한다.
세월은 흘러 나는 그때 보았던 영국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예순여덟 이제는 건강을 위해 반듯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머리가 시릴 때면 자연스레 모자를 찾는다. 여전히 화려한 멋쟁이는 아니다. 야외 운동을 나갈 때면 가방 속에 모자 하나쯤은 든든한 동반자로 챙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겨 이제는 내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모자를 준비한다. 오는 2월 24일. 센강에서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던 그 중학생 아들이 아빠가 된다. 내게는 첫 친손녀를 만나는 경이로운 날이다. 외손주를 다 키워놓고 다시 마주하는 새 생명을 위해 나는 예쁜 실 골라 작고 포근한 모자를 뜨고 있다.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이 모자가 아이의 첫 겨울을 따뜻하게 지켜주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모자는 바람을 기억한다. 설악의 후덥지근한 바람, 베네치아의 얄궂은 회오리바람, 융프라우의 희박한 공기, 그리고 센강의 시린 밤바람, 그 바람들은 모두 나를 여기까지 실어다 준 시간이다. 이제 안다. 모자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게 불어오는 삶의 계절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준비이다. “인생은 바람과 같다. 우리가 그 바람을 바꿀 수는 없으나 돛을 어떻게 다느냐에 따라 목적지는 달라진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