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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내 본향집
2026년 7월 5일 / 대예배 / 히 11:13-16
히 11:13-16(현대어성경) /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비옥한 초승달지대라고 하는 중동의 목초지를 찾아 떠돌던 유목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살았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그 아들 야곱도 다 이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 언저리에 살았다. 결국 모세와 여호수아 때에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언(마 24:1-2)대로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타이투스와의 4년간 전투에 그 땅을 빼앗기게 되었고 디아스포라(diaspora) 상태로 흩어졌다. 그러다 1948년 5월 14일에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유대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하는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를 선포하였다. 그러면 이제 다시 약속이 실현된 것일까? 아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진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절)라고 하였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었다(히 11:15-16). 그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다. 가나안 땅을 떠나서 살 때도 있었고, 가나안 땅에 살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 고향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고 스쳐 지나가는 여관방이었다. 아브라함도 모세, 예언자들도 베드로, 사도 바울, 신앙의 모든 선진도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참고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거듭난 사람의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였다.
● 오늘 본문을 통하여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믿음의 선진들이 고향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갖고 살았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히 11:13).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했다. ‘외국인’은 헬라어로 ‘크세노이’라고 하는데 ‘낯선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그네’는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인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한다. 나그네는 고향이 따로 있다. 어떤 이유로 타향에 얼마 동안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그 생활은 항상 임시적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와 같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로 이민해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니다. 한국에 살아도 나그네이다. 그리스도인은 돌아가야 할 본향 즉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믿음의 족장들은 모두 자신을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간주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애굽과 가나안 땅을 유리방황하며 살았고, 이삭 역시 브엘 라해로이에서 그랄로 브엘세바로 옮겨 다니며 살았고, 야곱은 벧엘로 밧단 아람으로 헤브론으로 옮겨 살다가 최후에는 애굽에서 죽었고, 요셉 역시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생을 마쳤다. 다윗 또한 자신을 나그네로 여겼다.
대상 29:15 /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 진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70객, 80객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로 70년, 80년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신령한 나그네들이다. 그리고 자신이 순례자 인생임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한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하려고 애쓴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힘이 든다. 그러기에 자신이 하늘의 신령한 나그네임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길을 힘들게 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출애굽 했으나 그 마음이 출애굽 되지 못하여 어려움이 올 때마다 애굽을 뒤돌아보며 세상 것을 추구하며 불만·불평하다가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세상의 땅인 가나안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고했다.
벧전 2:11-12 /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골 3:1-3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히 4:6-11 /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삼지 않고, 오직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삼고 살았다.
그리스도인들도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 나은 본향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최후의 목표이다. 만일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전 3:11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왔지만 거듭난 영혼은 새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왔다. 그리고 우리는 거듭났기에 천국에 가야 한다. 하나님의 품이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믿음의 선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였다(14절).
그들이 사모했던 더 나은 본향은 16절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것’인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향을 찾는 자식보다는 그 자식을 위해서 귀한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과도 같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계 21:1-4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3.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사람은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한다.
거듭난 믿음의 사람인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참 편안함이 없다. 그래서 늘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제나저제나 천국에 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누워도 편안하지 않다. 고향에 찾아가 안식을 누릴 때까지, 고난의 떡과 눈물의 잔을 마셔야 한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온갖 시련과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참고 인내하였다. 비록 땅에서 때로는 환난이 닥치고,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고, 육체의 질병으로 곤고함을 당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위축되거나 비겁해지거나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믿음의 길을 걸어 나갔다. 왜 그럴까? 천국에 가면 영원한 복락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을 가진 성도에게는 이미 마음의 천국(마 5:3)이 있다.
1. 믿음을 갖자
롬 8:24-30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자주 부르는 438장은 우리에게 위로와 큰 힘을 준다.
❶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❷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❸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2. 믿음의 확신을 갖자
롬 8:31-39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 함께 찬송가 336장을 부르자.
❶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❷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❸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고향은 영혼의 안식처와 같고,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성도는 자기의 본향이 하늘나라, 하나님의 품이란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아니하셨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서 잘살게 되면 하늘나라를 사모하지 않는다. 이것이 슬픈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돌아갈 고향을 생각하며 세상 것 바라보지 말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살아가자.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라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힘써 신앙의 경주를 경주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자. 이것이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의 바른 자세이다.
♬ 1.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 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2.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본문에 보면 그들은 자기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갔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다면 옛 삶을 돌아다봐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뎌 놓고서는 예전의 삶에 미련이 남아서 돌아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출애굽 여정 속에서 자꾸 애굽의 고기 가마를 생각하고 애굽에서 편히 있던 때만 생각하였다. 종살이와 같았던 삶을 망각하고 거기에서의 좋은 추억들만 생각하였다. 롯의 아내도 소돔과 고모라 땅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때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떠나온 집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여정이니 조금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꾸 예전의 삶으로 돌이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만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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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장에 가면 479장을 부른다. 이 찬송의 작사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토마스 라우손 테일러(Thomas Rawson Taylor 1807∼1835) 목사는 19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에서 사역하던 목사였다. 테일러 목사는 건강이 대단히 약했다. 목회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에 힘썼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힘써 일했다. 1835년 3월 6일 저녁, 테일러 목사는 한 집회에서 ‘나는 죽을 때 말씀을 들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설교였다. 사람들은 그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다음 날 아침, 테일러 목사는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가족들이 그의 방문을 열어보니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하늘나라를 돌아갈 고향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병약한 몸으로 27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감동적인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테일러 목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찬송가가 479장이었다.
❶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❷ 광야에 찬 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 넘어 눈보라 세차게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❸ 날 구원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아멘
경건한 사람은 장례식장에서만 부르지 않고 평상시에도 부르며 하나님 나라를 동경해야 한다. 이 땅이 그들이 멈추었어야 할 고향이었다면 수많은 순교자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 4세기 무렵에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로마 멸망기에 기록이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로마 제국은 망했는가에 관한 질문에 답한 책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인이 추구하는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목표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와 기독교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가는 나그네들이다.
❚ 중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세 시대는 단테의 『신곡』이 있었다. 14세기 초의 작품이었다. 이 책은 지옥과 연옥 천국 여행담에 대한 기록이다. 지옥은 모두 9층 17개의 원으로 구성된 각 원에 해당하는 죄수들이 벌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배교자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이름이 높았고 권력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장군, 시인, 황제, 주교, 교황, 사업가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 또한 중세에 즐겨 읽던 작품이었다. 세상에서 높게 생각했던 권력이나 부가 죽음 저편에서는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되고 있다. 이 작품 또한 우리가 이 땅의 순례자임을 잘 보여 준다. 이 땅에 매이고 영광 받으면 영원한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없다.
❚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라는 순례자의 모습은 신앙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화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크리스천’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자기가 사는 이 땅이 장차 망할 성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 순례길에 오른다. 중간에 많은 유혹과 시험을 만난다. 골고다 십자가 아래서 자기 등에 달려 있던 짐이 풀어지는 경험도 한다. 좋은 믿음의 친구도 만나고 유혹하는 자들도 만난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는 자도 만나고, 고난에도 믿음을 지키다 순교하는 ‘믿음’이라는 친구도 만난다. 그 중 ‘허영의 도시’라는 곳을 지난다. 허영의 도시는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이곳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집, 토지, 명당자리, 무역물자들, 직위, 명예, 승급, 귀족 칭호들, 국가들, 왕국, 욕정, 향락 등등이 거래되고 또한 모든 종류의 쾌락을 위하여 매춘부들, 포주들, 아내, 남편, 아이들, 주인, 하인, 생명, 피, 육체, 영혼, 은, 금, 진주를 비롯한 각종 보석 등등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이것들은 세상이 동경하는 것들이었고, 순례자를 유혹하는 것들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다. 크리스천은 이 모든 유혹을 이기고 죽음의 강을 건너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게 된다. 『천로역정』은 성도들이 가야 할 고향이 어디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세상의 영광과 쾌락이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땅의 유혹을 이기는 성화(聖化)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들어가게 될 천국이었다.
❚ 이명직 목사님의 '허사가’가 있다. 한국의 무디라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님(1900.7.4~1965.8.2)이 애창해서 더욱 유명해진 곡으로서 당시 성도들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다. 다소 허무주의적인 색깔이 베어져 있으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누구나 일생 중 한 번쯤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때일수록 잠시 잠깐 후에 가야 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지혜일 것이다.
❶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❷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 날 부러워해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❸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부귀영화 부럽지 않네 예수님의 신부될 것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❹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하늘나라 천군 천사 날 부러워해 영원토록 누릴 영화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음악 패러디(parody)의 일종인 콘트라팍타(contrafacta)의 방법으로 노래 가사가 바뀌어 우리에게 전해졌는데, 일본 해군 군가인 ‘용감한 수병’의 멜로디에 가사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곡에 얽혀있는 글이 있다.
❶ 이 고백과 가장 깊게 얽혀 있는 인물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최봉석 목사(일명 최권능 목사)이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던 전도자로 유명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평양 교도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본 순사들이 그를 회유하고 협박할 때,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이 고백을 입에 달고 살았다. ‘너희가 아무리 나를 가두고 때려도, 나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이기에 너희가 전혀 부럽지 않다’라는 영적 자존심이 담긴 선언이었다. 그가 모진 고문 속에서도 기쁨으로 불렀던 이 신앙의 고백은 후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❷ 개신교 장로이자 사회운동가인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의 삶에서도 이 구절은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하여 복지 사회를 꿈꾸던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이다. 김용기 장로는 평생을 비단옷 한 번 입지 않고, 고무신을 신으며 철저한 청빈의 삶을 살았다. 세상 기준으로는 가난하고 고된 삶이었지만, 그는 늘 당당했다. 실제로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 부러워 아니 하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라는 고백을 늘 입에 달고 살았으며, 이 정신은 가나안농군학교의 핵심 가치관이 되었다.
❚ 가수 최희준 씨는 1966년에 라디오에 하숙생이라는 연속극의 주제가 '하숙생'을 불렀다. 이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온 국민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면서 국민가요가 되었다.
❶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情)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❷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암으로 9년이나 투병 생활을 한 부인을 먼저 보낸 최희준 씨는 국회의원도 해 보았지만 그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는 성당을 찾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새 부인을 얻는다. 그러나 그도 향년 82세로 2018년 8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그가 부른 나그네 인생길이었다.
❚ 헨리 C.모리슨(Henry Morrison)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금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개척적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하였다. 이제는 늙은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 후 코끼리 사냥하고 돌아오는 데오도루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고 대통령이 내리자,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나간 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도 멎은 후였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선교사는 저녁노을 진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주님, 이것이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 저의 건강,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란 말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한 음성을 들었다. ‘헨리야,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의 유리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그렇다. 우리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약속의 네비게이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순례, 섬김의 순례, 그 영원한 사랑의 순례를 계속하여야 한다.
❚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한 귀족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을 본떠서 호숫가에 큰 저택을 지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음악을 몹시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이름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고용했다. 어느 여름철 그는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주했다. 드디어 축제가 끝났다. 단원들은 고향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런데도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 놓았다. 단원들은 악장에게 건의했다. 귀족에게 좀 휴가를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다. 악장은 단원들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의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드디어 발표회가 열렸다. 귀족은 시종 미소를 띤 채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주자들이 자기 연주가 끝나면,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서 슬그머니 악기를 들고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렸다. 4악장 맨 마지막에는 바이올린 연주자만 남았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아주 슬픈 가락으로 가냘프게 연주하고 끝맺었다. 그 귀족은 그제야 단원들의 마음을 곧 헤아렸다. 그래서 이튿날 단원 모두에게 원하는 휴가를 보내주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란츠 요셉 하이든의 교향곡 제45번, 일명 ‘고별교향곡’의 유래였다.
❚ 1919년 3.1만세운동이 끝난 직후였다. 평안도의 어느 도시에 있는 일본 헌병대의 대장이 부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호통을 쳤다. ‘만세 주동자들을 얼른 잡아 와야 될 것 아니야? 도대체 뭐하고 있어?’ 부하들은 시내를 한 바퀴 삥 돌고서는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때 만세를 불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또다시 호통을 쳤다. ‘이런 멍청한 친구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라도 잡아오면 될 것 아니야?’ 그러자 부하들이 반문했다. ‘누가 기독교인이고, 누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일요일까지는 기다려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헌병대장이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한심한 친구들! 기독교인들은 붙들고 물어보면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아. 그리고 그들은 만세를 불렀으면 불렀다고 정직하게 대답해. 그러니 가서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붙들어 와.’ 그렇다. 3.1운동 때 만세를 부른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만세를 불러서 희생당한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벗고 나면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길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떳떳하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살아간다.
❚ 어린아이들이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하고 딱지치기 땅따먹기를 하였다. 옛날에는 모두 그런 놀이를 하고 자랐다. 많이 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잃은 아이는 시큰둥해 있다. 딱지도 구슬도 다 잃어버린 아이는 아예 울고 앉아 있다. 많이 딴 아이에게 딴 것 중에 조금만 달라고 통사정해도, 다 딴 아이는 욕심 많게 하나도 주지를 않는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간다. 땅거미가 깔리면서 점점 어두워진다.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들이 나와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간다. 울던 아이들도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면서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서 안긴다. 모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돌아갔다. 그런데 딱지와 구슬을 다 따고 땅도 다 따먹은 아이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연연하다. 손에는 구슬과 딱지가 많이 있지만 그에게는 조금도 기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고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땅을 많이 가지려고 아우성을 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발버둥을 치며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인생의 밤인 죽음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때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생의 황혼이 되어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다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의 품으로 가는데, 아무도 불러 주는 이 없고, 갈 곳 없어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 케리 쿠퍼가 주인공이었던 영화가 있었다. 평화로운 마을에 악당들이 나타나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만행이 극에 달하자 신부 한 분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악당과의 결투에 나섰다. 그러나 언제나 당할 뿐이다. 대결전의 날이 임박했는데 서부의 사나이로 명성을 날리던 총잡이 케리 쿠퍼가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하였다. 이 낯선 객에게 악당들의 이유 없는 희롱과 공격이 진행되고 케리 쿠퍼가 이 싸움에 개입되게 되었다. 악당의 일당과 그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총잡이 케리 쿠퍼의 대결에서 악당들은 이미 그의 적수가 아니다. 그 일당이 추풍낙엽과 같이 쓰러지고 마지막 남은 악당 두목과의 결투의 장면, 서부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이럴 때는 석양이 뉘엿뉘엿 진다. 지평선 라인에 악당의 두목과 주인공 케리 쿠퍼가 한참을 서로 노려보고 있다. 그냥 쏴도 될 텐데 한참 노려본다. 마침내 양쪽 총에서 불을 뿜는데 아, 애석하게도 주인공 케리 쿠퍼가 쓰러졌다. 그러나 석양의 빛이 반짝하고 비치는 순간 늠름하게 버티고 서있던 악당의 허리가 구부정해지면서 달팽이 꼬부라지듯 무너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주인공에게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신부님의 품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는 주인공의 말이 퍽 인상적이다. ‘신부님! 신부님은 언제나 돌아갈 고향이 있으시지요. 저 같은 떠돌이도 신부님의 고향에 함께 초청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