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리근대화기의 교리해석 극복과 천도교 사후관 문제
여는 말
근래 천도교의 사후성령(死後性靈)에 대한 논의는 시의적절한 문제 제기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사후관(死後觀) 문제에 대해 여전히 관행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그러한 태도는 중요한 교리적 문제에 바람직한 연구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칫 불필요한 논란만 재생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고는 천도교의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함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2. 논리 전개의 접근 방법
대개 교리(敎理,dogma)라고 하면 한 종교의 이치와 원리(原理)로서 교조(敎祖)의 말씀이나 행적(行讀)으로부터 진리로 인정하고 있는 가르침의 체계이고, 철학(哲學.philosophy)이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을 생각하고 탐구해가는 학문으로 인간. 자연. 역사 등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 체계이다.
여기서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엄격히 말하여 교리상의 문제이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천도교경전』에 나오는 천령(天靈)이나 심령(心靈), 성령(性靈) 등은 교리의 핵심 논구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교리 공부를 한 사람들까지도 신앙의 진실한 내면세계에서는 정작 자기 자신의 사후성령 즉 개인의 사후성령 문제에 대해서 사람마다 각자 인식의 범위를 달리하고 있거나 모호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천도교경전』 내에 입각할 때 본체(本體)든 개체(個證)든 사후성령의 존재가 중요한 고려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목적인 지상천국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잘못 설명하는 과정에서 천도교는 마치 현세만을 중시할 뿐 사후성령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교리라고 회자(會炎)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체성령(個證性靈)의 존재 여부를 논함에 있어서 이미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바대로 무당의 초혼(招魂) 행위의 대상으로서의 혼백이나 천당-지옥과 같은 선천 기성종교의 내세관에 준거(準據)는 하는 것은 별개이므로 논외로 한다. 또 학자의 철학적 연구논문을 참고해야 할 사안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수운심법(水雲心法)상 『천도교경전』이나 스승님들의 법설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교리의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이런 묘연(渺然)한 문제에 접근할 때 가끔 교리상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동안 읽혀져 왔던 수많은 교리서(敎理書)들이 일제 강점기의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무리하게 시도된 철학적 협견(狹見)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3.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사후관 이해
신성사(神聖師)님 재세(在世) 시 직접 설법에 의한 교리의 설명체계와 그 이후 간접 추인하는 형식의 교리 설명체계를 이해할 때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위험한 단견(短見)에 사로잡힐 수 있음올 알아야 한다.
『천도교경전』에는 그 어느 곳에도 영성(靈性)의 본체(本體)만 있고 개체(個體)는 없다는 양분적(兩分的)교리 설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변증법적 논리와 20세기 철학사의 전체주의적인 논리와 속성으로 교리를 해석하려는 태도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교리 연구가 새로운 차원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포덕 47년(1906)으로부터 포덕 86년(1945)까지 약 40년 동안의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근대사상과 급격하게 접촉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교리 근대화 과정을 편의상 전.후기로 분류하여, 포덕 47년(1906)부터 포덕 60년(1919) 3.1 독립선언까지의 13년을 전기로 보고, 포덕 60(1919)년부터 포덕 86(1945)년 8.15 광복까지 26년을 후기로 구분해서 살펴보았다.
굳이 시기 구분을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시기에 천도교 내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하신 지강(芸江.양한묵) 선생과 야뢰(夜雷,이돈화) 선생이 이 양 시기의 교리 연구에 각각 가장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의 지난 100여 년은 사실상 교리연구의 정체(停滯)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교리근대화 전기의 사후관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下) 된 직후인 이 시기에는 아직 서양철학의 기반이 약하여 조선 사회 전반적으로 성리학적(性理學的) 색채가 짙게 깔려 있던 때이다. 이때 일본에서 서양의 근대사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지강(芝江)양한묵(梁漢默) 선생은 본래부터 그 자신이 해박하게 투리(透理)하고 있었던 성리학과 불교에 관한 전문지식을 함께 종합하여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철학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필자는 이 시기를 격의불교(格義佛敎)와 같은 격의동학(格義東學) 시기로 구분한다.
이는 포덕 48(1907)년에 ‘천도교중앙총부’의 이름으로 발행된 양한묵 저술의 『동경연의(東經演義)』가 그 당시 『동경대전』을 읽는 기준이 된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교서들이 모두 ‘천도교중앙총부’의 명의로 출판되었지만 1920년에 등사본으로 출간된 천도교회사 초벌원고(天道敎會史草稿)를 보면 다음과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08년 성사께서 양한묵에게 명하여 성훈연의(聖訓演義), 삼수요지(三壽要旨),
관감록(觀感錄), 도경(道經), 체리종약(體理宗約)을 편술토록 하였다. 또 1909년
양한묵에게 명하여 현야(玄夜), 정자공부(定字工夫), 대종선후(大宗先後), 이십
일록(二十一錄), 대종정의(大宗正義), 교지(敎志), 교사과요의(敎四科要義)
신언(神言)을 짖도록 하셨다.
이처럼 의암성사의 설법을 토대로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에 발행된 수많은 교리 문건들은 책임 진리과원(眞理課)과 현기사장(玄機司長)을 겸임한 지강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지강이 천도교 교리를 새롭게 풀이하는 여러 시도 가운데 철학을 심오하게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수운 대신사님이 「포덕문」 첫 장부터 강조하신 천주(天主, 한울님)의 의지적(意志的)인 성격과 시천주(侍天主)의 ‘주(主)’에 대한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는 당시 시국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다시한번 재고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동경연의(東經演義』 4쪽에는 '사람은 소분천(小分天)이고 사람의 성(性)은 곧 천(天)의 리(理)다‘ 라고 풀이했고, 7쪽에서는 ’종교는 천(天)의 대정신이고 사람은 천(天)의 소정신이다‘ 라고 설파한다. 이것은 마치 서양철학사에서 사람을 대우주에 대한 소우주라고 함으로써 우주와 사람을 가치상으로 동등하게 보려는 시각과 다를 바 없는 것이고, 또 사람인 소분천(小分天)과 한울인 대분천(大分天)의 공통 요소인 천(天)을 리(理)라고 함으로써 사람의 본성은 곧 사람의 리(理)라고 하는 성리학적(性理學) 견해가 곧 천도교 교리의 요체가 되어버리도록 하는 오해를 가능케 했다.
이렇듯 천도교 교리의 무리한 철학화 과정은,내 마음을 깨닫는다는 ‘각(覺)의 측면에 대한 이해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도직입적으로 ‘심(心)이 곧 천(天)’ 이라고만 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삼계(三界)는 오직 유일한 마음뿐 이라고 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입장과 ‘우주는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 라고 하는 육상산(陸上山,1139〜1192)의 주장에 혼돈되어 매우 알쏭달쏭한 감을 지울 수 없게 된다.
2). 교리 근대화 후기의 사후관
일제는 3.1 독립선언으로 무단정치(武斷政治) 대신 문화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때는 일본에서 18세기 서양의 계몽사상(啓蒙思想)과 19세기 서양의 실증주의(實證主義) 사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일본 동경대학 강단을 중심으로 서구 진화론(進化論)이 사상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 흐름은 그대로 국내 지식사회에 유입되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한편 포덕 60(1919)년 8월 19일 문화정책 시행 발표가 있은 지 13일 뒤인 9월 2일에 천도교의 장래를 암중모색해 오던 천도교 청년들은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라는 청년 단체를 만들면서 교회의 전위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다. 이때 교리 강연의 중심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야뢰(夜雷.李敎化)이며, 포덕 61년(1920) 6월 25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개벽』의 집필자 중 교리에 대한 직접적인 글은 야뢰가 도맡다시피 했다. 그는 지강의 ‘소분천(小分天)’이니 ‘우주정신’이니 하는 교서들의 내용을 더욱 발전시켜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등의 철학 용어를 받아들여 교리의 모든 것을 다윈주의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개벽』 1호에서 '진화는 곧 개벽’이라고까지 말하는 야뢰의 사고방식은 이렇게 서양의 근대사상을 천도교의 교리와 결부시켜 교리를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개벽』 2호에서 종교,철학, 과학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진리를 갖춘 것이 신(新)신앙이며 이 신 신앙은 동양 3교인 유.불.선 사상을 통일한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라고 암시한다.
그리고 천도교의 종교적 기본관념을 ①. 범신론(汎神論)에 입각한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 ②. 귀납론(歸納論)에 입각한 유.불.선 합일주의(合一主義) ③. 인내천론에 입각한 영육일치주의(靈肉一致主義)로 공식화했다.
여기에는 지극히 제한적인 일본 문화정치의 여파도 관련이 있어서, 물론 속셈은 달랐을 수도 있지만 당시 동경대학의 '다카하시‘가 쓴 『조선에 대한 3교 합일론의 역사』와 '우키다’가 쓴 『종교론』 가운데 “불교 유교 기독교가 통일되어 자연히 새 종교가 나온다”는 낙관주의적 사회진화론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개운치 않다.
그리고 『개벽』 6호에서는 인내천의 신(神)이란 일본 기자이자 소설가인 구로이와 루이코(黑岩周穴)의 '최후종교론_에 나타난 범신론(汎神論)상의 ‘실재(實在:스피노자의 substance)가 신이라고 한 것과 여합부절(如合符節)로 일치한다고 하다가, 『개벽』 7호에서는 우리 인간의 의식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건설한다는 신칸트학파의 입장을 취하면서 인간의 의식이란 대우주의 의식이 개체화(個體化)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기서 동학사상과 근대 서양철학이 과연 태생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이 시기에 근대 철학사상을 통해 천도교 교리를 풀이했다기보다는 천도교 교리의 이름으로 서양의 근대사상을 보급한 감을 씻을 수 없으며, 오늘날의 동학사상과 천도교의 교리는 교리대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3) 『동학지인생관』에서 급진 철학화에 대한 반성
천도교 교리발전에 평생을 바친 야뢰 이돈화 선생은 광복 2년 전인 포덕 84(1943)년에 그의 생애 최종 저술인 『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親)』을 펴냈다. 이 책에서 야뢰는 『신인철학』과 그 외 수 많은 저작들이 근대 서양철학 사상에 경도(傾倒)된 것을 반성하고 이 책에서 수운 대신사의 본뜻과 종교신앙적인 방향에서 또다른 입장을 정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야뢰는 그 『동학지인생관』의 제2편 4장 4절에 다음과 같이 사후관 문제를 설파하고 있다.
만약 인간 세상에 사(死)와 내세(來世)의 문제가 없다면 인생은 암혹 절벽에 직면한
무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죽은 후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생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으로서 내세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나는 내세의 존재롤 믿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우선 내가 사후생활을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겠다.
① 위안(慰安) 〈생략〉
② 성훈(聖訓) : 水雲을 포함한 모든 聖人의 敎訓 중에는 어느 것이든지 來世의
진리가 들어 있다.
③ 직각(直覺) : 래세 유무의 문제는 학자의 이론에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요 영웅의
언어행적으로 판단할 문제도 아니다. 오직 자아(自我)의 직각(直覺)으로 느낄
문제다. 나는 거의 직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대우주(대우주)는 무궁(無窮) 하다는 것 (有形과 無形)
㉡ 신은 전지전능(全知全能) 하다는 것
㉢ 무궁한 전지전능은 무소부재(無所不在)롤 의미한다는 것
㉣ 그러므로 영혼(靈魂)이 존재한다는 것
㉤ 영혼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개체영혼(個體靈魂)의 존재를 직각(直覺)케 되는 것
㉥ 따라서 인간의 내세는 있다는 것
㉦ 영계(靈界)와 현세(現世)는 반대일치(反對一致)에 의해 신의 이념으로 연결된다는 것.
이상의 주장은 그간 야뢰의 역작들이 헤겔의 변증법 이론과 다윈의 사회진화론, 스피노자와 신칸트철학파의 범신론을 거침없이 구사하며 천도 교리의 과학적 근대화에 주력하던 때와는 사뭇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없지 않다.
4. 경전과 교사. 의절에 나타난 영성(靈性)고찰
경전과 교사, 그리고 의절은 모두 천도교의 교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므로 이제 여기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언급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관련 항목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 「포덕문」 첫머리의 “천주조화지적 소연우천하야(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에 나타난 바와 같이 ‘천주'가 우주를 창조하신 확연하고 의지적인 조물자(造物者)로서의 성령임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포덕문」 천사문답(天師問答)에서 노이무공(勞而無功)한 한울님 말씀으로 ”여역장생 포덕천하의(汝赤長生布德天下矣)”라고 한 부분의 ‘역(赤)'자를 놓고 볼 때 한울님과 대자적(對者的) 입장에서의 ‘또한’은 ‘따로’라는 의미가 내재(內在)하는 것이며, 대신사의 성령(性靈)이 합세간(合世間) 출세간(出世間)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 오래오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사영기아심정 무궁조화금일지(神師靈氣我心定無窮造化今日至)" 라는 기도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3) 「영소(詠宵)」의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한울님 말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주사고형역유여(柱似枯形力有餘)’는 육신은 죽어도 법신(法身)은 죽지 않아서 오히려 그 영력(靈力)이 더 굳건히 남아 지탱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안심가」 결사(結辭)에 "한울님이 내몸 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내가 또한 신선되어 비상천(飛上天,죽음) 한다 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전지무궁(傳之無窮)” 하겠다는 것도, 대신사의 육신은 죽더라도 그 성령(性靈)은 죽지 않고 남아서 이 나라의 보국(輔國)을 간섭하시겠다는 표현으로, 이에서도 우리의 소박한 사후관(死後觀)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5) 「도수사」 결사(結辭) "귀귀자자 살펴내어 정심수도 하여 두면 춘삼월 호시절에 또다시 만나볼까"라 했다. 여기서 만나는 대상은 누구일까? 여기에는 분명히 본래의 조물자(造物者)인 한울님을 만난다는 것이 아니고 여천지(與天地)로 합기덕(合其德)해 계신 대신사님의 개체성령의 출세를 의미한다.
6) 「권학가」 8절에서 대신사께서 기독교의 사후관 비판을 하시면서 “부모 없는 혼령혼백(魂靈魂魄) 저는 어찌 유독 있어 상천(上天)하고 무엇하고" 라고 하신 말씀에는 이미 천도교적(東學的)인 의미의 사후성령(死後性靈) 존재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이 이미 담겨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7) 「홍비가」 결사((結辭)의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에서는, 무궁한 이 울과 무궁한 나의 존재는 무궁히 알아야만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즉, 나의 영성(靈性)은 무궁한 이 울 속에 무체성(無體性)으로 영원히 농축되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깨닫고 못 깨닫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8) 의암 성사의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을 살펴보자. ‘성령출세’란 사후성령(死後注靈)이 어느 특정한 곳에 한 덩어리로 질적 변화를 일으켜서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정령(精靈)이 항상 이 세상에 출세하여 표현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내가 육신이 살아 있을 때는 나의 영(靈)이 유형의 물체인 나의 몸에 의지해서 적극적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죽어서 유형의 육체가 사라지면 그 영은 그대로 현세에 남아 소극적 표현으로 섭리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인내천 심법(心法)에 의한 향아설위법(向我設位法)도 그 뜻을 좀더 좁혀서 설명하면 지나간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정령이 돌아오는 시대(天道敎的 來世)에 태어나는 수많은 자손과 후학들의 정령과 융합되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님들이나 스숭님들의 정령이 아주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이 세상에 출세하여 작용하고 계신다는 뜻이다(以身換性〕. 다만 성령을 수련(修煉)하고 수련치 못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석시차지견 금일우간간(昔時此地見 今日又看看)”이라는 시(聖師詩)도 의암 성사의 의지로 대신사의 성령을 초혼(招魂)해서 생긴 시(詩)가 아니고. 저절로 대신사의 성령(性靈,法身)이 성사의 육신에 의지하여(通하여) 나타난 성령출세의 현상인 것이며, 사후에도 성령은 장생(長生)하여 계신다는 것을 확연히 증명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9) 『천도교회사』 『천도교창건사』에 나타난 대신사의 현령(顯靈), 즉 해월 신사와 수운대신사의 영회(靈會)를 살펴보자. 포덕 8(1867)년 2월 해월 신사께서 울진군 죽변에 계실 때, “대도(大道)의 중임을 지게 한 것은 오직 천심(天心)에서 나온 것이니 당장 세상의 용납을 받지 못하더라도 괴롭게 생각지 말라."는 강화(降話)의 말씀을 듣고 곧 대신사의 현령(顯靈)인 것을 아셨다는 것과, 포덕 26(1885)년 상주 전성촌(前城村)에서 신사께서 ‘대신사순도향례식’을 마치고 난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대신사의 현령으로부터 지금부터 자취를 숨기라는 명을 받았다.” 하시면서 “멀지 않아 체포의 화가 미칠 것이니 각자 몸을 숨기라.” 하셨다.
이와같이 우리 천도교의 종교 신앙적인 순수한 심성 속에는 본체 성령의 철학적 관념보다는 한울님과 스승님, 그리고 조상님이라는 소박한 개체 성령출세의 이해를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5. 맺는 말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후문제’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천도교 신앙은 육신이 살아있는 현실만을 인정할 뿐, 사후의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거나,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본체성령(本體性靈)으로 환원(還元)해버리므로 사후에 개체성령(個體性靈)은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설사 그것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진실한 심성 속에는 허망하고 허무한 느낌을 심어 주게 된다.
천도교에서 인간 육신의 죽음을 환원' 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전에 나오는 말이 아니고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말이다. 즉 우주의 성령 속에는 무궁한 영적 실재가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교한 철학으로 성령의 개전일체(個全一體)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적어도 불연기연(不然其然)’의 인식 방법에 의한다면 알수 없는 불연(不然)이 불연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광복 후 사후성령에 관한 천도교의 사후관은 단 한 번도 진전된 것이 없이 불연(不然)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그동안 우리 손에 들리워진 교리근대화 과정의 산물로서의 분석철학적 교리해설서들이 천도교의 종교 신앙적인 사고력을 어느 정도 정체시킨 것도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개전일체’나 '신인일체(神人一體) 자타일체(自他一體)’의 천도교 근대화기의 교리 해석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 ‘본체와 개체’ ‘생전과 사후’ 어느 한쪽만을 긍정하고 어느 한쪽을 부정한다면 그것 자체로서 ‘만유일체(萬有一體)’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 성령(生靈)이 "본체와 융합 일치되어 개체의 성질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는 이론처럼 간단명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 철학적 사고일 뿐이다. 이런 말이 학문 연구의 주제로서 대학교수의 연구 발표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나 수련의 중간 단계에서는 어떤 토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핵심을 다루는 종교 신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성령을 단순하게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발간된 수많은 교서들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입각해서 다시 한번 현대적인 검증을 거침으로써, 수운탄신 200주년을 기점으로 지강 양한묵 선생과 야뢰 이돈화 선생 시대의 교리근대화 시기의 해석을 극복하고 '천도교 교리의 현대화라는 새로운 지평(地平)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포덕165년 6월 정암 주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