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請看千石鍾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非大 無聲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爭似頭流山
(지리산은) 하늘이 울려도 울리지 않는다오 天鳴猶不鳴
.......南溟 曺植 {題德山溪亭柱}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창작과 비평사, 1994)에서 재인용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智異風雲堂 洞
검을 품고 남주로 넘어오길 천리로다 伏劍千里南州越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一念向時非祖國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胸有萬甲心有血
.......남부군 총사령관 李鉉相이 남긴 漢詩
김명수, {지리산}(1990, 돌베개) 재인용
한 사람은 세상을 풍미한 儒學으로 지리산의 장엄함을 칭송하였고, 또 한 사람은 지리산 곳곳에 그의 이름을 깊이 새긴 빨치산이었다.
지리산은 이렇게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智異山, 地理山, 頭流山, 頭留山, 方丈山, 不伏山, 智利山, 赤狗山
지리산의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한자로 쓰는 智異山과 地理山은 글자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우리말의 音寫로 같은 말인데, '지리'라는 말은 산을 뜻하는 '두래'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두래는 ㄷ의 분음으로 '두리' '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 豆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에서 頭流는 백두산의 맥세가 흘러 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우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停留하였다 하여 頭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이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또 이와는 달리 산의 모습이 두리 뭉실 하다해서 두류산이라는 명칭이 나왔다고도 한다.
方丈山이란 명칭은 발해만 동쪽에 있는 三神山의 하나로 중국의 전설에서 기원한다.
한편 不伏山이란 이름은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데, 이성계가 창업의 뜻을 품고 우리 나라의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릴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燒紙가 오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성게가 등극한 뒤 지리산을 不伏山, 또는 反逆山이라 부르고 역적을 지리산록의 전라도로 보내는 律을 정했다고 한다.
智利山이란 이름은 문수사상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따왔다고 한다.
赤狗山이란 이름은 가장 가까운 시대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여순 사건 이후 지리산이 빨치산의 주요 무대가 됨으로써 붙은 이름인데, '빨간 개', 속어로 그대로 표현하자면, '개새끼 같은 빨갱이들이 판치는 山'이란 뜻일 것이다.
지리산의 여러 이름들 중에서 가장 비속한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 한번 곱씹어 볼 만한 이름이다.
백두대간이 용출해 낸 웅장한 山
백두대간이 뻗어 내리다 그 중추를 소백 줄기로 뒤틀면서 용출해 낸 웅장한 山, 지리산.
멀리 바다 건너 한라산과 겨루고 있지만, 그 위용을 보자면 짝할 바가 아니다.
1천 미터가 넘는 고봉만 해도 수십개 씩이나 되고 둘레가 8백리, 1억 3천만 평 이상 되는 이 지리산은 경남, 전남북의 3개 도와 5개 군 15개 면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어 그곳의 사람들과 무수한 동식물을 보듬고 있다.
이렇게 덩치 큰 이 산은 산맥이란 이름이 더 적당해 보이는데 일찌기 서산대사가 가장 장엄한 산으로 일컬은 바도 있고, 이에 걸맞게 우리나라 최초로 1967년 12월에 국립공원 제 1 호로 지정되었다.
이 산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산세가 높아 대륙성 기후를 띠고 있다.
온 산이 花崗斑岩으로 되어 있고 斑點을 구성하는 長石斑紋은 직경 10cm 내외의 것이 흔히 눈에 띄는데, 이러한 화강반암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암석학적 현상이라고 한다.
이 산의 서남쪽을 外지리산, 북쪽을 內지리산이라고 부르는데, 이번에 우리가 가는 지역은 북서쪽의 뱀사골 계곡 쪽과 서남쪽의 외지리산 지역이다.
뱀이 많은 골짜기--뱀사골 반선마을, 전적기념관
실상사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도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함양쪽으로 향하고 하나는 뱀사골쪽으로 향한다.
이 뱀사골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올라오면 뱀사골 반선마을에 이른다.
뱀사골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설이 분분하나 그 대부분이 뱀 이야기에 관련되어 있다.
그중 재미있는 것을 하나 들어보면, 지금은 전적기념관이 되어 있는 곳에 예전에 松林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가 없어져 마을 사람들은 부처가 되어 승천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게 된 서산대사가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칠석날 장삼 속에 극약 주머니를 달아 주지스님에게 입혀 예년처럼 독경을 읽도록 하였는데 드디어 새벽이 되자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큰 뱀이 송림사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고 이 뱀의 뒤를 쫓아가 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었고 그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뱀 이야기에 걸맞게 실제로 이 골짜기는 한동안 뱀이 많이 잡히는 골짜기로 유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뱀을 찾는 사람들 등쌀에 뱀들이 숨어서 그 이름도 많이 퇴색했다.
행정구역으로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라고 불리는 반선마을은 여순 사건 이후 지리산에 입산한 '반란군' 지도부, 김지회 홍순석 등이 사살되어 궤멸당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전적기념관을 세웠다고 하는데,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옛 송림사 터에 자리잡은 이 기념관은 1979년, 약 2억 원의 예산으로 건립되었다.
제 1 전시실에는 지리산 전적에 관한 각종 자료와 사진, 모형, 그리고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이 사용하던 장비와 물품이 전시되어 우리의 흥미를 끌고 제 2 전시실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각종 전적 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어 아주 '훌륭한 反共교육의 場'으로 활용되고 있다.
훌륭한 반공교육의 장, 그러나 올바른 역사교육의 장은 될 수 없는 곳, 통일이 된 미래의 우리 나라를 생각해 보고 과거에 이 산자락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관광지로서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고장, 반선마을을 뒤로하고 이제 달궁으로 향한다.
달의 궁전, 달궁
1928년 7월 대홍수 때였다.
심원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달궁마을을 덮쳤다.
다음 날 마을 200m 아래쪽에서 냇물에 휩쓸려 패인 왕궁터를 보고 모두가 놀랐다.
거기서 나온 다섯 아름의 귀목나무 그루터기와 새까맣게 변한 감나무는 둘레가 네 아름이 넘었는데 썩지 않고 있었다.
직경 1.5m 정도의 질그릇 시루 하나, 청동제로 보이는 숟가락 수십 개, 銅鏡 두 개, 활촉과 같은 쇠붙이 들리 헤쳐진 땅 속에서 나왔다
달궁 마을 토박이 정종근 노인의 증언.
최화수, [지리산]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3)에서 재인용
남원군 산내면 달궁 마을 일대는 북방의 기마족이 남하할 무렵, 세력이 약해진 마한의 한 왕의 궁궐터였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때 도성을 쌓는 일을 감독했던 황장군과 정장군의 수비성이 있었던 봉우리를 각각 그들의 성을 따서 황령과 정령이라 부르고 그것이 지금 반야봉 좌우의 두 봉우리라 하는데, 그 근거로 서산대사가 쓴 [寺記]를 제시한다.(김경렬, {다큐멘터리 지리산} 2, 1988)
아직 학계에서 확인된 바는 없지만 이것을 인정한다면 역사적으로 지리산이 알려지는 최초의 시기는 이때가 될 것이다.
산골의 궁벽한 이곳에 자리잡은 마한의 한 세력. 우리는 아주 쉽게 마한의 여러 세력들이 점차 백제로 포섭되었다 라고 배우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좀더 무거운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맺인 한은 구름으로 피어나고--노고단의 운해
지리산 10경이란 것이 있다.
지리산 등산 지도를 처음으로 제작하여 배포했던 구례의 지리산 산악회에서 1972년께 발표한 '지리산 10경'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 지리산의 10경은 다음과 같다.
① 천왕 일출: 해발 1915m의 천왕봉에서 맞는 일출의 장관
② 稷田 단풍: 지리산 제 1의 활엽수림 지대인 피아골의 단풍을 말함.
③ 노고 운해: 지리산 서쪽 영봉 노고단에서 지켜보는 구름 바다
④ 반야 낙조: 반야봉에서 지켜 보는 낙조의 경건한 모습
⑤ 벽소 명월: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인 벽소령에서 맞는 달
⑥ 세석 철쭉: 5월 하순∼6월 초순에 걸쳐 해발 1600m의 세석고원에서 벌어지는 철쭉 축제
⑦ 불일 현폭: 쌍계사 동북쪽 협곡의 백 척 단애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⑧ 연하 선경: 세석 고원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의 선경
⑨ 칠선 계곡: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
⑩ 섬진 청류: 구례 하동의 지리산 산자락을 안고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의 푸르고도 맑은 강물
이런 것은 매우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것들이라 여기 이것들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나은 것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들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적어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리산 10경을 지루하게 서술한 이유는 노고단의 운해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달궁에서 성삼재 종단도로를 타고 노고단 쪽으로 오르게 된다.
성삼재 도로를 타고 가면 구름이 내 몸 위에 군림하다가, 어느새 나를 둘러싸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성삼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약 3.7km 정도의 완만한 길을 걸어서 해발 1,507m의 노고단에 오르면 드디어 구름이 내 발밑에 융단처럼 깔리는 장관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는 지나치기만 할 뿐 노고단에 오르지는 않으니 노고 운해의 장관은 못 보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다시 언제라도 이 지리산을 찾을 기회가 있는 분들은 꼭 한번 노고 운해를 경험해 보라도 권하고 싶다.
이 노고단에는 1930년대에 서양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이 50채 가량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는 금강산이나 묘향산을 마음대로 드나들던 시절이었는데 유독 이곳에 거대한 별장이 들어선 것만 보아도 지리산의 아름다움이 어떠한지 여실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당시의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지금은 도로가 나 있지만 당시로서는 걸어서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 노고단까지 조선 사람들이 지는 가마를 타고 가는 의젓한(?) 서양 선교사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 험한 산길을 가마를 지고 올랐던 그 가마꾼을 생각한다면 '역시 지리산은 아름답군.'하며 선교사 별장을 생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별장들이 남아 있지는 않다.
여순사건 와중에 이 별장들은 불타 버렸고 서양 선교사들은 '지리산의 시원한 피서'를 잊지 못해 전란 뒤 왕시루봉에 새로운 목조 건물의 별장촌을 건립해서 지금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
백설공주 얘기책에 나올 것 같은 소박한 나무집들이라고 하는데, 지금이야 우리 나라에도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왠지 씁쓰레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의 옹졸한 생각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민족통일 대동 장승 굿
1988년 11월 6일 노고단 일원에는 수십 개의 오색만장이 티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수 놓으며 전국 도처에서 모여든 문화패, 탈패, 놀이패들의 신명나는 한판굿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민족통일 대동 장승굿'.
1980년대 들어서 각 문화운동 부문의 일정한 성과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연희예술 형식의 종합을 이루어낸 행사였는데, 이 행사의 직접적 계기는 박일민(장승 제작자) 씨의 장승 굿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열정에서 비롯됐다.
이 대동 장승 굿은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점차 올라가며 민족의 통일과 해방을 기원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1989년 5월 14일에는 문경새재 제 1 관문에서 두 번 째로 올렸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 한다.
이런 장승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의 운봉 석장승을 설명하면서 많이 얘기되었을 것으로 보고 생략하는데, 장승이 원래 공동체의 집단적인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때 이런 장승 굿은 장승의 현대적인 계승을 이루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도 이런 '물건'을 미신이나 우상물로만 간주하는 某某한 종교단체의 짓인지, 통일과 해방이라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는 무리의 짓인지, 6개월 만에 이 '민족통일 대장군'과 '민중해방 여장군', 두 남녀는 전기톱질을 당해 발목이 잘리고 심원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승에 대한 신앙은 공동체를 수호하려는 의지와 협동정신을 성원들 스스로 재차 다지는 대동사상의 표출이지 '나무장승'에 대한 맹목적 예배가 아니다."
행사 당일 주최측에서 배포한 자료집에 나오는 한 귀절이다.
개발과 보존, 그 역함수의 관계
쉽게 성삼재 종단도로를 타고 노고단에 오른 것은 좋았는데, 꼭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개발과 보존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 이래 지리산은 개발의 광풍을 타게 되었다.
각종 도로가 확장되고 포장되며, 주차장을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성삼재 및 정령치 종단도로이다.
성삼재 종단도로는 지난 1985년 IBRD 차관 등 67억 원의 예산으로 착공, 1987년에 완공되었다.
원래 1960년대 군 작전용으로 비포장으로 뚫렸던 이 도로가 1980년대 들어 관광도로로 탈바꿈했고 성삼재에는 3,000여평의 대규모 주차장까지 마련되었다.
이 도로가 야기한 문제는 매우 크다.
서북 능선이 관광 행랑객으로 번잡해 지면서 지리산은 아파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마구 버리는 쓰레기에 당국에선 거의 손을 든 상태이고 이 도로 주변의 생태계는 큰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과연 이 도로 개설의 타당성이 신중하게 검토되었는지. 자연 생태계 변화에 대한 사전 예측과 그 대비책이 제대로 세워졌는지, 노고단 일원의 부차적인 황폐화 현상에 대한 예측은 있었는지. 도로 개설과정에서 집채같은 바위 덩어리를 달궁과 심원계곡으로 무차별 굴러내린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지리산 개발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
지리산의 척추에 해당되는 벽소령을 관광도로로 연결하는 벽소령 종단도로가 살금살금 진척이 되고 있고 내원리 일대에는 양수 발전소가 계획되고 있으며, 중산리-문창대 케이블카 설치가 계획되고 있다.
소위 높은 자리에서 이런 일들을 결정한다는 분들은 오로지 얼마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가가 문제인 듯하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많은 유적들, 아파하는 산, 사라져 가는 동식물. 한창 요새 떠들고 있는 환경보호와 이 산은 무관한지.
후대의 역사책 관광 안내책에 이렇게 쓰여지지는 않을까?
"반만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이 멋진 산자락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지금 이 산의 생태계를 되살리고 곳곳의 역사유적을 발굴 정비하는 데에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생태계 회복에는 한 세기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여겨지며 역사유적은 이미 자취가 없어진지가 너무 오래되어 다시 정비한다 해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는 거의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華嚴寺가는 길
산을 차를 타고 넘을 때면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다고 한다.
꼬불꼬불 성삼재에서 내려오면 이제는 행정구역상으로도 전라북도 남원 군에서 전라남도 구 례 군으로 바뀐다.
구례군은 이렇게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을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전남 곡성군을, 남으로는 광양군을, 동쪽으로는 경남의 하동군을 이웃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런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 군은 삼국 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밀고 당기며 싸우던 격전지가 되었고 그 뒤에는 전라북도 남원과 전라남도 순천에 번갈아 들면서 행정구역의 변천이 매우 심했던 곳이다.
이 군은 현으로서 남원부와 순천부에 번갈아 들기를 몇 번 한 끝에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고 1897년에 전라남도에 속하게 될 때까지 전라북도에 들어 있었으니 '골수' 전라남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례군은 그 땅의 78%가 산지로 흔히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의 영향으로 생각하기가 쉬우나 실제로는 지리산 계통과 백운산 계통의 것으로 나뉜다.
그러나 광양 백운산 계통은 아랫녘의 조금에 지나지 않으니 지리산만을 내세워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구례군에 접어들면 천은사가 기다리는데, 이 절은 9세기 경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한 것으로 한때는 수도하던 승이 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의 거의 모든 절이 이렇다.
적어도 임진왜란과 한국전쟁(48년 이후의 빨치산 투쟁을 다 포함해서) 둘 중의 하나 때문에 거의 소실된 적이 있고 어떤 절들은 이 둘의 참화를 다 겪었다.
경치 좋고 물 산 많은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것이 罪였는지 이 천은사는 규모가 크거나 볼 것이 많은 절은 아니나 아담한 규모로 분위기는 지리산 절들 중 제일 낫다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언제 기회 닿으면 가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천은사 근처에는 梅泉祠堂이 있다. 구례의 유지들이 매천 황현이 순절하자 성금을 거두어 세운 사당으로 이 사당 앞에는 매천의 초라한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매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앞의 인물 란에서 하였다, 이러저러한 볼만한 곳들을 뒤로하고 화엄사 가는 길로 접어 들면 우측 계곡 건너에 백색의 프라자호텔이 보이고 얼마 안 가 다시 우측에 국립공원 남부관리사무소 건물과 南岳祠가 있는 곳이 나온다.
남악사는 매년 4월 20일이 되면 군민들이 모여 藥水祭를 지낸다고 하는데, 南岳은 신라시대의 5岳중의 하나로 지리산을 일컫는 말이었고 그후에 5악의 개념이 바뀌었을 때에도 지리산은 남악으로서 의연히 그 자리를 지켰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곳에 壇을 쌓고 산신제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후 1456년(세조 2)에 남악사를 짓고 國泰民安의 제를 지내왔으나 1908년에 폐사되었다가 1969년 郡에서 재건하였다.
아마 이 화엄사 계곡은 지리산 어느 계곡보다도 번화한 곳일 것이다.
화엄사 뒤로 노고단까지 오르는 약 10km의 등산로는 발의 피로가 유별나게 많이 느껴지게 하는 돌계단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리산 종주 산행에서는 반드시 이 구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많고 巨刹인 화엄사가 있기도 하여 관광객들이 꼭 들르기도 하여 호젓한 느낌보다는 번잡함이 더 우세하다.
그러나 볼 만한 유물 유적을 거치지 못해 굶주려 있는 우리 눈을 위해서라면 각황전을 비롯한 국보 3점과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을 지니고 있는 이 화엄사는 좋은 踏査地가 될 것이다.
이제 포장도로가 끝나고 미려한 노송과 전나무가 빽빽한 길을 조금 오르면 화엄사가 우리를 반긴다.
하나는 곧 전체요, 전체는 곧 하나이니--華嚴寺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혹은 그 후까지도 華嚴思想이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圓融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華嚴. 이러한 사상은 통일국가의 상징이기도 하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기에 크게 대두되곤 하였다.
화엄사는 신라시대에 이런 화엄사상을 펼친 대표적인 사찰 중의 하나였다.
신라시대에는 華嚴十刹이라 하여 전국의 화엄종 사찰 10군데를 꼽아 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부석사와 이곳 화엄사이다.
화엄사는 8∼9세기 경에 창건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지금의 사적기들은 모두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緣起조사가 세웠다고 하나 현존하는 이곳의 석조물들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고 여러 의문점 때문에 이 설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이런 의문은 1979년 신라 경덕왕대의 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는데, 이 사경의 발문에 연기는 皇龍寺 승려로서 이 사경을 만든 실제 인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뒤 이 절은 신라 말 道詵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나말 여초의 禪師들이 화엄을 공부한 경력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 중 많은 수가 이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이 화엄사는 전혀 '퇴색하지' 않고 번창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화엄사는 그 위치를 의연해 지켜왔다.
그러던 화엄사가 가장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 완전히 소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후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가 중건하기 시작했고 1702년(숙종 28)에는 벽암의 뜻을 이은 계파 스님에 의한 각황전을 중건하는 등, 몇십 년에 걸쳐 꾸준한 중건이 계속되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신라 말 화엄학이 南北岳으로 나뉘어 대립할 때, 이 절이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이래로 수많은 고승이 이곳을 거쳐가고 그 종풍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름 있는 유물에만 쏠리다 보니 절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일쑤고 절의 역사를 다루더라도 창건기, 중건기 정도만 서술하고 만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이 어찌 세속의 역사와 관계가 없겠는가.
화엄사도 예외는 아니고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식량 같은 것을 이곳에 저장해 두기도 하였다고 한다.
절의 규모가 크기도 하고 구례 읍에서 차로 10여분 정도의 거리며 여차직하면 노고단 쪽으로 쉽게 오를 수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20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다행히 戰禍를 피할 수 있어 조선 중후기의 건물들이 훌륭히 남아 있으나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암자는 거의 소실되어 버리고 몇 안 남아 있다고 한다.
자 이제 화엄사의 역사는 그만 얘기하고 유물과 다른 '기타 등등'의 이야기를 해야 겠다.
근자에 새로 새웠다는 일주문을 지나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얌전히 선 불이문이 있는데, 옛 일주문이다.
언덕진 길을 오르면 오른편에 중창주 벽암 대사의 비가 서 있고 바로 금강문에 들어서고 또 그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천왕문 위로는 높다란 축대를 쌓아 법당을 비롯한 중심 건물을 세웠고 축대 아래쪽에는 생활 공간을 두어 확연히 구별된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축대 위쪽 불전 공간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널찍한 마당을 영산전, 범종각, 보제루, 운고각, 적묵당이 동남으로 막아 둘러선 사이에 대웅전 쪽으로 양 탑이 서 있고, 다시 서북으로는 키가 넘는 축대를 단단히 쌓아 올려 대웅전과 각황전을 비롯한 원통전, 나한전, 명부전이 서 있다.
축대 위 정면으로는 남향으로 대웅전이 서고 서쪽으로 동향의 웅장한 각황전이 자리잡아 서로 위용을 자랑한다.
흔한 구도는 아니지만 금산사의 대적광전과 미륵전이 이와 흡사한 구도라 하니 작년 봄 답사의 기억을 되살려 보길 바란다.
우선 건물들을 설명하자면, 절의 주 건물인 大雄殿은 17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보물 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건물로 각황전 다음가는 큰 건물인데, 규모 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는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을 수 있다 한다.
특별히 문화재 딱지를 붙인 것은 아니지만 절에 왔으면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지 정도는 봐야 할 듯하여 대웅전의 부처님들을 설명해 보겠다.
화엄종의 주존은 法身佛, 즉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데, 이곳에도 역시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좌우로 모셔 法 報 化 삼신불을 이루고 있다.
이런 식으로 삼존불을 이루는 것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법보화의 삼신불을 비롯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모신다던가(송광사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처님 한 분과 보살 두 분을 모시는 1불 2보살의 형태를 띠는 것도 있고 이외의 여러 파격적인 구성이 있다.
아까 비로자나불이 법신불임은 말했고 다른 부처님들을 보자면 노사나불은 보살로 있으면서 원과 행을 닦아 얻은 인연으로 이룬 報身이라 하고 보관을 쓴 보살상으로 표현하였고 법신 오른쪽의 석가모니불은 중생을 계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몸을 나타내 보인 化身佛이다.
이 삼존불들은 아마도 중창 당시에 빚어진 듯하다.
覺 皇 殿
화엄사 각황전은 이름도 너무 유명하여 따로이 설명할 게 무에 있을까 싶다.
일단 절에 들어섰을 때 그 위용과 고색창연함으로 사람을 자연스레 압도하니 말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 형태로 지어진 이 건물은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기품을 지닌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원래는 장륙전이란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숙종이 사액하여 각황전이란 이름을 내렸다 한 다.
이 각황전 중건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
벽암대사의 문인이었던 桂坡대사는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중창 불사를 시작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지원을 얻어야 할지 막연하여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래서 밤새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떠나서 맨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이에 용기를 얻어 다음 날 아침 아무도 몰래 절을 나섰는데, 한참을 가다 보니 매양 절에 와서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거지 노파가 절 쪽으로 걸어왔다.
저 누더기 노인이 어떻게 시주를 하겠는가 싶기는 하였지만 계시를 생각하고 그 노인에게 시주를 부탁하니 노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얘기하며 하루 내 간청을 계속하자 이에 감동된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큰 서원을 발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불사를 성취하리니 문수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곁에 있는 늪에 몸을 던졌다.
몇 년 후 걸식을 하며 서울에 나타난 대사는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 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대사를 보자마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매달리는 것이었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 않았었는데 대사가 안고서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펴졌고 그 안에 장륙전이란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륙전 건립을 허락하였다.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었으니 이 설화가 사실에 맞지는 않다.
그러나 장륙전 상량문을 보면 대 시주로서 왕자 연잉군(英祖)이, 성조 대 시주로서 그의 모친인 숙빈 최씨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왕실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인지 주 건물인 대웅전보다 이 건물이 크고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지나 보다.
건물은 이 정도로 설명하고 이곳의 석조물들을 설명해야 할텐데, 설명하자 하니 가슴만 답답하다. 왜? 너무 많으니까!
일단 화엄사의 명물, 四獅子 三層石塔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각황전 옆에 나 있는 108개의 계단을 오르면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탑과 석등이 나온다.
이것들이 있는 이 언덕을 孝臺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석등과 석탑에 얽힌 설화 때문이다.
이 탑은 창건자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세웠다고 하는데, 네 마리의 사자가 기둥처럼 버티는 그 가운데에는 중심기둥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이는(사실은 머리가 닿아있지 않아서 기둥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僧像이 연기조사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석탑의 앞에는 배례석이 놓이고 이어서 석등이있는데 상부 화사석 부분은 등으로서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으나 간석 부분을 삼각형의 세 기둥 속에 한 무릎 꿇고 한 손에 공양기를 들고 있는 승려의 조각이 있는데 이가 바로 연기조사라는 것이다.
원래는 사리탑에 대해 공양을 올리는 승려의 형상을 생긴 것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기 조사의 효성으로 윤색된 듯하다.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신라 이형탑의 걸작이다.
열두 천인을 조각한 하층 기단과 3층의 탑신석 상부는 정형 석탑과 전혀 다를 바 없으나 상층 기단부를 판석 대신 네 마리 사자가 네 귀퉁이에서 연화좌 위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연화대를 받쳐 그 위에 실린 탑신부를 받들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불국사의 다보탑은 탑신부까지 다양한 조각으로 변용시켰지만, 이 사리탑은 탑신부를 정형 그대로 두어 간결한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네 마리의 사자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사의 喜怒哀樂이라 한다.
이렇게 길게 설명했는데도 아직 설명해야 할 보물들이 줄을 이었다.
이 보물들은 간략하게 설명해야 겠다.
東五層石塔(보물 제 132호) :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이 탑은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에 의해 조성된 화강석 석탑이다.
높이 6.4m의 이 탑은 일명 證明塔이라고도 부른다.
탑신은 옥개와 옥신이 각각 1石으로 되어 있고, 초층 옥신은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상당히 중후한 맛을 나타내주고 있다.
2층 탑신부터 5층 탑신까지 줄어드는 비율이 상당히 큰 편이어서 서 탑에 비하면 크기는 거의 비슷하나 엉성한 느낌을 준다.
西五層石塔(보물 제 133호) : 대웅전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동 5층 석탑과 같은 시기에 도선국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동 5층 석탑보다는 그 彫飾이나 정교성이 뛰어나다.
초층 기단 한 면에 3각 4면에 모두 12구의 12지 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층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긔 8부중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제 1층 탑신에는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어 상하에 장식이 많고, 12지 신상이 조각되어 있는 그리 흔치 않은 탑으로 秀作이다.
圓通殿 앞 獅子塔(보물 제 300호) : 원통전 앞 영산홍이 붉게 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자탑은 상층 기단이 이 탑에서 가장 특징 있는 부분으로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하여 4사자 3층 석탑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그 조형의 기술이 그를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사자의 조각 역시 둔중하고 섬세한 맛이 없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華嚴石經(보물 제 1040호) : 이 석경은 의상대사가 화엄 10찰을 전교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왕명으로 화엄사 丈六殿(지금의 각황전)을 건립하고 그 사방 벽에다 석각 화엄경을 둘렀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이 석경은 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당시 장륙전이 타면서 파손되었고 계속 방치되다가 일제시대에 각황전을 해체 수리했을 때 1차 정리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흩어졌다가 1961년에야 겨우 정리 되었다.
글씨는 쌍계사의 진감국사비를 닮았으며,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는 말도 전해온다.
계속 지방문화재로서 방치되어 오다가 1990년에 지리산 자락의 마지막 보물 제 1040호로 지정되었다.
화엄사의 역경을 잘 나타내 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에 서린 빨치산의 자취-오미리 운조루
화엄사에서 나와 하동 포구 쪽으로 19번 도로를 타고 약 5km 쯤 달려가면 기름친 들판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 사람들은 구만들(九灣坪)이라 부르는 오미리 금내리 등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이곳이 뭐 대단한 동네랴 싶겠지만, 이곳이 사실은 명당 자리의 하나인 금가락지터(金環落地形)라 한다.
옛 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 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性 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 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 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고 있다.
구례 금환락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양택지, 雲鳥樓.
이 집을 지은 사람은 三水公 柳爾胄였다.
그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에서 나서 28세 되던 1753년(영조 29)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가 이 오미리와 인연을 맺은 것도 낙안군수 시절이라고 한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원래는 이 유씨 집안의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 으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집의 건축적 특징은 누마루 방이나 누다락 방을 두어 스케일이 웅장한 궁전 주택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공포와 같은 장식적 의장을 생략하여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호남에서 보기 드문 아흔 아홉 칸 대저택.
이곳을 우리가 찾은 이유는 무엇인지,....
한 집안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역사의 큰 줄기를 좀더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법이다.
이 문화 유씨 종택은 명당 덕을 보았는지 대대로 부와 명예를 누려와 창건주 유이주가 후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남긴 기록을 보면 최소한 78칸에서 100여 칸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한 때는 100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기울대로 기운 집안인데, 일제 식민 통치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기고 부터 시작되었다.
그래 지금은 건물은 60여 칸으로 허물어졌고 농토는 30여 마지기 정도로 흩어질 대로 흩어졌다.
더욱이 아홉 번째 종손이었던 종숙 씨(현 주인)의 형 종택 씨는 여순 사건 때 연루되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한다.
여순 사건 때 김지회 부대가 문수리골에 거점을 두고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때 어느날 밤 오미동 마을 전봇대 일곱 개가 줄줄이 잘려 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군경의 통신망을 끊어 놓기 위한 빨치산들의 작전이었는데, 다음 날, 종택 씨를 비롯한 오미리 청년들이 빨치산과 내통하는 좌익으로 몰려 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편이다.
이 집의 행랑채는 그 당시 빨치산들이 쉬어가던 아지트로 쓰였다고 하는데, 이 집에 내려오던 보검은 당시 김지회 장군이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혼란하던 시기에 이 저택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혼란의 와중에 가보로 내려오던 많은 유물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데, 그래도 秋史 글씨의 병풍도 있고 이곳에서 소장해 온 많은 典積들은 근대사 연구에 있어 많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다.
운조루 누마루에 올라 너울거리 듯 눈 앞에 펼쳐진 오봉산을 보며 명당 자리에 깃들인 興亡盛衰를 생각해 본다.
지리산의 미녀와 의병전쟁, 그리고 빨치산--연곡사와 피아골
오미리를 나와 구례에서 하동 포구 쪽으로 내려가다 전라남도 동쪽 끝에 있는 지리산의 마지막 골짜기, 피아골로 향한다.
외곡 마을에서 연곡사까지 가는 길에는 수십 겹의 계단을 이루며 빈틈이라고는 없이 촘촘하게 일구어진 다랑이 논들이 있다.
이것도 장관이라면 장관이겠지만, 이 논들에 서린 질긴 생명 줄들을 생각한다면 여행객 티를 내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燕谷寺는 화엄사를 연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사찰지에는 진흥왕 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화엄사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듯하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연기조사는 화엄사를 오나공한 후 이곳을 지나다 연못이었던 법당 자리에서 제비가 노니는 것을 보고 상서롭게 생각해 도량을 앉혔다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燕巢라는 眞穴있다고 풍수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라-고려 초까지는 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처음 종풍이 단절되기 시작해 그후로는 혼란기 때마다 예외없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처음 종풍이 단절된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를 휩쓸고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로 넘어오던 왜적이 연곡사 입구의 석주관에서 전라도 의병과 접전을 벌였는데, 이때 석주성이 무너지면서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연곡사는 불타고 만다.
지금 이 석주관에는 이때의 순절자들을 기리는 칠의단이 있다.
임란 후 인조 5년 소요대사가 복구하였지만 한말 의병들은 근거지가 되면서 다시 불탔다.
1907년 의병장 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을 비롯한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일군의 방화로 불타 버린 것이다.
그 뒤 또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될 후, 사찰 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 1965년 1981년에 중건되었다.
이렇게 '당할 대로 다 당해 버린' 연곡사가 지닌 매력은 그 고난의 세월을 말없이 인내한 부도탑들이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 부도들인 이 탑들은 그 아름다움과 함께 시대적 흐름에 따른 조각수법의 변모를 보여 주고 있어 마치 부도 학습장을 방불케 한다.
우선 제일 멋있는 부도는 동부도이다. 국보 53호로 지정되어 있는 약 3m 높이의 이 부도는 연곡사에 있는 나머지 서 북부도와 비교해 볼 때 그 형태가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의 부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는데, 9세기 경 만들어진 것으로 쌍봉사 철감국사 부도와 함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구름 속을 나는 용이 밑을 바치고 있고 그 위에는 꼬리를 물고 있는 사자와 애교 스러운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고 다시 16장의 연꽃으로 겹겹이 피어 올린 상대석에는 8각 기둥이 배치됐고 그 속에 극락조 가르빙가가 춤추며 무악을 연주한다.
사리가 내장되었을 탑신에는 열반과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이고 각 면에는 꽃수레를 탄 신선과 보검을 든 사천왕들이 호위를 하고 있다.
지붕 돌은 돌로 깎은 여덞 ㅉ의 기와지붕이 궁전처럼 호화롭고, 하늘을 향해 솟은 상륜부 또한 눈부시다.
상륜부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이 날아오르듯 새겨져 있는데 저물녘 잔광이 스러질 때면 살아서 날개를 퍼덕이는 듯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런데 누군가 그 새의 머리를 떼어 가고 없으니. 아쉽기도 하고, "하필이면..." 하는 생각도 들고.
동부도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의 생애를 떠받치고 있는 탑비가 있었는데, 碑身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에는 역시 아름다운 조각에 드는 작품으로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는 한쪽 발톱은 강한 동감을 느끼게 하고 등 무늬도 통상적인 6각형의 甲文이 아닌 유려한 파상곡선의 날개로 처리되어 있어 파격미를 느끼게 한다.
동부도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북부도는 동부도에서 산길을 따라 100m 정도 언덕길을 오르면 볕 좋은 양지 쪽에 있다.
이것도 누구의 부도인지 알길은 없고 다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하대석을 연화문으로 처리한 점과 상륜부의 봉황의 위치가 연꽃 봉우리 위로 올라 앉았을 뿐 크기나 형태, 조각수법 면에서 동부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러한 부도의 이어짐은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된다.
대웅전 서쪽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와 함께 동백나무숲에 자리잡고 있는데, 탑신에 '소요대사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임란 후 연곡사를 재건한 소요대사이 부도임이 분명하다.
서북도에서 법당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또 하나의 걸작이 있다.
현각국사 탑비다. 역시 비신은 임란 때 파괴되었으나 979년 고려 경종 4년에 건립되었다는 금석문이 남아 당시 번창했던 연곡사의 위용을 말해 주고 있다.
손꼽히는 국보 사찰. 국보 2 점과 보물 4점. 이런 말들에 현혹될 것은 없지만, 여하간 아린 흔적이 많은 사찰이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은 골짜기-피아골
연곡사에서 계속 올라가면 노고단이나 반야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연곡사에서 한 2시간 40분쯤 오르면 단풍 철에 단풍으로 산도 붉고, 그것이 비친 물도 붉고, 덩달아 사람도 붉어진다는 三紅沼가 나온다.
지리산 10경에서 얘기했듯이 지리산 제 1의 활엽수림인 피아골의 단풍은 '끝내주게' 멋있다.
단풍이 10월 중순경부터 지기 시작하는데, 그보다 일찍 이곳을 찾은 덕분으로 구경은 못하지만, 그러나 이런 점들보다도 피아골이 우리 기억 속에 남는 이유는 빨치산 鬪爭地의 대명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단 피아골은 그 이름도 불온하다. '피'字가 들어가다니, 빨치산 투쟁으로 피를 많이 흘려서인가? 그러나 사실은 곡식의 한 가지인 '피'가 많이 나서 '피밭골'이라 불렀고 거기서 피아골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稷田'이란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에 나온 反共영화, 김진규, 노경희 주연의 '피아골' 덕분에 이곳은 처절한 곳으로 꽤나 이름이 남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태 씨의 증언에 따르면 계곡이 협소하고 지리적으로 보급투쟁이 어려워 이곳에 거점을 둔 큰 조직은 없었다고 한다.
이곳이 활엽수림 덕에 단풍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 보면 역사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싸그리 타 버린 이곳에 심어진 것은 활엽수 일색이었으니 말이다.
조금은 類가 다른 처절한 얘기가 있는데, 피아골에 얽힌 설화 한 가닥이다.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種女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 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性神 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들이 절대 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녀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대물림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종녀들과는 달리 성신 어머니는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性神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이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웠다 한다."
약간은 아마조네스를 떠올리게 하는 설화인데, 아마조네스가 남성적이며 해방적인 여성상을 의미한다면, 이 설화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희생되는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표현 한다고나 할까.
또 한 가지 여담을 하자면, 이 피아골은 토종꿀 재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해마다 늦가을이면 '벌싸움'이 심해진다는데, 그 원인인 즉, 이 일대가 좋은 蜜源임을 알고 탐하는 양봉업자들이 개량 벌의 벌통을 무더기로 한봉 보호구역에 바싹 갖다 놓아, 겨울을 대비하여 꿀을 모으는 일이 더욱 바빠지는 늦가을이면 그 싸움이 잦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개량 벌은 몸집이 토종 벌의 두 곱이나 되고 성질이 포악하여 토종 벌은 떼죽음을 당하기 일쑤이다.
거센 개방의 물결로 피해를 입어온 것은 사람만이 아닌가 보다.
섬진 청류--지리산을 뒤로 하고
화엄사를 나와 피아골까지 가면서 혹시 눈치챈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지리산 자락을 빙 돌아가는 그 도로에서 보이던 푸르디 푸른 맑은 물이 섬진강이었다는 것 을 안 분이 있는지.
남한 내에서 강수량이 많은 곳으로 지리책에 실렸던 섬진강.
이곳에 와 보기 전에는 섬진강이 이렇게 아름다운 강이었는지 미처 몰랐었다.
섬진 청류가 지리산 10경에 드는 이유도 실감이 나고.
이 섬진 청류를 보면서 지리산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이다.
아쉽게 지리산을 이별하면서 몇 가지 볼 만한 곳을 권하고 싶다.
피아골에서 하동쪽으로 향하는 그 다음 골짜기는 그 유명한, 화개천이 흐르는 화개이다.
김동리의 소설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느 가수의 노래도 생각이 나는데, 여하간 이곳에는 예전에 그럴싸한 장이 서기도 하여 지리산 주변 마을의 물물교역의 장으로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곳에 유명한 사찰이 없다면 더욱 이상한 소리.
이곳에는 최치원의 진감국사 탑비로 유명한 쌍계사가 있다.
최치원이 직접 썼다고 하는데, 문장도 명문장이지만, 그 내용이 신라 선문을 연구하는 데에는 물론이고 지리산 역사를 쓰는 데도 중요하다고 하니 해석은 못한다 하더라도 한번 보는 것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곳에는 최치원의 글씨 뿐만 아니라 추사의 글씨인 '六祖頂相塔'이라는 현판도 있다고 한다.
이곳은 또한 우리 불교 음악의 시원지이기도 하고, 화개동천의 茶도 유명하다 하니, 이만하면 갈 만하지 않은가 싶다.
쌍계사 위로 계속 오르면 신흥에서 칠불사 쪽과 대성골 쪽으로 계곡과 길이 갈린다.
이래서 '雙溪'寺가 되었나 싶다.
칠불사는 원래 칠불암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다 소실되고 건물들은 다 80년대 중건된 것이라서(그 당시 유명했던 許 某씨의 시주가 컸다고 하던데) 볼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아 분위기는 그만인 곳이다.
이곳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가야국의 허왕후가 나은 왕자 일곱 명이 허왕후와 같이 온 승려였던 그의 외숙부를 따라 승려가 된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곳은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데, 이곳의 구들은 亞字房이라 하여 세계건축사전에도 실리는 '영광'을 가졌다.
이것은 한번 불을 때면 몇 달이 가고 온 방이 윗목, 아랫목의 구별이 없이 골고루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 칠불사가 있는 이 지역은 우리 국악의 시원지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관련된 책을 참조하길 바라고, 아까 갈림길에서 대성골로 향하면 한층 천왕봉에 가까워 지는데, 이 골짜기는 빨치산 투쟁이 활발했던 곳으로 빗점이란 곳은 남부군 지도자 이현상이 사살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나도 역시 지리산 동부는 남는다.
벽송사, 영원사, 대원사 등의 절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의 자취가 어려 있는 덕천서원, 산천재, 경남북 도당의 주된 활동지역이었고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산청 함양 등.
첫댓글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 ! - 옛날 정상표지석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