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경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쿠사마 야요이전은 제게 미명 같았습니다.
그녀에 관한 몇개의 지식 나부랑이와
몇몇의 설치작품을 다만 2차원의 사진으로 알고 있었던 터여서
몸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을 느끼고 싶어 굳이 차를 타고 간 전시회였어요.
우선은 아이들이 충분히 즐거워 할 작품으로 느꼈기에
두돌 지나 꼬맹이와 초등 1년 생을 데리고 신나게 갔었지요.
아니나다를까 쪼르르 달려가서 신비로워하며 경쾌해하며
그녀의 작품들을 돌아다니는 동안
저는 단지 길따라 통통거리는 흥분으로 기웃거렸습니다.
물방울이라는 단순한 형체의 변이와 격변,적막같은 눈물방울들이 센터 구석구석에 박혀
많지않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뭉글어져
쾌락인지 울음인지 모를 분분함으로 발길이 출렁댔더랬어요.
그러다 쪽문같은 숨은 문을 열고 들어선 '반딧불이'방에서
끝도 없는 눈물을 내내 왜 흘렸는지 여전히 이유를 모릅니다.
제 블로그에 있는 그녀의 작품과 떠도는 해설들을 올릴까 합니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길, 오지 못했던 작품들이 우루루 달려오길 기도하면서.
쿠사마 야요이 1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
가볍고 경쾌하게만 보이는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는 그의 강박증세가 빚어낸 예술 상징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그란 점들 하나 하나에 쿠사마 자신의 자화상이 담겨있다고 했던 것처럼 그의 모든 예술적 모티프들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이었다. 지난 10월 서울 진화랑의 초대전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쿠사마.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의욕을 보이는 그의 무한한 환상세계를 엿본다.
쿠사마 야요이는 완고한 집안에서 억압된 어린 시절을 지냈으며, 특히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은 평생 동안 치유되지 못하는 정신적 질환으로 남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 환각증상이 있었으나, 부모는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무조건 엄하게만 다스린 듯하다. 일찍부터 쿠사마에게 예술은 절실한 삶의 길이었고 치료요법이었다.
쿠사마는 1957년에 일본을 떠나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했으며 1973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가장 왕성한 창작의 시기를 보냈다. 그 당시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앤디 워홀의 팝 아트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앨런 캐프로의 해프닝, 환경미술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산지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 때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간 것에 비해 쿠사마는 새로운 예술의 물결이 일고 있는 뉴욕이 예술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뉴욕으로 떠난다. 비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 적을 두긴 했지만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작업장에서 작품제작에만 전념한다. 쿠사마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에바 헤세(Eva Hesse),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도널드 저드(Donald Judd) 등 뉴욕의 작가들과 바로 접하게 된다.
힘들게 지내는 가난한 작가인 스텔라를 비롯한 동료작가들은 이미 쿠사마가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고 특히 저드는 당시 작가로보다 평론가로서 활동했는데, 쿠사마의 작품을 처음으로 잡지에 소개했다. 쿠사마가 뉴욕 미술계에 알려지고 자리잡게 된 것도 그 당시 뉴욕의 미술흐름과 사조(시대정신, Zeitgeist)가 외부에 비친 그의 작업 현상과 잘 맞아떨어진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는 초기부터 아쉴 고르키나 호안 미로를 상기시키는 초현실주의 분위기의 생물형태적 추상으로 시작하여 점차 그물 모양의 패턴이 화면 전체를 뒤덮은 〈무한망(Infinity Nets)〉 시리즈와 물방울(polka dots) 모노크롬 회화로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쿠사마의 그물망의 올 오버(all-over) 페인팅은 캔버스 경계를 넘어 오브제까지 확대되는 작업으로 전개되고, 이 작업은 오브제들과 회화를 함께 설치하면서 자연스럽게 설치미술·환경미술로 발전한다.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환상
쿠사마 야요이가 뉴욕에 있던 시기에 광고 상업 이미지를 이용, 대중문화에서 나온 팝 아트가 미술계에서 또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상생활 오브제를 매체로 쓰고 특히 작업 접근 방법으로 반복·집적(accumulation) 등의 구성을 자주 쓰므로, 얼핏 쿠사마의 작업을 팝 아트 맥락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시각적인 현상일 뿐, 근본적으로 작업의 기본개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1963년 뉴욕의 거트루드 스타인 화랑(Gertrude Stein Gallery)에서 열린 〈집성물 : 천 대의 보트 쇼(Aggregation : One Thousand Boats Show)〉 전시는 쿠사마의 설치미술이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경우다. 전시장 중앙에는 남성 성기를 닮은 하얀 수백개의 돌기체로 채워진 노젓는 배를 놓고 흑백 포스터 크기의 사진으로 복사한 배 조각 작품 999점을 전시장 천장·벽·바닥에까지 모두 붙여 완벽한 설치미술을 소개한다.
쿠사마의 1963년 설치작업은 반복되는 소머리를 세리그라피로 뜬 것을 벽지로 이용해 설치작업을 한 1966년 앤디 워홀의 작업과 자주 비교되지만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차이점은 기계로 규격화하여 완벽하게 제작하는 워홀의 작품과는 상반되게 쿠사마는 손으로 제작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겼다. 1968년 어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대량생산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가고 예술작품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으로 그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팝 아트와는 다른 작업임을 읽을 수 있다. 쿠사마의 설치미술이 선구적인 이유은 196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되돌아봐도 매우 앞서 갔음을 재확인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쿠사마의 미술사적 위치는 재조명돼야 한다고 본다.
쿠사마의 작업이 제로 그룹(Zero Group)과 연결된 것도 팝 아트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독일 레베르쿠센 미술관 관장이던 우도 쿨테르만(Udo Kultermann)으로부터 〈모노크롬 회화〉 그룹전에 초대받은 것을 계기로 유럽 미술계에도 소개되었다. 그 이후 하인츠 막(Heinz Mack), 오토 피에네(Otto Piene), 우에커(Ueker) 등 새로운 재료의 탐색과 빛과 움직임 등 구성 요소와 단색화에 관심을 둔 제로 그룹 창시 멤버들과도 함께 전시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바와 쿠사마의 작품세계에서 시각적으로 몇 가지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개념적으로 같이 묶기는 어렵다.
쿠사마는 거울·풍선·마카로니·헝겊·오브제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그의 반복·집적을 과장해 갔고, 작업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탈리아관 앞에 설치한 〈나르시스 정원〉 설치작업은, 전시에 정식으로 초대되지는 않은 쿠사마가 잔디 위에 1,500개의 거울 표면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 판매하여 신문·잡지 등 매스미디어의 초점이되기도 했다.
그물망과 물방울로 세상을 덮는 쿠사마의 작업은 캔버스·오브제·환경·설치미술을 넘어 거리의 해프닝으로 연결되었다. 그 당시 미국은 사회적으로 베트남 반전운동, 성해방운동, 인권평등에 관한 수많은 시위와 운동이 심하게 벌어지던 때였는데, 뉴욕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 쿠사마가 고용한 배우들은 나체 시위를 벌이고 그는 물방울을 배우 몸 위에 찍는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경찰에게 제지당하거나 해체되기도 했다. 그는 패션에도 관심을 보여 1968년에는 쿠사마 패션 회사를 설립, 뉴욕의 대형 백화점인 블루밍데일(Blo- omingdale)에서 ‘쿠사마 코너’도 열었다. 그의 활동범위는 비디오 작업에서부터 잡지 《쿠사마 오르지(Kusama Orgy)》를 출판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상과 같은 쿠사마의 폭넓은 활동은 자유를 옹호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일관성 있는 예술적 태도로 볼 수 있다.
1973년 쿠사마는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도 작품활동은 계속하지만 많은 시간을 글쓰는 작업에 할애했다. 주로 자전적인 시·수필·소설 등이 미술계 작가들 사이에 중요하게 읽혀 신인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쿠사마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거주하면서 병원 맞은편에 개인 작업실을 마련, 20대의 젊은 조수들과 작업을 하기도 했다.
쿠사마는 요즘 얘기하기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쿠사마는 자신의 미학,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 등, 이와 연결하여 작업의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여 앞으로 200∼300년을 더 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된 시간을 느끼며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고 한다.
[월간미술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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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하게 스며드는 강박적인 물방울무늬 - 야요이 쿠사마 ]
1963년 뉴욕, 거트루드스타인 갤러리에서는 젋은 동양계 여성작가가 퍼포먼스를 치르고 있었다. 귀기 넘치는 삼백안을 부릅뜨고 갤러리 안을 배회하는 그의 모습은 신내린 무녀 같았다. 발기한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하얀 돌기 수백 개가 빽빽하게 들어찬 보트 한 대가 전시장 가운데에 놓였고, 보트의 외관은 9백99장의 흑백포스터로 복제돼 갤러리의 벽, 천장, 바닥을 완전히 도배했다. 단 하나의 원본과 스펙터클한 규모로 복제된 이미지가 교차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대량복제이미지의 도입에서 앤디 워홀을 앞선 시도
야요이 쿠사마(草間彌生, 75)의 퍼포먼스 ‘집합체-1천 대의 보트 쇼’는 앤디 워홀이 대량복제이미지를 도입한 것보다 앞선 시도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1957년 도미한 그는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회화, 조각,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은 물론 패션회사 설립, 잡지출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전방위예술가로 활동했고, 일본 귀국 후에는 지병인 정신질환을 치료하면서 시·소설을 출간하고 설치미술을 선보이는 등 현역작가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촘촘한 물방울무늬와 반복되는 그물무늬 등에서 유발되는 강렬한 시각적 자극 때문에 옵아트로 분류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내적 필연성에서 터져 나오는 이 반복적인 형태들을 옵아트의 편협한 범주에 넣어버리는 건 어쩐지 탐탁지 않다. 먼저 반복되는 형상 뒤에 숨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곰팡이처럼 조용하고 음산하게 퍼져나가는 물방울 이미지
강박증과 집착은 창작활동과 맞물려 때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되는데, 야요이 쿠사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 완고한 어머니와의 갈등관계에서 유발된 그의 강박증세는 미술이라는 치유제를 통해서만 안정을 찾았다. 쿠사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생물유기체적 형태와 강박적인 물방울무늬에 대한 집착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덮어버릴 듯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원색의 물방울무늬 또는 그물망은 곰팡이가 증식하는 모습을 닮았다. 곰팡이가 소리 없이 음습한 바닥에, 벽에, 천장에 스며들어 검고 푸른 얼룩의 추상화를 만들어내듯, 쿠사마의 작품은 강박과 불안 속에서 싹튼다. 그가 즐겨 쓰는 기묘한 형태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규칙적이고 안정된 세계의 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의 평면작업은 눈을 어질어질하게 할 만큼 명도대비와 착시효과를 강조하고 있어, 오래 보고 있으면 관람자는 현미경으로 본 세포 속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각적 효과는 그림을 통해 지각되는 심리적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반점들은 평면회화 위에서만 머물지 않고, 입체작업의 요철을 표현할 때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쿠사마 야요이<밀로의 비너스, 석고상에 채색/1998년 작>
입체가 정면에서 빛을 받을 땐 볼록한 부분이 가장 밝게 보이지만, 쿠사마는 볼록한 부분에 흑색의 큰 점을 그리고, 높이가 낮아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반점을 그려 마치 역광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역광조명이 주는 비일상적이고 기괴한 느낌이 생물유기체적 형태와 결합되면서 관람자에게 더욱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그의 물방울무늬는 설치작품 속에 그대로 이어지는데, 거대한 생물유기체적 형상 위에 얼룩처럼 새겨지는 물방울 ‘점 강박관념’(1996)을 비롯해 구슬 모양의 설치물 ‘나르시스 정원’(1966∼2002)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나타난다. 최근 그의 설치작업의 전모를 보고 싶다면 2월 15일∼5월 11일까지 열리는 아트선재센터의 대규모 개인전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약력
야요이 쿠사마는 많은 관습에 의해 좌파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본연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당시에는 논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금기의 영역을 남보다 앞서 잠식해 나갔다. 그녀의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한 장르에 부합하며 동시에 그녀의 삶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기에, 우리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와 작품의 형식이 만나는 곳에서 그녀만의 놀라운 자유주의자적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녀의 당돌한 예술 세계와 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행동주의적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원류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새롭고 진지한 재평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환영
"그것은 환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쿠사마는 기술했다. 그녀 스스로 인정하듯이, 쿠사마는 열살 때 처음으로 환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 패턴을 보고 나서 천장이나 창 밖을 보면, 그 잔상이 망막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색의 파편들이 그녀를 둘러싼 가구와 자신을 온통 뒤덮어,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액세서리마냥 배경 속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POLKA DOTS
쿠사마가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의 눈에 물방울 무늬가 나타나더니 곧 끝없는 망점이 되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물체에 찍힌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녀는 물방울 무늬에서 남성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태양과 여성적 생산의 원리를 상징하는 달의 형태를 보았다.
자유
한정된 현대미술사의 분류에 속하기를 부정하는 쿠사마의 예술행로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자전적, 혹은 자기발견의 과정으로, 더 넓게는 오히려 자신의 병보다 더한 고통과 욕망, 강박증에 시달리는 삶과 세상과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 70세가 넘은 그녀가 요즘 얘기하기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쿠사마는 자신의 미학,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 등, 이와 연결하여 작업의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여 앞으로 200~300년을 더 살고 싶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대한교과서) 차례 부분의 작품
쿠사마 야요이<밀로의 비너스, 석고상에 채색/1998년 작>
첫댓글 "대량생산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가고 예술작품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공감입니다. 정신의 수작업이 문학일터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