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경남에서 활동하는 호남 문인들의 문인지(文人誌)『노령문학(盧嶺文學)』제 12호(도서출판 신정, 2025)에 실린 정재규 시인의 시「발걸음, 가볍다」를 감상해 본다. 1996년『文藝時代』가 주최한 공모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시인은 우리들의 생활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현상들을 포착하여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시상(詩想)을 엮어내곤 한다는데...
발걸음, 가볍다
- 정재규
붐비는 지하철 객실에서
가방을 메고
출입문 근처에
흰 지팡이를 든
소녀를 보았네
곱게 땋은 머리가 예뻐
다시 보니
열 대여섯 살쯤 된
앳된 얼굴의 시각 장애인이었네
일반 승객보다 더 빨리
내리기 위해
출입문에 바짝 붙어 서 있었네
혼자서도 당당하게
지하철을 탄 그 소녀는
목적지에 오자
조심스러우면서도
아주 능숙하게
나가는 곳을 찾아
사람들과 섞여 계단을 하나하나 가볍게 올라갔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도 모르게
그 소녀가 목적지에
무사히 다다르길 빌었네
한발 한발 당차게 걸어가는
그 소녀를 보며
다음 역에서 내리던
내 발걸음도 한없이 가벼워져
객실문을 걸어 나왔네
흔히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러한 심리를 일컬어 사람들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한다지? 근디 이 시에서는 그 어느 곳에도 불쌍하다는 둥, 안타깝다는 둥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데, 작가는 장애인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 태연자약하게 말하고 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아주 능숙하게 나가는 곳을 찾아 사람들과 섞여 계단을 하나하나 가볍게 올라갔네' 라고 말이지. 그야말로 측은지심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 소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제 갈 길을 걸어갔다지?
하지만 군중 속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소녀의 발걸음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그녀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의 발걸음조차 가벼워졌다니 뭐 이런 걸 두고 공감(共感)이라고 하겠지? 근디 공감이란 말 참으로 무서운 게 또한 인생이라.
영미권에서 쓰는 경구(警句)에 'Pity is akin to love(동정은 사랑의 시작이라)'란 말이 있듯, 동정심은 일견 아름다운 마음씨라 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는 어려움을, 상대에게는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라...하지만 시인은 장애인 소녀가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역시 발걸음도 가볍게 열차에서 내렸으니 그 따위 경구는 개나 주라지의 모습이라...
한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시적 화자(話者)인 시인과 시적 소재인 대상 사이에 거리감의 유무(有無)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위의 시에서는 시인과 대상인 장애인 소녀와의 사이에 거리감이 없는 게 각자 제 갈길을 가는 게 그런 모습이다. 그 반대로 화자인 시인과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으면 애초 대상을 향한 측은지심이 이윽고는 자신을 향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성찰에 이른다고 한다.
출처- AI Gemini
백석(白石)의 시「여승」을 감상해 보자. 이 시에서 시인은 가족이 해체된 여승(女僧)의 측은한 모습을 내러티브적(narrative) 관점으로 묘사하면서, 필경에는 '쓸쓸함'이라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밑바닥에 드러내고 있다고 하더만. 그게 맞는 말인지 모르는게, 나란 인간은 시에 대해선 도통 문외한이자 바보인 것을 말이지. 근디 내가 진짜 바보인 까닭은 시를 모르기 땀시 아니라 백석의 시「여승 」을 읽을 때면 언제나 지병(持病)처럼 도지는 눈물, 눈물, 그리고 또 눈물이라...
여승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