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엔 한량처럼 보내기도 했고 사업도 몇번 말아먹었지만, 힘든 순간 속에서도 재기에 성공한 이후 무역업, 제분업, 제면업, 모직업, 설탕, 비료 사업 등에 뛰어들며 삼성을 국내 최상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고, 말년엔 반도체 산업을 위시한 제조업에도 진출해 이후 삼성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대한민국이 반도체 강국이 되는 밑거름을 쌓았다.
오늘날 재계 최상위권 대기업 그룹인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이 모두 이병철을 1세대로 하여 비롯되었다. 그 외 현재는 기업 규모가 작아졌지만 제지업계 최대 규모 기업인 한솔그룹과 국내 2위의 미디어 기업인 중앙그룹[7]과 유통특화 준대기업인 BGF그룹까지 포함된다. 이병철을 시초로 하는 범삼성가는 현재도 대한민국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차남 이창희의 고명딸 이혜진이 이끄는 래딕스글로비즈[8] 및 래딕스플렉스와 그녀의 남편 조명희가 이끄는 디엠퓨어텍, 3녀 이순희의 아들인 김상용이 이끄는 알머스(前 영보엔지니어링) 등도 범삼성가에 속하며 이들도 삼성 등 범삼성가 기업들과 상부상조한다.
1910년(융희 4년) 경상남도의령군에서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태어나 천석꾼의 집안에서 꽤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9] 1922년 3월 지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그해 9월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으며,[10] 1926년 열일곱의 나이로 3살 연상의 아내 박두을과 혼인했다.[11]
1929년, 서울 종로의 중동학교를 26회로 졸업하고 이어 1930년 4월에 와세다대학부속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으나, 일본 유학 생활 중 건강 악화로 1931~4년 수료 및 학위는 중도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다만 1970년 모교에서 인정받아 와세다대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와세다대학 한국동창회 (현 한국교우회) 활동도 열심히 해서 후배 롯데 신격호 회장, 박태준 포스코 회장 등을 엄청 챙겼다. 본인은 훗날 학창 시절에 대해 중퇴하긴 했지만 수학은 제법 했으며 일본인 등 동기들에게 지는 걸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했으나,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직장없이 지냈다.[12]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豚)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러다 이웃 친구들과 도박의 일종인 골패에 빠졌다. 즉, 뭔가 위인스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과 달리 이병철의 20대 젊은 시절은 꽤나 한량이었던 것.[13]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다 네 아이[14]의 아버지가 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낸 것을 자책하고 밤새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다 끝내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훗날 이병철은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15]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부동산업에 진출했으나 일본이 전시 체제로 전환되면서 대출이 중단되어 마산에서 시작한 사업은 거하게 망했고, 이를 정리한 후 남은 돈과 부친의 지원으로 다시 한번 새 출발을 계획한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중국과 만주를 돌아본 그는 만주와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리라 결심하고, 1938년 대구에서 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지금의 삼성그룹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성상회를 설립했다.[16] 이때 삼성을 일으킨 것이 제분업과 제면업으로, 이후 유명해지는 별표국수가 대구에서 이름을 날리며 자리를 잡는다.[17] 이후 건어물, 과일 유통 무역으로 진출하여 크게 성장하게 된다.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했다.[18] 서울로도 진출해 사업을 확장한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이 벌어지자, 초기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 북한군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쉐보레 승용차는 인민군에게 노획되어 박헌영이 타고 다녔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삼성사를 정리하는 이용우 전 중앙일보 기자에 의하면 인민군 간부로 내려온 이순근이[19] 가져가 관용차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전시 체제하에서 점령 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20]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더 손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했으며[21][22] ,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 고철을 제2차 세계대전의 물자 징발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23]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24]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중국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0,000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CJ그룹의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 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데[25]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26]+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 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 조치 수혜 등을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게 된다.
1940~1950년대에 사업 전환과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 되어서야 사업이 궤도에 오른 현대그룹의 정주영과 달리,[27] 상술했듯 이병철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또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28]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당시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29]안국화재도 58년에 인수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 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다. 당시 정권이 바뀐 후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의 이병철은 당연히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지목했으나 여러 속사정으로 결국 이들과 타협하였고[30], 이병철도 "전시세금이(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지금도 유지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사업 투자로 나라에 기여하게 해달라고 요구, 박정희 정권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비료 공장 설립도 재개하였다. 다만 지방의 명망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병철은, 초창기까지만 해도 反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고 한다.[31]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했고, 1963년 동방생명을 인수했다.
화폐개혁 실패 당시 이병철이 쓴소리를 한 일화도 있고 해서 이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32]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근데 사실 이병철은 이런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뭔가 쌓인게 있었는지, 1960년대 중반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도 아예 없진 않았다고 한다.[33] 그래서 몇몇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년)과 '중앙일보'(1965년)였다.[34] 참고로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동양방송은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신문사와 방송국 동시 소유를 금지해서[35]KBS로 통폐합돼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36]
우여곡절 끝에 울산에 100만 평 부지를 매입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 완공된 즈음인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37] 이 일로 국민적 공분이 일고 당시 정권도 공범에서 심판자의 입장으로 돌변하자, 이병철은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현 롯데정밀화학)과 경주 최씨 가문으로부터 기증받은대구대학교[38]를 정부에 넘기게 된다. 이병철 장남 이맹희에 의하면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당시 정권이 정치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삼성의 밀수를 눈 감아주는 한마디로 공범이었는데, 정작 여론이 난리가 나자 정부는 뒤통수를 쳤고 덕분에 삼성 혼자 독박 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삥까지 뜯겼다고 한다.[39] 당시 한국비료는 첫 해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액의 30%에 이를 정도로 삼성 입장에서도 알짜배기 기업이었다.[40]
그렇게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41], 이때도 이병철은 회장직은 유지하며 복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병철에게 밉보였는지 70년대 들어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42],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1976년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사족으로 감옥까지 갔다왔지만 자길 홀대하는 아버지에 분노한 이창희[43]가 1969~1970년 무렵 정권 인사들을 끼고 부친을 몰아내려는 쿠데타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연히 눈밖에 난 이창희는 그룹에서 쫓겨났으나 3년이나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용서를 받았고, 이병철은 차남이 산하의 몇몇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맹희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물증은 없었고 본인도 죽을 때까지 부인했으나, 이병철의 의심을 사 결국 사이가 갈라졌고 용서도 구하지 않아 호암이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설도 있다. 훗날 이맹희는 198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사한 건 이병철 사후 이건희 체제가 확립된 1993년이다. 참고로 이때 형제간에도 사이가 틀어졌는지 2010년대 이맹희, 이건희간 유산 상속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6년 대한암협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했다. 대구대학은 포기했지만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4년에는 울산에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했고, 1977년에는 조선소를 인수하여 조선업(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도 뛰어들었고,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도 설립한다. 방위산업에도 진출하여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을 설립했다. GE와의 기술제휴로 소위 '제공호'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국산 제트전투기인 KF-5를 생산한 것이 삼성테크윈이다.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는 1969년 설립되었다. 허나 처음엔 반발도 심했는데, 이병철이 1967~8년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고 밝히자 금성사(현 LG전자) 등 정재계에서 반발이 있었다. 이에 이병철은 삼성전자는 'TV, 라디오, 냉장고 등 생산품 중 극히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69년 1월 13일 현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이 설립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 직원 수는 고작 36명이었다. 삼성전자 신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인 윤종용 전 부회장 등이 이 때의 창립멤버다. 이때만 해도 삼성전자는 첫해 매출이 37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오늘날 삼성전자와는 비교도 안되는 작은 규모로,[44] 국내에서도 금성사(현 LG전자)에 밀리는 2등 신세였다.
1970년대에 삼성전자가 수원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때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하며 43만평을 고집했다.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보스턴 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미국에 방문했는데 이때 세계 최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병철은 이 당시에 대해 미국이 설계한 생산설비를 도입한 일본이 자동차, 반도체 등의 미국 시장을 거꾸로 침식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이 위기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기이한 현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년 전인 1980년에 일본의 후지(富土) 화학 회장 이나바 슈조(稻葉秀三)와의 대담 중 나온 발언을[45] 떠올리며 세계 최강 미국도 흔들리는 판에 삼성도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결심을 한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46]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당시 삼성반도체는 말만 반도체 회사였지 트랜지스터 생산이나 겨우 하는 기술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47] 이병철은 삼성반도체 회생 과정에서 NEC에 자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기술 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
1983년 3월 이병철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고, 기술진 확보를 위해 미국에 있던 유학파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원래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었으나 실제로 마이크론에 가보니 마이크론측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단 2명만이 마이크론 사내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출입도 못했다고 한다. 들어간 2명마저도 제대로 된 연수는 커녕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설을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받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결국 삼성은 자체 개발하기로 방향을 틀었고, 연구진들이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불과 1년도 안되어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세계 3번째 개발이었다. 삼성이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것이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개발한 64K D램은 국가등록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당시 삼성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19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48] 적자를 보게 되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64K 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1984년 10월, 악몽의 덤핑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 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이건희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글로벌 기업으로 꽃피게 된다.[49]
1986년 1Mb D램 개발에 성공했지만 1Mb짜리를 최초로 개발했던 도시바와는 2년의 기술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 한 언론에서 "한국 반도체는 일본 것을 베꼈다"는 식의 보도가 나왔고, 이를 본 이병철은 분노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가서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 이에 진대제는 반드시 16Mb D램을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삼성전자는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80년대 자동차와전자는 융합된다고 본다고 적극적으로 자동차 사업 진출을 원했지만, 이땐 중공업 중복 투자 정리가 중요한 과제였고, 자동차 산업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를 겨우 마친 시절이라 포기했다.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꽤나 고생을 했다. 평소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50]했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호흡기 전반과 흉부 건강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또한, 치아 건강도 좋지 못했는데 특히 치주 손실이 심각[51]해 말할 때나 저작시 통증이 극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말년의 모습에선 이런 건강 문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말년의 여러 인터뷰에선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목소리가 거칠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또한, 치주 문제로 인해 입술을 항상 오므리고 있었다.
결국 10년에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사망했다.
사후 이태원동 자택에 빈소가 차려져 당시 국회의장 이재형,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다.(KBS, MBC)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시신은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는데, 본인 의지와 달리 묘 위치가 삼성물산 구역으로 되어있다 보니 후손들의 배임 논란이 있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맏아들 이맹희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3남 이건희 역시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 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52]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의료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났으며, 이재용도 집 공기 상태가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가졌다. 이병철은 36세 때인 1945년 8·15 해방 직후 사업보국의 신념을 다진 것을 회상하며 "이와 같은 각성은 그 후 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는 데 있어 일관된 나의 기업관이 되어 왔다. 사회일반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 이병철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가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심지어 귀빈들 맞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한 아들 이건희와는 다른 부분이다.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봐서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선 인재를 모신다는 식으로 노동 조건을 본인이 보장해주겠다는 마인드였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53], 결국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체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후 삼성의 무노조 원칙은 2대 이건희 회장까지 내려오다가[54] 3대 이재용 회장대에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포기하고, 노조 설립을 허용하면서 사라졌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데려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상기한 서울 탈출 당시 운전사 위대식 건도 그렇고,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한 이창업이[55]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史)>[56]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54년 제일모직 공장을 대구에 세울 때 공장보다도 기숙사를 먼저 세웠는데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의 기숙사였으며,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오고 목욕탕, 세탁실, 다리미실, 미용실이 있는 등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급여 또한 좋아서 당시 제일모직 근로자의 증언에 따르면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 가능했다고 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카더라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57]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선우용여가 먼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이병철이 소유한 TBC 방송국 전속 무용수 시험[58]에서도 이병철이 관상가를 데리고 와 직접 면접을 봤다고 한다.[59] 방송국 직원 면접에서도 회장이 직접 와서 그랬을 정도면, 다른 회사 면접 역시 관상가와 이병철이 면접을 다 봤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다.[60]
1965년에는 5.16 군사정변 직후 처형당할 뻔한 홍진기를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드는[61]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62], 나중에는 맘에 들었는지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 홍라희다. 때문에 이후 이건희 후계 체제 과정에서 홍진기가 이병철에 영향력을 행사한거 아니냐는 루머도 있지만, 피해 당사자인 이맹희부터가 음모론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애초에 후계 구도 관련해선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됐다.) 상기되어있듯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굳이 영향력 행사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면 장인이 경영 수업을 해준 것 정도인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 한다.
신현확 관련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신현확은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을 맡아 4.19 혁명이 일어난 이후 체포되었다. 당시 분위기상 신현확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신현확이 체포되기 전 이병철에게 전화하여 돈을 요청했는데 이병철은 신현확이 끈 떨어진 연 신세임에도 이를 들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수십년간 이병철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집권하고 장남인 이맹희의 경북고 동창들이 요직에 앉아 이제 친구 맹희에게 삼성을 되찾아 주겠다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러자 후계 구도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한 이병철은 1986년 신현확에 전화하여 삼성물산 회장직을 권유한다. 처음 신현확이 거절을 하자 이병철은 "빚을 이제 갚아 주셔야겠습니다"라고 처음으로 그 일을 말하며 설득을 하였고 신현확은 그제서야 삼성물산 회장직을 수락했다. 당시 TK 인맥의 대부격이던 신현확이 버티자 이후 신군부 세력들은 삼성의 후계 구도 개입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경상남도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이병철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달성공원역 근처에 있는 옛 삼성상회터에는 삼성상회 실물을 1:250으로 축소한 청동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근처 오토바이골목 안에 이병철의 고택이 있는데, 삼성상회 사업을 할 때 거주했던 곳이다. CJ의 역사관에는 홀로그램으로 이 회장의 흉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 외 삼성그룹에서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기부채납한 대구오페라하우스에는 이병철의 동상을 설치해 놓았으며, 근처 도로의 명칭도 호암로로 변경하였다.[70] 이병철이 건설자금을 지원했다는 혜화동 경주이씨중앙화수회회관 앞에도 이 회장 흉상이 있다. 또한 삼성이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에도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미술품 수집에도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호암미술관에 있거나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이병철이 주도적으로 모은 것들이다.
이병철은 자신이 모은 미술품을 관리할 후계자로서 홍라희를 택했는데, 박물관 설립 전부터 홍라희에게 매일 10만원 상한으로 돈을 주며 3달 동안 인사동에 나가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이었다니 2010년대 기준으로 매일 대략 500만 원어치의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셈. 이는 수집광 기질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미술계의 메카인 인사동에서 노하우와 안목, 인맥을 쌓을 수 있게끔 그녀를 키워내기 위함 아니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여튼 이후 홍라희는 한국 미술계의 대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발굴단에게 단지 터의 크기를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 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수집 뿐만 아니라 나무도 좋아했는데, 공장부지 안에 있는 나무마다 번호를 붙혀 관리하게 했고, 나무 그늘 밑에 맥문동을 심어 지피식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준 인물로 약용 식물로 쓰이던 맥문동이 조경 식물로 활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태산목을 특히 좋아해 이병철 생가와 제일모직 부지에도 태산목을 심어놓았다.
[1] 원래 이름은 이병길(李秉吉)인데 '吉'자를 더 붙여서 30대 시절에 이병철(李秉喆)로 개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잡을 병(秉) 쌍길 철(喆)[2]경주 이씨 판전공파 사정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진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공교롭게도 자신의 손녀인 이윤형과 기일이 같다.[4] 중시조 39세손. 본래 상○(相○) 항렬이다. 이름의 '''병(秉)은 공교롭게도 중시조 59세손의 항렬자와 같다. 판전공파(判典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 이강(李
)이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 즉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역임하였기에 줄여서 판전공(判典公)이라고 했다. 다만 의미상 판사공(判事公)으로 해야 옳다는 의견도 있다. 전객시는 예빈성(禮賓省)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전객시의 장(長)은 정3품 판사로 하였다. 사정(司正)은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7품 관직이다.[5] '호암아트홀'과 '호암미술관'에 붙는 그 호암이다. 성균관대학교에도 이사장이었던 이병철의 호를 따서 명명한 '호암관'이 있다. 고향인 경상남도의령군 정곡면 생가 앞에도 '호암길'이 있으며, 대구광역시북구에도 호암로가 있다.[6] 현 서울수송초등학교[7] 다만 여긴 사돈댁인 홍씨 일가 소유긴 하다. 물론 삼성에서 분리된거긴 하다만. 중앙그룹의 모체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이병철에 의해 설립되었다.[8]나쵸와 치즈소스로 유명한 아미고도 이 회사 산하 브랜드다.[9] 당시 일본 중산층 5인 가족의 한달 생활비가 한화로 환산하면 50원이었는데, 이병철은 일본 유학 당시 부친으로부터 매달 200원을 송금받았다고 전해진다.[10]#[11] 여담으로, 이땐 박두을 집안이 이병철 집안보다 더 부자였다고 한다.[12]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 내용에 따르면 취직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걸로 봐서,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을 세워두고 상경하지는 않은 것 같다.[13] 사실 일제강점기 시절엔 지식인 중 시대를 한탄하며 무기력해하다 이런 식으로 한량의 길로 빠져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14]이인희, 이맹희, 이창희, 이숙희.[15] 창업을 위해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도 대출을 받았다. 과거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현재 SC제일은행 마산지점이 들어서 있다. 옛날 마산 최대 번화가인 창동, 오동동 일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 자리는 과거 조선시대 조창 건물이 있던 자리를 일제가 정확하게 네 동강을 내어 사거리를 만들었다. 현재의 SC제일은행과 남성동파출소 자리인데 SC제일은행뿐만 아니라 마산 최초의 민족자본 상사이던 원동무역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여러 모로 이 동네 말로 쎄뽁(?)(쇠복)이 붙은 땅이다. 한편 당시 이병철에게 대출을 인가해준 담당자는 패전 후 일본에서 변호사를 했다. 이병철은 이 사람을 찾아서 "당신 덕분에 삼성 그룹이 있을 수 있었다"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는데 이 봉투를 받은 담당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6] 오늘날 달성공원역 근처로, 삼성상회터가 있다.[17] 다만 당시 경북에서 1위를 차지하는 국수는 소표 국수였고, 2위도 풍국산업이었기에 별표 국수는 나름 매출이 올라갔음에도 이들의 아성과 도전을 이기지 못해 결국 폐업했다는 말도 있다.[18]커피로 유명한 동서식품을 키워낸 김재명이 이때 삼성으로 합류, 이병철과 3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한다. 동서식품은 원래 1967년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커피 사업을 연구해 제일제당의 커피사업부로 출발할 예정으로, 맥스웰하우스 동아시아 판권을 가진 제너럴 푸즈 일본 법인(현 아지노모도AGF) 책임자 린 야마모토와 합작 직전까지 갔었지만 실패하고 7년 뒤 제일제당의 임원들이 자금을 출자하여 사업장을 인수해, 대기업으로 육성한다.[19] 삼성상회 전문경영인을 맡아 초기 사업을 확장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지만 이후 월북을 했다고 한다.[20] 여담으로 대구는 이 시기만 해도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동네였다.[21] 덕분인지 위대식은 운전기사였음에도 삼성그룹 내에서 이사 대우를 받았으며, 그가 사망하자 이병철이 호암미술관 근처에 미리 봐둔 자신의 묫자리 옆에 묻어주라 할 정도로 신임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병철은 면접에서 관상을 볼 정도로 관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유명한 관상가가 위대식의 관상이 주인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구해주는 좋은 관상이라고 하여, 위대식의 헌신으로 목숨을 구한 이후 관상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면접에서도 활용했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많아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호를 딴 호암미술관과 자신의 묘를 최고 수준의 지관을 통해 명당을 골라서 정했는데, 그런 자신의 무덤 옆에 묻어주라고 한 것은 위대식의 후손들도 함께 번영을 누리자는 이병철의 최대의 신임을 보여준 것으로 이병철 옆에 묻힌 것은 부인 박두을 외에 다른 임원들은 전무하여 위대식이 유일하다. 이병철의 위대식에 대한 신임이 가족과 같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훗날 알려지기론 위대식이 전쟁통에도 숨어지내는 이병철 일가를 탈출시키려 물건들을 밀수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북한군의 눈을 피해서 차편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이병철 일가에 자신이 어떻게든 탈출시켜줄 테니 불안해하는 일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고. 사실상 그가 아니었으면 이병철은 탈출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이후 서울이 수복되긴 하지만 사업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22] 위대식이 이병철의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면 이병철이 "위군, 돈 좀 모아두었나?" 하며 좋은 투자정보를 슬쩍슬쩍 흘려준 덕에 위대식은 재산도 꽤 모았다고 전해진다.[23]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국령 내에 있는 금속이라는 금속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24] 당시 돈으로 60억 원이면 2020년대 가치로는 거의 1조 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전쟁 기간에만 이만한 돈을 벌었다는거니 국수 장사하던 회사가 단숨에 한국 제1의 대기업이 되는 것도 이해가 갈법하다.[25] 근당 300환 → 50환.[26] 설비 자체는 유럽에서 괜찮은 것을 이것저것 골라 들여왔기 때문에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물건 만드는 공정관리와 사후 관리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공들인 것에 비해 결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87년 이병철 사후 전권을 잡은 이건희가 품질 중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외치면서 마무리를 유독 강조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27] 정주영은 쌀 장사, 자동차 정비업하다 해방 이후 1947년부터 본격 오늘날 현대의 모태격인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주한미군 공사 등을 따내 1957년에야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하게 된다.[28] 방위산업체이자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급성장한 아시아자동차를 설립한 이문환이 독일인들의 공장을 인수, 확장했다.[29] 다만 박정희 시대 관료 오원철은 삼성이 비료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국내 비료 수요를 멋대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0] 냉정하게 말하면 뇌물 바치란 소리도 된다. 실제 후술되어있듯 이병철은 군사정권에 알게 모르게 돈 많이 뜯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50년대 인수한 한일은행·조흥은행 등을 다시 정부한테 뱉어낸다.[31] 박정희는 이병철을 "설탕과 밀가루 같은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이라 폄하했고, 이병철 역시 박정희를 "만주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으로 여겼다. <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엮음, 청산 펴냄, 1993.[32]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이 한 말로 정계, 관계와는 멀리도 가까이도 않으며,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얘기.[33] "정부는 기본 방향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의 주장은 외자 유치를 통한 공업화였다. 국내에는 자본의 축적이 없고 기술도 없으므로 선진국에서 차관이나 투자의 형식으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야 했다."(<호암자전>, 나남). 이병철이 불가근 불가원을 명확히 내세운건 사카린 밀수 사건을 겪은 이후부터라고 한다.[34] 이전 버전은 이 기업을 홍진기가 키웠다고 이병철의 역할을 축소했으나(결과적으로 계열 분리를 통해 삼성 울타리를 벗어나긴 했다), 이병철은 김동완 기상캐스터를 영입하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 백지수표를 제시하며 설득하다 거절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강부자 등 인기 전속배우를 직접 만나 격려하기도 했다. 또한 이병철은 당시만 해도 후계 구도와는 멀어보이던 영화광 삼남 이건희에게 동양방송을 맡길 작정이었다.[35] 지금으로 치면 종합편성채널 금지.[36] 다만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신문·방송겸영 허용 덕에, 중앙일보에서 2011년 12월 1일 JTBC를 개국한다.[37] 1966년 9월의 소동에 대해 <호암자전>과 <묻어둔 이야기>는 모두 "정치자금 등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의 결과"라고 적고 있다. 군사정권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쪽이,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사카린 밀수 사건'을 언론에 제보했다는 것이다.[38] 지금의 대구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이며, 영남대학교의 2개 전신 중 하나이다. 현재의 영남대학교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사실상 강제 통합한 학교다. 그러니 "한수(漢水) 이남 제일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병철 입장에서나 선뜻 대학교 운영권을 넘겨준 최씨 일가 입장에서나 당황스러울 법 하다.[39] 이에 대해 이맹희는 당시 삼성과 정부의 관계를 '짧은 밀월, 긴 갈등'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맹희의 회고록이 거의 유일한데, 그 외 회고록을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 보고서가 있다. 보고서를 보면 한국비료 국가 헌납 1년 뒤인 1967년 9월 11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로버트 메이어 상무담당관 등과 만난 이맹희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국 정부의 제안에 따라 진행된 일이며, 삼성은 중앙정보부 등의 협박에 못 이겨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맹희는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대가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에 매달 정기적으로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가운데,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게 되는 진퇴양난까지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한국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는 방안까지 건의했다."는 구절도 있다.[40] 한편으론 그런 기업과 대학을 책임을 진다면서 사회 환원도 아닌 정부에 준다는 것도 선뜻 이해가 안가는데, 이맹희에 의하면 당시 이후락이 찾아와 대학교를 넘기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가 대통령 퇴임 후 해당 대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독재로 나아가면서 붕 뜬다.) 결국 살려고 울며겨자먹기로 일종의 뇌물을 바친 셈. 사족으로, 이때 헌납한 한국비료는 1994년 이건희가 2,300억 원에 다시 인수했고, 영남대학교는 지금도 박정희가 사학주처럼 취급받고 딸 박근혜가 이사장을 맡는 등 영향력을 행사해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41] 명목상 직책은 부사장이었지만, 총재 소리를 들으며 일종의 대리청정 체제로 실권을 휘둘렀다. 실권 행사 기간에 대해선 이병철, 이맹희 측이 서로 말이 다른 편인데, 당시 실권을 행사한 기사 등을 보면 이맹희 측에 무게가 실리나 이병철도 활동을 아예 안한건 아니라 일종의 공동 경영으로 볼 수도 있다.[42] 이병철도 나름의 고민은 있었는지, 이맹희와 이건희를 두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으며 특히 박두을 여사가 이맹희를 아껴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맹희와는 사이가 멀어졌지만 손자인 이재현은 죽을 때까지 이뻐해 삼성그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제당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CJ가 존재하는덴 알게 모르게 박두을 여사의 도움도 있었던 모양.#[43] 이창희는 자신의 홀대해서가 아니라 박정희와 사이가 나쁜 이병철이 삼성의 주인으로 있으면 삼성이 망한다고 생각하여 박정희에게 투서를 썼다고 주장한다. #[44] 삼성전자가 글로벌 대기업으로 도약하는건 1990년대 이후부터다.[45] "일본 기업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했고,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다.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 수입은 급증했다. 일본의 살 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46] 여담으로 닷컴버블 사태로 IT 산업이 휘청거렸던 2001년, 이건희의 장남 이재용도 부친과 같은 과정으로 설립한 회사 일부를 겨우 건지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다만 이재용이 설립한 회사 중 e-learning 업체 크래듀는 예상 외로 선전하며 자격증 바람, 당시 정부가 페달을 밟던 지식 정보사회로의 전환 과정상 수혜를 누리며, 시장을 선점한 휴넷과 업계 선두를 다투는 선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6년부로 사명을 멀티캠퍼스로 변경한 상태이다.[47] 삼성은 1990년대까지도 꾸준히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다가 이후 장비를 KEC에 넘겼다.[48] 1980년대 초중반 1,300억 원이면 2010년대 중반의 4,000억원 수준이다. ※ 생활 물가의 경우는, 1981년 → 2007년 국내 짜장면 지수 등이 약 25배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건 무리다.[49] 이병철의 사망 17년 뒤인 2004년에는 반도체 외 TV와 휴대폰 사업까지 성공하면서 1980~90년대 전자업계 세계 최강자였던 소니의 시가총액을 제칠 만큼 사세(社勢)가 커지게 된다. # 다만 사실 소니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엄청나게 큰 기업은 아니었다. 마쓰시타 전기, NEC, 히타치 등이 규모면에서는 더 큰 기업이었고, 단지 소니는 워크맨처럼 좀 더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는다는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다 쇠락하고 일본에선 토요타 자동차가 킹왕짱인 형국이지만.[50] 이병철을 진찰한 일본인 의사가 "가벼운 질환이 있는데,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라고 완곡하게 말하는 걸 듣고 눈치를 챘다고 한다.[51]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유럽에서 임플란트 시술이 활발해졌고, 당시에는 골유도재생술은 임상 시험 단계였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다.[52] 약어로는 CMT,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돼 점점 기형화되는 희귀병. 박두을 여사 집안의 유전질환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이재현이 이 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이부진도 이 병의 인자가 있어 발병할 수도 있다고 한다.[53] 실제 노동자 인권 자체를 개차반으로 본건 아닌지, 기숙사를 짓는 등 공을 들였다고 한다.[54] 다만 이때부터도 원체 비판을 많이 받아서 알게 모르게 탄압을 했지만 노조 활동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다.[55] 처음엔 이병철의 와세다대학 선배 이순근이 전문경영인을 맡아 삼성상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지만 월북을 했던터라, 이 시점에서는 이창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서울 사업으로 신경쓰지 못한 몇 년 동안 대구 사업장에서는 청주(淸酒) 월계관과 사이다 판매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56] 28살에 요절한 일본의 여자 공장 노동자가 1925년에 쓴 책으로, 당시 일본의 공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노동 환경과 식사, 주거 환경 등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도 제대로 먹지 못해 책이 나오는 해에 사망했다.[57]삼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 관상가가 강연 자리에서 밝혀 세간에 알려졌다.[58] 서라벌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였는데 담당교수였던 최영남의 강한 요구로 시험을 봤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고등학교때까지 서양무용(발레)을 하다가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연극과에 갔던 거라서 더 이상 무용은 하기 싫다고 말했지만 최영남이 너는 지금 방송국 무용수가 되어도 곧 거기서 연기를 할 운명이라고 말하여 혼을 내며 무조건 시험을 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수가 은인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합격하자마자 바로 "상궁나인"이라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뽑혔다고 한다. 왕 역할의 이순재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는 "나인"(궁궐의 시녀) 역할이었다.[59] 당시 선우용여를 얼굴 앞뒤옆만 카메라로 찍어보더니 무용도 안시키고 나가라고 한 뒤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그전에 다른 후보자들은 그 면접에서 다 무용 시범을 했기 때문에 본인은 떨어진 줄 알았다고 한다. 알고보니 관상만으로 합격시킨 것이었다.[60]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이 관상을 중요시했다는 건 허구라고 한다. "내가 신입 사원을 뽑는 기준은 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사람이 비즈니스 맨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았다."라고 말했다는 것.[61] 다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는데, 다른 언론사에선 집중 견제를 받았기 때문. 사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커진 것도 이때 앙심이 생긴 다른 언론사들이 집중 저격한 탓도 있었다.[62] 이맹희 회고록에서 따르면 친했다기보단 '아버지(이병철)과 일민(홍진기)은 서로를 어려워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민이 후계 구도에 간섭했다는 주장에 대해 일민은 그런 짓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애초에 아버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남의 조언을 듣고 판단할 사람이 아니라고 음모론을 일축했다[63] 사업착수 전에 검토하는 큰 줄기 항목만 90가지였다고 한다.[64] 더 나아가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시절 '재벌 해체, 국가보안법 폐지, 초중등 무료 급식' 등 지금 봐도 파격적인 공약들을 제시해 재벌 회장의 이미지를 깨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65] 다만, 호암처럼 입사 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인재들에게 위임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아이디어가 괜찮은 사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반영하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우위를 나누기보단 스타일 차이라고 봐야 할듯. 또 이병철과 달리 신격호는 정주영과 비슷하게 집안이 잘 사는 편은 아니었다.[66]롯데그룹의 상징성이 있는 제과업은 제일제당이 적극 뛰어들지 않고, 대신 해태그룹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두 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구단 간에 트레이드도 하지 않았을 만큼,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67] 높이 152m로 63빌딩 건설 전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이었다.[68] 1970년대에는 서울 4대문 안에 백화점 신설이 불허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꼼수로 명칭을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터라 하였다. 시장명을 백화점으로 바꾼건 개점 9년 뒤인 1988년 11월.[69]대구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신문 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다녔다.[70] 323(-1)번이 다니는 남침산네거리와 홈플러스 대구점 사이의 도로.[71] 본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도 한 몫 했을 것이다.[72] 이병철의 형 이병각을 임종 전 천주교로 귀의시킨 신부이다.[73] 정 몬시뇰 본인 말론 이병철이 세례를 원했다고 한다.[74] 다만 포브스는 재일교포신격호를 일본인 시게미츠 타케오로 분류했다. 참고로 신격호는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버프로 세계 부자 순위 '4위'였다고. (9위였다는 말도 있다.) 다만 당시 롯데가 그정도로 잘나가던 기업은 아닌지라, 이는 신격호의 부동산 가격이 버블이 끼면서 급상승한 영향으로 봐야 할듯 싶다. 실제 버블이 꺼지며 이후 자산이 많이 내려가고 이 중 상당 부분을 또 자식들에게 물려줘 2010년대엔 국내 40위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75] 말년엔 정주영의 현대에 뒤진 적이 있긴 하다.[76] 인터넷 댓글창 등을 통해 이병철이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가 사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으나,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이병철이 직접 며느리감으로 낙점하고, 후일 삼성가의 안주인이 되는 홍라희부터가 전북 전주 태생이다.[77] 사실 여부를 떠나 탑승감 이외의 문제도 있는 것이, 국내에서 사업한 외국 엘리베이터 업체로 저명한 것은 OTIS, 티센크루프, 미츠비시를 꼽을 수 있는데, 미츠비시는 한국시장에서 철수했고, OTIS는 LG와, 티센크루프는 과거 동양엘리베이터와 합작해 들어와 각각 LG-OTIS, 티센크루프-동양으로 영업했다. 국내 업체로는 현대엘리베이터가 있으므로, 운영진으로써는 경쟁사 제품을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도 짐작할 수 있다.[78] 같은 세대인 LG 창업주 구인회도 만 38세(...)에 할아버지가 되었다.[79] 미국 뱁슨 칼리지 주최.[80] 이때 정욱은 직접 이병철을 만나 본인이 쓰던 안경과 ‘운둔근(運鈍根;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운이 온다)’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받았다고 한다.[81]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 등.[82] 다만 드라마판의 진양철의 인물 묘사는 확실히 이병철의 영향이 크기는 하지만, 원작의 진양철은 이병철과 비슷한 색채가 옅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