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丹陽禹氏)를 역사에 드러낸 인물은 여말(麗末)의 석학 역동(역동) 우탁(禹倬)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역학(易學)을 개척한 대학자로서 또 서릿발 같은 기개로 왕(王)의 패륜을 극간했던 당대의 명신으로서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1308년, 갓 왕위에 오른 충선왕(忠宣王)은 부왕(父王 충렬왕(忠烈王))이 총애했던 숙창비(淑昌妃)와 정을 통하는 등 정사를 멀리하고 애욕의 늪에 빠졌다. 당시 우탁(禹倬)의 벼슬은 감찰규정(監察糾正). 어느날 그는 도끼 한 자루와 거적때기를 들고 어전에 나갔다. 그리고 거적때기 위에 엎드려<충렬왕릉(忠烈王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부왕(父王)이 총애했던 숙창비(淑昌妃)를 희롱하는 처사는 인륜을 저버린 패륜>이라는 내용의 칼날 같은 상소를 올렸다. 왕(王)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그의 직간에 만좌한 조신들은 몸을 떨었다. 왕(王)이 어떠한 보복을 내릴는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패륜을 범한 왕일지라도 <인륜(人倫)의 도(道)>를 역설하는 대신을 함부로 범할 수는 없는 법. 왕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우탁(禹倬)에게 거적때기 위에서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끼로 찍어 달라며 머리를 조아린 채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왕을 욕보인 신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책이었다. 이후 우탁(禹倬)은 벼슬을 훌훌 떨쳐 버리고 경북(慶北) 안동(安東)지방(현 안동군 예안면(安東郡 禮安面))에 은거, 주역(周易)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호 역동(易東)은 <동방에 역학(易學)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그의 사후(死後) 2백년-. 성리학의 대가 이퇴계(李退溪)는 그를 “동방(東方) 성리학(性理學)의 조(祖)”라 극찬, 은거지 예안(禮安)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세우고 그의 위업을 기렸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쥐고…”,“춘산(春山)에 눈녹인 바람…”등의 ‘한노가(恨老歌)’는 그가 남긴 명시조다. 우탁(禹倬)의 출생지는 충청도(忠淸道) 단양(丹陽). 17세에 진사(進士)에 합격,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됐고 29세에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祿)을 제수 받았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당시 영해군(寧海郡)에 팔령(八鈴)이라는 요신(妖神)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동(역동)은 과거에 급제한 사록(司祿)을 제수받고 먼저 그 사당을 부수고 요신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한다. 우씨(禹氏)는 고려 충령왕조(忠烈王朝1247~1308)를 전후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선 개국 직전까지 번영을 누린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그의 아들 천규(天珪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천계(天啓)ㆍ천석(天錫 시중(侍中))ㆍ천우(天佑)ㆍ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공민왕(恭愍王) 11년 홍건적의 침입 때 개성(開城)수복에 공을 세우고 동서북면도원수(東西北面都元帥)ㆍ찬성사(贊成事)등에 오른 우제(禹磾), 우길생(禹吉生 적성부원군(赤成府院君))ㆍ우복생(禹福生 창왕조(昌王朝)ㆍ문하시중(門下侍中))ㆍ우팽(禹伻 문하시중(門下侍中))ㆍ우인열(禹仁烈 찬성사(贊成事)ㆍ정평공파조(靖平公派祖))등은 여말(麗末)의 대표적 명현들이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면서 우씨일문(禹氏一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역동(易東)의 손자인 우현보(禹玄寶)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갈리던 무렵의 대표적인 절신(節臣).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등을 역임하고 단양(丹陽)부원군에 오른 그는 당대의 명유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등과 교분이 두터웠던 석학이었다. 그는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귀양을 가기도 했었으나 조선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중 고려수절제신조(高麗守節諸臣條)에 禹玄寶의 편모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창왕(昌王)2년에 김저(金佇)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낭관(郎官)들이 공(公 우현보(禹玄寶))이 여흥(驪興)에 가서 폐왕 우(禑)를 만나 은밀히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다 하여 공(公)을 벌하도록 왕에게 간했다. 그러나 창왕(昌王)은 이를 곧이 듣지 않고 파직만 했다가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했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공(公)은 경주(慶州)로 유배되고 그 이듬해 고려가 망했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가 공신(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이성계(李成桂)는 옛친구인 공(公)에게 친구의 예(禮)로서 대접하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공(公)은 낙향하기를 원했다. 공(公)이 죽은 뒤 태조(太祖)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우현보(禹玄寶)는 조선 정종(定宗)2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다. 세상에서 죄를 지은 몸이니 내가 죽거든 선영 밑에 묻지 말고 우리 내외를 합장도 하지 말라. 나 혼자 무덤을 만들어 내가 생전에 죄인이었다는 뜻을 표시케 하라” 우현보(禹玄寶)가 남긴 유언이다. 그의 아들 우홍수(禹洪壽 대제학(大提學)ㆍ대제학공파조(大提學公派祖))ㆍ우홍부(禹洪富 예판(禮判)ㆍ예안군파조(禮安君派朝))ㆍ우홍강(禹洪康 개성유수(開城留守)ㆍ대제학(大提學)ㆍ안정공파조(安靖公派祖))ㆍ우홍득(禹洪得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ㆍ집의공파조(執義公派祖))ㆍ우홍명(禹洪命 예판(禮判)ㆍ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등 5형제도 조선 개국 당시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다 전원 유배당했으며 우홍수(禹洪壽)ㆍ홍득(洪得)ㆍ홍명(洪命)등 3형제는 혁명의 와중에서 또는 유배지에서 숨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한편 둘째 우홍부(禹洪富)와 셋째 우홍강(禹洪康)은 뒤에 풀려나와 우홍부(禹洪富)는 정종(定宗)2년 제2차의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太宗))을 도운 공으로 정난원종(靖難原從)에 올랐고, 우홍강(禹洪康)은 한성부윤(漢城府尹)ㆍ강원도(江原道)관찰사 등을 지냈다. 맏이 우홍수(禹洪壽)의 아들 성범(成範 공양왕의 사위)도 조선(朝鮮)개국 때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아우 우승범(禹承範)은 황해도(黃海道)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우공(禹貢 수사(水使)ㆍ도총관(都摠管))은 세조(世祖)때 이시애난(李施愛亂)의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敵愾)공신 3등에 오르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좌리(佐理)공신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때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가(詩歌)로써 시국을 풍자하다 갑산(甲山)에 귀향갔던 우선언(禹善言)은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단양 우(丹陽 禹)씨의 충절의 기개는 구국의 투혼으로 되살아났다. 우성전(선조조(宣祖朝) 대사성(大司成))ㆍ우복룡(禹伏龍ㆍ동(同)ㆍ성천부사(成川府使))ㆍ우배선(禹拜善 동(同)ㆍ樂安郡守), 우치적(禹致績 동(同) 순천부사(順天府使))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들 중 우성전(禹性傳)은 선조(宣祖)때 동인(東人)이 남인(南人)ㆍ북인(北人)으로 분파 할 당시 남인(南人)의 영수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 그가 서울 남산(南山)밑에 살았기에 남인(南人)이란 호칭이 생겼다.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당쟁이 불꽃을 튀기던 시절,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ㆍ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등을 지냈던 그는 북인(北人)에 의해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수천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 서울 남산(南山)을 수호하는 등의 전공으로 대사성(大司成)에 특진되었으나 부평(富平)전투에서 전사했다 저서로‘역설(易說)’,‘이기설(理氣說)’등을 남겼다. 우희열(禹希烈)은 태종(太宗)때 충청(忠淸)ㆍ경기도(京畿道)관찰사를 거쳐 세종(世宗)때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특히 수리 공사에 대한 식견이 높아 각도에 파견되어 제방(堤防)공사를 독려했다. 선조(宣祖)때의 유학자이자 부사ㆍ목사등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우복룡(禹伏龍)은 희열(希烈)의 5대손. 숙종(肅宗)때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성리학자로 박람강기했던 우세일(禹世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한말의 이름높은 경사가(經史家)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우성규(禹性圭 단양군수(丹陽郡守))등도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낳은 인물들이다. 조선말(朝鮮末)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 탄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우세영(禹世英)은 한국 천주교 수난사에서 기록된 순교자, 사후에 복자(福者)로 추앙받고 있다. 근세의 인물로는 을사(乙巳)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정동의여대장(正東義旅大將)>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관서(關西)의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펴 용맹을 떨쳤던 우동선(禹東鮮), 대구(大邱) 친위대 참교(參敎)로 있다가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병영을 탈출해 광복회(光復會)조직, 만주(滿洲)에 군사학교 설립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우재룡(禹在龍),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암살할 당시 동지로서 합세했던 우덕순(禹德淳)등이 빛난다. 이렇든 단양우씨(丹陽禹氏)는 1천여 년의 씨족사에서 <절의(節義)>를 가장 고집해온 가문이다. “왕(王)앞에 도끼를 들고 나타났던 역동(易東)의 기개가 고려가 망할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임진왜란과 일제침략을 당해서는 구국의 투혼으로 이어져 왔다.”고 우대규씨(禹大奎 서울 화숭회장ㆍ한일(韓一)약품회장)는 말한다. 해방 후 단양우씨(丹陽禹氏)문중은 사회 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박사는 <세계의 권위>로 꼽혔었다. 1919년 동경제대(동경제대) 농학과를 졸업한 그는 피튜니아 꽃의 겹꽃 육종에 성공했으며 1936년 <종(種)의 합성설(合成說)>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대(代)잡종의 확립, 핵(核)치환 배추육성, 고추 우량 품종 육성 등의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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