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 수 (蒙 首)와 흑 멱 리(黑 冪 籬)
○ 해동역사 예지(禮志)편을 보면, 관심을 끄는 구절(句節)이 있는데, 곧
《 해동역사(海東繹史) 본문(本文) : 부인(夫人)들이 출입할 때에도 역시 말과 노복을 공급하는데, 이들은 대개 공경(公卿)이나 귀인(貴人)의 처(妻)로, 따르는 종자(從者)가 2, 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얼굴을 가리는 ㉠『너울(蒙首)』을 만들어 쓰는데, 그 끝이 말 위를 덮으며, 거기에 또다시 갓[笠]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만은 오직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 轝)는 없다. 옛날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과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궁인(宮人)들이 대개 말을 타면서 대부분 ㉡『흑 멱 리(黑 冪 籬)』로 전신(全身)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高麗)의 풍속(風俗)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唐)나라 때 『멱리(冪籬)의 유법(遺法)』이 아니겠는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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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문화원형 백과사전> : 개두, 몽수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부터 귀부인들은 몽수(蒙首)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출입하였다. 이는 본래 서역 부녀자의 쓰개였던 것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멀리 당나라에서는 몽수를 멱 리(但 奴), 유모(烽 帽), 개두라고 일컬었으나, 우리나라에선 조선(朝鮮)시대에 이르러 길이가 짧아지면서 개두(蓋頭)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도경> 등의 기록으로 보아, 몽수(蒙首)는 고려시대에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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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설명으로 보면, 『 몽 수(蒙首) 』란 : 공경(公卿) 또는 귀인(貴人)의 처(妻)들이 외출(外出)할 때는 종자(從者) 2-3인이 따르고, 검은 천으로 머리로부터 얼굴을 가리고, 그 천이 말 위를 덮을 정도이며, 또 그 위에 갓(笠)을 다시 썼다고 한다. <몽(蒙) : 입을 몽. 덮다. 덮어씌우다> 이것은 당(唐)나라 때의 멱리(冪), 유모(烽 帽), 오호(五胡)시대의 멱(冪)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닌가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몽수(蒙首)는 조선(朝鮮)시대 개두(蓋頭)라고도 한다.
고려(高麗)시대에 몽수(蒙首)는 대중화(大衆化)되어, 매우 일반적(一般的)으로 사용(使用)되었을 것으로 설명(說明)하고 있다.
몽수(蒙首)는 검고, 얇은 견직물인 라(羅)로 만든 것으로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끝이 땅에 끌릴 정도의 긴 것이다.』 『조선(朝鮮)시대에는 개두(蓋頭)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재(現在) 중앙아시아 지방의 회교(回敎)도들의 여인(女人)들이 사용(使用)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아마도 이것으로부터 유래(由來)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大部分)이다.
이러한 예법(禮法)은 회교도(回敎徒)의 성전(聖典)으로부터 유래(由來)한다고 보아지는데, “여인(女人)들의 신체(身體)를 가족(家族)이 아닌 타인(他人)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예법(禮法)이 고려(高麗) 때 유행(流行)되어, 정착(定着)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정확한 경위(涇渭)는 알 수 없다.
만약(萬若) 위 ㉡의 설명(說明)대로,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과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궁인(宮人)들이 대개 말을 타면서 대부분『흑 멱 리(黑 冪 籬)』로 전신(全身)을 가렸다고 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신라(新羅)시대에 관복(官服)도 당(唐)의 관제(官制)에 따랐다고 보면, 이때 더 성(盛)했을 것으로 판단(判斷)되는데, 【해동역사(海東繹史) 저자(著者)는, 논평(論評)하기를, 《지금 고려(高麗)의 풍속(風俗)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唐)나라 때 『멱 리(冪籬)의 유법(遺法)』이 아니겠는가》하였다.】 한참 후대(後代)의 “고려(高麗)”시대에, 『고려(高麗)의 풍습(風習)이었다.』고 하면서, 해동역사(海東繹史) 예지(禮志)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무언가 다른 이유(理由)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더하여, 『근대조선(近代朝鮮) 당시에도 부녀자들은 “너울”을 쓰고, 외출(外出)하였는데, 이러한 풍속(風俗)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면, 그 이면(裏面)엔 그럴 만한 이유(理由), 또는 유래(由來)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이것은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난 뒤, 고려(高麗) 여인(女人)들이 “망국(亡國)의 한(恨)과 치욕(恥辱)”으로 인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이야기와는 차원(次元)이 다른 설명(說明)이다. 이미 고려(高麗)에서는 “너울”을 쓰고, 머리에 삿갓을 쓰고 다녔으니 말이다. 이렇게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왜곡(歪曲)된 이야기만 가르치는 것은 무엇 연유(緣由)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선적(優先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회교(回敎)의 ‘하지라’는 ‘기원후(紀元後) 620-630년’경으로부터 시작(始作)된다. 『당(唐) 무덕(武德 618~626)』이라면, 회교(回敎)가 일어나기 전(前) 또는 일어난 직후(直後)로 사료(思料)되는데, “당(唐) 조정(朝廷)” 궁녀(宮女)들이 이러한 시기(時期)에『흑 멱 리(黑 冪 籬)』를 사용(使用)했다고 하는 것은 회교(回敎)의 발상지(發祥地)와의 지리적(地理的)환경(環境)이나 교통로(交通路) 및 생활환경(生活環境)요건(要件)건등을 감안(勘案)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 이러한 것이 『가능(可能)했다.』고 한다면, 『당(唐)나라는 회교(回敎)의 발상지(發祥地) 그 자체(自體)였거나, 또는 근접(近接)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高麗) 역시 당(唐)의 영토(領土)였던 곳【영토】과 그 변경(邊境)지방이 근접(近接)해 있었을 때만이 위의 일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근세(近世)에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조선인(朝鮮人)을 “고려인(高麗人)”이라고 호칭(呼稱)했던 것과 현 신강(新疆)지방에 “고려인(高麗人)”들이 살았다는 통전(通典)의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萬若), 연행록(燕行錄) 기록(記錄)을 믿는다면, 현 신강(新疆)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일부 옛 나라들은, 그 서쪽지방【현 신강(新疆)의 서(西)쪽 지방으로 중앙아시아지방】으로 옮겨져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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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車 師 (高昌 附) : 《 文 字 亦 同 華 夏 ,兼 用 胡 書 。有 毛 詩 、論 語 、孝 經 、歷 代 子 史 ,集 學 官 弟 子 ,以 相 教 授 。雖 習 讀 之 , 而 皆 為 胡 語 。賦 稅 則 計 田 輸 銀 ,無 者 輸 麻 布 。其 刑 法 、風 俗 、婚 姻 、喪 葬 與 華 夏 大 同 。其 人 面 貌 類 高 麗, 辮 髮 施 之 於 背 女 子 頭 髮 辮 而 垂 :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夏)와 같았으며(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등이 있었으며, (중략). 그 형법. 풍속. 혼인. 장례 등 모두 화하(華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
(2) 于 闐 (우전) : 《 自高昌以西,諸國人多深目高鼻,惟此一國,貌不甚胡,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지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눈은 깊고, 코는 높다.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 (于闐)국을 칭하는 것임】 는 얼굴모양이 호 (胡 : 오랑캐)와 같지 않은데, 약간 (頗 : 자못 파. 약간. 조금)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
○ 반도(半島)로부터 일만(一萬) 리 쯤 떨어져 있는 『거사(車 師)』의 백성(百姓)들의 풍속(風俗)이나 의복(衣服), 혼인(婚姻)이나 장례(葬禮) 등의 모든 생활(生活) 습관(習慣)이 대부분 중화(中華=華夏)와 같았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은 모두 고려(高麗)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특히 <부녀자들은 머리 땋아 등 뒤로 드리웠다.>는 말은,
이곳이 고려【高麗 : 고구려(高句驪)을 뜻한다.】의 땅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기록은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거사(車師) 또는 고창(高昌) 땅, 서쪽지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인(胡人)으로써,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눈은 깊고, 코는 높다. 【諸 國 人 多 深 目 高 鼻】고 한 것을 보면, 이곳이 고구려(高句驪)와 서융(西戎)들과의 변경(邊境)지방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며,
중화(中華)와 고려【高麗 : 고구려(高句驪)】란 말은 같은 의미(意味)라 할 수 있다. 곧 “고려(高麗)와 중화(中華)”는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고려(高麗)는 중화(中華)이며, 중화(中華)는 고려(高麗)이다.”라고 할 수 있다.
● 꼭 지적(指摘)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일련(一連)의 역사(歷史)전개(展開)과정(過程)은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主張)으로 결코 해결(解決)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린 좀 더 과감(果敢)하고, 넓은 안목(眼目)을 가져야 할 때다.
2012년 03월 0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