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생 】
사슴이 사자에게 먹히는 것은 사슴의 불행이 아니다. 슬픈 일이 아니다. 잠시 몸을 바꾸는 것이다. 사슴의 몸을 벗고 사자가 되는 것이다. 사슴의 살은 온전히 사자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존재가 죽음에게 먹히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생명의 죽음도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은 없다. 사자의 죽음도 끝은 아니다. 사슴이 그랬듯이 마침내 들판에서 죽은 사자 또한 몸 바꾸어 독수리가 되고, 까마귀가 되고, 개미가 되고, 구더기가 된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된다. 풀이 된 사자는 다시 사슴이 되고, 염소가 된다.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사자는 물고기가 되고, 오징어가 되고, 바다가재가 된다. 삼치가 되고, 홍어가 되고 남해 바다의 소라고둥이 된다. 아프리카 사슴이, 사자가 남해 섬사람이 된다. 중생은 그렇게 환생 하고 윤회 한다. 바다로 간 섬사람이 멸치가 되고, 장어가 되고, 갈치가 된다. 사람을 먹은 갈치가 밥상에 올라 또 다른 사람이 된다.
【 고통 】 중생(衆生)에게 고통의 시간은 건너 뛸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견뎌내야 할 시간일 뿐. 고통은 또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통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옥죄어드는 올가미와 같다. 삶 또한 그러하다. 삶이 참담하다 해서 건너 뛸 수는 없다. 인간은 그 삶이 어떠한 것이든 온전히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삶의 초월 따위를 이야기하는 어떠한 종교적, 초자연적 언술도 모두 사기다. 건너 뛸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은 아닌 것, 초월은 초월자의 권능이지 인간의 일은 아니므로.
【 천국 】
인간에게 천국이란 연인과 여행자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어떠한 여행지도 여행자에게는 천국이다. 어떠한 연애도 연인에게는 피안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여행자여! 어떠한 천국도 정착지가 되는 순간 지옥으로 돌변한다. 명심하라 연인이여! 그대들의 천국 또한 그러하다.
【 사랑 】
우리는 늘 실패하면서도, 다시 실패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왜 자꾸만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탈이 나고, 체한 적이 있다 해서 결코 밥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없듯이 상처받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결코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생명이 있다. 육체의 생명과 정신의 생명. 우리는 우리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밥과, 물과 야채와 고기와 햇빛과 공기 등의 물질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듯이 우리의 정신, 영혼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지식과, 사유와 사랑 같은 정신의 양식들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밥처럼 사랑은 삶에 꼭 필요한 양식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랑은 육체의 여느 양분들처럼 지나침도 모자람도 금물이다. 인간의 육체에 공급되는 영양분이 균형을 잃었을 때 육신은 병이 들듯이 정신의 양분 또한 균형을 잃으면 병이 된다. 균형. 우리가 늘 맞추길 갈망하지만 백 개의 저울을 들고서도 결코 맞출 수 없는 균형. 더 떠먹으면 탈이 나고 병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저 밥숟가락 위의, 사랑.
【 고행과 신비주의 】
세상에는 여전히 주술이나 신비주의, 고행 따위를 진리인양 호도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자칭 도사나 무속인, 신비가 뿐만 아니라 종교인도 적지 않다. 인류의 큰 스승 붓다나 예수는 신비한 능력은 진리와 무관한 것이니 소문내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말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성인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까지도 주술을 들먹이고 신비주의나 고행주의로 혹세무민 한다. 애석한 일이다.
세상에 신비한 현상은 능히 있을 수 있다. 공중부양을 하고, 투시를 하고, 장풍을 날리고, 축지법도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런 신비한 능력을 얻기 위해 수도를 하고 수련을 한다. 그런 신비주의자들을 추종하는 세력도 허다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신비한 능력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사람들은 앉은 채로 30cm나 1m쯤 뜨는 자를 신처럼 우러르지만 사람이 앉아서 1m를 뜬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움직일 수도 없고, 밥 한 그릇 편히 먹을 수 없지 않은가. 새들은 수 백 미터 하늘을 떠서 쉽게 날아다니며 먹이도 잡고 똥도 싼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자랑할 만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행기나 우주선은 수 천 미터, 수 천 킬로미터 하늘도 수시로 오가지 않는가. 중력만 없다면 사람 또한 허공을 둥둥 떠다닐 수도 있지 않은가. 오래 전 유리 겔라라는 마술사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염력으로 시청자들 집안의 숟가락을 구부렸다 해서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밥 떠먹으라고 있는 숟가락을 왜 구부려서 못 쓰게 만들어 놓고 호들갑이었을까. 뜨거운 불이나 용광로는 숟가락이 아니라 유리 겔라까지도 녹여버릴 수 있지 않은가. 사람 몸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벽을 뚫고 사물을 보는 투시능력자도 분명 존재 한다. 하지만 CT나 MRI도 사람 몸속의 내장까지 훤히 들여다본다. 또 축지법으로 순식간에 천리를 가는 것을 자랑 삼기도 하지만 초고속 열차나 비행기는 수 천 명을 태우고 하루 만리도 너끈히 간다. 장풍 따위는 또 어떤가.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사람 하나 살상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처럼 여기지만 인간은 이미 주먹만한 핵폭탄 하나로도 수 백 만 명을 일시에 몰살 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 신비한 능력이란 그토록 부질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런 신통력을 사소하게 여겼으며 예수님께서는 소문내지마라 이르지 않았던가.
고행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고행의 경력이 무슨 깨달음의 척도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거기에 현혹되는 사람들 또한 수두룩하다. 평생 눕지 않았느니, 장좌불와 10년을 했느니, 앉아서 열반에 들었느니 떠들어 댄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죽은 스승이나 병마에 시달리다 스승이 누워서 열반에 들면 몸이 굳어지기 전에 제자들이 어서 일으켜 앉혀 놓고 좌탈입망 했다고 소문내기까지 한다. 우스운 일이다. 부처님도 누워서 열반에 들었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열반에 들지 않으셨는가.
인류의 큰 스승들은 일관되게 고행이나 신비주의를 배척했다. 장좌불와나 좌탈입망이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은행나무는 앉은 자리에서 천년을 꿈쩍도 않고 있으며 코끼리나 말은 평생을 서서 잠들기도 하는 것을.
【 전생과 후생 】
분실한 전생을 찾아주는 자들이 있다. 전생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들이 있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전생을 타자가 훤히 안다. 대개 사람이란 자기 몸의 전생도 알지 못하기 마련인데, 수천, 수만, 아니 세상 모든 인류의 전생을 훤히 안다고 큰 소리 치는 자들이 있다. 그걸 믿고 따르는 추종자도 허다하다. 놀라운 일이다. 누구의 전생이든 눈 한번 감으면 알아 맞추는 자의 신통력이 놀랍고, 그 신통한 능력을 터럭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의 지적 능력 또한 놀랍다. 전생이니 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신앙이다. 나는 내가 생겨나기 이전의 전생이 있다고 신앙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생은 오로지 한번 뿐이다. 수도 없이 반복 되는 생이라면 생이 소중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전생과 후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인과법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허황된 소리지만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한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고 남이 알려준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전생이겠는가. 후생이 있다한들 스스로 갈 곳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후생이겠는가. 그런 전생과 후생으로 어떻게 인과법을 깨닫게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생 이전에 전생이란 없다. 나의 사 이후에도 후생이란 따로 없다. 삶 밖에 극락이나 지옥이 없고, 삶 속에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듯이 전생이나 후생이 있다면 그 또한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지 않다. 내일의 나 또한 오늘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나는 없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오늘 나의 전생이다. 내일의 나는 오늘 나의 후생이다. 어제 내가 악한 마음으로 악한 짓을 했으면 오늘 나는 악인이다. 오늘 내가 선업을 쌓았으면 내일의 나는 분명 선인이다. 인간은, 존재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윤회한다. 이것이 인과법이다. 이것이 전생이 있고 후생이 있다는 것의 의미다.
【 삶과 죽음 】
누가 죽음이 두렵겠는가. 결코 오지 않는 미래가 두렵겠는가. 죽음은 죽음의 일, 삶이 죽음의 볼모는 아니다. 내일은 내일의 일, 두려운 것은 오늘이다. 어떠한 고통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도 무릅쓰는 용기를 칭송하지만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 그리 대단한 용기는 아니다. 죽음 앞에서도 삶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용기 있는 자의 행동이다. 죽음에 몸을 맡기기는 쉽다. 죽음과 맞서기는 진실로 어렵다. 삶을 버리기는 쉽다. 삶을 지키기는 진실로 어렵다.
【 존재의 외로움 】
안개의 계절이 돌아 왔다. 마을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개의 군단에게 자리를 내준 것일테지. 하지만 나는 마을이, 바다와 산과 하늘이 안개 속으로 아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마을과 사람과 염소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야 문득 깨닫는다. 내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 남겨지길 원했구나. 사람은, 존재는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다. 함께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존재들 속에서 문득 혼자인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함께 있어도 함께가 아닌 것들. 사람들, 염소들, 마을길과 바다와 산들. 은수자가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디며, 외로움에 미쳐버리지 않고 몇 십 년을 살 수 있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혼자서는 결코 외로울 수도 없는 것이다.
【 욕심 】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있다. 비워도 비워도 다 비울 수 없는 것이 있다.
【 인사 】
간혹 어떤 사람이 신세를 졌는데 인사가 늦었다고 인사를 해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인사도 늦은 인사란 없다.
오직 ‘인사 할 줄 아는 사람'과’과 ‘인사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
【 상처 】
어떠한 상처도 스스로 치유되는 법이란 없다.
어떠한 상처도 타자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다.
어떠한 상처도 치유해주면서 치유될 뿐이다.
<공동선 2006, 9.10 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