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어머니의 쉼터
문희순
장마가 끝나니 칠월의 불볕더위가 숨이 막히게 이어진다. 아름다운 꽃이 무더위를 탓하지 않고 태양을 향해 자기를 열고 서 있듯이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감사하며 태양이 뜨거운 거리로 조심스럽게 나섰다. 가끔은 반복되는 일상을 내려놓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도시에서 무책임하게 구경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모든 것에서 잠시 벗어나 숨구멍을 트면 바쁘게 살아오느라 잃어버렸던 보석들이 반짝 살아나 진정한 삶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복합터미널을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반겨주어 땀을 식히며 광주광역시 가는 고속버스 승차권을 샀다. 버스 안은 차가운 바람이 적당하게 온도를 맞혀주어 2시간 20분 감사함을 느끼며 의자에 기대여 토막잠을 청했다.
양림동 가는 길은 수월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9번 버스를 타고 일곱 번 정도 승강장을 지나고 전남대병원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곳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오늘의 목적지 “오월 어머니 집이다.”
대문이 활짝 열린 오월 어머니 집을 마주하니 나의 유년 시절 우리 집 전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건물 위에 횃불이 하늘을 보고 있다. 긴 세월의 얼룩진 상처의 터널에서 맨몸으로 몸부림치며 지독히 떨기도 하고 통곡하며 그렇게 이겨내며 강해진 어머니, 그것은 살아가야 하는 희망이었다.
오월 어머니 집에 계신 분들은 518민주화운동 올해로 42주년을 맞이하다 보니 연세가 평균 80~90대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남편을 잃으신 분들은 60-70대 후반이고, 형제, 자매 잃으신 분들은 50~60대 초반, 부모를 잃으신 분들은 50대 초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점심시간을 지나서 거실로 들어섰을 때는 어깨가 들썩들썩하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들의 노래교실 시간이었다. 바라보는 내 마음이 뿌듯해지며 흥에 겨워 몸을 살짝살짝 움직이시는 모습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머니들은 노래시간도 있고 그림도 그리시고, 공예도 하시고 남은 삶 위로와 치유 받으시면서 즐겁게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응원하는 기도를 마음속으로 했다.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어머니들이 손수 그리고, 만드신 작품들이 걸려있고 전시되어 있는데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아픈 사연들이 있어 보는 나도 고통이었다. 그중에도 몇 작품은 전투적인 믿음으로 이겨내시고 치유하시는 작품이 있어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 기가 나에게도 은은하게 전해졌다.
오월 어머니 집은 다른 단체들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하신 어머니들이 아침에 오셔서 편히 쉬시고 배우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 집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소품 하나까지 묻어 있다. 그리고 특히 이곳에서 근무하시는 직원분들의 상냥함과 관장님의 넉넉하고 포근한 인상과 차분하게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인내력은 정말 감동이었다. 그리고 봉사하는 마음 자세로 근무에 임하시는 모습은 존경 그 자체였다.
코로나 19로 의료진, 공무원들이 방역에 지쳐있을 때 오월 어머니들이 팔을 걷고 손수 만든 몇백 개의 도시락을 제공하셨다고 한다. 공동체 안전위해 애쓰는 공무원들 맛있게 드시고 기운 내어 방역 잘하시라고 선한 사업에 동참했다고 한다.
사랑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머니들의 평온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작은 공간 오월 어머니 집,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나고 오색 물감으로 집을 색칠하듯 마음이 핑크빛으로 물들며 진정 감사했다. (이해인) 기다리는 행복에서 “내가 만나야 할 행복한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망이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오거리에 가면 민주주의를 위해서 피눈물 흘리시며 노력하셨던 오월 어머니들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