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낭
강정효 사진전
2020.11.21~11.30
폭낭은 팽나무를 이르는 제주 말이다. 제주에서 폭낭은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일뿐만 아니라 마을의 신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히 마을 공동체와 동고동락을 함께 해 온 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별다른 놀이터나 놀이기구가 없던 어린 시절 마을 한복판에 우람하게 서 있는 폭낭 아래는 주된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나무 위로 더 올라가는지를 놓고 담력시험을 했을 뿐만 아니라 폭이라 불리는 폭낭의 열매가 주황색으로 익으면 따서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폭낭의 아래는 둘로 단을 쌓아올린 후 시멘트로 포장한 댓돌이 있었는데, 여름철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피서지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댓돌에 모여앉아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공회당 역할까지도 했었다. 1970년대 마을회관이 건립되기 이전의 일이다.
마을 안의 폭낭은 친근한 공간인데 반해, 마을 구석에 위치한 신당의 폭낭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신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혹 동티가 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여섯 살 무렵 새벽녘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두려움에 떨며 당을 찾았던 적이 있다. 새벽에 2km 가량을 걸어야 하는 어머니가 말벗삼아 데려간 것이다. 이후 신당을 다시 찾은 것은 20대 들어 신당에서 열리는 굿을 촬영하러 갔었고, 지난 2008년에는 제주도의 신당을 전수 조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제주도 곳곳을 다니다 보면 허허벌판에 외따로 서 있는 폭낭들도 자주 보게 된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제주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 당시 없어진 마을들이다. 잃어버린 마을로 불리는, 4.3 당시 없어진 마을은 2019년 제주4‧3평화재단이 펴낸 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34개 마을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살의 현장을 지켜봤던 나무들도 상당수 있다.
하지만 개발바람과 함께 제주의 폭낭들도 시련을 맞고 있다. 도시화와 더불어 마을길을 넓히면서 베어지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곳곳에 카페나 펜션, 타운하우스, 전원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까지도 사라지는 상황이다. 과거 4.3 당시에는 총칼에 의해 없어진 마을과 폭낭이 요즘에는 자본을 앞세운 개발바람에 그 모습을 잃어가는 실정이다. 더불어 제주의 정체성과 공동체 문화도 함께.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정효
1965년 제주 출생. 기자, 사진가, 제주대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사)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사장)를 역임했다. 16회의 사진개인전을 열었다.
〈제주 아름다움 너머〉, 갤러리 브레송, 서울, 한국, 2016
〈제주4·3, 남겨진 사람들〉, 마부이구미 연속사진전, 갤러리 라파엣, 오키나와, 일본, 2016
〈한라산 신을 찾아서〉,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 2016
〈할로영산 보롬웃도〉, 스페이스 선⁺ 서울, 한국, 2015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 제주, 한국, 2013
〈제주의 돌〉 기획전,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 한국, 2012
〈대지예술 제주〉, 제주도문예회관, 제주, 한국, 2011
〈베트남〉, 한라대학 전시실, 제주, 한국, 2009
〈일본군진지동굴〉, 제주학생문화원, 제주, 한국, 2006
〈화산섬 돌 이야기〉, 사진갤러리 자연사랑, 제주, 한국, 2000
〈한라 백두〉, 제주국제공항(제주)/한국관광공사(서울), 한국, 2000
〈한라산의 계곡〉, 제주국제공항, 제주, 한국, 1999
〈산악인 고상돈 20주기 추모〉,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 한국, 1999
〈섬땅의 연가〉, 세종갤러리, 제주, 한국, 1997
〈부처님 오신 날〉, 세종갤러리, 제주, 한국, 1993
〈돌하르방〉, 동인미술관, 제주, 한국,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