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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서 벗어나는 법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반야의 법문을 설하시기 이전에 설하신 것으로 출가하신 스님네들의 불교수행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법문입니다.
열반에 드실 무렵에도 제자들이 “어디에 머무오리까?” 하고 물었을 때 “사념처에 머물어라.”고 할 정도로 부처님께서 간절히 마음을 두셨던 법문입니다.
사념처가 무엇인가 하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현상 차별세계에 관한 법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세계에 매달리고 집착해서 고(苦)를 취했기 때문에 그 고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현실에 집착을 떼게 하기 위해서 설하신 현상에 대한 법문, 이것이 사념처고 오정심관(五停心觀)입니다.
오정심관이라고 하는 것은 사념처와 함께 닦는 법입니다. 사념처에 앞서서 닦는 법이 오정심관입니다. 이 다섯 가지라고 하는 것을 오관(五觀)이라고도 하고 오념(五念)이라고도 하는데 다섯 가지 허물을 막고자 닦는 수행입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라는 것인데 이 육체 이 몸뚱이에 대한 탐심, 애욕에 대한 탐심, 이 육체적 현상적 탐심을 끊게 하기 위한 수행법입니다. 필경에는 나서, 성장하고, 변해가면서, 늙어서 송장이 되는 과정까지 모두가 청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적인 육체라 하는 것은 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냄새와 부정한 것을 흘려 보내고 마침내 송장을 만들어 놓고 가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체에 대한 애착과 탐착,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이 육체가 부정한 것이다”라고 보라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다만 무상도를 닦아가는 도구이지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의 부정한 것을 관해서 탐욕심을 멈추게 하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두 번째는 자비관(慈悲觀)입니다. 성을 많이 내고, 자비심을 모르고 남을 해치는 데 대해서도 조금도 마음 아픈 줄 모르고, 남이 다치는 데 대해서도 조금도 동정심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항상 자비한 마음을 키우게 하기 위한 것이 자비관입니다. 일체 중생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성냄을 그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연관(因緣觀)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상이 인연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인연이 모여서 있어지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며, 인연으로 인해서 모아지고 인연으로 인해서 흩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서 어리석은 생각들을 다 제거하라고 하는 것이 세 번째 인연관입니다.
네 번째는 계분별관(界分別觀)입니다. 계(界)라는 것은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자로서 상식적으로 알아둬야 합니다. 세계라 하면 우주가 있고 달이 빛나고 그리고 태양이 빛나고 별이 있고 그 속에 지구가 있고 인간이 살고 이런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계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보는 감각의 세계 즉 눈, 귀, 코, 혀, 몸, 분별의식, 이렇게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이 감각세계가 여섯 개니까 여섯 세계이며, 이 감각의 대상이 되는 세계 그러니까 하늘이 있고, 별이 있고, 태양이 빛나고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꽃이 있고 매미가 울고 하는 세계 이런 세계는 전부 바깥의 경계입니다.
이것은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경(六境), 이렇게 여섯 경계에 대해서 우리가 느낀 세계가 있습니다. 곱다든가, 아름답다든가, 거칠다든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원망스럽다든가, 슬프다든가, 온갖 의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섯 군데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 여섯 가지로 뿌리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으로 여섯, 밖으로 여섯, 그것을 취한 중간의 의식으로 여섯, 그렇게 십팔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이는 바깥세계만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그린 것까지 마음의 생각까지 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팔계(十八界)입니다.
그러니까 계분별관이라는 것은 이 십팔계의 모든 법은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관하여 아견(我見)을 그치는 것입니다.
지·수·화·풍은 사대라고 해서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마는 식과 공을 말하면 육대라고 하는데 이 십팔계라고 하는 존재들은 가만히 보면 독자적으로 부동한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육대(여섯 가지 요소)가 합해져서 사람도 되고, 물질도 되고, 형상도 되고, 운동도 하고, 있다가도 없어지고, 이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이것이 고정적으로 있다고 하는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집착을 붙잡고 놓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이 아견(자기 고집)입니다. 그것을 버려라 하는 것이 계분별관입니다.
다섯 번째가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수식관은 호흡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토하고 하는 것을 하나, 둘 하고 세는 것입니다.
호흡을 거칠게 들어마시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해서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이렇게 호흡을 해서 들어마시고 토하는 것을 하나로 해서 또 하나, 둘 이렇게 호흡을 해서 열까지 하고 그 다음부터 또 하나에서 시작하고, 이렇게 하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흔들리고, 염불할 때도 잡념이 자꾸 일어나거든 수식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밀 염송을 할 때도 자세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저도 법당에 가면 어떤 분이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염불하시는 것을 보고 등을 두들겨 줄 때도 있습니다. 허리를 펴라는 뜻입니다.
허리를 펴면 수식이 됩니다. 수식관은 처음에는 호흡을 하나, 둘 세는 것입니다마는 좀 익숙해지면 세지 않고 호흡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서 생각이 끊임없이 호흡을 계속해서 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흡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 무념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염이 끊어지는 무념이 되게 만드는 제일 중요한 문, 간단한 문이 바로 이 호흡을 생각으로 추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밀 염송할 때도 하나, 둘 세지는 않지만 호흡을 들어마시고 토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 하고 생각으로 염하면서 호흡을 하면 잡념과 산란한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반야법을 설하시기 이전에 권장하시던 대문입니다마는 이 오정심관을 오관(五觀)이라고도 합니다. 사념처나 오정심관이나 같이 닦는 것입니다.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은 오정심관에 정리된 네 가지입니다.
첫째, 신념처(身念處), 이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관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수념처(受念處), 받아들이는 것, 느낌이지요. 따뜻하다, 부드럽다, 시원스럽다, 맛이 좋다 등 느껴지는 것, 감각적인 것, 그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인데 왜 괴롭다고 하는가. 우리들이 현상에 감각적인 것,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들은 내 중심에 맑고 고요한 그 상태에서부터 비뚤어진 것입니다.
비뚤어지면 맑고 고요한 그 깊은 곳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진리에서 그만큼 떠난 것이어서 진리에서 떠난 것은 그만큼 고(苦)를 부릅니다. 지금은 잠시 즐겁고 따뜻하고 달고, 맛있고, 좋은 것같이 보여도 거기에 집착을 해 버리면 그만큼 자기의 본성에 평등한 마음, 맑은 마음, 그 마음이 치우친 것이 되기 때문에 치우친 상태가 지나치면 지나친 정도로 그 사람 마음이 거칠어지고 거칠어지면 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몸이 다했을 때 거친 성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입니다.
저는 말 가운데서도 아주 억센 말, 거친 말, 악센트가 강한 말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부드럽고 연한 말보다도 아주 톡톡 쏘는 말, 자극적인 말이라든가, 술이라도 독한 술이 많이 먹힌다고 합니다.
제가 그 전에 아산 어느 공단인가 그쪽에 갔을 때 소비성향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그 당시는 맥주가 고급이었는데 맥주가 대량 팔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양주가 팔리는 양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이 윤택하고 좋아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근로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나 강한 자극을 가져오는 독한 술 같은 것을 즐겨 먹는 성격들이 좋은 것인가? 그러한 성향, 그러한 국민성은 그리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극적인 것, 강한 자극을 통해서 자기 만족을 가져오는 그러한 성격이면 신경질적이 되고, 자기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자기 안정감을 잃어버린 상태는 거친 성격이 되고, 이 몸을 키워가는 가운데서 거친 마음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국민성 전체에 대해서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인즉 거기서 확대해 보면 국민성 전체가 거칠어졌을 때 사회가 안 좋아지고 어지럽다고 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환경이 나빠집니다. 이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있어서 좋은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환경이라는 것은 근본뿌리에서는 본래 하나입니다.
인간계에 태어난 것도 인간계에 태어날 만한 마음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계에 태어난 것이고, 지옥에 태어난 것도 마음이 거칠고 억세고 그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그 세계를 자기가 만들어서 간 것입니다. 또 천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밝고 따뜻하고 맑은 마음을 키웠기 때문에 그 착한 마음이 뿌리가 되어서 천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천상이라고 하는 복스런 환경이나, 인간이라는 환경이나, 지옥이라는 환경이나 그 환경을 누가 만들었는가? 살고 있는 환경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생활 가운데서도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곱게 쓰면 그 사람의 인격이 좋아지고 가정이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사회 환경을 밝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이 천상에 간다거나 극락에 가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이 국토가 아름다워집니다.
근래 어떤 지역의 이상 기후라든가 화산폭발 같은 것은 현대인의 자기 본자성에 대한 도전, 반발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마는 그것을 전적으로 긍정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거칠어진다고 하는 사실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을 믿는 사람, 반야바라밀을 닦는 사람들이 더 평화스럽고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키워가도록 노력하고 이 법을 널리 전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국토가 아름다워지고 세계가 평화스러워지도록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념처(心念處)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무상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호숫가에 던져진 그림자와 같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비추고, 구름도 비추고, 나무도 비추고 그것은 비추는 것이지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변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있는 것으로 알다보면 속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 내 생각이라는 것도 자꾸 변합니다. 환경 조건에 따라서 자꾸 바뀝니다.
아까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렇다던가, 삼 년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다르다던가 뭐, 생각이 점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라는 것은 덧없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법념처(法念處)입니다. 모든 현상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요소들의 결합체가 아닌가? 이것은 조금 전 오정심관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오정심관에 대해 말씀드릴 때 한 가지 빠졌었는데 계분별관 대신에 염불관을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염불을 함으로써 번뇌를 쉬게 한다는 것입니다. 계분별관이 십팔경계를 분별하는 대신에 염불관을 해서 오정심관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관이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정리한 수행이 사념처인데 사념처가 퍽 중요한 법문이어서 이 현상에 대한 집착된 생각을 떼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경에는 이러한 사념처 법문이 반야바라밀에서 나오는 것이며 내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내며 일체 삼매, 일체 선정이 반야바라밀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십팔불공법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에 따라서 각각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의 십력(十力, 부처님이 지니고 있는 열 가지 특별한 힘), 그리고 네 가지 두려움이 없는 확신 사무소외(四無所畏), 그 다음은 세 가지 생각이 머무는 곳 삼념주(三念住), 그리고는 대자대비를 합해서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신력을 열여덟 가지라고 해서 십팔불공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십팔불공법도 모두가 반야바라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십팔불공법 중 부처님의 십력(十力)을 보면 첫째 여실하게 이치가 아닌 것을 아는 힘, 부처님은 지혜가 환하십니다.
둘째 여실하게 과거와 미래에 지은 바 업과 그 업의 결과로 받는 과보, 그 인과를 다 아는 힘입니다.
셋째는 모든 선정과 삼매의 순서와 심처를 아는 힘입니다.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 곳에 모아서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서 세밀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정(定)과 말끔한 혜(慧)가 균등하게 살아있는 상태를 선정이라고 하고, 선정의 깊이의 정도에 따라서 사선팔정(四禪八定)이라고 하는 천상에 태어나는 도가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지키는 가운데 있는 것이 선정이고, 삼매(三昧)라는 것은 정(定)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데 독서삼매라든가, 어떤 사람은 술 마시는 데 삼매가 되어서 밤이 가는지도 모르고 집안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마는 이것도 아마 삼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삼매는 옳은 삼매가 못 되고 그르치는 데 빠지는 데 외곬으로 가는 삼매입니다.
삼매는 마음을 맑고 고요한 데에 모으는 것으로 삼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무슨 무슨 삼매에 드셨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 깊은 마음 경계에 머물러 계신 것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 수행이 최상의 수행 ]
그런데 일체 삼매, 일체 선정이 반야바라밀에서 나고, 중생을 성취하고(중생이 성불한다는 뜻, 완전한 지혜를 이루는 것), 불국토를 이룸도 또한 반야바라밀에서 나며, 집안이 보살의 집안이 되는 것도 반야바라밀에서 된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 자생물(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 생활도구, 즉 말을 바꾸면 재산을 말하는 것), 이것을 성취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효성스럽고, 복스럽고, 덕스럽고 지혜스러운 권속(형제, 자녀, 제자)을 성취하는 길도 반야바라밀에서 나옵니다.
또 대자대비를 성취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에서 나오고, 모든 천상에 태어나는 그것도 반야바라밀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천상에 나고 싶으면 천상에 납니다. 닦은 데 따라서 자기 세계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라한이나 모든 보살 등 성인이 되는 것도 마하반야바라밀을 닦아서 되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일체 종지(일체를 알고, 총괄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세밀한 부분까지 일체를 다 아시는 지혜)도 반야바라밀에서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 가득 찬 사리보다도 더 먼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한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반야바라밀 수행이 바로 최상의 수행이라는 데 대해서 자신을 갖고 긍지를 갖자고 하는 결론입니다.
최상의 도법을 성취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재산을 이루고, 권속을 이루고, 모든 덕성을 이루고, 천상에 태어나고, 성자가 되고,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는 그 모두가 마하반야바라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금강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열심히 염송하는 데 대해서 자신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오셔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 이외에 더 좋은 것이 없는가? 지장보살 염불을 좀 해볼까? 관세음보살 염불 좀 해볼까? 고왕경 독경을 해볼까? 천수경 좀 해 볼까?”하고 물어옵니다.
그러면 제가 “반야바라밀이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여러 가지 하려고 하느냐.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라. 앉아서 염하고 서서 염하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염하라.”고 그럽니다. 신심을 가지고 시간 있는 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금강경을 읽든지 반야심경을 지송하는 것 이외에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염하라고 합니다.
구도정진 때도 절을 많이 하는 것을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너무 앉아 있다 보면 그것에 심취하기 쉬우니까 포행 대신, 혹은 부처님께 예경을 드리기 위해서 108배를 드리는 것은 권해도 천 배다, 이천 배다 하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다 아신다]
부처님이 가지고 계시는 십력 가운데 네 번째는 중생의 능력과 성질에 우열을 알아내는 힘입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고 어떤 정도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다 아십니다.
재작년부터 건강이 좋지 못해서 여러 형제들에게 걱정을 게치면서도 내가 지금 이 수행을 하고 있는데 힘이 들어도 부처님이 다 아신다는 마음을 가지니까 편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중생의 이해 정도를 아는 힘입니다. 중생이 이 정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이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을 내린다는 정도를 부처님은 다 아십니다.
여섯 번째 중생의 성질과 소질이나 그 행위를 아는 힘입니다.
일곱 번째, 인간과 천상 모든 세계(인간에 태어나든지, 천상에 태어나든지)에 태어나는 인과를 아는 힘, 예를 들면 너는 천상 도리천에 살았는데 그 때는 어디 어디에서 어떤 어떤 보살도를 닦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네가 천상에 태어났다. 혹은 얼마만큼 결과를 바라고 과보를 바라고 대가를 바랐기 때문에 복이 얼마밖에 되지 않아서 그 복이 끝나서 다시 인간이 됐다는 것을 부처님은 다 아십니다.
아홉 번째는 천안(일체를 막힘없이 다 보는 눈)으로 중생이 나고 죽는 때와 미래세의 선악경계를 다 아십니다. 언제 죽는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법문을 하시며 “물을 것이 있으면 다 물으라.” 그리고 나서 법문을 쭉 하시고 나서 “그만 둬라 그만 때가 됐다.” 하시고 조용히 육체서부터 의식을 거두십니다. 생사를 자재하셨습니다.
열 번째는 자신의 번뇌가 다해 없어져서 아주 구름이 다 없어지고 먼지가 다 날아가서 말끔한 것처럼 다시는 후유(後有, 금생 다음에 다시 몸을 받는 것이 후유입니다. 내생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든지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지옥에 태어나든지 하는 것은 번뇌라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의 그림자에 따라서 어두운 그림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그림자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고, 중간쯤 되면 인간에 태어날 것이고, 그 안에 무수한 차별이 있으면 차별세계에 태어납니다.)가 없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다했기 때문에 후유가 없습니다. 진리 그대로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다시 변화의 몸을 나타내서 천상에도 나고 인간계에도 태어나고 지옥에 가서 중생제도를 하실지언정 업으로서의 후유가 없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렇게 되었으면 그렇게 된 상태를 다 아십니다.
[네 가지 두려움이 없는 힘]
그 다음은 사무소외(四無所畏), 네 가지의 두려움이 없는 힘입니다.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네 가지 확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부처님은 일체법을 다 깨달았습니다. 다 깨닫고 다 증득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 있어 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일체 번뇌는 다 끊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부처님은 다시 끊을 번뇌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를 다 닦고 나서 도는 다 닦아서 번뇌를 끊었는데 아직도 조금 더 닦을 것이,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 못 통한 것입니다. 아직도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철 종정스님이 주장하는 돈오(頓悟)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 마치면 일체 마치는 것이지 마치긴 마쳤는데 조금 남았다는 것은 덜 된 것이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성철 종정스님과의 돈오와 점수에 관한 이론이 많이 논쟁이 된 시절이 있었습니다마는 성철 종정스님은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데 부처님이야말로 일체 번뇌가 다 끊긴 것입니다.
세 번째 설법에 있어서 수행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다 설했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그 다음에 고에서 벗어나서 해탈의 방법을 다 설했다는 확신입니다.
네 번째는 모든 물음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대답할 수 있어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무소외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완전무결합니다. 법 그 자체이십니다. 법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부처님은 영원하시고 자재하시고 항상하시는 우리 부처님이십니다.
중생이 기뻐하여 설법을 들어도 환희심을 내지 아니하고, 중생이 한결같이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고 마음이 태연하며, 한 곳에서 하나는 기뻐하며 열심히 듣고, 하나는 전혀 듣지 아니함을 보고도 근심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항상 평정한 삼념주(三念住)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합하여 부처님만이 가지시는 십팔불공법이라고 합니다.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은 대승십팔불공법이라고도 하며, 이것은 부처님만이 가지신 특별한 위신력 열 여덟 가지로 십력과 사무소외와 삼념주(三念住) 대자대비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달리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학자들 주장이고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소개를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처님만 가지는 열 여덟 가지 공덕]
부처님께만 있는 공덕으로서 이승(二乘)이나 보살들에게는 있지 않은 열여덟 가지로서 하나는 신무실(身無失), 몸에 허물이 없습니다. 둘째는 구무실(口無失), 부처님은 입의 행위에 있어서 잘못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무실(意無失), 뜻에 잘못이 없습니다. 넷째는 무이상(無異想), 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는 무부정심(無不定心), 정심(定心) 아닐 때가 없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깊은 삼매 속에 항상 계십니다.
여섯 번째는 무부지이사(無不知已捨), 삼매를 가지고 있는 분은 나한 같은 도에 들어갔지만 아직도 지은 자취가 있기 때문에 이승이라 하고 부처님은 지은 바가 없는 진리 자리 그 자체에 그대로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욕무감(欲無減),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마음에 싫어함과 족함이 없습니다.
여덟 번째는 정진무감(精進無減), 불과(佛果)를 이룬 후에도 정진력에 감소함이 없습니다.
아홉 번째는 염무감(念無減), 부처님이 일체 지혜를 구비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열 번째는 혜무감(慧無減), 부처님이 지혜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마음에 부족한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열한 번째는 해탈무감(慧脫無減), 부처님은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유위, 무위의 해탈을 구현하고 일체 번뇌를 멸함을 말합니다.
열두 번째는 해탈지견무감(解脫智見無減), 일체의 해탈에 관하여 명백한 지견을 가지고 조금도 결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열세 번째는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일체 몸으로 행하는 업이 지혜를 따라서 행하시고, 열네 번째는 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말하는 것이 지혜를 따라서 행하시고, 열다섯 번째는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뜻하시는 바도 일체 지혜에 따라서 행하시고,열 여섯 번째는 지혜지과거세무애(智慧知過去世無碍), 과거세를 다 아시는데 무량무애 조금도 막힘이 없으시고, 열일곱 번째는 지혜지미래세무애(智慧知未來世無碍), 미래세계 모두 다 아시는데 막힘이 없으시고, 열여덟 번째는 지혜지현재세무애(智慧知現在世無碍), 현재세를 다 아시는데 무량무애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팔불공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이와 같이 큰 도력, 도를 이룬 그 모두도 반야바라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오늘 법문의 결론입니다.
우리 불광형제들은 반야바라밀 수행을 합니다. 다른 어느 법회보다도 항상 반야경을 소중히 여기고 반야바라밀 수행을 하는 데에 전념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와 같은 근거가 있는 것이니까 자신을 가지고 다른 것 안 해서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 조금도 갖지 마시고 크게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보리가 크게 장양하는 시간이 되도록 정진합시다. 감사합니다.
월간 불광...
첫댓글 아래 보문님의 공양글을 보고 생각나서 모셔왔습니다 ^^** 확신에 가득찬 우리 큰스님 법문은 언제나 짱~~!!!입니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부처님의 이와 같이 큰 도력, 도를 이룬 그 모두도 반야바라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반야바라밀의 닦음은 곧 보현행원 수행, 보현행원 수행은 고잘미섬공의 원행.....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보현행원 성실히 배워 익혀 생활속에 실천하여 보리이루리.......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