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푸르니 새는 더욱 희고 (江碧鳥逾白)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네 (山靑花欲然)
올 봄도 눈앞에서 지나가니 (今春看又過)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일런고 (何日是歸年)
두보가 53세(764년) 때의 봄, 피난지 성도(成都)에서 지은 무제(無題)의 절구(絶句) 2수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다. 두보가 안녹산의 난을 피해 성도에 머물면서 지은 시로 기약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읊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봄의 정경. 그 봄이 또 지나감을 아쉬워하며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읊은 걸작이다. 벽(碧)·백(白)·청(靑)·홍(紅)의 화려한 색채의 조화, 거기에 조응된 작가의 초라한 삶과 향수를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어느 날이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될 해인가를 절실히 토로하고 인생의 무상감을 강조하며 향수에 애태우던 두보는 결국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절구(絶句)는 시의 제목이 아니라 한시(漢詩) 장르의 이름이다. 두보가 시를 지었을 당시엔 시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 후 인쇄술과 상업의 발달로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두보(杜甫 712~770)는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20대와 30대엔 각지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李白)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玄宗)에게 부(賦)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755년 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적군(賊軍)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펑샹(장안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저우(華州;장안서쪽)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간쑤(甘肅)의 친저우(秦州:天水市)로 갔다. 친저우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고 다시 남쪽의 퉁쿠(同谷:成縣)로 옮기고, 그 해 말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외의 환화시(浣花溪) 언저리에 환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살았다. 지방 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쓰촨의 재주(梓州)·낭주(낭州)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 엄무(嚴武)의 막부(幕府)에 절도사 참모로 출사해, 그의 추천으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쓰촨 동쪽 끝의 쿠이저우(夔州;奉節縣)에 이르러 강 연안의 서각(西閣)에 거주했는데, 얼마 뒤 도독(都督) 백무림(栢茂林)의 도움으로 교외의 양서·동둔(東屯)에서 관전(官田)을 빌려 농원을 경영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쯔강에 배를 띄워 싼샤(三峽)를 따라 내려가면서 2년 동안 후베이(湖北)·후난(湖南) 등의 물 위를 떠돌다 후난의 뇌양(뇌陽)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두보 시는 대략 1,470여 수이다. 그 시를 보면 고난으로 가득 찼던 유랑의 시기에 따라 각각 시풍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문 일이다. 두보 시는 그의 엄격한 정신을 표현한 격조 높은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수법과 엄격한 성률(聲律)에 의해 세상일이나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백의 자유분방한 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보 시의 긴밀하고 엄격한 구성은 이백을 앞서는 특히 율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초당(初唐)에 완성된 금체(今體 : 近體) 형식이 두보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두보의 고시(古詩)와 악부(樂府)에는 당시 눈앞에 보이던 사회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백성의 고난을 호소한 것이 많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등의 혼란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이 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가 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두보의 사회시야말로 〈시경 詩經〉 이래의 풍유(諷諭) 정신을 계승한 것이고 이른바 중국 시의 올바른 전통이다. 백거이(白居易)와 원진이 두보의 시를 존중한 것도 그 풍유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이백의 시는 육조에서 안사의 난 전까지의 낭만정신이 최고로 발휘된 것이고, 두보는 안사의 난 이후의 현실주의적 시풍을 연 것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다음 시대인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민중을 위한 시인으로 널리 존중되고 있다.
첫댓글 동시대의 라이벌 이었던 이백과 함께 당시의 백미를 이루었던 두보와 이백
이백의 시는 거칠것없는 호탕함이라면 두보의시는 여성적인 가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격에서도 잘 나타나듯 두보는 한여자만 사랑한 반면 이백은 소위 말하는 플레이보이 기질이 많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시선과 시사 ...말그대로 두 시인의 인생과 삶에서 많은것은 느끼게 합니다
길이 남아 기억될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이렇게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작품이나 시의 구절이 필히 있어야 함을 이런 데서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