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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성월은 한 달 동안 성모 마리아를 꾸준히 기억하고 묵상하도록 정해진 달입니다.
교회는 매년 5월을 성모 성월로 정하여 신자들이 이 기간 중 매일 또는 보다 자주 성모를 공경하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기도와 은총의 삶을 살아가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모 성월을 정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는 성모 마리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고, 성모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또 모든 성인 성녀들이 성모님를 공경하였던 것처럼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을 본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 혹은 가정에서는 성모 성월을 기념하는 예절을 특별히 거행하는 것이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선행과 기도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모성월의 기원과 역사]
서방 교회에서 성모 성월의 유래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반 민중들의 봄 축제나 5월 축제가 서서히 그리스도교화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5월을 성모 마리아의 달로 봉헌하는 관습은 13세기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549년에는 베네딕도회의 지들(W.Siedl)이 [성모 성월] 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 5월]을 출판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성 필립보 네리에 의해 미약하게나마 5월을 성모 성월로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네리는 젊은이들에게 5월 한 달 동안 성모 마리아에게 꽃다발을 바치거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또 선행으로 마리아를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5월이 성모 성월로 구체화된 것은 17세기 말엽의 마리아 운동과 더불어서입니다. 1677년에 피렌체 부근의 피에솔레 도미니코회 수련원에 특별한 모임이 생겼고, 이 단체는 5월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자신들의 신심을 고취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매주일 피렌체 지방의 5월 1일 축제를 반복하다가 1701년부터는 5월 한 달 동안 매일 축제를 지냈는데, 이 축제 때 '성모 호칭 기도’를 노래로 바치고 마리아께 장미화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은으로 만든 심장을 봉헌하였습니다.
17세기 말 신자들은 나폴리의 글라라 성당에서 5월 한 달 동안 매일 저녁 성모에게 찬미가를 바치고 성체 강복을 하였으며, 만토바의 성당에서도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행사가 장엄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성모 성월 신심 행사는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전해지고, 19세기초에는 벨기에와 스위스, 그리고 19 세기 중엽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도 거행되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모 성월은 예수회의 디오니시가 1725년에 베로나에서 [마리아 성월]을 출판함으로써 시작되어 동료 회원들에 의해 로마·밀라노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집과 일터에서 성모 성월에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제시되어 있고 마지막 날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도록 하였습니다. 1747년에는 훗날 제노바의 주교가 된 사포리티의 [성모 성월]이 출판되었고, 이어 1758년과 1785년에 여러 저자들에 의해 [성모 성월]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성모 성월의 정착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유럽 전역과 아프리카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교황 비오 7세의 성년(聖年)대사 선포와 함께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유럽에서도 성모 성월은 완전히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성모 성월 신심을 잘 지켜 가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권장하였는데, 교황 비오 12세는 교서를 통하여“성모 성월 신심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례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례적 예배 행위로 간주할 만한 신심”이라며 이 신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 신심 운동이 기적이나 발현에 치우치지 말고 전례적인 공경 안에서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성모 성월 신심을 위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전례 예식은 없습니다. 단지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말씀의 전례 양식을 빌려 새롭게 구성한 '성모의 밤’ 행사를 하거나, 매일 성모상 앞에서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는 등 본당이나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성월 기도회를 봉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글이나 시(詩) 낭송, 성모 호칭 기도, 꽃이나 촛불 봉헌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성모의 밤' 행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관계된 신심들}
1.성모송(聖母請)
2.묵주 기도
3.가르멜의 성의(聖衣) 또는 스카풀라(scapulare)
4.기적의 메달
5.성모칠고(聖母七苦)의 로사리오 |
[과달루페] [파리] [라살레트] [루르드] [파티마] [바뇌] 사적 계시와 성모 발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과달루페]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의 동굴에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1844~1879)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특히 묵주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루르드를 방문하였고 기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 이상의 성모님의 발현들은 모두 교회의 정식인가를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1928~1975년 사이에 발생하였던 성모님의 발현들 중에서 교회의 공식 인가나 동의를 받지 못한 발현은 230 여 건에 달합니다. |
[남양 성모성지] 남양 성지는 초대 교회 교우촌이자 처형지이며 우리 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바닷길이 열렸듯이 매일 썰물 때면 육지까지 바다가 열려 길이 생기는 제부도의 신비스런 광경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 교우촌은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1991년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 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남양 성지는 성모 성지로 선포된 후 지속적인 기도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묵주의 기도 고리 운동은 현재 수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매일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15분간 5단을 바침으로써 24시간 내내 묵주의 기도가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또 1년에 두 차례씩 실시되는 피크로스(PICROS) 운동은 며칠 동안 도보 성지 순례를 하면서 끊임없이 묵주의 기도를 함으로써 희생과 고통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낙태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도 모임을 매주 토요일마다 마련하고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수원이나 안양, 군포 등지에서 대부도 방면으로 가려면 39번 국도의 비봉 사거리에서 306번 지방도로 들어서야 합니다. 비봉 사거리에서 약 7km가면 남양에 닿는데, 남양 농협 건너편에 있는 로사리오교를 건너면 남양 성지입니다. *남양성모성지 홈페이지 http://www.namyangmaria.org [대구 성모당]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킵니다. |
성모 성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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