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역사★*** |
우리 음악을 국악(Korean classical music)이라 한다. 곧 우리 민족의 고유성(固有性) 과 전통성을 지닌 민족의 음악이 우리의 국악이다. 국악이란 이름은 조선 말엽 고종때 장악원(掌樂院)에서 부터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래 음악이 이 땅에 들어 오면서 서양음악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국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 음악의 기원은 아득하다. 구름 밖 파란 창공만큼이나 아득하고, 끝없는 창해의 수평선 저 편만큼이나 아스라이 멀기만 하다.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는 미국 음악의 연륜이 2백 년 남짓하고, 요즘 한국 땅에 풍미하는 유럽 음악도 2천 년의 나이를 넘지 못하는데, 오직 한국 음악의 전통만은 마치 8천 년의 봄과 8천 년의 가을을 살았다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의 연륜만큼이나 기나긴 세월을 단절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음악의 역사라는 것은 미술·문학·연극·무용 등의 예술문화는 물론 정치·경제·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음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부 세력의 침략과 끊임없는 항쟁으로 그 수난이 많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고려·이조시대의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역사의 어두운면에서 우리 음악은 너무나 고독했다. 당악이 들어오면 당악을 추종하고, 아악을 들여와 국가 대사에 사용하고, 향악보다 이들 음악만이 격조가 높은 양, 이것이 우리의 음악인 것처럼 착각하고 추종하여 번창 하였지만, 그 음악을 밑거름으로 더욱 우리의 음악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꽃피우려 했던 옛 음악인들이 있어 오늘날 우리의 음악을 알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외래의 그 어느 것보다 찬연한 음악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 믿는다. 이미 상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고 춤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이나 예맥의 무천( 天) 부여의 영고(靈鼓) 같은 제천 의식의 기록들이 이를 증언해 준다. 오늘날 굿판에서 볼 수 있듯이 직관과 몰아의 엑스터시로 불가사의를 이뤄내고 마는 이른바 무교(巫敎)적인 원형질의 민족다운 우리 고유의 혈통적 정체성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시절 우리 음악은 당시 매(?)니 주리(侏離)니 하는 말로 불리었다. 비록 한자로 표기되어 오는 낱말이긴 하지만 우리네 민족 음악에 붙여진 최초의 이름씨인 셈이다. 단편적이나마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할 때 당시의 음악적 상황은 결코 오늘에 못지않게 국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경 개념이나 민족 개념이 희박했을 뿐 아니라 농경과 아울러 유목이나 수렵을 생활 방편으로 삼던 시절이었기에 민족 내지는 문화의 이동이 빈번했음은 당연한 일이며 따라서 음악의 광범한 교류 또한 필연적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음악은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그 연륜이 길고 기원이 아득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의 강줄기가 동아시아를 무대로 도도히 흘러내리며 외래적 요소들을 수용했듯이, 우리의 민족 음악 역시 적지 않은 외래적 음악 요소를 새로운 자양분으로 섭취하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것을 전파해가면서 굳건하고 뚜렷한 개성으로 연면히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람한 물줄기로 흘러내린 우리 음악은 근래에 와서는 서구 음악의 유입으로 한때 혼란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수 천년을 맥맥히 흘러온 전통과 역사의 강인한 복원력으로 다시 변증법적 융합과 창조적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상고시대 우리 나라의 고대 음악도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종교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 왔다. 선사 시대의 음악 문화는 우리 나라에 나타난 기록이 없으므로 중국 문헌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여러 문헌은 우리 음악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악기 이름과 제천행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이족(夷族) 또는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으며, 동이족의 음악을 매 리(離) 주리(侏離)라 하였고, 춤은 지모무(持矛舞)라 불렀다. 음악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음악 이름의 글자로 보아 춤은 창을 들고 추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농경 사회 이전 수렵 사회에서 추었던 춤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또 구이(九夷)의 음악과 춤을 하(夏)나라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B.C. 2000년경의 우리 음악이 우수했었다는 것을 뜻한다.우리의 민속을 소개한 문헌의 글은 매우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 부여에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었으며,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우리 나라 음악에 대하여 씌어진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이다. 그 중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동예에는 무천이란 제천 행사가 있어, 온 국민이 한데 모여 며칠 밤낮을 춤과 노래를 즐기며,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이미 노래나 춤과 악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악기인 '슬'이라는 악기가 진한과 변한에 있었다고 한다. 영고 동맹 무천은 모두 추수가 끝난 후 하늘에 감사하는 국가적인 하늘제사로써,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제사한 후 며칠 계속하여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겼다. 또 남쪽의 마한에서도 5월 씨뿌리기를 끝내는 때와 10월 추수하고 난 후 자연에 제사하고 연일 음식과 술을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부여 고구려 동예가 언어 풍속이 같고 마한 진한 변한도 북쪽지방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마한의 행사는 그것의 제천 의식과 온 국민이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보아 같은 풍속이며, 이러한 풍속이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공통된 습속이었을 것이다. 특히 진한에는 '슬'이라는 현악기가 쓰였다고 하는데, 이 악기는 우리말로 '고' 라는 악기일 것이며 가야고의 원형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어느 민족이나 언어와 함께 고유한 음악이 있다. 이 음악은 종교와 더불어 생성 발전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음악이 독립하여 연주하지 못하고 문학 음악 춤이 혼연일체되어 연주된 선사 시대에는 음악이 종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제사도 음악으로서 의식을 집행했으며 제사가 끝난 후 즐거운 놀이에도 음악과 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일종의 굿이므로 이러한 굿과 놀이는 현재 5월의 강릉 별신굿과 10월의 각 지방의 도당굿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풍속으로 보더라도 5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여 수릿떡을 만들어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10월(음력)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초생달 아래에서 집집마다 신에게 고사를 드리고 선조 무덤에 제사하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이전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또,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 시대는 중국, 서역의 음악이 전래되었고,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하는 등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음악에 쓰이던 피리나 오현비파 등은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서역, 즉 오늘의 중앙아시아 지역의 악기이고, 신라의 가야고 음악에 등장하는 우륵의 12곡 중의 사자기(師子伎) 역시 서역의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향악(鄕樂) 관계의 시에 나타나는 산예( 猊), 속독(速讀), 금환(金丸) 등의 민속놀이 역시 '유사만리(流沙萬里)' 사막 지대를 건너온 서역 계통의 음악이다.불교와 함께 들어온 범패라는 이름의 불가 음악도 있다. 4세기에 이미 고구려에 불교가 수입됐고, 1세기에 인도의 허황옥(許黃玉) 일행이 이 땅에 도착하여 수로 왕비가 되었으며, 8세기에는 진감 선사가 지금의 쌍계사에서 정식으로 범패를 가르쳤던 점 등을 감안하면, 삼국 시대에 이미 불교 음악이 한국 음악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때의 신라 고승 월명사(月明寺)가 "나는 국선(國仙)의 무리로서 향가(鄕歌)는 부를 수 있으나 범성(梵聲), 즉 범패(梵唄)는 모른다"고 한 말은 당시의 음악적 정황을 살피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삼국 시대에 이미 우리의 음악은 무교(巫敎)적인 요소와 선교(仙敎)적인 요소를 뼈대로 하고, 여기에 이역 만리의 외래적 민간 음악을 병합하여 독특한 토착 음악 문화를 형성했다.
◆고구려: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은 진나라 의 7현금을 본떠 우리 민족에 알맞은 거문고를 제작하고, 또 악곡을 지어 연주하였다.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과 서역계와의 교류를 통해 많은 악기를 들여와 우리 생활에 알맞게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보다 일찍 중국 및 서역과 교통하고 문물을 교역한 나라로서 음악이 고대 한반도의 어느 나라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중국과 서역에서 들여온 음악과 악기, 춤, 놀이들을 고구려화시켜 이전의 고구려 음악과 합쳐서 고구려 사람들에게 맞는 매우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고 또 이러한 음악을 중국에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제 1 기 (B.C. 1세기∼A.D. 4세기):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시기로써 여러 문헌들과 함께 안악 제 3호분의 주악도나 통구의 무용총 등과 같은 고분을 통해서 당시의 음악 문화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기악과 성악, 춤이 종합 예술체에서 분리되고 중국 한(漢)나라의 음악이 들어와 고구려의 초기부터 음악 문화가 풍요했었다. 제 2 기(A.D. 4세기 ~ A.D. 6세기):이 시기의 고구려는 백제의 서울 한성을 함락시키고 북부 지방의 부여를 통합하는 등 나라 안팎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 나라의 힘이 크므로 중국 대륙은 물론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활발하였고, 음악도 서역계 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제 3기(A.D. 6세기 ~ A.D. 7세기):수세기에 걸쳐 막강한 힘을 가진 고구려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결국 705년간에 걸쳐 28대 왕들로 이어지던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나라를 잃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렇게 어려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앞 시기에 이루어 놓은 음악 자산을 키워 5세기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 음악과 서역 음악은 더욱 많아졌으며, 이렇게 수입된 음악들은 고구려인의 취향에 맞게 고구려 음악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음악 문화를 흡수했던 고구려 음악은 해외로 나가 연주할 만큼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 연주와 춤, 놀이는 궁중에서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성행했었는데 기록이나 벽화에는 보이지 않으나 노래도 많이 불렀을 것이고 또 고구려는 부여, 동예를 통합하였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같은 집단적 제천 의식과 음악, 춤, 놀이도 풍습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제 1기가 음악이 뿌리내리고 싹이 돋은 시기라 하면, 제 2기는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 시기이고, 제 3기는 열매 맺어 씨를 뿌린 시기라고 하겠다.
◆백제:선사 시대의 마한땅을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백제는 고대 음악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음악에 대한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선사 시대로부터 있어 온 제천 의식과 백제인들이 불렀던 노래들이 일시에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게다가 남부 중국과 교역함으로써 음악이 상당히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B.C.18년 ~ A.D. 660년) 음악 전체를 한 시기로 묶는다. 이 시대의 음악은 중국의 남송이나 북위 등에 소개되었고,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악인 삼근·기마차·진노·진타 등의 악사와 악기와 춤을 가르쳤다. 특히 미마지는 7세기 초에 중국의 오나라에서 기악무를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 백제의 음악문화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시기는 늦으나 5세기~6세기 사이에 중국 남송과 북위 등에 고구려악 못지 않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같이 군후·막목·횡적·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의 가면은 일본 여러 절에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기악은 산대도감(山臺都監) 놀이 및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라고 한다.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하다. 한편, 백제의 가요로 유명한 정읍사(井邑詞)가 있고, 곡목만 전해지는 방등산·무등산·지리산 등이 있다.
◆신라:옛 진한 땅 경주 지방의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왕국을 건설하여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세력이 막강하였고, 6세기에 가야국들을 병합하였으며, 7세기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B.C. 57년 ~ A.D. 935년) 음악은 통일 이전의 음악과 통일 이후의 음악 두 시기로 나눈다.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가야고로 연주하던 음악과 향가가 있었다.이 시대는 가야금 음악이 대표적인데, 삼국 사지 중 '악지'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이 악곡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의 음악문화는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다. 가야국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사자기>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보기(寶伎)>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 경에 신라에 수용된 가야금은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신라악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다. 통일 전의 <신열악>·<사내악>·<미지악>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신라 음악사를 보면, 조상제사, 연희 등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둔 것으로 해석되는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민간에서 널리 불려졌던 가요로 향가가 있는데, 당시 위흥과 대구 화상에 의해 향가가 수집, 편찬되었으나, 지금은 25수의 가사와 제목만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시대의 음악문화는 불교음악이 본격적으로 전래 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삼현삼죽(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이 주축을 이루는 향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신라고유의 향토음악 향악은 삼현삼죽과 박판(拍板)·대고(大鼓)·가(歌)·무(舞)로 이루어져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이는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대고 등을 복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3현 3죽과 음악 3현 3죽은 가야고,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을 말한다. 3현중에서 가야고는 통일 이전과 같이 기악 형태로 연주되었고 또 노래와 춤에 편성되어 연주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신라가 통일되었는데, 거문고는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 같다. 그 뒤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고, 신기(神器)로 간주되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9세기경부터 일반인들이 연주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삼국사기]에 거문고가 들어온 이후 악기로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춤과 연희 하신열무(下辛熱舞), 사내무(思內舞), 상신열무(上辛熱舞), 소경무(小京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등이 있었으며, 하신열무 등 4편의 춤은 가야고와 노래 춤의 종합예술이었고, 한기무 등 세 편은 가야고 편성의 춤이었다. 이밖에 화랑 관창의 가면을 쓰고 춘 검무와 원효대사가 파계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 무애무가 있다. 팔관회가 열였는데 하늘과 명산, 큰 강이나 용신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 행복을 기원하며, 화랑에 의해 노래와 춤 놀이를 하였다. 흔히 제사는 11월에 거행하고 이 날에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다.학자 최치원(837년 ~ 876년)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악잡영 5수]로서 이 시를 통해 다섯가지 놀음과 이에 따르는 음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가지 놀음은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인데, 금환은 백제의 농주(弄珠)와 우륵의 12곡 중 보기와 유사한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이고, 월전은 재담, 대면은 탈춤, 속독은 춤, 그리고 산예는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와 같은 사자춤이다. 또 금환, 대면은 중국계통의 놀이이고, 월전, 속독, 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지만 음악은 알 수 없다. 최치원의 시는 서역악이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헌강왕 11년(885년) 이후에 시를 썼고 향악이라고 말한 점에서 중국 음악과 서역악이 9세기말에 향악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음악 범패 불교 음악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부르는 범패(梵唄)와 포교를 위해 우리말로된 화청(和請)과 회심곡(回心曲)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년) 국선(國仙)에 속한 월명사가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는 기록에서 8세기 중엽 범패가 신라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과는 달리 원효대사가 무애가를 부르며 춤을 춘 것은 포교를 위한 거사(居士) 소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범패의 기록은 옥천사에 세운 진감선사(眞鑒禪師)의 [대공탑비문]에 범패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처음이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27년만인 홍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으므로 범패는 늦어도 9세기 신라 사찰에서 널리 가창되었을 것이다. 당시 적산원(赤山院)에는 대중이 석가를 칭송하는 회중가의 신라풍과 당나라에서 부르던 당풍, 그리고 당나라의 범패보다 더 오랜 고풍의 세 범패가 있었는데, 신라의 범패는 신라풍과 고풍의 두 양식의 음악이 가창되었다고 본다. 범패 자료는 [동음집](同音集)과 1931년 출간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있다.
◆당악이 들어옴 문무왕 4년(664년) "성천(星川)과 구일(丘日)등 28명이 부성에 가서 당악을배웠다." 고 한다. 신라가 통일한 것은 668년이고 부성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점으로 보아 이때 배운 당악은 고취(궁중 의식이나 군대 행진에 연주되는 일종의 취주악) 형식의 음악일 것이다. 삼현삼죽 음악에 사용된 궁조, 월조, 반섭조 등 당악의 조이름을 사용하고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 악기들을 보면 당악이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고, 요고, 횡적, 당비파와 퉁소, 쟁, 소, 생, 당피리, 적(笛), 박판, 공후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음성서 설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신라의 궁정은 의식을 제정하여 집행하게 되고, 의식에는 음악 연주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궁중의 의식 음악은 예고됨이 없이 항상 열리는 것도 있으므로 음악인을 궁중에 상주시켜 연주, 행정, 교육을 담당할 음악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음악 기관이 음성서(音聲署)이다. 음성서가 설치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덕왕 5년(651년)에 음성서의 관리를 임명했는데, 음성서는 늦어도 진덕여왕 이전 7세기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의 무속 환웅천왕이 내려온 신단수 부근은 신역 또는 재단으로서 이 주위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단군은 이 천왕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을 제사하고 모시던 고조선의 제주(祭主)이며 군장(君長)이었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모든 군장이 제주를 겸하였다. 따라서 이 때 백성들은 제주인 무당을 통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는데, 신라는 왕호를 차차웅(次次雄) 즉 무당이라는 호칭을 가졌으며 고구려는 사무(師巫), 마한의 천군(天君)은 모두 제정이 하나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호칭이었다. 가야국의 계락(稽洛),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소도 등은 단군신교의 유풍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며 유(儒) 불(佛) 선(仙)이 들어옴으로써 고유한 무속이 변형되었다. 즉 유교의 길흉의 예의와 불교의 분수(焚修)의 법, 도교의 초제의 의식 등과 혼합된 무속이 되었다. 굿 또는 제사의 주제(主祭)를 무(巫)라 하였는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신을 내리게 하고 기도로써 재앙을 피하여 축복을 내리게 하였다. 여무를 무당 또는 만신이라 하고 남무를 박수 또는 복사라 한다.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했다는 부여신과 그 아들인 고등신(高登神)을 모신 신묘가 있고 신수라는 큰 구멍에 왕이 직접 제사했다. 고구려 초기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하는데 이 때부터 제정이 분리되었다. [삼국사기]에 무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상류사회 지식계층에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금가(琴歌)의 문화가 맥을 이루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금가인 <풍입송>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민간에서는 고대의 제천의식을 수반했던 국중대회의 전통이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의 특징으로 범패를 들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의식음악으로 830년 신라의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 옥천사에서 가르쳐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신라의 향가는 진성여왕 2년(888)때 위홍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삼대목이란 향가집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등 10여곡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 말년(1170)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고려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전통적인 무격의식과 관련되어 면면히 이어온 것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 행사의 끝에 '악·가·무'의 민간 행사가 있었다. 또 당악이 들어오면서 향악이라는 遁명칭이 생겼으며, 예종 때에는 송나라로부터 아악이 수입되어 향악·당악·아악이 구분되기도 하였다. ◎향악(鄕樂) : 당나라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우리 나라 음악으로, 사모곡·서경별곡·한림별곡 등의 고려 속악이 있었으며, 악기는 통일 신라 시대의 삼현(가야금·거문고·비파)과 삼죽(대금·중금·소금), 그 밖에 장구·피리·박 등의 악기가 있었다. 무용 반주를 위한 삼현 육각의 악기 편성도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 전기는 향가와 화랑의 전통, 팔관회와 연등회 등 통일신라의 유풍이 강하게 전승되는 한편, 중국으로 부터 아악이 전래되어 향악, 당악, 아악의 전통이 정립되었다.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인 아악은 금·석·사·죽·포·토·혁·목의 팔음(八音)악기를 당상악(堂上樂;登歌)과 당하악(堂下樂;架)으로 구분 배치하여 율려(律呂)에 맞게 교대연주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에 악장과 춤이 반드시 따르는 악, 가, 무 총체의 음악으로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당악(唐樂) : 당·송·원나라 음악을 합친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곡으로는 낙양춘·보허자 뿐이며, 이 두 곡도 모두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향악화 되었다. 당악은 악기나 춤에 있어서도 당악기·향악기 및 당악정재·향악정재라는 구분이 생겨나게 된다. 당악정재(唐樂呈才)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 등이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당악의 핵심을 이룬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敎坊樂)·사악(詞樂)과 원나라의 일부까지를 포괄한 중국의 속악을 통칭한 당악은, 향악과 양립하여 쌍벽을 이뤄 좌우로 구분(양부악(兩部樂); 좌방악(左坊樂) - 당악, 우방악(右坊樂)-향악) 되었다. 고려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중엽에는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정과정(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 이는 우리말 가사를 가진 조선조의 <진작(眞勺)>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아악(雅樂) : 궁중 의식에서 연주되던 전통 음악으로, 지금까지 악기는 많이 남아 있지만, 악곡은 오로지 '문묘 제례악' 한곡만 전해지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풍이 사라지고, 아악의 전통도 주변 정치상황에 기인하여 문란해졌다. 이 시기 음악문화는 전기에 수입된 아악과 당악이 고려 후기의 혼란기를 통해서 점차 쇠퇴해 가는 일면과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노래들이 대두된 것이 또한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당악은 쟁과 대고 대신 대쟁과 아쟁, 교방고가 쓰이고 새롭게 퉁소가 사용된다. 고려후기의 향악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 형식의 장가(長歌)이다. 그외 <만전춘> <이상곡> <쌍화점>이 있다. 이러한 고려의 속악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됨으로써 그 음악적 내용을 후대에 전하였다.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해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여러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악공이 흩어지고 아악기 손실 등 그 전승에 타격을 입어, 1371년, 공민왕이 아악서(雅樂署)를 신설, 아악복구작업을 일으켰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예와 악을 중히 여김에 따라, 태조 때 음악을 관장하는 전악서와 아악서를 두었고, 정도전·하 륜 등이 납씨가·정동방곡·순덕곡 등을 지었다. 고려 때와는 달리 불교 대신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예악(禮樂)을 존중하여 이를 정치,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건국 초에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면서 조선조의 음악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전기의 특색은, 숭유(崇儒)불교억제정책으로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의 폐지, 아악의 일신 그리고 건국 개업을 칭송하는 <봉래의> <발상> <보태평> <정대업> 등 신악(新樂)의 창작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음악제도 보존을 위해 성종 24년『악학궤범』9권 3책의 형태와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역사 서술을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치중하였다. ◇세종 : 박 연에 의한 아악의 정리와 맹사성에 의한 향악의 정립, 편종과 편경을 비롯한 새로운 악기 제작, 새로운 기보법인 정간보가 창안되기도 하였다. 한편 권 제·정인지·안 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한 '여민락'은 지금도 기악곡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정대업과 보대평 등이 작곡되었다. 세종에 이르러 박연, 남급, 정양, 맹사성과 같은 이론가에 힘입어 음악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아악의 부흥, 향악의 창작, 악보 창안, 간행을 하였다. 아악기 제작으로 악기를 자급자족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중요한 악기제작으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간보(井間譜; 매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 창안 및 악보출간을 들 수 있는데, <정대업> <보태평> <치화평> <취풍형>등의 신악이 이 기보법에 의해 악보화되었다. 이는 다른 기보에 비해 싯가(時價)가 분명한 점이 장점이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속악보는 용비어천가를 가사로한 여민락 만. 문묘악 그리고 세조실록 악보에 전하고 있는 정대업·보태평 등이다. 성종대에 차츰 당악기는 향악에 편성되는가 하면 악기 개량도 보인다. 이러한 악기들은 박(拍), 월금(月琴), 당비파, 장고, 해금, 아쟁, 당적, 당피리, 태평소 등이다.향악은 『대악후보』 『시용향악보』 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고, 특히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평조, 우조, 평조계면조, 우조계면조의 <중대엽>과 <삭대엽>을 파생하였다. ◇세조 : 세종이 만든 정간보를 근거로 하여 오음 약보를 만들었으며,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작한 것을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성종 : 고려 음악의 개작과 당악기 계통의 악기를 개량하였고, 성 현이 중심이 되어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악학궤범은 우리 나라 음악 전반에 걸친 내용을 총정리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통 음악의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임금의 거동에는 여러 형태의 고취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전정헌가(殿庭軒架), 전정고취(殿庭鼓吹), 전부고취(前部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등을 말한다. 행례에 사용되던 음악은 대개 여민락 만, 여민락 영, 유황곡, 정동방곡, 낙양춘, 보허자 등의 곡을 들 수 있다. 전정헌가와 전정고취가 전·후부고취와 다른점은, 전자는 거문고, 가야금 등 놓고 타야 되는 악기와 편종, 편경, 건고, 응고, 삭고 등 들고 다니기 어려운 악기로 편성되어 있어 일정한 장소에 위치하여 연주하는 형태이고, 후자는 행악(行樂), 즉 행진할 때 연주되는 음악형태로 주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들이어야 된다.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백하고 복잡하지 않은 정악이라는 음악이 있다. 이는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정악의 또다른 뜻으로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상회상> <여민락> <보허자>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영조 :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부족한 악기를 새로 만들었으며, 가곡·가사·시조·판소리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영조 무렵에 고개를 든 판소리(타령 또는 잡가)는 문헌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춘향가 200구(句)가 있고, 송만재(宋晩載:1769~1847)의 판우회에는 12마당이 들어있다. 그 중 현재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박타령), 수궁가(토끼타령; 별주부전), 적벽가(화용도)의 다섯마당만 전하고 배비장전 이하의 7곡은 가사 또는 곡을 잃었기 때문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와 고수(鼓手)와 함께 긴 이야기를 소리와 몸짓, 아니리(말체)로 끌어 가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대중음악이다. 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발림(科)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북을 치며 "좋지", "얼씨구" 등 감탄사나 흥을 돋구는 말들을 간간히 하는데, 이것을 추임새라고 하며, 이는 장단을 정확하게 치는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판소리 초창기 인물로 우춘대(禹春大)를 비롯하여 권삼득(權三得), 모흥갑(牟興甲)등을 꼽을 수 있고, 그 후에도 박유전(朴裕全), 염계달(廉季達) 등 헤아릴 수 없는 명창들이 많이 있다. 이 판소리 외에도 조선후기의 민속악은 많은 분야가 새로 생겨났다. 즉, 서울지방의 잡가(12잡가), 절간에서 타락한 우바새(男)나 우바이(女)들이 절간으로 혹은 민가로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피우고 소리를 하는 사당패 음악, 남도 무악계의 시나위와 이 시나위에서 파생되어 점차 체계를 잡은 산조(散調) 등이 있다. 그외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 를 이루는 가사가 있다. 이는 음악중심인 가곡과 달리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다. 시절가라고도 하는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 : 12잡가·민요·시나위·산조·풍물 등이 발전하여 오늘날 전통 음악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통치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우리 나라 전통 음악은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궁중 폐쇠에 따른 궁중 음악의 양식 변화와 아울러 민간 음악도 침체 되었다. 그리고 갑오 경장 직후 700여 명이던 궁내부의 악사들이 40여 명만 남게 되었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다. 한편 갑오 경장 이 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 음악이 들어와 보급되었다. 1910년에 이화 여자 전문 학교에 음악과를 두어 처음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고종 때에는 민영환에 의해 궁중에 군악대가 창설되어 음악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세,현대시대 고종31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제국주의의 간섭과 침략으로 대한제국은 급속도로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되고, 이후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지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문화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던 궁중음악은 왕실의 몰락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궁중음악에 종사하던 많은 음악인과 궁중연회에 참여하였던 무기(舞伎)들은 생업을 바꾸거나 새로이 생겨난 공연장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는 왕실을 위한 의식음악(연향, 조회, 동가(動駕), 군례(軍禮)의 중단, 제례음악의 중지, 궁중음악인의 감소를 가져왔다. 갑오경장 직후만 해도 772명이나 되던 악사들은 차차 문화 말살정책으로 1917년에는 겨우 50여명만이 남게 되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왔는가 하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고 국악은 또다시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조선조 음악이 공연예술로 전환되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조선아악요람(朝鮮雅樂要覽)』 등 여러가지 악서의 출판, 경종보 대금보 피리보 당적보 해금보 아쟁보 단소보 현금보 등의 악보제작과 오선보로의 채보 음반취입 등의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조의 음악전통이 현대로 전승되는 과도기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이왕직 아악부(雅樂部)의 전통은 해방 이후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구황궁아악부로 존속하다가 1950년 국립국악원의 창설로 그 맥을 이었다. 조선조 중 상류층에서 애호되던 정악도 왕조의 몰락과 신분제도의 붕괴로 크게 위축되었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공연형태를 통해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민속악에 밀려나는 위기를 맞아, 정악 애호가들이 정악의 융성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코자 1909년에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최초의 사설의 음악기구라는 역사적 의의와 전통음악과 양악을 동시에 교육시키는 음악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그러다가 1910년 통치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우리 나라 전통 음악은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궁중 폐쇠에 따른 궁중 음악의 양식 변화와 아울러 민간 음악도 침체 되었다. 그리고 갑오 경장 직후 700여 명이던 궁내부의 악사들이 40여 명만 남게 되었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다. ◇한편 갑오 경장 이 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 음악이 들어와 보급되었다. 1910년에 이화 여자 전문 학교에 음악과를 두어 처음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고종 때에는 민영환에 의해 궁중에 군악대가 창설되어 음악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창극은 판소리의 새로운 변형으로서 현대국악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판소리를 각 등장 인물별로 그 역을 분담하여 분창하는 양식으로 출현하였다. 이는 외래 공연양식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의 사회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창극은 최초의 서양식 원형극장인 원각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판소리는 창극에 밀려 고유의 음악적 발전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이후 판소리 명창들은 대규모 창극공연과 판소리 공연활동을 벌임으로써 남도음악의 전승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광복 후 1951년 국립 국악원의 개원으로 전통 음악의 연구 및 연주 활동이 활발해 졌으며, 국립 국악원에서는 부설로 '국악사 양성소'를 운영하여 전통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60년에 접어 들면서 국악원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져 중앙의 대소 연주를 비롯, 지방순회연주, 국외의 파견 연주, 국가 의식의 연주악, 문묘 종묘 등 연례적인 제악 연주 및 TV 라디오 방송을 통한 각종 연주회를 연 백회이상 실시하여 국악 보급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국립국악원은 아악이나 창작 국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民俗樂)부분, 즉 판소리 산조(散調) 민요(民謠) 민속무용(民俗舞踊)까지도 포괄한 범국악(汎國樂)의 종가(宗家)로 군림해 왔다. 한편 서울 대학교를 비롯하여 각 지방 대학에까지 국악과가 신설되어 전통 음악? 교육과 함께 전문 국악인을 양성하고 있다. 그 밖에 서울 시립 국악 관현악단을 비롯한 여러 국악 연주 단체에서도 전문 국악인을 수용하여, 연주회를 통해 전통 음악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현재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벌여지고 있다. 국악인들의 끈질긴 집념과 60년대의 탈춤부흥운동, 70년대의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 연희성을 띠는 연행예술운동의 진행으로 우리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풍물의 대중화는 서양음악에 밀리는 국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또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 우리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우리 국악을 세계속에 독특하고 훌륭한 음악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방송매체에서도 국악의 이론 등 다채로운 공연을 소개하고 있고, 이러한 폭넓은 활동은 현재 국악의 재평가, 정립으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 국악을 활성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모습은 국악의 해를 맞아 그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 음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보존과 발전의 균형을 이루어 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통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는 것은 전통 음악의 미래에 밝은 빛이 되고 있다. |
★전통 악기★*** |
☞ 금부ㅣ 석부ㅣ 사부ㅣ 죽부ㅣ 혁부ㅣ 포부ㅣ 목부ㅣ 토부ㅣ
금부(金部)-금속으로 만든 악기 ○꽹과리(소금), ○태평소, ○자바라, ○징, ○나발, ○운라, ○특종, ○편종, ○방향 석부(石部)-돌로 만든 악기 ○특경, ○편경 사부(絲部)-줄로 만든 악기 ○거문고, ○가야금, ○아쟁, ○해금, ○양금, ○대쟁, ○금, ○슬, ○월금, ○향비파, ○당비파, ○수공후, ○와공후, ○소공후 죽부(竹部)-대나무로 만든 악기 ○대금, ○중금, ○소금, ○단소, ○퉁소, ○지, ○당적, ○적, ○소, ○약, ○향피리, ○당피리(당필률), ○세피리 혁부(革部)-가죽으로 만든 악기 ○장구, ○소고, ○진고, ○절고, ○좌고, ○노도, ○노고, ○뇌도, ○뇌고, ○삭고, ○응고, ○용고, ○영도, ○영고, ○교방고 포부(匏部)-바가지로 만든 악기 ○생황 목부(木部)-나무로 만든 악기 ○박, ○축, ○어 토부(土部)-흙으로 만든 악기 ○훈, ○부, ○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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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요★*** |
민요의 특성
역사적 배경:우리 전통음악이란 대개 그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생활과 정서 속에서 발현하고 성장하여 다듬어지고 그 민족의 의식이 정착하여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전통음악 중 특히 민요는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통적 노래로 문학과 음악과 율동까지를 합친 종합 예술체이므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생활을 담은 민족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생활 속에서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일을 끝내고 한바탕 놀 때는 물론 여럿이 힘을 모아 일을 할 때도 신명나는 노래와 풍물(장구, 북, 꽹과리, 징)장단이 빠지는 법이 없었으며, 하다 못해 물을 긷거나 소를 끌고 길을 걸을 때도 흥얼거리는 노래가락이 언제나 따라다녔다. 민요는 민중 속에 전승되어 온 가요이다.그래서 구전음악이라고 한다. 민속음악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며 일반적으로 예술음악의 모체가 되기도 한다. 대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제례나 노동을 할 때 부르기 시작한 노래로서, 노동을 하면서 일이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민요가 많다.특정한 창작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민중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반영하고 때로는 국민성, 민족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민요는 옛부터 서민들 사이에서 불리워지고 있는 전통적인 노래를 뜻한다.즉, 우리민족의 심성과 정서를 솔직하고 소박하게 담고 있는 서민적인 노래로서 민족 정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이 노래는 민중의 소리가 담겨있고, 민족의 생활, 감정, 풍습, 종교적 등의 내용들이 깊이 표현되어 있는 음악이라할 수 있겠다. 음악적인 측면으로는 첫째, 특정한 개인이 창작한 것이 아니거나 창작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둘째, 악보로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으며, 입에서 귀로 전승된 음악이라할 수 있으며 셋째, 엄격한 규범 형식이 없이 여러 지역이나 노래부르는 사람에 따라 또는 같은 사람이 부르더라도 부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는 노래라할 수 있다. 즉, 민요는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터득하여 부를 수 있는 비교적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이라 할 수있겠다. 그러나 민중사이에 불리우고 있어도 도시적인 유행가는 창작자가 분명한 동시에 시간적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의 유행이기 때문에 민요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다소 변하여 민요가 된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요였던 것이 도시화되어 유행가가 된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민요와 유행가를 엄격하게 구분짓기에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 민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자질이나 소양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이다.민요에는 민중의 소박하고 진솔한 생활감정과 사상이 표현된다. 민중은 노래로써 인생을 말하고 현실을 비판한다. 예날 성군들이 민요를 듣고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선정을 베푸는 자료로 삼았던 까닭도 바로 이런 점이 의문이었을 것이다.민요는 말로 존재하지만 노래로 불려지는 데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같이 민요는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때로는 무용과 병존하기도 한다. 강강술래놀이에 일정한 곡조를 가진 음악과 무용이 동반되는 것과 같은 현상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이 분화되기 이전 원시종합예술로서의 형태를 시사해 주는 것으로, 민요의 발생이 상고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한국민요의 역사는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구지가]나 [해가], 향가 가운데 [서동요]와 [헌화가]등의 한국문학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온대지방에 위치해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기후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으며 제주도를 비롯한 수많은 섬이 있다. 산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국토의 70%가 산지로 되어있고, 이 산지로부터 흘러내리는 강줄기 주변으로 너른 평야지대가 분포해 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일찌기 구석기시대부터 농업이 이루어져 불과 50년전인 1950년대까지도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농업, 특히 한국인의 주식인 쌀을 생산하기 위한 벼농사는 농사법의 특성상 한번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많은 경우 집단적인 노동이 이루어짐으로써 민요가 많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또 나름대로 삶의 터전이 되었다. 서해바다의 조기잡이, 서남해바다의 멸치잡이, 동해바다의 명태잡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어업이었고, 바닷가에서도 각종 해산물이 채취되었다. 1940-50년대에 이르러 동력선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야 했으므로, '노젓는소리'를 비롯한 뱃노래가 생겨나게 되었다. 민요의 배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는 촌락공동체 문화이다. 각종 노동, 신앙, 의례, 놀이 등 생활의 모든 것이 자급자족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촌락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른 각종 민요가 풍부하게 생성·전승될 수 있었고, 각각의 촌락공동체마다 독특한 민요가 발전하게 되었다."
음악적 특징
정악이나 산조, 판소리 같은 음악이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감상음악이라면, 민요는 특별히 배우거나 수련할 필요가 없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생활음악이었다. 민요는 민족의 노래이면서 민중의 노래이다. 이 말은 민요 그 자체가 민족예술이고 민중예술이라는 것이다. 민중예술이란 창작자와 향유자가 분리되지 않고서 집단적인 형태로 보존되어 나타나는 예술로서, 한 사람을 부각 시키거나 개인적 저작권이 주장되지 않는 형태로, 이것이 민요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누구나 민요를 만들 수 있고,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랫말로 표현할 수 있다.민요의 창작자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특정한 가사 하나로 되어있지 않고 가사가 바뀌어 들어갈 수도 있는 등, 민요 한 가지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불린다. 민요의 창작은 어느 누구든 할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민중예술의 진수로서 자리잡는 것이다. 따라서 민요는 집단성을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집단 속에서 계속 불려와서 공동체 문화로서 자리잡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민요의 특징은 다르다. 남도소리, 서도소리, 제주도 민요, 경상도 민요 등 각 지역적 특징에 맞도록 불리워지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유는 바로 집단성이란 부분에 있는 것이다 "한국 민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위에 보는 것처럼 노동요가 많다는 것이다. 주로 놀이판이나 축제판에서 노래를 부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노동요가 많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특징이다. 노동요 중에서도 집단노동요가 많다. 모심기나 논매기 처럼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보통 2-30명이 모여서 공동으로 일을 했고, 방아찧기와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서너집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집단적 노동에서는 규칙적으로 일손을 맞추는 동시에 흥겨운 리듬으로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특히, 노젓는소리나 목도소리 처럼 노래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집단노동요는 앞소리꾼이 소리와 일을 이끌어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정한 후렴구를 반복해 부르는 '메기고 받는 방식'이 가장 많다. 한국 민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주악기, 특히 선율악기가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업노동요의 경우 간혹 반주가 따르더라도 앞소리꾼이 북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거나 서너명 정도의 풍물패가 반주를 하는 정도가 보통이었다. 어로요에서는 풍물악기가 자주 리듬악기로 사용되면서 때로 날라리(새납)가 선율악기로 사용되는 수도 있었다. 장례의식에서는 요령이나 북, 그리고 때로는 풍물이 사용되었다. 유흥요도 대개는 반주악기 없이 부르거나 물방구(물동이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엎어 띄운 것)를 친다든지 하는 정도에 그쳤다. 한국의 민요의 선율은 크게 한반도의 북서부(한강 이북의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의 수심가권, 한반도 남서부(충청남도,전라남북도)의 육자배기권, 그리고 한반도 동부(강원도와 경상남북도)의 메나리권, 그리고 제주도권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 네가지 권역의 선율을 음악적으로 설명하자면 전문적인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자의 능력을 벗어난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간단하게 권역별 민요의 느낌을 말하자면, 네가지 권역의 민요 선율이 모두 애조(哀調)를 띤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나, 수심가권의 선율은 외로운 느낌을 주고, 육자배기권의 선율은 비장한 느낌을 주며, 메나리권의 선율은 다정한 느낌, 그리고 제주도권의 선율은 적막한 느낌을 준다."
민요의 장단
민요의 장단: 우리나라 장단은 주로 판소리나 민요, 산조, 시나위 등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일정한 틀 안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연주된다. 주로 시나위와 산조반주에 쓰이는 진양, 중모리, 엇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은 장단의 이름이 그대로 곡의 이름이 되어 곡명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본래는 빠르기가 다른 각 장단을 나타내는 말로 진양에서 휘모리로 갈수록 장단의 속도가 빨라진다. 정악장단에 비해 잔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민속악 장단의 특징이며 민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장단으로는 세마치와 굿거리가 있다. 특히 민속악 장단은 음악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장단을 사용하고 있다.
민요의 종류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고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지방마다 말투가 다르듯 민요에도 각 지방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지방 민요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통속민요 : 널리 알려진 민요(강강술래, 아리랑, 도라지타령, 밀양 아리랑 등)
향토민요 : 일정한 지역에서만 불리는 민요(거문도 뱃노래, 임실 방아타령 등)
<민요의 지방적 특징 및 대표곡>
◈ 경기 민요 - 서울, 경기 지방과 충청도 일부 지방을 포함합니다. 창부타령, 아리랑, 태평가, 경복궁타령, 흥타령 등이 있고 굿거리, 세마치 장단을 많이 사용합니다. 음이 맑고 깨끗하여 일반 사람들의 듣기에 부담이 없고 가사 전달이 잘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 남도 민요 - 우리나라 민요중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고 알려진 민요입니다. 전라도와 충청남북도 일부를 포함합니다. 남도 민요는 계면조로 된 음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꺽는 목과 떠는 목의 기교를 사용합니다. 경기 민요에 비해 매우 극적인 느낌이 듭니다. 보렴, 새타령, 육자배기, 진도아리랑, 강강수월래 등이 있습니다.
◈ 서도 민요 - 황해도, 평안 남북도 일부를 포함합니다. 다른 지방에 비해 창법이 매우 특이합니다. 또한 다른 지방에 비해 기악 반주를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 창법상의 표현을 악기로 옮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민요로는 평안도의 수심가, 엮음 수심가, 황해도의 산염불, 잦은염불, 몽금포 타령 등이 있습니다.
◈ 강원도 민요 - 탄식조나 애원조의 노래들이 많습니다.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 경상도 민요 - 빠른 장단이 많이 쓰여 흥겹고 경쾌한 점이 특징입니다. 밀양 아리랑, 울산 아가씨, 쾌지나 칭칭나네 등이 있습니다
◈ 함경도 민요 - 신고산 타령. 애원성, 궁초댕기 등이 있습니다.
◈ 제주도 민요 - 강한 억양과 사투리가 많이 쓰인다.장단이나 선법은 경기민요와 비슷한 점이 많으나, 어두운 느낌의 발성을 즐겨 사용한다. 해녀 뱃노래(이어도 사나), 오돌또기, 아양타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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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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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및 연주자 |
분류 |
동영상 |
[가] |
가난타령 |
임방울 |
예술음악(판소리) |
0 |
가야금산조 |
강태홍연주, 박녹주 북, 중모리 |
예술음악(산조) |
동영상 |
가야금협주곡1번 |
kbs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이강덕) |
- |
가자가자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강강술래 |
박초월, 한농선 외 |
민속음악(민요) |
0 |
강상풍월 |
조순애 창, 장송학 장고 |
예술음악(판소리) |
- |
강원도아리랑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강원오독떼기(강릉) |
강원도 오독떼기 |
민속음악(민요) |
0 |
개성난봉가 |
오복녀 |
민속음악(민요) |
- |
거문고산조 |
원광호연주, 진양조 |
예술음악(산조) |
0 |
경기도당굿제석굿(경기무가) |
조광현 창, 방돌근 외 반주 |
종교음악(무속) |
- |
경기시나위 |
경기시나위 |
예술음악(시나위) |
- |
경복궁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경제평시조 |
문현 창, 경제평시조 |
풍류음악(가악) |
0 |
계락 |
이준아 창 |
풍류음악(가악) |
- |
계면얼롱 |
홍원기 창, 김종희 외 반주 |
풍류음악(가악) |
- |
계면조초삭대엽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 |
계면평롱 |
김월하 창, 김호성 외 |
풍류음악(가악) |
- |
고고천변 |
백남희 창, 관용현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고당상 |
한승호 창, 천대용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곰보타령 |
이춘희, 황용주 창, 전숙희 장고 |
예술음악(산조) |
- |
과거장 |
이동백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곽씨부인유언(=)심청모유언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관악영산회상(상령산) |
국립국악원 |
예술음악(대풍류) |
- |
관악영산회상(타령) |
국립국악원 |
예술음악(대풍류) |
동영상 |
구아리랑 |
이춘희 창 |
민속음악(민요) |
0 |
군노사령 |
정정렬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궁초댕기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권주가 |
최정희 |
풍류음악(가악) |
- |
그물당기는소리 |
- |
민속음악(민요) |
- |
금다래꿍 |
오복녀 |
민속음악(민요) |
- |
기생점고 |
이화중선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긴사랑가 |
안숙선 창, 김청만 북 |
예술음악(판소리) |
0 |
긴아리 |
김광숙 창 |
민속음악(민요) |
0 |
길군악 |
삼성취주단 연주 |
예술음악(대풍류) |
- |
꽃타령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나] |
나주절싸소리(논매는 소리) |
나주 절싸소리 |
민속음악(민요) |
- |
낙양춘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 |
난봉가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남경선인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남병산바람비는데 |
김애정 창, 이보형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남원골한량 |
송만갑 창, 1927년 녹음 |
예술음악(판소리) |
- |
남창지름시조 |
문현 창 |
풍류음악(가악) |
- |
네그른내력 |
신금홍 창, 이흥원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노들강변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노랫가락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노젓는소리 |
경기 시선배 노젓는 소리 |
민속음악(민요) |
0 |
논매기소리 |
강원명주, 최돈항, 최돈업 창 |
민속음악(민요) |
- |
놀량 |
박정욱 소리 |
예술음악(산조) |
0 |
농부가 |
김소희, 박녹주, 이화중선 |
민속음악(민요) |
- |
늴늬리야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다] |
단소산조 |
이생강 연주, 이성진장고, 진양조 |
예술음악(산조) |
- |
달거리 |
김금숙 |
예술음악(산조) |
- |
달구소리 |
달구소리 |
민속음악(민요) |
동영상 |
대금산조 |
이생강 연주, 중모리 |
예술음악(산조) |
0 |
대취타 |
삼성취주단 연주 |
궁중음악(군대음악) |
동영상 |
도라지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도리깨질소리 |
강원도 학산농요보존회 |
민속음악(민요) |
- |
도사내려오는데(도사등장)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돈과쌀털어내는대목(돈타령) |
박녹주 창, 김득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돈돌나리 |
- |
민속음악(민요) |
- |
동동 |
김상기외 연주 |
궁중음악(향악) |
- |
동해안무가 |
김석출 외 |
종교음악(무속) |
- |
둥가타령 |
- |
민속음악(민요) |
- |
뒷산타령 |
박정욱 소리 |
예술음악(산조) |
0 |
[마] |
만고강산 |
안숙선 창, 장덕화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만학천봉 |
황용주 창, 황용주 장고 |
예술음악(산조) |
- |
매화타령 |
- |
풍류음악(가악) |
- |
모내기소리 |
충북 옥천 |
민속음악(민요) |
- |
목도소리 |
- |
민속음악(민요) |
- |
몽금포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문묘제례악 |
국립국악원연주, 응안지악 |
종교음악(유교) |
- |
물푸는소리 |
전북 고창 |
민속음악(민요) |
- |
밀양아리랑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바 ] |
바위타령 |
박상옥 창, 황용주 장고 |
예술음악(산조) |
- |
박석틔 |
박소춘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박타령 |
김정문 창, 유성기음반복각 |
예술음악(판소리) |
동영상 |
반짓소리봉청 |
김응기 창 |
종교음악(불교) |
- |
방아타령 |
지화자 |
민속음악(민요) |
0 |
배따라기 |
최경명 창 |
민속음악(민요) |
- |
백구사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동영상 |
범내려오는데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범피중류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베틀가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보태평(희문) |
국립국악원연주, 보태평 중 희문 |
종교음악(유교) |
동영상 |
보허사 |
kbs국악관현악단 |
풍류음악(줄풍류) |
- |
보허자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0 |
본령(=)여민락령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 |
비단타령 |
조순애 창, 장송학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뺑덕어멈길소리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사] |
사물놀이 |
두레페사물놀이, 운우풍뢰 |
예술음악(판소리) |
동영상 |
사설지름시조 |
문현 창 |
풍류음악(가악) |
0 |
사철가 |
조상현 창, 박춘맹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산염불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산조합주 |
안숙선 창, 김청만 북 |
예술음악(산조) |
0 |
삼고초려 |
김초향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삼현영산회상(상령산) |
국립국악원 |
예술음악(대풍류) |
- |
삼현영산회상(타령) |
국립국악원 |
예술음악(대풍류) |
동영상 |
상사별곡 |
김호성 창 |
풍류음악(줄풍류) |
- |
상여소리 |
서춘식 앞소리 |
민속음악(민요) |
- |
새타령 |
이선유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서름타령(군사설움타령) |
임방울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서우제소리 |
제주민속보존회 |
민속음악(민요) |
- |
선인따라가는대목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성주풀이 |
박초월, 성우향 |
민속음악(민요) |
- |
소상팔경(단가) |
- |
예술음악(판소리) |
- |
수심가 |
박정욱 소리 |
민속음악(민요) |
0 |
수양산가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 |
수제천(=)정읍 |
국립국악원 연주 |
궁중음악(향악) |
동영상 |
시나위 |
시나위 |
예술음악(시나위) |
동영상 |
시비따라가는데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시집살이노래 |
강원도지방 시집살이노래 |
민속음악(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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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산타령(=)어랑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신연맞이 |
이동백 창, 이흥원 북 |
예술음악(판소리) |
0 |
심봉사통곡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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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모유언(=)곽씨부인유언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심청모출상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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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물에빠지는데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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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머리 |
임방울 창 |
예술음악(판소리) |
0 |
씻김굿중조왕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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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음악(무속) |
- |
[아] |
아리랑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아쟁산조(박종선) |
박종선 연주, 김청만 장고, 자진모리 |
예술음악(산조) |
0 |
안채비소리착어성 |
김응기 창 |
종교음악(불교) |
- |
앞산타령 |
박정욱 소리 |
예술음악(산조) |
0 |
약성가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양산도 |
지화자 |
민속음악(민요) |
- |
양양가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 |
어랑타령(=)신고산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어부사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 |
어사와장모 |
김연수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어사출도 |
정정렬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언락 |
하규일 창 |
풍류음악(가악) |
동영상 |
여민락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 |
여민락만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 |
여창지름시조(달밝고) |
국립국악원 |
풍류음악(가악) |
동영상 |
엮음수심가 |
박정욱 소리 |
민속음악(민요) |
0 |
엮음지름시조 |
김호성 창 |
풍류음악(가악) |
- |
염불 |
이정업 외 |
예술음악(대풍류) |
- |
영산회상(염불도드리) |
국립국악원 |
풍류음악(줄풍류) |
동영상 |
영산회상(세령산) |
국립국악원연주 |
풍류음악(줄풍류) |
0 |
오돌또기 |
제주민속보존회 |
민속음악(민요) |
0 |
오봉산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옥중가 |
최승희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옥중상봉 |
김연수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옹헤야 |
김소희 창 |
민속음악(민요) |
- |
용왕탄식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우락 |
이난향 창 |
풍류음악(가악) |
- |
우조소용 |
홍원기 창, 김성진 외 반주 |
풍류음악(가악) |
- |
우조초삭대엽 |
이준아 창 |
풍류음악(가악) |
- |
운담풍경 |
성창순 창, 김득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유산가 |
김금숙 |
민속음악(민요) |
0 |
육자백이 |
조순애 창, |
민속음악(민요) |
0 |
이도령춘향달래는대목 |
박녹주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이별가 |
송기덕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이별가(오리정이별) |
안숙선 창, 김청만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일출(거문고독주곡) |
경기도립국악단 |
창작음악(정대석) |
0 |
임당수바람부는데 |
성우향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자] |
자룡이활쏘는데 |
김소희 |
예술음악(판소리) |
- |
자진방아타령 |
지화자 |
민속음악(민요) |
0 |
자진사랑가 |
안숙선 창, 김청만 북 |
예술음악(판소리) |
0 |
자진산타령 |
정득만-이창배 외 |
예술음악(산조) |
0 |
자진아리 |
김광숙 창 |
민속음악(민요) |
0 |
자진염불 |
이정렬-이반도화 |
민속음악(민요) |
0 |
자진육자백이 |
조순애 창 |
민속음악(민요) |
0 |
장부한(대장부한) |
김창룡 창, 전기흡입녹음 |
예술음악(판소리) |
- |
장승타령 |
이동백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적벽가 |
김금숙 |
예술음악(산조) |
0 |
적벽강싸움 |
조학진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적성가 |
김초향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정대업(소무) |
국립국악원연주, 정대업 중 소무 |
종교음악(유교) |
0 |
정선아라리 |
지화자 |
민속음악(민요) |
0 |
정선아리랑 |
김남기 외 |
민속음악(민요) |
동영상 |
정읍(=)수제천 |
국립국악원 연주 |
궁중음악(향악) |
동영상 |
정자소리 |
김흥순(청도) |
민속음악(민요) |
- |
제비노정기 |
장판개 창 |
예술음악(판소리) |
0 |
죽장망혜 |
박귀희 창 |
예술음악(판소리) |
0 |
중타령 |
신금홍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지경다지는소리 |
전북 고창소리 |
민속음악(민요) |
- |
진국명산 |
박동진 창, 장덕화 북 |
예술음악(판소리) |
0 |
진도아리랑 |
진도아리랑타령보존회 |
민속음악(민요) |
0 |
진오귀굿 |
김금화 창 |
종교음악(무속) |
- |
집터잡는데 |
김초향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차] |
창부타령 |
지화자 |
민속음악(민요) |
0 |
천년만세 |
국립국악원연주, 응안지악 |
풍류음악(줄풍류) |
0 |
천안삼거리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천자뒷풀이 |
나성엽 창, 북 미상 |
예술음악(판소리) |
0 |
국악관현악입문 |
국립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이성천) |
- |
추월만정 |
신금홍 창 |
예술음악(판소리) |
0 |
축원화청 |
김응기 창 |
종교음악(불교) |
- |
춘향끌어내리는데 |
임방울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춘향방경치 |
정정렬 창, 한성준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취타 |
국립국악원 연주단 |
예술음악(대풍류) |
동영상 |
칠머리굿새드림 |
강순선 외, 새드림 |
종교음악(무속) |
- |
침향무(가야금독주곡) |
kbs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황병기) |
0 |
[카|타] |
쾌지나칭칭 |
kbs국악관현악단 |
민속음악(민요) |
0 |
태평가(가곡) |
이준아 창 |
풍류음악(가악) |
동영상 |
태평가(민요) |
묵계월, 안비취,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토끼고향에돌아오는대목 |
김연수 창 |
예술음악(판소리) |
0 |
토끼능변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토끼신세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토끼와자라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토끼욕설 |
박초월 창, 김명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토끼화상 |
조순애 창, 장송학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퉁소산조 |
한범수 연주 |
예술음악(산조) |
- |
[파] |
편락 |
하규일 창 |
풍류음악(가악) |
0 |
편삭대엽 |
지금성 창, 해경악회 |
풍류음악(가악) |
0 |
편시춘 |
성창순 창, 김득수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평양가 |
김금숙 |
예술음악(산조) |
- |
평조회상(상령산) |
국립국악원(관현합주) |
풍류음악(줄풍류) |
동영상 |
평조회상(상령산) |
국립국악원(향피리독주곡) |
풍류음악(줄풍류) |
동영상 |
풍년가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풍물 |
영남농악 |
민속음악(민요) |
0 |
피리산조 |
정재국 연주, 사재성 장고, 중중모리 |
예술음악(산조) |
0 |
피리협주곡 |
kbs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이강덕) |
- |
[하] |
한강수타령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 |
한오백년 |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
민속음악(민요) |
0 |
합주곡4번 |
kbs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김용진) |
- |
해금산조 |
김성아 연주, 김청만 장고, 짧은산조 |
예술음악(산조) |
0 |
해령 |
kbs국악관현악단 |
궁중음악(당악) |
0 |
현악영산회상(염불도드리) |
국립국악원연주 |
풍류음악(줄풍류) |
동영상 |
현악영산회상(세령산) |
국립국악원연주 |
풍류음악(줄풍류) |
0 |
호남가 |
오정숙 창, 장덕화 북 |
예술음악(판소리) |
- |
홋소리할향성 |
김응기 창 |
종교음악(불교) |
- |
화초장 |
박봉술 창 |
예술음악(판소리) |
- |
환(피리독주곡) |
kbs국악관현악단 |
창작음악(김용진) |
- |
환계락 |
이난향 창 |
풍류음악(가악) |
0 |
황계사 |
김부용 창 |
풍류음악(가악) |
0 |
회심곡 |
김영임 창 |
전곡듣기 |
0 |
회심곡 |
안비취 창 |
종교음악(불교) |
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