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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도란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저술한 문헌 '목민심서'를 본따 만든 용어로 백성을 생각하던 정약용의 마음을 일깨우며 걸어보라는 의미이다. 이곳 철문봉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가 본가인 여유당(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서 집뒤 능 선을 따라 이곳까지 와서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하여 철문봉이란 명산이 전해지고 있다. |
천마지맥누리길의 안내판과 팔당1리로 내려갈 수 있는 등로의 철문봉을 내려 예봉산으로 간다.
헬기장과 억새밭에서 보는 예봉산의 위용을 보며
암릉을 오르는 잠깐만 이라도 운치를 느끼는 유명한 예봉산과 한강의 조망은 산행의 재미를 더했다. 온화한 날씨가 도와준
가파른 산길을 오른 오늘의 최고봉 예봉산!
[예봉산]의 강우레이더 관측소 앞 나무데크 전망대에 망원경이 저 멀리 볼 수 있는 풍경은 운길산, 걸어온 산길의 갑산과 적갑산
으로 이어지는 본지맥과
동쪽으로 검단산과 고추봉, 모두가 산으로 둘러친 산정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풍경에 잠시 머물다.
'양수 2등급의 예봉산 삼각점을 확인하며
12년 전에 없었던 매점 까지 한바퀴 돌아본 후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수점인 두물머리의 조망이 압권인 예봉산의 산길가득 풍경이 가득했다. 그 풍경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터인데~
예봉산을 내려 가면서 올라야 할 율리봉과 예빈산을 바라보면서 '벚나무쉼터'의 이정목과 팔당역 갈림의 이정목을 지나
율리봉으로 간다.
[율리봉]에 서면
지나온 예봉산이 우뚝!
율리봉에서 조동마을로 가는 이정목에 직녀봉의 방향 따라 남진하여 간다. 밧줄지대을 지나 두물머리의 풍경에 눈을 두고
[율리고개]로 내려서면 예빈산 0.7km의 이정목이 있는 고개를 또 오른다.
철쭉군락지의 나무계단에 만난 보호수나무를 보면서 오르면
예빈산(직녀봉)0.66km의 안부에 야영하는 분들의 몇동이 쳐 있고 등산로마다 곱게 쌓인 낙엽이 살망살망 따른다.
암릉의 밧줄잡고 오르며 서산 기우는 해넘이 즐거움에 한강도 빨갛게 물들어 간다. 저녁을 맞는 서산으로 올랐다. 물든 것은
한강만이 아니라 내 눈에도 빨갛다.
오늘의 최고 전망대 예빈산(직녀봉)
[예빈산(직녀봉)]
아주 먼 옛날,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있었고, 그에게는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베짜는 여인 '직녀'입니다. 왕은 처녀가 된 딸의 짝을 찾았고 그 짝은 소를 모는 '견우'였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놀기에만 빠져 게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왕은 견우와 직녀를 갈라 놓았습니다. 직녀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고 눈물은 큰 비와 폭풍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까마귀들은 일년에 단 한번 다리를 만들어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
이곳에 까마귀가 많이 나는 이유를 이제 알겠네~
해넘이 전망대에 한눈에 펼쳐진 굴곡진 물길로 어울려 노을이 빛을 발하고
한강 너머로 서서히 내려 앉는다. 찰라였다. 함께 한 야영하는 분들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이 엷게 두 강에 내리고
예빈산에도 내린다.
노울빛을 기운받아 산길은 동진하게 될 가파른 산길이 낙엽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하산길에 만난 어둠속에 나를 가두고 '올빼미
산악회'의 표지기만 나를 안내하여 내려갔다.
경사진 잔돌들 밟아 가며 철탑을 지나며 양수리의 불빛이 꽃 같이 피고 묘를 지나 또 묘를 지나면
철조망길과 만나 원형석곽묘를 지나 달빛은 어느덧 가야할 산길에 나무그림자 밟아 가고 있었다.
안부를 건너면 나무들을 베어 쌓았다. 성황당고개인가 보다.
상봉마을과 6번국도의 불빛 받으며 6번국도를 넘을 수 없어 봉안마을로 내렸다. 콘크리트 도로를 걸어 능내리 4차선도로의
하봉안버스정류장에서 가야할 산길의 지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하여 스틱을 접고 배낭을 정리하여 산행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가야할 4차선도로 따라 가다 조안공동묘지로 오르고 x102.7봉을 지나 또 4차선도로로 내려왔다 마재고개의 쇠말산x85.8봉의
산봉우리를 지나 정약용선생묘 능선을 내려와 소내나루의 팔당호에 잠기는 약 2,5km의 산릉을 접었다.
8시가 가까이 오면서 집으로 가는 행차는 조급해 1시간쯤 기다렸을까, 167번 버스에 올라 팔당역에서 전철로 환승했다
두 번째 걸어본 천마지맥의 산길도 세월만큼이나 변해 있었다. 정상마다 세워진 정상석과 이정목들, 군락지의 안내판과 활공
장, 산릉의 등산로가 펑 뚫려있었다. 그 땐 예빈산에서 검단산과 맞닿은 팔당대교로 내려갔었는데, 개척산행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