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마르크스-모택동의 공통점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은 중국의 대표적인 국가 상징 공간이다. 이 공간을 모택동의 대형 초상이 굽어보고 있다. 그런데 올해 초인 1월 11일 또 다른 인물의 거대 동상 하나가 천안문 광장에 들어섰다. 공자의 동상이다.
공자와 모택동! 이 조합은 일단은 어울리는 느낌이 없다. 더욱이 공자와 유교는 모택동이 주도한 문화혁명 당시 봉건 잔재의 대표 격으로 단죄됐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몇 해 전부터 대대적으로 공자 붐을 일으키더니 드디어 그의 동상이 모택동의 초상과 함께 천안문 광장을 지키게 한 것이다.
개혁개방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사실상 포기한 중국이 결국에는 공자와 유교라는 전통 이데올로기에 기대기로 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어느 정도는 일리 있게 들린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주의를 좀 요한다.
붉은 금융은 파생상품보다 더 위험하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라는 시각이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식 자본주의는 우리가 통념으로 이해하는 그런 자본주의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금융부문의 경우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칼 월터와 프레이저 하위가 공저한 <붉은 자본주의>는 “중국 공산당은 은행의 역할을 국영기업에 자본을 무제한으로 대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07년 미국 발 국제 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금융 시스템에 회의가 확산되면서 차라리 확고하게 국가 통제 하에 있는 중국식 금융 시스템이 나은 것 아닌가 하는 시각이 힘을 얻었다.
중국식을 찬양하는 자들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그럴듯한 용어를 헌사하기도 하고 중국 스스로도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붉은 금융은 본질적으로는 월가의 교활한 금융맨들의 파생상품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는 시장에서 발생한 것인 만큼 길고 긴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결국에는 시장에서 수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은행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중국식 금융에선 은행의 부실채권은 그대로 국가 자체의 재정부실이 된다.
중국식 통제 경제의 문화적 뿌리
중국 경제의 이 같은 문제점은 일견 사회주의 통제 시스템의 잔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좀 더 뿌리 깊은 문화사적 배경이 있다. 중국에는 국가가 시장과 금융을 장악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간주하는 오랜 역사적 전통이 있다. 사회주의 시대나 개혁개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점에선 전혀 차이가 없다. 중국 경제의 운영 메커니즘은 중앙집권적 통제라는 점에선 예전 왕조시대와 다르지 않다.
중국은 엄청난 외환보유고에다 미 국채 보유 또한 세계 최대다. 자국 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에 부담을 준 데 더해 늘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이는 미국에 비하면 명암차가 뚜렷하다. 그러나 중국은 과거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의 중국의 판도를 만든 청나라 전성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훨씬 영토가 작았던 명나라도 대단한 부를 쌓아두고 있었다. 1600년대 당시 명나라는 국고에 은을 1300만 냥 정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 인구를 9년간이나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저장해놓고 있었다. 명나라는 그렇게 부를 쌓아두고도 얼마 뒤 망해버렸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의 중국은 그렇게 망해버린 명나라 청나라와 변함없는 공통점이 있다. 중앙집권적 통제로 인해 민간 금융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송나라 때 문약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제에서만큼은 초보적 산업혁명으로 간주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같은 경제적 발전은 한족 왕조에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요나라 금나라에 의해 연속적으로 유린되다 결국 몽골에 의해 완전히 망해버린 때문만이 아니다. 송나라 시절 극성을 이룩한 주자학의 영향이 더 큰 요인이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 제국 판도의 전역에선 지폐가 안정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몽골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거대한 상업제국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를 초원으로 밀어내고 재등장한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철저한 농업제국이었다. 건국자 주원장이 농민 반란군의 두목이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송나라 시절 외침에 시달리면서 강화돼 간 중화주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주자학은 원과의 싸움에선 저항이념의 역할을 하고 명나라가 건국되자 통치이념이 됐다.
주자학적 세계관에는 상업의 자리가 없다. 원래 공자의 유교 자체가 주나라의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와 상속제도인 종법제(宗法制)를 이상화한 것인 만큼 상업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주자학에서는 이것이 더 한층 강화돼 농자천하지대본의 경제관과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고착화됐다.
금융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농업에 조세수입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토지에 긴박돼 있는 경제체제에선 금융이 발달하지 못한다. 왕토사상에 입각해 중앙집권적 통제까지 더해지면 더욱이 어렵다. 잘 해야 토지라는 실물을 담보로 한 대부업 정도인데 이런 것은 금융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 발달된 금융의 핵심은 신용과 미래가치라는 추상적 가능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금융 발달의 초기에 이에 어울리는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바로 상업이다.
“이제 천하의 근본은 농사가 아닌 상업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와 모택동이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조합이 자리를 함께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가 읽어진다. 마르크스 모택동 공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상업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의 번영이 얼마나 갈까?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가능성은 과연 없는 것일까?
1901년 4월 19일자 ‘제국신문’에 약관 26세의 한 청년이 사설 하나를 썼다.
“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상업 흥왕함에 달렸으니 지금은 천하의 큰 근본을 장사라고 할 수밖에 없도다.”
그 사설 중 한 대목이다. 말하자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라 상자천하지대본(商者天下之大本)이라는 것인데 글쓴이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무역입국(貿易立國)을 일찌감치 갈파한 셈이다. 나라가 가쁜 숨을 쉬며 종말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다. 얼마 뒤 나라가 망하고 긴 식민지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청년이 제시한 길을 그대로 밟아 그때는 아무도 꿈조차 꾸지 못했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미국이 먼저 한미 FTA를 비준할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한미 FTA는 원래 노무현 정권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극력 반대하고 있다. 1901년 당시의 청년이 생각난다. 그의 이름은 이승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