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은 조선 광해군 시절에 영창대군을 처형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며 상소하다 제주로 귀양을 갔던 분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국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 모리(某里;아무도 모른다는 뜻)에 은둔하여 서릿발같은 절개를 지킨 조선 최고의 선비 중 한 분이다. 후세사람들은 이러한 기개와 충의를 숭모하여 남계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하였고, 정조(正祖)는 충정을 기리어 칠언절구 한 수를 하사하였다. 원시(原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日長山色碧嵯峨 鍾得乾坤正氣多 北去南來同一義 精金堅石不曾磨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북으로 가거나(尹集이 淸瀋陽에 간 것) 남으로 오거나 (정온이 某里로 온 것), 의리는 매한가지인데 금석같이 굳고 정결한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네.>
남달리 성품이 강직했던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께서 은둔하였던 고택은 덕유산 자락의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다. 이 고택은 풍수를 공부하거나 우리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즐겨 찾는 답사코스이다. 동계선생 고택은 순조20년(서기 1820년)에 건립된 목조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두줄박이 겹집에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설치되어 있는 단아한 모습의 전통민속가옥인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곧기가 대쪽같고 기개가 바위같은 동계 정온 선생께서 사셨던 그 고택을 꼭 방문하고 싶었다. 선인들의 기개와 절개는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분으로 소문난 종부 할머니를 꼭 뵙고 싶었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온 것이다. 아니 시간을 내어 기회를 만들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사실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란 별로 없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어야 어느 때 마치 우연처럼 그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창의 위천면까지는 쉽게 찾았으나 초행길이어서 선생의 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로에 선생의 고택을 알리는 안내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안내판이 있어도 헷갈릴 것인데 그것조차 눈에 띄지 않으니 갔던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얼마나 헤맸는지 모르겠다. 또 동계 고택의 담장이 허물어졌는데 지방 행정기관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는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방문화재에 대한 홀대를 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 군 문화공보과에다 전화를 해 목소리를 높혀가며 한참 동안 항의성 건의를 해야 했다.
길바닥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동계선생댁에 이르렀을 때는 해거름이 다 되어서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사진작업에 어려울 그런 시간이었다. 어느새 나도 반풍수가 되었는지 우선 동계 선생댁 주변 자연환경을 살펴보았다. 풍수설이란 것은 양택(주택과 궁궐 등 산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던 음택(무덤 혹은 유택과 같이 죽은 사람의 집)이던 간에 자연과의 균형과 어울림에서 의미를 찾는 학문이다. 필자가 풍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석 때문이었다. 수석이란 것은 자연의 상징이다. 따라서 수석과 함께 자연의 의미를 쫓다보니 풍수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동계선생댁을 풍수설에 따라 설명한 자료는 더러 있다. 따라서 그 설명은 생략하고 결론을 잠깐 얘기해야겠다. 동계 선생 고택이 있는 강촌 마을은 위천천을 따라 형성된 들판이 좋고, 사면을 에워싸고 있는 용맥이 순하여 장풍(藏風)과 함께 생기의 응집이 강하다. 전반적으로 양기가 길하며 생기가 왕성한 길지이다. 동계 고택 또한 수국의 신술 관대룡에 위치하고, 양기도 관대수와 장생수가 도래하여 절방으로 소수하니 대단한 길지이다.
주변을 살펴보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젊은 사람 하나가 안방에 누워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종부 할머니의 손주사위였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모양인데 주말이면 찾아와 종부할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집안일도 조금씩 거드는 효손들이었다. 안채를 기웃거리는데 연세가 이슥한 두 분이 대청마루에서 채소거리를 다듬고 있었다. 틀림없이 두 분 중에 한 분이 종부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필자는 그 할머니들을 향해 "집안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친철했다. "네, 돌아보세요. 어디서 오셨지요?" 라고 한 할머니가 맑은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그 분이 종부 할머니였다.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종가집들은 보통 안채는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남의 집 안방을 기웃거린다면 생활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대학교수라고 찾아오고, 신문사 기자라고 찾아오고, 무슨 잡지사, 무슨 귀빈... 아무튼 허구헌날 안방을 기웃거리니 공개할래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계 선생 댁 종부 할머니는 그런 것을 게의치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은 게 있고, 알고 싶은게 있으면 안방까지 다 뒤져도 좋다는 태도이셨다. 하기사 살던 집까지 대학측에다 다 기증한 경주 교동 최부자댁의 마지막 만석지기 최준 선생의 따님이시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계 선생댁의 14대 종부 최씨 할머니는 올해 연세가 팔순이다. 그런데도 옛날처럼 도와주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여전히 혼자 그 넓은 집안의 일을 다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그 많은 손님들께 일일이 차 대접을 다 하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만큼 아직은 근력이 좋고 정정하시다.그러나 팔순이라는 연세는 결코 적은 연세가 아닐 것이다. 종부 최씨 할머니는 경주 교통의 만석지기 최부자댁 따님으로 태어나 동계 선생 댁으로 출가해서 평생을 종부로 살아오신 분이다. 안동의 유씨 집안으로 출가한 종부할머니의 여동생 또한 그 댁의 종부로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사실 말이 명문가의 종부이지 종부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편히 쉴 시간도 없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그저 젊어서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집안일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 집안친구들과 후손들 챙기느라 안일이 없는 삶이다. 그래서 종부할머니는 집안의 대를 이를 며느리에게도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일과 관련하여 불평불만을 말해서는 안된다. 그저 내 운명이거니 하고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안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고 했다.
나는 종부 할머니의 부친이신 경주 최부자댁의 마지막 만석지기 최준 선생께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시면서 시작한 육영사업의 한 부분으로 설립한 청구대학(현 영남대학의 전신) 문제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꺼냈다. 사실 대구에 있는 현 영남대학의 전신인 청구대학을 설립할 목적으로 최준 선생은 경주 교동의 살던 집을 포함한 전재산을 대학측에 기증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부자 댁의 그 고결한 정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고의적으로 은폐시키고 있는 듯한 생각마저 들 정도다. 우리나라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산 명문가가 바로 경주 최부자댁인데 그걸 몰라주는 현세태에 대해 최부자댁 따님으로서 서운한 생각을 가지시고 계시지나 않는지 궁금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그 말을 꺼냈던 것이다.
"할머니, 그거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학교를 설립해 육영사업을 펼쳤는데 지금은 그 사실조차 얘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쩝니까?" 종부 할머니는 친정댁 이야기가 나오자 안타까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세 말이야. 아이구 사람들 참. 이렇게 될 것 같으면 교동의 그 집이라도 돌려주었으면 좋겠어. 사람들 참 너무 하지..."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표정에는 서운함같은 것은 없다. 그저 지나가는 얘기처럼 달관의 담담함으로 말씀하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조선 마지막 황제인 고종황제에서부터 이석씨까지, 그리고 현재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꿰고 계셨다. 이석씨는 조선 마지막 왕손인 의친왕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나 유명한 대중가요 '비둘기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동계 고택을 찾아 이틀밤을 묵으며 부모를 그리워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갔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의친왕이 한때 이곳 동계 고택에 숨어들어 꽤 오랫동안 묵고 간 인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의친왕 이강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병탐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 세울 궁리를 했다.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보고 당의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중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왕가의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다.그 두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에 발각되어 대단한 탄압이 자행되었는데 이것이 대동단 사건이다.
바로 그 의친왕 이강이 한때 잠시 숨어지내던 곳이 바로 동계 선생 고택이며 그때 남긴 친필을 보관하고 있다며 내게 그 사진을 보여 주셨다. 옛적에는 왕가의 사람들이 남긴 것을 비롯하여 귀한 서필들이 꽤 많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도둑이 들어 꽤 많이 잃어 버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진품 대부분을 박물관에 맡겨 버렸다고 하셨다.
종부 할머니께서 들려주는 이런저런 말씀을 듣다보니 그만 해가 떨어져 마당이 어둑어둑하다. 할머니는 일어나시더니, "해떨어졌으니 식사하시고 가셔야지?" 하시며 주방으로 가신다. "아뇨, 전 그냥 가겠습니다. 가다가 간단히 요기하면 됩니다." "무슨 그런 말을... 우리집에 오셨으니 손님인데 손님대접을 그렇게 하면 안되지. 지금 해 둔 밥이 있으니 있는 찬으로 요기를 해요" 그러시면서 내가 거절하지 못할만큼 친철하게 주방으로 안내해서는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곰국에다 문어 쓴 것, 그리고 무김치를 우선 내놓으시고는 계속해서 고기장조림 등을 내오신다. 작은 밥상 위가 그릇둘 곳이 없을만큼 자꾸 가득해진다. "아이구 할머니, 그만 됐습니다. 송구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요기를 하게된 것만도 죄스러운데..." "아녀, 먹던게 있어서 그래요. 낮에 손님이 오셔서 준비한 게 조금 있거던"
팔순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기가 참으로 미안했다. 그래서 얼른 식사를 끝내고 나서, "할머니. 사실 저도 경주 최가입니다. 최부자댁과도 집안일거고요. 그리고 동학의 최재우 선생과도 집안일 겁니다." "그려? 어쩐지 최가같더라니까. 일가구만. 더 반갑네..." "다음에 제가 좋은 분을 좀 모시고 찾아뵐께요. 아까 원광대 조용헌 교수가 보고싶다고 하셨죠? 제가 연락해 드릴까요? 사실 일면식은 없지만 저도 그 양반을 참 좋아하거던요. 나이는 저보다도 오히려 아랜데 참 훌륭한 사람이더군요." "그렇지요? 그 양반 지난번 내가 한번 전화를 했는데 그집 딸래미가 나를 알아보더라니까. 애들 교육을 얼마나 철저히 잘 시켰는지... "
......
"할머니,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 밤에 어딜 가겠노. 그만 묵어가소" "아닙니다. 가야할 곳이 있어서요." "어딜 가시려고?" "거제로 갑니다." "아이쿠 그 먼데를 이 밤중에... 묵어가면 좋을건데..." "다음에는 좋은 분들 모시고 꼭 찾아뵙겠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우리 문화와 우리 민족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래요. 다음 올땐 미리 전화 좀 하고 오소. 그래야 내가 준비를 좀 하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그래요."
종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을 나서니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을 다녀가는 기분이 들었다. 벼란간 내 어릴적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눈씨울이 촉촉해짐을 느꼈다.. (하나꼬레. 200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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