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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 5일 저녁방송에 동참해주신 법우님들 반갑습니다. 범어사에서 있었던 說禪法會(설선법회)를 조금 언급을 하고 싶습니다. 금년 들어서 범어사에서는 아주 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계획의 일환으로 看話禪(간화선)을 좀더 생활화 하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목적 하에서 설선법회라고 하는 법회를 마련했습니다.
본래 범어사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토요 정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연관 시켜서 토요일인 오늘부터 10주간 實參實修(실참실수)한, 실답게 참선하고 실답게 선을 통해서 수행하신 주로 선원 장 스님들! 조실 스님들! 이런 스님들 열 분을 모셔서 10주간 선을 설 하는 법회가 설선법회가 되겠습니다. 그 첫 법회가 오늘 이루어 졌습니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14시에서 15시까지 선을 설하고 또 설한 뒤에는 다시 질문자가 나와서 선을 논하고, 설하신 분께 이런저런 의문 나는 점이나 문제점등을 질문하면 선사스님께서 거기에 대한 적절한 답을 하시는 그런 법회가 되겠습니다.
시간도 세 시간이나 계속되는 계획을 세워서 오늘 첫 법회를 했습니다. 홍보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마는 의외로 아주 많은 신도 분들이 평소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상으로 그렇게 많이 오셨습니다. 요즘 홍보가 워낙 잘 되어서 그런가 많은 분들이 동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날씨가 추워서 따라서 눈도 아주 많이 왔어요. 금년에 범어사에서 눈이 한 다섯 차례쯤 왔는데 오늘이 아마 제일 많이 오지 안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눈이 아주 순조롭게 곱게 내려서 서설같이 온 도량을 그리고 온 산하를 하얗게 백설로 덮었습니다.
한참 선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데 눈이 아주 퍼~얼 펄 날리는 그런 정경을 한번 상상 해 보십시오. 우의를 빨리 구입해서 전부 지급을 다했지만 대웅전 마당에 많은 신도님들이 눈을 맞으면서 선 법문을 듣고, 또 일부 참선하신 스님들이 조실 스님께 선에 대한 이런저런 것을 묻고, 조실 스님도 어느 때 보다도 아주 열의를 가지고 성의 있게 대답을 하셔서 많은 청중들에게 큰 감명을 준 법회였습니다.
그래서 說禪법회가 설할 설(說)자 참선 선(禪)字 법회가 아니라 눈雪(설)자 참선禪 자의 법회가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렇게 눈이 많이 왔고, 좀 전에 나가봤는데 이 시간에도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제 짐작에 족히 한 15cm쯤 되지 않겠나? 합니다.
신도님들께서는 불편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좋은 법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 조실 스님 지유 스님께서 하신 법회의 내용을 몇 말씀 전 하면서 거기에 대한 부연 설명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이렇게 법문을 하는 것의 좋은 점은 바로 그날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나 어떤 시사적으로 우리가 한번쯤 거론해야 할만한 그런 일들! 또 행사에 관계되는 일들을 그때그때 바로 본문의 주제로 삼아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것이 상당히 큰 이점 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조실 스님께서 하신 법문은 화두 공부! 말하자면 간화선! 소위 선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는데 특히 한국의 선의 전통은 간화선이기 때문에, 간화선을 선양하는 목적 하에서 설선법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데 대한 이런저런 문제 점을 조실 스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조실 스님께서는 물론 많이 공부하셨지만 화두에 대해서는 좀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친견하는 입장이고 또 오늘 제가 눈을 맞으면서 가서 들었습니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그 요체는, 大奮心(대분심)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요에서도 고봉스님께서 대 의정! 대 분심! 이런 것을 아주 특별히 강조 하셨습니다. 분심 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오늘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부모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침해를 받아서 돌아가셨을 때 그 자식이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부모를 죽인 그 원수를 갚기 위한
그 마음 하나일 것이다.
또 자식을 그런 처지로 잃었을 때 부모의 마음!
부모를 그렇게 잃었을 때 자식의 마음!
그들이 갖는 원수를 갚기 위한 그런 큰 보복심!
이런 것을 분심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성낼 忿(분)자가 아니라 사실은 분발할 奮(분)자인데 어쨌든 비슷한 의미이지요. 스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하는, 밤잠을 이룰 수 없고 식사를 할 수가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오로지 원수 갚고자 하는 그런 분한 마음으로 화두에 임해야 된다.
그 사람에게 무슨 잠이 있을 것이며 무슨 세속적인 명예가 그 분심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명예도 권속도 사람도 돈도 그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 마음하나 일 뿐일 것이다. 그러한 마음 자세로 한다면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화두를 들어서 일념이 되고 一念(일념)이 돼서 소위 動精一如(동정일여)가 되고 가만히 있을 때나 활동을 할 때나 한결같고, 또 夢中一如(몽중일여) 꿈속에서도 화두를 드는 것이 한결 같고 또 寤寐一如(오매일여) 이런 말도 있지요. 푹 깊이 잠들었을 때나 성성하게 깨어있을 때나 한결 같아야 된다. 소위 몽중일여가 되면 病中一如(병중일여)가 된다 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꿈 가운데 한결 같다면 아무리 심한 고통을 앓고 있더라도 그 고통 속에서도 한결 같다. 이런 화두가 일념으로 되기까지의 단계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는 분심이 그와 같이 일어난다면 과거 조사 스님들도 말씀하셨지만 일주일이면 끝난다 그랬습니다. 깨닫는데 일주일이면 끝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부지하세월 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도대체 그런 식으로 화두를 들어서 깨닫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다가 그만두고 한참 잊어버렸는가 하면 또 한번씩 들고, 이를테면 한 시간 좌선을 하더라도 2분 3분 잘 해야 5분 10분 정도 화두를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저 졸고 그리고는 또 망상과 씨름을 하고 그런 좌선에서 털고 일어나면 그것마저 잊어버리는, 그런 식의 화두 참선 법으로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요즘 주말참선 주말참선하고, 시민선방 시민선방 많이 이야기들을 하고 범어사에도 신도님 선방이 물론 있습니다마는,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한다든지 선사들도 그런 것을 권하긴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이나 아니면 30분만이라도 하라고 이런 식으로 권하긴 하는데, 본격적으로 화두를 하는 사람도 하루에 10시간씩 또는 많은 경우는 14시간 15시간까지 그렇게 加行精進(가행정진)을 하는 스님들도 한 시간 화두를 드는 동안에, 아무 잡생각 없이 한결같이 화두가 되는 그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한 시간에 10분이 되겠는가? 20분이 되겠는가? 10분 20분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번 이라든지 토요 참선 아니면 어쩌다가 시간 내서 한두 번 선방에 가서 좀 앉아보고 하는 그것 가지고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화두를 들고 그냥 살아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선방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선방 생활도 그야말로 부모를 죽인 원수를 앞에 두고 그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런 순간의 자세가 아니고는, 지금 화두를 의심해서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심이 아니고는 아예 깨달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오늘날 화두 한다는 것은 뭐냐? 그냥 화두를 들면서 생활하는 것이지요.
화두 드는 공부는 그야말로 화두 드는 삶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삶 경을 보는 삶 삶의 한 모습일 뿐이지 그것이 무슨 깨달음을 가져온다든지 하는 것은 곤란 하지 않겠는가? 자기(조실 스님)가 알기로는 도저히 그것으로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요.
24시간 일념이 되어야 되는데 한 시간이면 10분도 채 일념이 안 되는 그런 정신으로 그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화두를 제대로 의심하지 못하니까 씨름 하듯이 억지로 하는 것이지요.
“이 뭣고?” “이 뭣고?” 한다든지 “왜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왜?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라고 계속 심지어 염 화두! 송 화두! 외우기도 하고 소리 내서 얼른 다고 해서 외울 誦(송)자 송 화두 염불하듯이 한다고 해서 염 화두 이런 억지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렇게 진정으로 조사스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의심이 가지 않고 억지로 의심을 지어서 하는 참선 공부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은 그냥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하나의 삶의 형태이지 깨달음을 기대 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왜인 고하니 화두를 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승 속을 합하면 글쎄요, 이천만 우리 불자들에게 스님들은 결제 때 통계가 나옵니다. 물론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만을 계산하고 개인적으로 참선하는 스님들은 그 계산에서 빠지기는 합니다마는,
금년 겨울에 한 2150명인가요? 그렇게 신문에 통계가 나왔었습니다. 그럼 일반인은 얼마가 되겠느냐? 일반인은 그 배의 숫자입니다. 4000명~5000명 정도는 참선을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법어사의 예입니다마는 토요일에 가서 한 두 시간 세 시간 한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설명 듣고 중간에 쉬고 해서 일주일에 두세 시간 참선하는 그런 참선 객 이지요. 그 외에 뭐가 특별한 참선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참선하는 분들이 일반 재가불자는 한 4. 5000명으로 짐작할 수가 있고 출가인 은 2150명 뭐 2000명 좌우가 되겠습니다. 그런 스님들이 우리가 말하기 좋은 깨달았다고 하는 경우는 사실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좋은 삶이지요.
어떤 삶보다도 사찰에서 조촐하게 그리고 아주 청빈하게 화두를 들면서 화두가 제대로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거기에 하나의 모든 승부를 걸고 살아간다고 하는 그 사실이 소중하다면 소중 하고 값지다면 값진 것이지요.
솔직하게 지금 화두를 하고 있는 참선하는 분들의 상태로서는 그렇게 밖에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사실을 잘 아시는 조실 스님께서,화두를 드는 삶이다. 기도를 하는 삶이다. 경을 보는 삶이다. 그런 삶의 형태의 하나로 볼 수밖에 없다고 몇 번 강조하셨습니다.
조사스님 들이 말씀하신 화두를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서,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켰을 때의 앞뒤를 가리지 아니하고 오로지 원수를 갚으려는 그런 분심의 마음상태가 일주일은 지속되어야 된다. 화두를 들 때 그러한 마음이 일주일이 지속되면 틀림없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누가 그러한 마음을 일생에 한번이라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화두를 가지고 그러한 마음을 일생에 몇 번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아니면 몇 시간을 사실은 그러한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솔직하게 표현해 본다면 참 깨달음을 기약하기란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꼭 화두를 들어서만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스님 같은 이들도 평소에 화두라는 것도 모르고 참선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분이었지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는데 자신은 정신적으로 그런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지만, 그것이 무슨 견성인지 마음의 깨달음인지 전혀 어떤 명칭도 붙일 수 없는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깨달음이지요.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꼭 뭐 어떠한 특수한 방법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깨달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 조사스님 들의 깨달음을 우리가 꼭 이야기한다면 조사스님 들도 대개 어떤 말씀에서나 경전에서 제일 많이 깨달았지요. 어떤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이 통계를 낸다 하더라도 많았습니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가 깨달은이는 사실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오늘 조실 스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씨름을 하듯이 하는 억지로 드는 화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 참선을 했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경험은 그렇습니다.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는데요. 한 철만 그러니까 90일만 제대로 억지로라도 씨름을 하듯이 그렇게 계속 無! 무! 무! 하면서 하던지 이 뭣꼬? 이 뭣꼬? 하면서 한다든지 그렇게 집중을 하면은, 妄想(망상)과 惛沈(혼침)과 話頭(화두)가 뒤섞여서 씨름 하듯이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아주 큰 변화가 오고 정신이 강화되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운동기구를 가지고 한 철을 열심히 운동을 하면은 건강 해지고 힘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고 활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도 그런 변화가 쉽게 오는데 정신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정신은 보이지는 않지만 씨름 하듯이 하는 화두를 들어도 정신이 아주 강화되고 정신적으로 변화가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저도 경험한 바고 대개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놀랄 정도로 정신이 강화되고 정신적으로 변화가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또 매 철 있는 것은 아니 예요. 대개 첫 철 참선을 시작해서 첫 철 하루에 한 12시간에서 15시간쯤 집중적으로 하면은 틀림없이 어떤 정신적인 변화가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변화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고 조실 스님의 말씀처럼 요즘 화두 공부 하는 사람들은 화두 하는 삶이지 그 외 다른 것은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난 듯이 큰 분심을 일으켜서 한다면 조사스님 들이 경험했던 그런 깨달음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긴 하다고 정리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범어사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설선법회의 이모저모와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내용을 가지고 좀 부연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어제 아주 재방송을 제가 들어봐도 상당히 서툴고 중간에 음악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기는 했습니다마는 법화경 이야기를 제가 쓴 서문을 좀 말씀 드렸지요. 오늘은 법화경의 전체구성에 대해서 조금 말씀 드릴까 합니다.
법화경의 전체구성
법화경은 28품, 옛날 권수로는 7권이고 28품이라고 하는 그런 28가지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품이라는 것이 장이나 마찬가지예요. 제1장 제2장 제3장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그 장마다 매 품마다 또 품의 이름이 있습니다.
1. 서품(序品)
2. 방편품(方便品)
3. 비유품(譬喩品)
4. 신해품(信解品)
5. 약초유품(藥草喩品)
6. 수기품(授記品)
7. 화성유품(化城喩品)
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
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10. 법사품(法師品)
이런 식으로 1권이 끝나고 그 다음에 또 2권에 나머지 품들이 소개가 됩니다. 그와 같이 28가지의 장, 28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 서품 (序品)
오늘 서품은 그야말로 서론에 해당되는 그런 내용이고 이름마저 서론이라고 할 때 쓰는 서품입니다. 이 법화경이 영축산 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왕사성 기사 굴 산중에서 법회가 이루어진 것인데 우선 법회가 이루어 지려면은 첫째 청중이 있어야 됩니다. 법을 설하는 부처님은 물론 당연히 있어야지요, 그래서 먼저 청중을 소개합니다.
오늘 범어사 법회에서도 참석하신 분들이 총무원장 스님이 오셨고 총무 부장도 오셨고 그 다음에 각 부장들 등등 많은 중요 소임자들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사실은 어떤 의식에서든지 제대로 하려면은 내빈 소개부터 먼저 합니다. 행사를 하기 전에 내빈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경전에 나와있습니다.
어떤 사찰에서 보면은 그러한 것을 몰라서인지 내빈소개를 식이 끝난 뒤에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의미가 반감합니다. 누가누가 와 있더라고 하는 것을 소개를 하고 식을 진행해야 그 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내빈 소개만 듣고도 그 법회의 무게와 범위와 격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는 꼭 내빈소개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법회청중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서 맨 처음에 법회청중부터 쭉 소개를 하면은 그 법회 청중이 누구누구다 하는 것만 봐도, 아 그 경전의 격이 어떻고 어떤 내용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이야기 돼 지겠구나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우리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 어떤 의식을 하든지 간에 참석한 청중들 내빈소개부터 먼저 하는 것이 바른 법이다 하는 것을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법화경 서품에서도 법회청중이 맨 처음 나옵니다. 그 중에 성문대중이라는 것이 있지요. 성문대중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을 늘 따라 다니면서 부처님의 시중을 들고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직접 듣는 역사적인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소리(聲)자 들을 (聞)자 성문(聲聞)! 부처님 법문 소리를 직접 듣는 대중들이다.
1.법회의 청중
(1)성문대중(聲聞大衆)
1 저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왕서성 기사굴 산중에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사성 기사 굴 산중은 인도 그야말로 왕사성 법화경이 설해진 그 무대, 우리 불자들이 인도 성지순례를 갈 때 꼭 들리는 영축산 이라고도 하고 왕사성이라고도 하는 그런 곳인데 거기가 법화경이 설해진 무대다 이렇게 봅니다.
법화경이 그 당시 부처님이 직접 설했던지 아니면은 뒤에 몇 백년 뒤에 또 깨달으신 어떤 또 부처님이 편찬을 했던지 간에 무대는 역시 영축산이고 그것은 왕사성 기사굴 산중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경전 결집의 문제는 기회가 될 때마다 부연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2 큰스님(大比丘)들 일만 이천 명과 함께 하셨는데, 그들은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이들로서 모든 누(漏)가 이미 다 하고 더 이상은 번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얻어서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라 그 마음은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은 큰스님들 1만 이천 명이 계셨는데 그들의 덕을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그 덕을 찬탄 하는 것 중에서 이들은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 그랬어요. 그 당시로서는 큰스님들은 도가 높은 큰스님들이나 수양이 많이 된 출가인 들을 아라한이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큰스님들을 도인들 또는 선지식들 그렇게 표현하고 또 화상들 그리고 아사리라고도 이런 표현도 합니다. 부처님 당시는 대개 아라한 이라는 말을 잘 썼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누(漏)가 이미 다 하고 더 이상은 번뇌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닦은 공덕과 자신이 지은 복이 더 이상 새는 일이 없다 이 말입니다. 새어 나가는 일이 없고 번뇌도 없다 그랬습니다. 참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불교에서는 흔히 복을 짓는다고 하는데 복을 지어 놓고도 이것이 안목이 없으니까 전부 흘러서 새어 나가는 거죠. 자신은 복을 짓느라고 지으면서도 사실은 복을 감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 중생들은 하루빨리 지혜의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 아주 절실하게 느껴지지요. 우리는 자기감량으로는 얼마든지 잘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인데 정작 내용에 있어서 복이 새어 나가버린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사실 우리가 이해를 못하고 살피지 못하고 챙기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실컷 애써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쌓이는 것이 없습니다. 공부도 그렇고 복도 그렇고 유루복(有漏福)이나 무루복(無漏福)도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새어 나가는 일이 없어서 더 이상 번뇌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얻어서” 그랬어요.
정말 우리는 자기에게 이로운 일을 하기위해서 별별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말 자신에게 이익 한 일이 무엇이냐? 이것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 되는 일을 법화경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이러한 것을 한번쯤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 되는 일이 무엇일까? 우리가 참 쉽게 이것이다 라고 답할 수가 없지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들 나름대로 아주 얕게 산다고 하고 이익 되게 산다고 하고 아주 유리하게 산다 하고,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아주 유리하게 살고 현명하게 살고 이익 되게 산다라고 하지만은, 정말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 되는 일일까?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라 그랬어요.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속박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의 속박은 다 없어진 상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속박을 받고있다 하더라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서 속박을 받고 있고요, 또 재산이 있다든지 명예가 있다든지 무엇이든지 있다고 하면 그 있는 것에 얼마나 속박을 많이 받습니까? 어떤 스님이 옛날에 카메라가 귀할 때 어떻게 하든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비싼 돈을 들여서 카메라를 하나 사서 찍어보니까 아주 신기하고 그래서 이 카메라를 좋아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하나 갖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간수를 못해 가지고 그 걸망 속에 넣어놓아도 아무도 그 카메라를 가진 줄도 모르고 카메라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늘 거기에 마음이 가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시로 가서 걸망을 열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놈의 카메라 하나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공연한 도반들 의심하고 밥 먹다가도 그 생각하고 자다가도 그 생각하고 걸망을 지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화장실 가서도 그 생각하고 어디 등산을 가서도 그 생각하고 그래서, 몇 칠을 그렇게 그 카메라 하나 때문에 속박이 되어서 그렇게 끙끙대다가 에이 이것은 도저히 안되겠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저기 강에 가서 물에다 사정없이 집어 던져 버렸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다 그렇게 집어 던질 수는 없지 만은 하나의 실예로서 그것이 있음으로부터 오는 존재의 속박이지요. 이것이 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그런 말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있고도 속박을 받지않는 예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사실 그래야 됩니다. 없고 속박을 안 받는 것은 쉬운데 있으면서 속박이 안돼야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뭐 전체 안 가져도 안 가졌다는데 대해서 마음이 끄달리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것도 물론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은, 갖고서 거기에 끄달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훨씬 수승 하고 훌륭한 일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부처님을 따라 다니는 “큰스님(大比丘)들 일만 이천 명은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다.” 라고 이렇게 덕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자신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고, 더 이상 번뇌가 없고 어리석어서 자기가 지은 복과 자기가 지은 공덕이 새어 나가는 그런 일은 전혀 없고 이런 이들 이지요. 그런 훌륭한 분들이 말하자 면은 법화경을 설하는 법회청중으로서 성문대중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누군가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여기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름은 아야교진여. 마하가섭.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
이 분들이 삼가섭(三迦葉)이라고 부처님 당시 때 불을 섬기는 “화룡외도(火龍外道) ”라고 하지요. 불을 섬기는 이교도였었는데 부처님께 귀의를 했던 분입니다.
사리불. 대목건련. 마하가전연. 아누루다. 겁빈나. 교범바제. 이바다. 필릉가바차. 박구라. 마하구치라. 난타. 손타라난타. 부루나미다라니자.
금강경의 주인공 수보리. 아난. 라후라 등등 세상에 널리 알려진 참으로 큰스님들이었습니다. 또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學]과 공부를 다 마친 이들[無學]이천여 명도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성문 대중들 밑에 또 소개가 됩니다마는 남자 성문들 그 밑에 비구니는 뒤에 또 이야기가 되고 여기까지 그런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고 또 그들의 덕을 표현한 내빈 소개를 할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또 간단한 그 분의 이력을 이야기를 하지요. 공로가 있으면 공로도 이야기 하고 그렇게 해서 누구를 소개하듯이 경전이 그것의 원형입니다.
내빈 소개의 아주 원형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우리가 눈여겨봐 두었다가 우리 불교에서 행사를 할 때는 반드시 이런 절차에 의해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것입니다. 행사가 끝난 뒤에 마지막에 내빈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오늘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주위 분들에게 또는 사찰에 스님들에게 또 스님들도 이런 것을 잘 이해하고 또 모르는 분에게 깨우쳐 드려서 하나하나 바로잡아서 모양새 있게 우리가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은 범어사에 있었던 설선법회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불교공부 하는데 꼭 법화경을 공부를 해서 무엇을 시험을 치기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는 무엇을 가지고 하든지 바르게 좀더 깊이 있게 이해 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법문을 하는 목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뵤법연화경._()()()_
감사드립니다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얻어서 존재의 속박이 다 없어진 상태라 그 마음은 아주 자유로웠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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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