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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국에는 개화문명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동학농민운동과 그리스도교 선교활동과 일본이 강요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근대화작업을 촉진시켰다. 오늘의 현대문학(신문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⑴ 개화기문학:현대문학사에서 최초로 꼽히는 것은 1906년에 발표된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이며, 최초의 신시(또는 新體詩)는 최남선(崔南善)이 1908년에 발표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이다. 이 무렵의 문학을 ‘개화기문학’이라 하며, 좁은 의미에서 이것을 ‘신문학’이라고도 한다. 이인직의 《귀(鬼)의 성(聲)》 《은세계》 《치악산》, 이해조(李海朝)의 《자유종》 《빈상설(上雪)》 《모란병(牡丹屛)》 《춘외춘(春外春)》, 최찬식(崔瓚植)의 《추월색(秋月色)》, 구연학(具然學)의 《설중매(雪中梅)》, 조일제(趙一齊)의 《장한몽(長恨夢)》 등 신소설과, 이 무렵의 창가(唱歌)로서 최남선의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등이 모두 개화기문학에 포함된다. 그 주제는 젊은이들과 여성의 해방, 관습의 개혁, 계급타파 등 근대적 자각을 나타낸 것이 많으며 시와 소설이 대개 과거의 양식을 버리고 본격적인 문학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⑵ 계몽문학:신소설 이후 1910년대 말까지는 이광수(李光洙)의 독무대로서, 그의 역할이 주목된다. 1910년에 발표된 그의 처녀작인 단편 《어린 희생》은 신문학사상 최초의 단편이다. 장편 《무정(無情)》(1917∼1918)은 최초로 성공한 근대 장편소설로서 한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흙》 《재생(再生)》 《개척자》 《마의태자》 등 장편 및 역사소설을 많이 남겼다.
⑶ 예술지상파의 문학:《창조(創造)》 《폐허(廢墟)》 《백조(白潮)》 등의 동인지가 등장하여 이광수의 문학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문학이 민족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겠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함으로써, 문학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박하고 나선 대표적인 작가는 김동인(金東仁)이었다. 주요한(朱耀翰)·염상섭(廉想涉)·전영택(田榮澤)·홍사용(洪思容)·박종화(朴鍾和)·이상화(李相和)·현진건(玄鎭健)·나도향(羅稻香) 등이 비록 계보는 달랐지만 문학의 경향은 모두 같았다. 이들의 문학은 그 후 ‘예술지상파(藝術至上派)의 문학’이라 불렸으며, 1919년에 처음으로 순문예지 《창조》가 나온 데 이어 여러 동인지들이 나왔으나 1923년경부터 이들은 ‘프로문학’의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⑷ 프로문학:프로문학이란 프롤레타리아의 문학을 약칭한 것으로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문학을 표방했으며, ‘신경향파(新傾向派)의 문학’으로도 불렸다. 이것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문예사조에 입각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문학이며, 백조파(白潮派) 김기진(金基鎭)이 1923년 《개벽(開闢)》지에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를 연재하여 프로문학시대의 막을 열었다. 여기에 박영희(朴英熙)가 합세, 프로문학운동을 적극화시키면서 1925년에는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조직되고 최서해(崔曙海)·이기영(李箕永)·조명희(趙明熙)·임화(林和) 등의 활동이 1920년대 말까지 왕성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20년대 후반에 이르러 프로문학은 잃어버린 예술성 때문에 김기진과 박영희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고,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카프 소속의 70∼80명이 한꺼번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5년에는 해산계를 내고 와해됨으로써 그 후 우리 문학은 ‘순수문학’시대로 접어들었다.
⑸ 순수문학:순수문학의 주축이 된 문인은 구인회(九人會)에 속한 이태준(李泰俊)·이효석(李孝石)·유치진(柳致眞)·정지용(鄭芝溶)·김기림(金起林) 등인데, 이들은 모두 이념적으로 사회주의 문학에 반대했고 문학이 사회운동의 수단으로 예속되는 것도 반대했다. 그리하여 사상성·목적성·사회성이 배제된 순수문학 이론이 평론가 김환태(金煥泰)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돈(豚)》, 김유정(金裕貞)의 《봄봄》 《동백꽃》 《금따는 콩밭》, 이상(李箱)의 《날개》 《봉별기(逢別記)》, 유진오(兪鎭午)의 《김강사와 T교수》, 이무영(李無影)의 《흙의 노예》, 최정희(崔貞熙)의 《인맥(人脈)》 《지맥(地脈)》, 김동리(金東里)의 《무녀도(巫女圖)》 《바위》 등이 모두 이 시대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김기림에 의한 모더니즘 운동과 함께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烏瞰圖)》와 김광균(金光均)의 《와사등(瓦斯燈)》, 박용철(朴龍喆)의 《떠나가는 배》, 정지용의 《백록담》, 신석정(辛夕汀)의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하더구나》 등 순수파의 수작들이 이 시대에 나왔다. 한편 이같은 문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서정성(抒情性)과 예술성을 살린 작품 김영랑(金永郞)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李陸史)의 《광야》 《청포도》 등은 민족의식이 잘 표현되었고, 1920년대부터 민요적 전통을 계승해 온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 《산유화》 등 많은 시는, 서정적 가락으로 민족의 애환을 읊어 공감의 폭을 넓혀가며 일제강점기의 시단을 장식했다. 또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은 기교와 주제의 깊이, 특히 항일정신과 신앙심 및 서정적 감각을 모두 조화시킨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⑹ 암흑기:순수문학은 그 후 암흑기를 맞이한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사건’으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으로 옥사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이육사(李陸史)는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사했고,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 등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1939년 친일·반민족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했다. 1941년 당시의 대표적 문예지 《문장(文章)》을 폐간시키고, 그 해 《인문평론(人文評論)》을 《국민문학》으로 바꾸어 한국어 반 일본어 반의 체제를 일본어 일색으로 바꾸게 하였다. 또 1940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민족지를 폐간시켜 한국어에 의한 문학활동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유진오·김동인 등 소설가와 주요한·김소운(金素雲)·노천명(盧天命)·김동환(金東煥)·서정주(徐廷柱) 등 시인과 최재서(崔載瑞)·박영희·김기진·김문집(金文輯)·백철(白鐵) 등 평론가들이 더러는 심하게, 더러는 소극적으로 반민족적 친일문학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0년대 전반은 암흑기로 기록된다.
⑺ 해방문학:1945년 8·15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학은 ‘해방문학’의 시기를 맞는다. 모국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문학시대, 표현의 자유를 얻은 문학시대, 민족적 자각과 함께 민족적 유산에 대한 모든 발견과 연구가 가능해진 시대로서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38선에 의한 국토분단으로 문단도 남북으로 갈라졌으며, 서울에서는 좌우익의 문학단체가 양립하여 1948년의 정부수립 전까지 시인 임화를 비롯하여 이태준·박태원(朴泰遠)·김동석(金東錫)·이원조(李源朝) 등이 월북했다. 그리고 해방문단은 그같은 이념의 갈등이 문학논쟁으로 나타나서 김동리·조연현(趙演鉉) 등 순수문학파와 김동석 등 프로문학파의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그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좌익문인은 사라지고 순수문학이 한국문학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났다.
⑻ 전쟁문학:6·25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문학은 본격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소재로 한 문학을 가졌고 현실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다. 이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문학은 주로 ‘전쟁문학’의 테두리에 포함되며, 1953년 휴전 후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문학이 전쟁 전의 문학과 다른 것은 해방문단에서의 좌우익 문제가 주로 이념적 논쟁 형식으로만 나타난 데 비하여, 전쟁 당시와 그 후의 문학은 실제로 피를 흘리는 비참한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장용학(張龍鶴)의 《요한시집》 《상립신화(喪笠新話)》 《현대의 야(野)》에서는 특히 6·25전쟁의 참혹한 양상으로서의 좌우익의 유혈과 이념의 극복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황순원(黃順元)의 《학》이나 이범선(李範宣)의 《학마을 사람들》, 오유권(吳有權)의 《방아골 혁명》, 강용준(姜龍俊)의 《철조망》, 하근찬(河瑾燦)의 《수난이대(受難二代)》 등은 모두 동족상잔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강신재(姜信哉)의 《임진강의 민들레》, 박경리(朴景利)의 《시장과 전장》, 정한숙(鄭漢淑)의 《끊어진 다리》 등 장편도 모두 문제작이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4·19혁명으로 이승만정부가 무너지고 젊은이들의 현실참여 의식이 커졌다.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평론가들 중 김우종(金宇鍾)·김병걸(金炳傑) 등이 선두가 된 참여문학운동은 그 후 범문단적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백낙청(白樂晴)·염무웅(廉武雄)·구중서(具仲書) 등에 의하여 그 운동이 확대되고 시인 김수영(金洙暎)에서 김규동(金奎東)·신경림(申庚林) 등으로 이어지며 1970년대까지 각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1960~1970년대의 문학의 주류는 참여문학이면서 계속 순수문학과의 논쟁이 거듭된 셈이다.
⑼ 1970년대 이후의 문학:1960년대의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된 참여문학운동은 1970년대에 이르러 범문단적 경향으로 확산되어갔다. 특히 1970년대의 유신체제와 도시산업의 발달 및 남북공동성명의 세 가지 특성은 참여문학에서 두드러진 주제가 되거나 또는 정치적 사건으로 나타났다. 황석영(黃晳暎)의 《객지》, 이문구(李文求)의 《장한몽》, 윤흥길(尹興吉)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정래(趙廷來)의 《청산댁(靑山宅)》, 김정한(金廷漢)의 《인간단지》 등이 모두 도시산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에 시인 신동엽(申東曄)의 《껍데기는 가라》, 최인훈(崔仁勳)의 《광장》 등으로 나타난 통일지향적 분단문학은 1970년대에 윤흥길의 《장마》를 비롯해서 그 후 박완서(朴婉緖)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문순태(文淳太)의 《잉어의 눈》 등과 함께 분단 이후 한국 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과거의 반공논리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따르면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등장하여 분단문학에 새로운 분수령을 형성했다. 한편 1970년대 이후에는 부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른바 민중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으로써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대작이 나오고, 김지하(金芝河)·신경림(申庚林)·정호승(鄭浩承) 등의 시작 활동이 많아지면서 민중문학의 유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운동 등은 마침내 정치적 권력과 문인의 갈등으로 이어져서 김지하·이호철(李浩哲)·임헌영(任軒永)·김우종·정을병(鄭乙炳)·장백일(張伯逸)·고은(高銀)·백낙청·한수산(韓水山)·정규웅(鄭奎雄)·김병걸 등 다수 문인의 체포·고문·투옥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⑽ 기타:한국문학에서 ‘발표지’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개화기 문인들은 스스로의 자금으로 책을 발간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는데, 《창조》 《폐허》 《백조》 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 후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 《영대(靈臺)》 《금성(金星)》 《장미촌(薔薇村)》 《조선문단》 《시문학》 《문예공론》 《해외문학》 등이 식민지체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 문학을 키운 공적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문예지들은 거의 문인들 자신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8·15광복 후에는 《문예》 다음으로 1950년대에 《현대문학》이 등장하여 현재까지 한 번도 결간 없이 발간되는 가운데 수많은 신인을 배출시켰는가 하면, 《자유문학》 《사상계》 《문학예술》 등 문예지와 종합지의 역할도 컸다. 그 후 현재까지 《문학사상》 《한국문학》 《시문학》 《현대시학》 등 월간문예지도 계속 발간되면서 한국문학 발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등록 문인은 약 2,000명에 이르며, 등록되지 않은 문인까지 모두 합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2) 미술 1945년 8·15일 광복은 다른 모든 분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여는 기점이었다. 일본의 압제와 왜곡에 의하여 단절된 한국 전통미술의 창조적 계승과 세계미술에 대한 참가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군이 분할 점령한 3년간은 좌·우 세력의 사상적 대립 속에 놓여짐으로써 미술계도 1945년 10월의 ‘해방기념전’ 이후 좌·우익으로 갈라져 치열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시종하였다. 정부수립 전인 1947년 김인승(金仁承), 박영선(朴泳善), 이봉상(李鳳商), 장발(張勃) 등 온건한 사실파(寫實派)의 미술문화협회(美術文化協會)를 비롯하여 새로운 조형미술을 지향하는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미술단체 등 여러 조직이 발족하였으나, 194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가 창설되어 사실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김환기(金煥基)·남관(南寬)·유영국(劉永國)·김영주(金永周) 등의 추상파 화가들은 별도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1950년의 6·25전쟁으로 한때 미술계도 혼란에 빠졌지만,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현대미술과의 접촉이 활발해져 추상미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었으며, 또한 북한의 많은 미술가들이 남하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각 유파의 단체전(團體展)·그룹전·개인전이 활발해지는가 하면 프랑스·미국 등지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풍조처럼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미술교육도 궤도에 올라 더욱 활기를 띠고, 젊은 미술가들은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미술에 저항하면서 성장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그룹전으로는 ‘모던아트전’ ‘창작미술전’ ‘신조형파전(新造形派展)’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은 하나의 종합적인 현대미술 추진체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자 추상미술이 화단적(畵壇的)으로도 단연 큰 비중을 차지하여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하여 ‘문화자유초대전(文化自由招待展)’ ‘신인예술상미술전(新人藝術賞美術展)’ ‘액추얼전(展)’ 등이 성행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 돌아온 화가에게서는 초현실주의 경향이 두드러졌고, 미국에서 돌아온 화가에게서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양적 환상이나 신화의 세계 또는 한국의 고미술(古美術)과 관련된 작품세계가 주조(主調)를 이루었다. 또한 국전이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1960년대 말부터는 사실(寫實)과 추상(抽象)의 두 경향으로 분리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이 무렵에 그룹 아트가 새로이 이입(移入), 유행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 화단의 서양화 부문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통하여 주목되는 작가로는 유영국·김영주·권옥연(權玉淵)·변종하(卞鍾夏)·박석호(朴錫浩)·전성우(全晟雨)·박서보(朴栖甫)·김서봉(金瑞鳳)·윤명로(尹明老)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상범(李象範)·장우성(張遇聖)·노수현(盧壽鉉)·배염(裵廉) 등 전통적인 동양화를 지향한 작가와는 달리 이응로(李應魯)·김기창(金基昶)·서세옥(徐世鈺)·박노수(朴魯壽)·천경자(千鏡子) 등은 새로운 재료나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동양화에 현대적인 조형(造形)을 받아들여 구미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조각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김경승(金景承)·김종영(金鍾暎)·윤효중(尹孝重)·김세중(金世中)·김영중(金泳仲) 등의 사실파가 중심이 되어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의 동상 제작과 각종 모뉴먼트 및 그 밖의 작품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1950년대 후반에는 추상적 조형의 추구가 성행하였으며,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종래에 보지 못하던 철재(鐵材)에 의한 추상조각이 제작되는가 하면 최기원(崔起源)·전상범(田相範)·최종태(崔鍾泰) 등의 조각가가 등장하였다. 건축은 6·25전쟁 후의 부흥기를 거쳐 1960년대부터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김중업(金重業)을 비롯하여 김수근(金壽根) 등 개성이 뚜렷한 건축가에 의하여 현대건축이 이루어졌다. 한편, 각 분야에서 내셔널리즘 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민속공예전' ·'이조백자전'·'조선문방구'·'목공예전'·'조선민화전(朝鮮民畵展)' 등을 통하여 전통미(傳統美)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그 영향 아래서 개성 있는 젊은 추상미술가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3) 영화
한국영화의 최초의 작품은 1919년 김도산(金陶山)이 연극의 한 부분으로서 만든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극이 단성사에서 상연되어 장안에 화제를 뿌렸지만, 역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파연극(新派演劇) 도중에 스크린을 내리고 연극장면의 일부를 그 속에 옮겨놓은 방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최초의 극영화 작품은 1923년에 윤백남(尹白南)이 만든 《월하(月下)의 맹세》이다.
그 후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스토리 위주의 영화가 등장하였는데, 이경손(李慶孫)의 《장한몽(長恨夢)》, 왕필렬(王必烈)의 《해(海)의 곡(曲)》 등이 곧 그것이다. 초창기의 영화는 제목이 말하듯이 대중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야담이나 통속소설을 필름에 담는 정도의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민족의 울분과 저항정신이 담긴 영화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나운규(羅雲奎)였다. 그는 1900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1936년에 요절한 불운의 예술인이었지만, 그가 처녀감독하고 주연도 겸한 《아리랑》(1926)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는 《아리랑》의 주인공을 광인(狂人)으로 설정, 교묘히 일제의 검열을 피하였다. 주인공은 일제의 앞잡이인 악덕지주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일경을 구타하는 등 광인의 행위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또 《풍운아(風雲兒)》 《아리랑》 1·2편 외에 최초의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三龍)》 등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무렵의 영화는 무성영화(無聲映畵)로 꼭 필요하다고 느낀 대사(臺詞)는 화면에 자막(字幕)으로 넣기도 하였지만, 변사(辯士)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영화가 무성영화시대에서 토키시대로 전환한 것은 1935년의 《춘향전》부터이다. 나운규 이후 두각을 나타낸 감독은 이규환(李圭煥)과 최인규(崔寅奎)였다. 이규환 역시 민족정신이 투철한 영화인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나그네》(1937) 등을 통해 민족의 비애를 표현했고, 최인규는 《국경(國境)》 《수업료》 등을 발표하였다.
1935∼1939년에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사 등 20여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영화제작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으나, 그 제작 편수는 미미하여 1935년에 17편, 1936년에 5편, 1937년에는 4편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부진은 영화사의 영세성과 일제의 검열 강화가 그 원인이었다. 일제는 1940년에 조선영화법을 제정·공포하고, 1942년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시켰는데, 이것은 영화제작을 극도로 억제하고 그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일련의 조치였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그 동안 뿔뿔이 흩어진 영화인들이 속속 모여들어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인수, 조선영화건설본부(위원장 尹白南)를 설립하고 미군정하의 뉴스영화제작을 맡았다. 이 무렵 좌익계열은 따로 조선영화동맹을 조직하였다. 1946년 고려영화사에서 《자유만세》를 제작, 조국광복의 감격을 마음껏 구가하면서 이구영(李龜永)의 《안중근사기(安重根史記)》, 윤봉춘(尹逢春)의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이규환의 《민족의 절규》, 김영순(金永淳)의 《불멸의 밀사》, 최인규의 《독립전야(獨立前夜)》 등이 잇달아 나왔다.
6·25전쟁의 와중에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 《낙동강》 《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다. 휴전 후인 1955년 15편에 불과한 제작편수도 1959년에는 108편으로 증가했는가 하면 전후세대의 새 감독들이 등장, 영화가 본격적인 예술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김기영(金綺泳)의 《십대의 반항》,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誤發彈)》, 신상옥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강대진(姜大振)의 《마부(馬夫)》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인들은 시야를 해외로 돌리기 시작, 1955년 제2회 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로 처음 참가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많은 한국영화가 샌프란시스코·베를린·베니스·칸 등 해외 영화제에 속속 출품되었다.
이리하여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누린 셈이었다. 1960년대의 문제작으로는 김수용(金洙容)의 《갯마을》, 박상호(朴商昊)의 《비무장지대》, 이만희(李晩熙)의 《만추(晩秋)》, 정진우(鄭鎭宇)의 《초우(草雨)》, 이성구(李星究)의 《장군의 수염》 그리고 최하원(崔夏園)의 《독짓는 늙은이》 등을 꼽을 수 있다. TV의 대중화에 따른 영화계의 타격은 심각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외 영화제에서 변변한 수상 기록도 거의 없는 부진의 늪을 헤매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李長鎬), 《영자의 전성시대》의 김호선(金鎬善), 《바보들의 행진》의 하길종(河吉鍾) 등 전후 감독들의 활약은 다행한 일이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영화는 1970년대의 침체기를 벗고, 유수한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등 그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국영화의 국제무대 진출에 앞장선 감독들로 《피막(避幕)》 《여인잔혹사(女人殘酷史)》 《물레야 물레야》의 이두용(李斗鏞), 《만다라》 《길소뜸》의 임권택(林權澤), 《바보선언》의 이장호, 《땡볕》의 하명중(河明中), 《깊고 푸른 밤》의 배창호(裵昶浩)를 들 수 있다.
이들이 기울인 노력은 마침내 1980년대를 빛내는 몇 개의 수상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강수연(姜受延)이 1987년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9회 낭트3대륙영화제에서 《씨받이》(임권택 감독)에서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신혜수(申惠琇)가 1988년 제12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아다다》(임권택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1987년 제2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강수연이 1989년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에서의 연기로 최우수여우상을, 배용균(裵鏞均)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곧바로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심혜진이 1990년 제12회 낭트3대륙영화제에서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장길수(張吉秀) 감독의 《은마(銀馬)는 오지 않는다》가 1991년 제15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이혜숙)·각본상(장길수)을, 정지영(鄭智泳) 감독의 《하얀전쟁》이 1992년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1992년 제16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제작자상을, 이덕화(李德華)가 1993년 제18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살으리랏다》(윤삼육 감독)에서의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서편제(西便制)》가 1993년 제1회 상하이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임권택)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받았고, 장선우(張善宇)감독의 《화엄경(華嚴經)》이 1994년 제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상을, 정지영감독의 《허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1994년 제42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1994년 제16회 낭트 3대륙영화제에서는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이 여우주연상(최명길)을 수상하였다.
1990년대는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로 접어드는 길목이기도 해서 다양한 영화제작이 시도되었다. 대작영화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태백산맥(太白山脈)》, 김호선의 《애니깽》, 영화의 형식미를 살린 이명세(李明世) 감독의 《첫사랑》, 어른을 위한 동화인 박철수(朴哲洙) 감독의 《오세암(五歲巖)》, 액션코미디물인 강우석(姜祐碩) 감독의 《투캅스》 등이 등장, 백가쟁명(白家爭鳴) 시대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또 하나의 변화된 상황은 삼성(三星)·대우(大宇)·선경(鮮京) 같은 대기업들이 영상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또한 서울종합촬영소의 준공으로 한국영화의 국제화·미래화가 앞당겨졌다. 한편 1998년 정부는 일본영화 및 일본어판 출판만화와 만화잡지를 즉시 개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영화의 경우는 반세기 동안 닫혀져 있던 문을 개방하는 데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한일공동제작 영화, 일본 배우가 출연하는 한국영화, 4대국제영화제수상작품들을 우선으로 들여올 수 있도록 했다.
영화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사건도 있었다. 스크린쿼터제를 사수하기 위해 한국영화인협회등 각종 연화단체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 한미투자협정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막으려고 현재도 노력 중이다. 또한 2001년 현재 부산국제영화제가 6회, 부천팬터스틱영화제가 5회 행사를 성황리에 열었다. 이는 여러 국가의 좋은 영화를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어 영화인과 일반인 모두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는 산업화과정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강제규가 연출한 《쉬리》독),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 곽경택의 《친구》 등이 연속으로 흥행기록을 경신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1년 8월 김호정은 제54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나비》(문승욱 감독)의 연기로 ‘청동표범상’을 수상하였다.
4) 무용 한국무용을 대별하면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무용에는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 있고, 창작무용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신무용과 1980년대에 발전한 창작무용이 있다. 이 모든 무용은 시대에 따라 서로 관련을 맺고 변화·발전해왔다. 거기에는 흥과 멋과 우아함이라는 우리의 미적 정신이 담겨 있으며, 가(歌)·무(舞)·시(詩)가 일체를 이루는 종합적 예술창조로 오늘날까지 거듭 발전해오고 있다. 상고시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비롯한 한국의 무용은 당초 음악과 무용이 미분화 상태에 있어서, 이를 아울러 ‘악(樂)’이라 불렀다. 고구려 무용의 단편(斷片)을 무용총(舞踊塚) 벽화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중국측의 사적(史籍)에도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광수무(廣袖舞)·지서무(芝栖舞) 등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백제무용에 관한 국내의 기록과 자료는 아직 전무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백제인 미마지가 오(吳)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악지(樂志)에도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백제의 무용의상 등에 관해 기록한 대목이 있으나, 그 춤의 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전혀 헤아릴 길이 없다. 신라의 무용은 무악(舞樂)을 장려한 진흥왕(眞興王)시대에 융성기를 맞았다. 552년(진흥왕 13)에는 가야국(伽倻國)의 우륵(于勒)이 신라에 돌아와서 국원(國原:충주)에서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에게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각각 가르쳤다. 또한 신라 때 당(唐)의 악제(樂制)를 채용한 일도 무용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특기할 만한 무용으로는 검무(劍舞)를 비롯하여 무애무(無3舞)·도솔가무(兜率歌舞)·처용무(處容舞)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신라 고유의 무용 외에도 서역과 중국에서 전래된 가면극(假面劇)인 오기(五伎)가 있는데, 그 모습을 최치원(催致遠)이 한시로 묘사한 향악잡영5수(鄕樂雜詠五首)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고려시대로 접어들자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가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되고, 이와 함께 가무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가무의 종류도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향악)으로 나누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073년(문종 27) 2월에 여자 무용수 진경(眞卿) 등 13인이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추었으며, 또 그 후에 포구락(抛毬樂)과 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을 추었는데, 이것은 모두 중국에서 전승된 당악정재(唐樂呈才)에 속하는 가무이다. 고려시대 무용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나타난 무용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일무(佾舞)에는 무무(武舞)와 문무(文舞)가 있으며, 정재(呈才)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로 구분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의 예능을 계승함과 동시에 부흥을 시도하였다. 궁중의 여러 행사에는 가무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무악을 관장하는 곡악서(曲樂署)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무악은 세종·세조에 의해 정리 발전되고 성종대에 집대성되었으며, 익종은 김창하(金昌河)와 수십 종의 정재를 새로 창안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춘앵전(春鶯傳)이 대표적 작품이다.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의 일무의 동작과 곡을 수록한 《시용무보(時用舞譜)》가 약 200년 전에 편찬되었으며, 홀기(笏記) 등에 의해 조선시대 후기의 무용 내용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진연의궤(進宴儀軌)》 《정재홀기(呈才笏記)》 등에 궁중무용 51종과 남무(男舞)·무당무·무동춤·사자무·살풀이·승무·소고무·장고무·한량무·강강술래 등의 민속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향악무에는 꽃을 어르고 꺾으며 추는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심향춘(沈香春), 풍년을 기원하는 경풍도(慶豊圖), 태조의 건국을 축하하는 몽금척(夢金尺), 왕조창업의 공덕을 칭송하는 곡에 맞추어 추는 문덕곡(文德曲) 외에도 첩승무(疊勝舞)·초무(初舞)·박접무(撲蝶舞)·무산향(舞山香)·아박무(牙拍舞) 등이 있으며, 당악무에는 수명명(受明命)·성택(聖澤)·하성명(賀聖明)·하황은(荷皇恩)·수보록(受寶) 등이 있다.
민속무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농악과 강강술래가 있으며, 승무·살풀이·한량무·남무·탈춤 등이 있다. 강강술래는 전라도 지방에서 밝은 달밤을 가려 부녀자들이 즐기는 향토적인 군무(群舞)이다. 농악은 상고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농사의 능률을 올리고 유사시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자무는 조선 고종 때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으로 추었는데 이는 탈춤에서 유래한 것이다. 탈춤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춤으로 가면(탈)을 쓰고 춤을 추며 대사가 있는 극형식을 띠고 있다. 탈춤의 명칭은 지방별로 다른데, 황해도 지방은 강령탈춤·봉산탈춤이고, 경기도 지방은 산디놀이, 경남 지방은 야유(野遊) 또는 오광대(五廣大)로 각각 불러왔다. 남무는 남자와 여자로 분장한 두 사람이 서로 교태를 부리는 민속무인데 주로 기녀 사이에서 성행한 것이다. 한국의 무용은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의식으로, 또는 궁중이나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다가 1905년 국립극장격인 원각사(圓覺社)가 개장함으로써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함께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이 되면서 무용에서는 또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전통무용은 극장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공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무용에 대한 전승이나 발전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이 외에 1919년에 다양한 서구의 춤이 도입되어 무대상연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창안된 한국무용이 서서히 일어났다. 1929년에는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사사한 조택원(趙澤元)·최승희(崔承喜)가 현대무용을 한국화한 ‘무용의 현대화’를 표방하면서 신무용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 민속무용에 가장 뛰어난 예인으로 한성준(韓成俊)을 들 수 있다. 한성준은 여러 지방의 민속무용을 정리하고 승무·태평무·학무 등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의 춤들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책정되어 한영숙이 계승 발전시켰다. 1945년 8·15광복 이후 한국은 남·북으로 양단되어 무용계에도 무용의 해석방법·표현법 등을 놓고 커다란 대립이 나타났다.
1950년대 무용은 신무용의 대표적 인물인 최승희의 제자 김백봉(金白峰)의 제1회 무용발표회에서 공연한 부채춤·화관무 등 작품의 경향은 여전히 신무용의 흐름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에는 대학에 무용학과가 생겨났고, 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1962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제1회 무용공연을 가졌다. 그 후 1973년 현 국립극장 건물이 준공되었고, 이때부터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되어 송범(宋范)·임성남(林聖男)을 단장으로 하여 많은 공연을 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무용가로는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포함하여 김천흥(金千興)·김진걸(金振傑)·최현(崔賢)·김선영(金善泳)·김문숙(金文淑)·김백봉·최희선(崔喜仙)·한순옥(韓筍玉)·한영숙(韓英淑)·송수남(宋壽男) 등이 있다. 이들은 무용수뿐만 아니라 안무가로서 1950년대 이후 한국 무용계를 이끌어온 중추적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11월에는 서울시립무용단이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1961년에 창립된 한국무용협회는 한국 무용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각 대학에서 배출된 많은 무용수들의 활동을 예견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해 주었다. 1979년에는 대학민국무용제가 창설되어 창작무용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대한민국무용제는 현재 서울무용제로 개칭하여 14회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1970년대의 변화는 1980년대에 더 한층 활기를 띠어 ‘무용의 르네상스시대’라 부를 정도로 공연의 양적 증대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20년대 이래 계속되어 온 신무용 위주의 창작무용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창작 예술성을 펼치게 되었다. 연간 100여 회 이상의 공연은 공연공간에 대한 의식변화를 가져와, 대극장 중심의 1970년대의 많은 무용수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반면, 1980년대에는 소극장·거리·공원 등 다양한 곳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 개막과 폐막식을 화려하게 수놓은 한국무용은 우리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와 같은 의식은 또 다른 전통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문제를 제시했다.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무용수가 김매자(金梅子)·배정혜(裵丁慧)·문일지(文一枝)·김현자·정재만·국수호(鞠守鎬) 등이며,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동문단체인 창무회·설무리·한무회 등이 창작무용 활동에 많은 참여를 하였다. 1980년대 한국무용의 발전은 다양한 양식적 측면에도 영향을 주어 내용면에서도 신무용의 미학적 한계인 미나 선의 미적 범주를 넘어선 많은 사회적인 소재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용은 특히 이애주·채희완·강혜숙 등 민족춤으로 나뉘어 서민정신과 노동, 신바람 등 한국적 특성을 바탕으로 삶의 현실을 추구하는 춤을 추었다. 1980년대의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교육개방과 함께 무용에서도 우리의 것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 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전통무용의 올바른 계승을 위해 단순한 춤동작의 고답적 답습이 아닌, 살아 있는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급하다. 또한 국적 없는 창작무용의 한계도 한시 바삐 정리되어야 할 숙제이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무용예술은 다양한 측면에서 변화·발전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5) 연극
연극의 시초는 의식(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가사의한 자연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에게 감사하는 고대의 의식이 곧 연극 그 자체였다. 한국 최초의 연극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나타난다. 3세기경 이미 한반도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부족(部族)들이 한데 모여 소박한 놀이와 의식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경천(敬天)·농사 또는 부족의 단결을 위해 거행되었음은 물론이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에서는 검무(劍舞)가 성행하고, 이미 탈[假面]을 쓰고 하는 춤이 민간에서도 유행했는데, 오늘날 알려져 있는 처용(處容)의 노래와 춤도 이 때의 산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가 국가적인 행사로 열렸는데, 이같은 공의(公儀)가 민중의 놀이로 세속화되면서 광대(廣大)와 재인(才人)이 나타났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판소리는 이들 광대와 재인의 산물이다. 판소리는 본래 음악으로만 여겨져 왔으나, 연극의 모든 요소를 지닌 특이한 성격의 악극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또, 조선시대의 놀이 중에서 현재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으로 탈춤[假面劇]이 있다. 서구의 연극처럼 대본(臺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대사와 춤과 익살, 그리고 가면을 통한 성격표현 등 특이한 형태로 이어지는 이 가면극은 현대연극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대적인 의미의 첫 옥내극장(屋內劇場)은 1902년 12월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였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면서, 서구 연극을 의식한 근대적인 연극의 공연은 1908년에 개관된 원각사(圓覺社)에서 시작되었다.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극화하여 그 무대에 올렸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신연극이라는 견해가 통념이지만 내용으로 보아 최초의 신극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다음에 나타난 것이 1910년대 초기,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에 의해 상연된 《불효천벌(不孝天罰)》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등 일련의 신파극(新派劇)이었다.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대단해서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시 새 연극을 소개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임성구를 비롯하여 윤백남(尹白南)·조일제(趙一齊)·이기세(李基世) 등이며, 또 1920년대 초에 근대극을 담당할 후진 양성에 힘쓴 현철(玄喆)이 있다. 이 무렵 도쿄[東京] 유학생들은 극예술협회를 발족시키고 신파극에서 탈피한 본격적인 연극을 지향하였으며, 1923년 박승희(朴勝喜)를 중심으로 토월회(土月會)가 창립되어 신극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활약한 대표적 극작가로는 김우진(金祐鎭)·김운정(金雲汀)·박승희·조명희(趙明熙) 등이 있다. 주로 일본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1931년 7월 발족한 극예술연구회는 진정한 신극운동을 표방, 활발한 소극장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모임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진섭(金晉燮)·유치진·이헌구(李軒求)·서항석(徐恒錫)·이하윤(異河潤)·정인섭(鄭寅燮)·함대훈(咸大勳)·홍해성(洪海星) 등이다. 특히 유치진은 그 후 1960년대까지 꾸준히 창작과 연출을 계속하면서 《토막(土幕)》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마의태자》 등 많은 희곡을 발표하였다. 그 동안 이들 본격적인 연극지향파와는 달리 오락성과 상업주의에 몰두한 극단도 많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주로 동양극장(東洋劇場)과 단성사(團成社)를 무대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윽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마지막 발악은 연극계에도 예외없이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작품의 철저한 사전검열, 전쟁찬양 내용의 강요, 극장 내의 가차없는 임검 등 일제의 탄압은 연극계를 질식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역사상 처음 누리는 자유로운 활동기를 맞아 한국 연극계도 소생하여 우후죽순처럼 많은 극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가 그랬듯이 연극계도 좌우익으로 양분되는 시련을 겪은 끝에,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0월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신협(新協)과 극협(劇協)이 전속되어 《원술랑(元述郞)》 《뇌우(雷雨)》 등을 공연하였다. 6·25전쟁의 참극을 겪고 재기한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를 흔히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 시대라고도 부른다. 대학생이 중심이 된 제작극회(製作劇會)라든지, 실험극장·산하(山河)·민중극장·자유극장·광장(廣場)·가교(架橋) 등 많은 극단이 탄생하고 우수한 극작가·연출자와 연기자를 배출하였다.
특이한 민속적 희극을 써 온 오영진(吳泳鎭)을 비롯, 차범석(車凡錫), 임희재(任熙宰), 이용찬(李容燦), 하유상(河有祥), 이근삼(李根三) 등 극작가와 이진순(李眞淳), 오사량(吳史良), 허규(許圭), 김정옥(金正鈺), 이승규(李昇珪) 등 연출가는 이 소극장운동기의 소산이다. 1970년 중반부터 나타난 한국 고유의 전통적인 민속가면극 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 들어 한국의 연극은 마당극·창극·인형극·청소년극·총체극·뮤지컬 등으로 다양화하였고 기획제작시스템이 등장하였다. 또 소극장이 증가하는 한편 극단이 난립하고 실험극운동이 활발해졌다. 바야흐로 한국의 연극은 서구의 연극을 수용하는 한편, 한국 고유의 연극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6) 스포츠
한국이 서구식 스포츠에 처음으로 접한 것은 조선 말기인 1897년(광무 1) 영국 함대가 인천에 입항하여 수병들이 축구경기를 시범으로 보여준 데서 비롯된다. 그 후 한국 조정의 궁내대참리(宮內對參理)와 어전통역(御前通譯) 등의 벼슬아치 중 외국어학교 출신들이 ‘대한축구클럽’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축구팀의 효시이다. 이어 서울의 젊은이들 사이에 축구가 유행하여 많은 팀이 생겨나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야구는 1903년(광무 7) 서울 종로에 YMCA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G.L.질렛이 이듬해 봄 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그리고 1905년에는 관립 한성고등학교(지금의 경기고교)의 다카하시[高橋]라는 일본인 교사가 야구팀을 만듦으로써 서울에 두 팀이 생겼다. 그 해에 두 팀이 훈련원(訓鍊院)에서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를 펼쳤는데, 승리는 고등학교 팀에게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연식정구(軟式庭球) 역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정확한 도입연도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종 황제가 땀을 흘리면서 하는 외국인들의 연식정구 시합을 보고 “그렇게 힘드는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고 하문(下問)하여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기록에는 황명원(黃明源)·연학년(延鶴年)·이세정(李世禎) 등이 금강(金剛)클럽을 조직하여 1910년 이래 오랫동안 전국 연식정구계를 주름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농구는 11년에 YMCA 뒷마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편을 갈라 게임을 하고 연습도 하는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과 그 뒷면의 설명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로 보아 농구도 YMCA 창립과 더불어 한국에 도입되었음이 확실하다. 1920년에는 YMCA 팀이 일본에 원정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농구의 해외경기의 효시이다. 육상경기는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라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도입되어 경기대회는 운동회 또는 학교 대운동회 때 달리기 등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본격적 육상경기대회는 1908년(광희 2년) 훈련원에서 열린 연합운동회였는데, 그 입장식에는 영친왕이 대청(臺廳)에서 관람하였다고 되어 있다.
초창기의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 4월에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창립되면서부터이다. 이 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가 스포츠를 보급시켜 젊은이의 체력과 기력을 양성할 것을 역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지(有志)들의 발기로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기념사업으로 7월에 배재고보 교정에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와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축구대회 중학단부에는 경신·휘문·배재·중앙·보성의 5개 고등보통학교 팀이 출전하여 배재고보가 우승하였고 청년단부에서는 배제OB·YMCA·천도교·경신OB·삼한(三韓)클럽의 5개 팀이 겨룬 끝에 배재OB가 우승하였다. 야구대회 참가 팀도 축구대회 참가 팀과 같았는데 중학단부·청년단부 모두의 패권을 역시 배재 YB(young boy:재학생)와 OB(old boy:졸업생)팀이 휩쓸었다.
이같이 YMCA는 초기 스포츠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서울에 이어 1921년에는 평양에서 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고, 이것을 계기로 평양에 축구가 유행해 서울·평양 간 경평축구전(京平蹴球戰)이 열렸으며 이에 일본유학생 팀이 가세하여 지방 순회경기 등을 벌임으로써 축구를 중심으로 한 서구 스포츠는 전국에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스포츠를 한국에 완전히 정착시킨 것이 연희(延禧)전문과 보성(普成)전문의 두 사학(私學)이다. 1924년에 양교 축구부가 동시에 탄생하자 그때부터 양 팀 간의 대결은 서울의 화제가 되었다. 강력한 축구부를 먼저 구성한 것은 연희전문으로서 1926년에 이영선(李永善)·이영민(李榮敏)·김윤기(金允基) 등으로 강팀을 이루어 전국 축구를 휩쓸자, 보성전문은 이듬해 김화영(金化永)·김원겸(金元謙)·임용업(林龍業) 등으로 팀을 구성하여 연희전문과 맞섰다. 이때부터 연보전·보연전(延普戰·普延戰)은 열기를 높여갔으며 이것이 자극이 되어 중등학교 축구의 질이 높아졌다.
당시의 축구소년들은 누구나 연희전문·보성전문 진학을 열망했고 진학 후 기술을 더욱 연마했으므로 양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1935년에 구성된 경성축구단(京城蹴球團)은 동양 최강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농구는 이보다 늦게 1930년에 연희전문 농구부가 강화되고, 보성전문 농구부는 이듬해 팀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축구의 연보전과 더불어 농구 연보전도 스포츠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또 다른 행사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에 의한 양교 농구 수준의 급격한 향상에 따라 연희전문 농구팀이 1936년 전일본 종합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이성구(李性求)·염은현(廉殷鉉)·장이진(張利鎭)의 세 선수는 이 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일본 대표농구 팀의 선수로 선발되었다. 연보전은 축구·농구뿐만 아니라 육상경기·아이스하키·스피드스케이팅·유도·정구 등의 경기도 공통적으로 장려하였으며, 그 밖에도 연희전문에서는 야구를, 보성전문에서는 럭비·배구·역도·탁구 등을 장려하여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축구·농구에서와 같이 양교의 육상경기 장려는 양정·배재 고보를 비롯한 전국 중등학교 육상경기 발전에 자극제가 되어 그 산물로서 권태하(權泰夏)·김은배(金恩培)·손기정(孫基禎)·남승룡(南昇龍) 등 우수한 장거리 및 마라톤 선수가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손기정·남승룡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출전, 1위와 3위를 차지하여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그리고 김원권(金源權)·김유택(金裕澤)은 1939년에 멀리뛰기와 3단뛰기 및 100m달리기에서 그 해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스포츠는 조선체육회의 주도로, 또 연보전의 경쟁 아래 해가 거듭할수록 널리 보급되었고 수준을 높여갔으나, 군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이르러 외래 스포츠의 금지지시를 내림에 따라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침체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체육인들이 광복의 감격을 발현(發現)하기 위하여 이 해 10월 광복경축 종합경기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독립국가로서의 한국 스포츠는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1947년 4월 19일 서윤복(徐潤福)이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에 한국대표 축구팀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원정하였고, 9월에는 역도선수단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또 이 해 여름에 대한올림픽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한국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런던에서 거행된 제14회 올림픽대회에 한국선수단은 독립된 대한민국 팀으로 첫 출전을 하였다. 대회에서 비록 금메달은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으나 성적은 비교적 좋아 역도 75kg 급(미들급)에서 김성집(金晟集)과 복싱 플라이급에서 한수안(韓水安)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국내적으로 모든 스포츠가 활발히 펼쳐졌고 국제적으로 한국 스포츠가 세계에 진출하여 그 전도는 밝았지만, 38선으로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면서 한국 스포츠는 통일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유를 찾아 월남한 체육인들이 상당한 활약을 보였는데 최윤칠(崔崙七) 선수는 마라톤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9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이 1~3위를 차지할 때 3위에 입상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 스포츠는 다시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해병대를 포함한 국군 4군이 다투어 장병의 사기앙양책으로 스포츠를 장려함에 따라 다행히 명맥은 유지되어 전쟁 후의 혼란기에 올림픽(1952년 헬싱키)과 아시아대회(1954년 마닐라)에 출전할 수가 있었다. 1961년의 5·16군사정변 이후 정책적으로 스포츠를 장려하여 많은 실업 팀이 창단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학스포츠도 활성화되었다. 그 영향은 하부구조로 경기 인구를 증대시켰다. 정부의 스포츠 장려와 맥락을 같이하여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제22대 회장에 취임한 민관식(閔寬植)은 체육행정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편한 후 체육발전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태릉(泰陵)에 선수촌(選手村)을 건립하여 국가대표급 선수의 전천후 강화훈련이 가능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외 인공 스케이팅 링크도 지어 태릉을 한국 스포츠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어 민관식 회장은 소년체육대회(少年體育大會)를 기획하여 1972년 6월 서울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리도록 하였다.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1974년 몬트리올 올림픽대회에서는 레슬링의 양정모(梁正模)가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고, 여자 배구선수들은 3위에 입상, 올림픽 무대에서 구기종목에서 첫메달을 획득했다.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한국 스포츠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한국은 김성집(金晟集)을 단장으로 284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해 올림픽사상 최다의 수확인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를 획득해 세계 140개국 중 처음으로 10위에 입상했다. 유도의 안병근(安炳根)·하형주(河亨柱), 레슬링의 김원기(金元基)·유인탁(柳寅卓), 복싱의 신준섭(申俊燮), 양궁의 서향순(徐香順)이 금메달을 따내 일약 한국 스포츠를 세계 10위로 끌어올렸다.
이 밖에도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이 각각 올림픽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차지하여 한국 스포츠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였다. 1983년 6월 4~21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이른바 박종환(朴鍾煥) 사단이라 불리던 청소년축구 팀이 한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세계 4강에 진입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81년 가을 한국민족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48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를 52: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1988년의 제24회 올림픽 개최권을 따낸 데 이어 11월 26일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현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임시총회에서 북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참가대표 전원의 만장일치로 1986년의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권을 획득했다. 양 대회의 서울 유치는 긴장이 감도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훗날 한국의 북방외교의 교두보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이 세계에서 16번째로, 동양에서 2번째로 올림픽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사건이었으며, 국민 화합에 힘쓰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86·1988년 분위기에 편승, 국가적 차원에서의 체육정책이 수립되면서 진해선수촌을 비롯해 온양 온천수영장 등 국가대표 훈련시설이 대폭 확충되었으며, 스포츠과학연구소(현 한국체육과학연구원)가 설립되는 등 스포츠 과학화에도 열기가 확산되었다. 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93, 은메달 55, 동메달 76개를 따내 사상 처음 일본을 제치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어 2년 후 역시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대회에서도 금 12, 은 10, 동 11개 등 모두 33개의 메달을 따내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남자 100m 우승자인 캐나다의 벤 존슨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발견해, 한국 스포츠과학도 세계적인 수준임을 동시에 인증받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금 54, 은 54, 동메달 73개를 따내 역시 일본을 누르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함으로써 스포츠에서 ‘극일(克日)’을 기록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후 남북은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친선축구경기를 가져 남북 간의 긴장을 해소하기도 했으며, 1991년에는 각각 탁구와 축구가 남북단일 팀을 구성하는 등 활발한 남북 체육교류를 갖기도 했다.
1992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올림픽대회에서는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黃永祚)가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여자 핸드볼이 서울올림픽에 이어 우승,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고, 금 12, 은 8, 동메달 12개를 획득해 다시 세계 7위에 올라 명실공히 한국 스포츠가 세계 ‘G 7’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국 스포츠는 여름종목뿐만 아니라 겨울종목에서도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해 1994년 3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벌어진 제17회 동계올림픽대회에서는 금 4, 은 1, 동메달 1개로 러시아·노르웨이·독일·이탈리아·미국에 이어 세계 6위를 차지, 동·하계 스포츠의 균형적인 성장을 입증하였다.
또 1994년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게임에서도 마라톤의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낸 것을 비롯하여 여자 배구가 아시안게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 금 63, 은 53, 동메달 63개로 일본을 누르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26회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10위의 성적을 거둠으로써 연속 4번째로 세계 10위권에 들었고 2000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제27회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1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의 상위 입상으로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된 1980년대부터 한국 스포츠는 엘리트 스포츠를 벗어나 모두가 참여하는 각종 생활체육시설들이 확충되어 많은 국민들이 직접 체육활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축구대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으로 열리게 되어 전세계와 한국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01년 현재 프로골프의 박세리·김미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박찬호·김병현 등의 열풍, 프로축구, 프로 야구, 프로 농구 등의 맹활약으로 국민들이 스포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7) 음악
고대로부터 전래된 한국 전통의 음악과 중국 및 서역(西域) 등지에서 전래된 음악을 국악(國樂)이라 하고, 주로 갑오개혁 이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된 찬송가를 비롯한 다른 서양음악 등을 편의상 양악(洋樂)이라고 한다.
⑴ 국악:국악은 사용하는 악기와 곡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아악(雅樂):중국 주(周)나라 때와 그 이전의 음악을 말한다. 1116년(예종 11)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중국아악이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일이다. 아악은 태묘(太廟)·사직(社稷)·선농(先農) 등의 제사(祭祀)와 연향(宴享)에 쓰였고, 이때의 악기로는 편종(編鐘)·편경(編磬)·금(琴)·슬(瑟) 등이 있었다. 특히 세종(世宗)은 박연(朴堧) 등을 독려하여 아악을 크게 중흥시켰고, 유신(儒臣)들의 절대적인 뒷받침으로 한때 찬연대비(燦然大備)하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 때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과 악기도감(樂器都監)을 두고 편종·편경 등의 아악기를 재정비하는 등 아악의 재건에 힘을 기울여 아악이 재생하는 듯했으나, 1910년 제향(祭享)의 폐지와 더불어 아악이 자취를 감추게 되어 지금은 오직 경학원(經學院)과 공자묘(孔子廟) 제향에 그 잔영(殘影)이 남아 있을 뿐이다. ② 당악(唐樂):중국 당(唐)·송(宋)나라 때의 속악(俗樂)의 통칭으로,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에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에 실린 송나라의 사악(詞樂)에는 석노교(惜奴嬌)·태평년(太平年) 등의 43편이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곡은 낙양춘(洛陽春)과 보허자(步虛子)의 2곡뿐이며, 이것도 당악의 원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향악화(鄕樂化)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이전까지 성하던 당악은 이와 같이 차차 향악 속에 흡수·동화되어 그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③ 향악(鄕樂):고대로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이르나,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서는 당(唐) 이전에 들어온 중국·서역 계통의 외래음악(外來音樂)은 모두 향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한국 고유의 음악은 조선 전기에도 거의 전승된 것이 없고, 고려시대의 향악(고려시대에서는 俗樂이라 했다)도 차차 자취를 감추어 조선 선조(宣祖) 때의 《금합자보(琴合子譜)》에는 겨우 정석가(鄭石歌)·사모곡(思母曲)·한림별곡(翰林別曲) 등이 전할 뿐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속악으로서 조선 후기까지 전승된 것은 정읍사(井邑詞)·동동(動動) 등의 몇 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종(世宗)은 여민락(與民樂)·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을 직접 창작하여 향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④ 속악(俗樂):민중과 더불어 자라온 한국 고유의 민간음악(民間音樂)으로서 가사(歌詞)·시조(詩調)·판소리·민요·잡가(雜歌)·산조(散調)·시나위·농악(農樂:매굿)·무가(巫歌)·범패(梵唄) 등이 이에 속한다. 국악은 또한 아악과 속악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아악은 당악과 향악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정악(正樂)이라 하고, 민간음악 중에서도 아정(雅正)한 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가곡·가사·시조 등을 좁은 의미의 정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악은 궁중 또는 양반계급에서 연주된 음악이며, 속악은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민중의 애환(哀歡)과 더불어 함께 자라온 ‘민중음악’인 것이다. 특히 향악과 속악은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에서 한국음악의 독창성과 우위성을 증명하는 음악이라 하겠다. 국악발전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세종대왕의 업적인데 왕은 1447년(세종 29) 향악을 기보(記譜)하기 위하여 정간보(井間譜:한국 최초의 有量樂譜에 속한다)를 창안하였고, 1449년에는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에 바탕하여 보태평·정대업 등을 창작, 5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연주되고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중심으로 한 호한(豪悍)한 정재(呈才)에 속하는 봉래의(鳳來儀:여민락·致和平 등으로 구성된다)를 제정(制定)하여 성업(聖業)을 이룩하였다. 성종(成宗) 또한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악가(樂歌)를 개작(改作)·개산(改刪)하고 당악기의 일부를 고치는 한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찬정(纂定)하는 등 국악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이룩한 음악은 세조(世祖)가 이어받고, 성종은 다시 이를 정리 집대성(集大成)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궤범을 후세에까지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도 국악은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원각사(圓覺社)·협률사(協律社)·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등을 통해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한편 음악가로는 3대 악성(三大樂聖)으로 꼽히는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박연(朴堧)을 비롯하여 근대의 5명창(名唱)인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김창룡(金昌龍) 등이 있다. 8·15광복 후의 국악은 1951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연구와 연주 활동의 태동(胎動)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의 국악 교육은 1954년에 개설된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가 처음이었으나 1956년에 폐과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 대학원·서울대학·한양대학·전주 비사벌국악고교·이화여자대학·추계예술대학·중앙대학·국악고교 등에서 국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⑵ 양악(洋樂):한국에 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한 것으로, 이 책에는 불완전하나마 양악의 기보법과 지극히 간단한 화성(和聲)에 관한 것이 일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양악이 직접적으로 들어온 것은 1895년 이후, H.G.언더우드, H.G.아펜젤러 등의 선교사에 의하여 전도(傳道)와 더불어 찬송가가 보급되면서부터이며, 특히 1900년(광무 4)에 창설된 시위연대군악대(侍衛聯隊軍樂隊)에 의하여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학교교육에서 창가(唱歌:서양음악)를 가르친 것은 1909년 조양구락부에 서양악과(西洋樂科)를 두면서부터이다. 이것은 양악 전문교육의 효시(嚆矢)이며, 1910년에는 이화여자전문에 음악과를 둠으로써 양악교육은 차차 본궤도에 올랐는데, 그 발전과정은 ① 섭취시기(1884∼1945), ② 토착화 시기(1945∼62), ③ 현대화 시기(1962∼현재) 등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현대화 시기를 1962년 이후로 보는 것은 ‘서울국제음악제’가 이 해에 처음 열렸기 때문이다. 제1·2기에는 김인식(金仁湜)·이상준(李尙俊)·김형준(金亨俊), 독일인 F.에케르트, 백우용(白禹鏞)·정사인(鄭士仁)·김영환(金永煥)·홍난파(洪蘭坡)·현제명(玄濟明) 등의 활약이 매우 컸다. 8·15광복 이후에는 고려교향악단·해군정훈음악대·서울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국제오페라사(社)·국립오페라단·김자경(金慈璟) 오페라단은 물론, 이화여자대학·서울대학·연세대학·경희대학·한양대학 등의 음악대학을 통하여 양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또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윤이상(尹伊桑),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장영주(張永宙), 피아니스트 김영욱(金永旭)·백건우(白建宇), 지휘자 정명훈(鄭明勳), 소프라노 조수미(曺秀美), 첼리스트 장한나 등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세계적 음악가가 속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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