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해서 친구와 서둘러 감자를 캐기로 하였다. 올해는 오랜 봄가뭄으로 감자가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다.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급변하니 일상생활도 불편하려니와 특히 농작물재배가 큰일이다. 기후변화로 생산 불황이나 전쟁으로 판매와 수입의 길이 막히면....그래서 어느 학자는 도심에 대형건물을 지어 수직농법을 해야할 시기가 올 것이라고도 하였다. 병충해 방제는 가능한데 맛을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친구와 함께하는 탓밭 농사야 취미삼아 하는 것이지만, 전업농가의 생겨와 서민들에 대한 물가인상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감자를 심어온지도 10년이 넘었다. 잡초제거며 제반 관리가 어려워 손이 덜가는 작물들 몇가지를 재배해 왔었다.
감자는 농산물공판장에서 수미감자를 구입하여 심는데, 서울의 손자와 며느리가 좋아했다.
감자밭에 들어서니 갑자기 김동인의 소설 '감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몰락한 선비의 후예로 비교적 엄한 농가의 딸로 자라난 복녀, 그러나 그 가난이라는 운명앞에 불행한 결혼생활로 왕서방과의 비극적 최후를 맞게되는 가슴아픈 애환...
원산지의 찬란한 문화가 폐허가 되고, 방랑자처럼 세계를 떠도는 감자의 운명, 그러고보니 감자는 사람들의 애환을 따라 머무는 것만 같았다.
배고픈 어린 시절에 동네친구들과 밭에서 감자를 몰래 캐어 모닥불에다 구워 먹었다. 손과 입가에 새카만 재가 묻어난다.
가정에서는 모자라는 밥을 감자를 삶아 보충을 하였었다. 감자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껍질을 벗기고, 삶은 후 설탕을 뿌려야 한다. 그러나 바빠서 껍질을 벗기지 않거나, 설탕이 없을 때는 매운 맛이 났다.
밥에다 감자를 섞어 놓으면 먼저 감자를 빼먹는 것으로 보아 싫어하진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보리밥 한그릇을 뚝딱해치우고, 뒷산의 정자나무 동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소꼬리 털을 뽑아 올무를 만들어 매미를 잡고, 아침에 매어놓은 소를 몰고 높은산으로 올랐다.
소를 산에다 풀어놓고 절간쪽으로 다가간다. 절에는 또래의 남자 애가 있었는데, 혼자 계시는 스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후에 생각해본 일이지만 과연 그 아이는 스님의 아들이었을까? 그게 궁금했다.
우리들은 계곡의 넓다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않아 물놀이를 하고, 가져간 감자를 구워먹었다. 그런데 가끔 스님이 오셔서 삼굿(구덩이에 감자를 넣고 연결되는 곳에서 돌을 달구어 수증기로 읶혀내는)을 해주신다.
우리는 계곡에서 가재도 잡고, 씨름도 하며 절간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스님은 솔잎 말린 것 등 약재를 달여 주시기도 하셨다. 한여름에는 일기예보(일기예보 정보를 들을 매체도 없었음)와는 관계없이 대략 한차례 정도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비를 피하여 나무밑으로 달려가거나, 아니면 올테면 와보란듯이 벌거벗은 상태로 비를 맞았다.
비가 올 기미가 없다가 갑자기 내렸다 그치는 현상을 두고, 우리들은 호랑이가 장가를 간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호랑이 장가는 그렇게 가는게 아니야. 호랑이는 추운 겨울에 그놈을 꽁꽁 얼렸다가 봄에 풀리면 그때 장가를 가는거다."
어른, 아니 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우린 그게 맞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의 비, 열대지방에 내리는 그 '스콜(Squall)'이란 비는 해외등반을 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한차례 통째로 맞았다. 시원해서 좋았다. 그런데 현지인들은 아예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감자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군대시절 칠갑산에 무정간첩이 나타나 뱀잡이 하는 땅군을 살해했다. 밤중에 우리부대는 차를 달려 현장에 도착했고, 날이 밝자 수색을 시작했다. 숲이 우거진 상태라 수색은 쉽지 않았다. 낮동안에 어느 마을에 들어가 수색을 하던 중 외딴 작은 초가집에 들렀다. 군인들이 고생을 한다며 할머니께서 삶은 감자를 한바가지 내어 오셨다.
그러나 차마 우리들은 감자를 먹을 수가 없었다. 80중반의 할머니가 60중반의 눈이 보이지 않는 아들과 함께 살고 계시는 것이었다. 배고픈 군인들이지만 감성은 있었다. 당시 돈이 없는 우리들은 가지고 있던 담배며 먹던 건빵들을 모두 꺼내어 모아 드렸다.
일주일 가까운 수색, 그러나 간첩은 우리들의 특별휴가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소란에 놀란 독사들만 우리들의 몸보신용으로 희생되고 말았다.
젊은 날의 그러한 기억은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30년쯤 지난 후 여행 중 그곳을 찾아갔었으나 제대로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였다.
감자캐기에는 초대하지 않은 옛 직장 여자동료 둘이 왔다. 지들이 복녀의 마음을 알기나 할려고?
감자는 지금의 우리 자식들은 내어 주어도 잘 먹지 않고, 반찬이나 배부른이의 다이어트 식품 정도로 활용된다. 그러나 감자는 고구마와 함께 어려운 보릿고개에 목숨을 지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구황식물이었다.
'인구의 자연적 증가는 기하급수적이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필연적이다'라고 주장한 맬더스의 '인구론'을 이제는 기후변화와 세계 인구증가로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들 한다.
피자며 통닭을 시켜먹다가 감자, 고구마, 보리개떡을 먹으라고 내어놓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언젠가는 우리네 식량사정이 더 어려워져 감자가 또 다시 소중한 먹거리로 자리 매김할 날이 올 것같은 불안한 생각이 든다.
예상과는 달리 감자는 그런대로 수확이 괜찮았다. 애 엄마는 벌써 서울 며느리에게 마늘과 감자를 보내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내가 뭐 농사꾼인가? 그래도 서툰 생산자 대열에 들어섬을 허락하신 하늘에 감사해야겠다.
첫댓글 안개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