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촌님이 새로 만드신 중국역사속의 여걸 서태후를 보고 올립니다.
청동릉((淸東陵)
중국 현존하는 제왕릉 중 가장 규모가 큰 청동릉. 청나라 순치제,강희제,건륭제,함충제,동치제의 릉과 서태후 등 15개 무덤群애 161여개의 릉이 있음. (청나라 제왕릉은 청동릉과 북경 서쪽에 청서릉이 있는 데 청동릉이 볼만한 유적이 많습니다.)
*북경에서 200여 km떨어진 곳에 있음 (3시간 정도 소요됨 )

1. 청동릉 최대규모의 건륭제 릉 (무려 53년동안 건축했다고 함)
* 중국역대 황제 들은 자기가 살고 있을 때 부터 자기 무덤을 만듬.

牌樓門


건륭제 무덤

건륭제 릉 - 현재 공개되었음. 릉 안에 5만여 자의 금강경이 만주어, 중국어, 몽고어 등 여러문자로 새겨져 있고 불상조각이 있는 데 무려 35년의 시간동안 새겼다고 함.
* 청동릉은 순치제 릉 빼고 모두 도굴되었음.

건륭제 무덤 위



건륭황제 비릉

건륭제의 황비 등 비들의 무덤

향비의 묘 (가묘?)
2. 서태후와 동태후릉
*중국 황실의 경우 황제는 용이고 황후는 봉황으로서 용이 봉황보다 위인데, 서태후릉안의 (서태후는 황후가 못 되었음) 조각에서는 봉황그림이 용위에 있음. 릉 내부의 도금이 되어 있는 등 화려한 장식을 했음. 당시 서태후의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볼 수가 있음~~

* 함풍제가 죽을때 서태후가 워낙 별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들러서 유언 시, 서태후와 동태후가 죽으면 반드시 황법의 관례대로 동태후는 죽으면 동쪽에 묻고 서태후는 죽으면 서쪽에 묻어라 했는 데... (중국에서는 동쪽이 서쪽보다 한계급이 높음) 서태후가 거짓말하여 자기 무덤을 동쪽에 하고 동태후 무덤을 서쪽에 결정했음.
정면사진이 동쪽이고(서태우 릉) 왼쪽이 서쪽임(왼쪽 뒤 건물이 동태후의 릉임).

정면의 계단 중간에 있는 것이 봉황(여자, 황후, 왕비)이 용(남자, 황제)위에 조각되어 있는 것임. - 서태후는 자기가 위에 있다고 하고 싶어서~~
청동릉은 몇차례 도굴이 되었는 데, 그중 마적떼를 이끌고 하북성의 군벌이 된 손전영(孙殿英)이 서태후 릉을 도굴할때는 서태후의 시신에 입힌 속옷까지 다 벗겨갔다 합니다. 당시 국민당 장개석은 손전영을 처벌할려고 했지만 손전영이 뇌물로 국민당 지도부에 제공하는 관계로 유야무야가 되었습니다. 손전영의 청동릉도굴은 그 당시에도 큰 공분을 일으켰지만 부패한 국민당의 미온적인 대책으로 넘어갔습니다. 손전영은 나중에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군에 붙어서 중국침공에 일조를 한 간신 중의 간신입니다.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쫒겨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부패입니다.


서태후 릉 (앞은 사당이고 뒤가 릉임 - 현재 릉 내부가 도굴되어 대외 공개되어 있음)

서쪽에 있는 동태후릉
3. 강희제 릉

8월13일 강희제 릉 입구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님과~
4. 함풍제 릉 (서태후 남편)




5 순치제 릉







3. 三皇墓, 御佛寺 등









*작년인가 중국에서 건륭제의 비인 향비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향비의 묘은 청동릉에도 있고 고향인 신강위구르자치구 서쪽 도시 카스에도 있습니다.
카스(喀什)는 위구르어린 喀什噶尔(캬수가~얼)의 음역이며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산남로와 천산북로가 만나는 고대 실크로드의 아주 중요한 도시였음.
중국 진나라 말기/한나라 초에는 흉노족이 지배를 하였으면 한나라 무제(기원전119년)때부터 한나라의 관리를 받기 시작하여 기원전 60년에 한나라는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여 카스를 한나라 지도에 포함시켰음.
당태종이후에는 당나라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는 데 당시 안서사진(安西四镇)중의 하나가 바로 카스였음.
징키스칸이 서방정벌 후에는 차카타이 한국의 핵심도시 였고 청나라 건륭제때 청나라 대신이 카스에 거주를 했음.
청나라라 멸망한 후에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하였음.
카스지구는 인구가 약 200만명인데 99%가 소수민족(대다수가 위구르 족임)
Apak hoja Mazar - 카스를 대표하는 관광지
1640년에 지었는 건물로 예배당, 경전읽는 경전당, 묘지, 연못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
apak hoja (hoja호자는 귀족이란 의미 같은)의 5대 72명이 묘지건물에 관이 봉안되어 있음. 또한 청나라 건륭제의 비인 향비(향이 난다고 해서 香妃라고 했다고 함)가 죽어서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향비묘라고도 부름.
향비 :
1. 태어날때 부터 향기가 나서 향비라 했다고 하는 데...
2. 28세때 건륭제에 시집을 가서 임신도 하지 않았다고 하고...
3. 죽어서 여기에 묻혔다는 애기...
신빙성이 좀 부족한 느낌이 올때 마다 있어서 저 나름대로 판단해보면:
1. 카스는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였으므로 아라비아 향수 같은 것도 많이 유통되어서 향비가 어렸을 때부터 아라비아 향수를 사용하여 목욕을 많이 해서 가까이 가서 냄새 맡으면 이상한 향이 났고 (어떤 중국 사람들은 향비의 몸에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고 함. 이것은 민족마다의 냄새가 달라서 임. 지금도 위구르족 가까이 가면 이상한 향 냄새나고, 서양사람들 한테도 이상한 냄새나고, 외국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한테서 마늘냄새 같은 거 난다고도 함.)
2. 28세 시집갔다 - 지금도 위구르족들은 보통 20세 전후에 시집을 가는 데 옛날에는 더 일찍 갔을 확률이 많았으므로(아주 추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이미 애를 2명나았는 아줌마였는데, 하도 절세미인이라서 공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음. 또한 향비가 매일 사용하는 아라비아 향수가 피임작용을 하여서 건륭제에게 시집가서 애를 낳지 못했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있음. 총애를 받지 못하여서 임신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함.
3. 향비은 북경에서 죽었는 데 시체를 카스까지 옮기시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 이상은 소요되었을 텐데 운송도중 시체가 부패되었거나 냄새가 심하여 여기까지 관을 가지고 온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도 해봄. 몇년전 중국 연속극 환주거거(한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합니다)란 연속극이 대 히트를 쳤는 데 이 연속극에 향비이야기가 나와서 카스에서 여행객 유치를 위해서 향비가 카스에 묻혔다고 하는 가능성이 큼니다. 진짜 무덤은 청동릉에 있습니다.

Apak hoja Mazar 입구
앞에 노란표지판을 경계로 하여서 안쪽에서는 (입장료를 받았으니까) 사진찍을 수도 있는 데 노란표지판 앞에서는 사진 못찍게 함(공짜사진은 안된다는 결연한 의지의 중국~~)


입구 부속건물

입구 부속건물

Apak hoja Mazar 묘지 건물
건물 설계구조가 참 뛰어나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의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시마라칸트에서(티무르 제국) 영향을 많이 받았지 않았나 봅니다.

Apak hoja Mazar 묘지 건물 정문 (여기에 72개의 관이 전시되어 있음. 또한 향비 관도 있고 향비시체를 북경에서 카스까지 실었던 마차도 있음-진품인지?)

Apak hoja Mazar 묘지 건물의 정면 -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경전을 읽던 경전당인데 무너지기 아슬아슬함.

건물 어느쪽을 보더라도 균형이 있는 건물

예배당 (이슬람 사원) 정문

예배당

예배당

예배당 앞에 있는 연못 - 예배보기 전에 여기서 손과 온 몸을 씻었다고 함.
거래처 사장 왈 : 예배전에 신자들이 여기서 옷 벗고 전신을 씻기 때문에 여자들은 좀 뭐해서 이슬람사원에 예배를 못 본다는 요상한 논리를 폄~~
* 이슬람사원안에는 여자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향비의 후손이나 먼 친척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이쁜 위구르족 꾸냥과~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쁜 꾸냥에 귀걸이는 한들한들~~재미있게 잘 읽고 잘 보고갑니다.한동안 멀리 출장 가셨군요?
터키와 투르메크스탄, 카쟈흐스탄 등의 국가들을 둘러보느라 어제 돌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