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Dionysos),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하는 이 고대의 신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술의 신이다. 그 술은 다름 아닌 포도주(wine)다. 그래서 미술 작품에 묘사된 디오니소스는 흔히 머리에 포도나무 잎사귀와 담쟁이 덩굴로 된 관을 쓴 채 손에는 포도송이, 또는 술잔과 술병을 들고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사실 포도나무는 건조하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빠른 성장과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식물이다. 이는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포도나무 재배와 포도주 제조술을 전해준 신일뿐만 아니라 본래는 나무의 수액, 동물의 피와 같은 자연계의 생명력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술과 생명력을 관장하는 신
디오니소스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신들의 왕 제우스와 인간 여인인 테베의 공주 세멜레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그가 태어나기까지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다.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인 헤라가 남편의 외도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 헤라는 세멜레의 어릴 적 유모로 변장하고 세멜레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그녀가 사랑하는 이가 진짜 제우스인지 확인해보라고 꼬드겼다. 헤라의 속임수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를 설득해 천상의 의복을 입고 나오게 하지만, 그 강렬한 광채를 보는 순간 타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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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로 [제우스와 세멜레] 1895년
캔버스에 유채, 212cmx118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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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푸생 [바쿠스의 탄생] 1657년
캔버스에 유채, 179cmx122cm, 포그 미술관 소장 |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가 그린 [제우스와 세멜레]는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작고 하얀 인간 여인의 육체는 곧 재가 될 것이다. 제우스는 죽어가는 세멜레의 뱃속에 있던 태아를 서둘러 꺼내 자신의 허벅지 안에 넣고 꿰맸다. 그리고 석 달 뒤 태어난 아기를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와 아타마스 부부에게 맡겼다. 그러나 헤라의 보복으로 두 사람은 광인이 되어 죽고, 다시 제우스는 전령 헤르메스를 시켜 디오니소스를 소아시아의 니사 산에 사는 님프들 손에서 자라게 한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이 그린 [바쿠스의 탄생]을 보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날개 달린 모자와 신발을 신은 헤르메스가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안겨 주고 있다. 그가 오른손으로 가리키는 구름 위로 사건의 발단이 된 장면, 즉 천상의 복장을 한 제우스와 세멜레가 보인다.
포도 재배법과 즙을 짜내 술 만드는 기술
님프와 사티로스들에 의해 길러진 디오니소스는 그 곳에서 포도 재배법과 즙을 짜내 술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이런 신화를 바탕으로 어릴 적 술의 신의 모습도 화가들에 의해 자주 그려졌다.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작품으로 알려진 [어린 바쿠스]에는 다소 조숙한 표정의 어린 신이 머리에는 담쟁이 덩굴을 두르고 손에 술 주전자를 든 채 돌 더미 위에 앉아있다. 작고 연약한 생명의 신은 종종 자연의 생명력이 잦아지는 시기인 동지 무렵의 황량한 들판 배경과 함께 등장하곤 한다. 반면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는 포동포동한 아기 술의 신이 병째로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게다가 아기가 기대고 있는 술통과 번갈아 살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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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니 [어린 바쿠스] 1514년경 목판에 유채, 48cmx37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
귀도 레니 [술 마시는 바쿠스] 1623년경 캔버스에 유채, 72cmx56cm, 드렌스덴 게말데갤러리 |
이후 청년이 된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술수로 인해 광기에 휩싸여 각지를 떠돌아 다니다 여신 레아를 만나 치료를 받는다. 그 뒤부터는 이 지역들에 포도나무 재배 및 포도주 만드는 법과 함께 자신의 종교를 전파할 수 있었고, 이윽고 고향 그리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니사를 떠나 트라키아를 거쳐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어지는 디오니소스의 방랑이 포도와 포도주가 전해진 경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편 디오니소스 주위에는 항상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다. ‘미친 여자들’이라는 뜻의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불리는 여신도들과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반인반수의 숲의 신 사티로스들이다. 이들은 한 손에 뱀이나 포도송이를, 또 다른 손에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지팡이 티르소스(Thysros)와 탬버린처럼 생긴 악기 팀파논(Tympanon)을 열정적으로 쳐대며 술에 취한 채 광란의 춤을 추곤 했다. 또한 디오니소스의 마차를 끄는 호랑이, 표범은 그 숭배의 기원이 소아시아임을 나타낸다. | |
이러한 디오니소스 무리의 행렬은 화가들에 의해 [디오니소스의 승리], 또는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주제로 자주 다뤄졌다. 간혹 이들과 함께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크레타 섬의 황소 괴물을 물리친 테세우스에게 반해 따라 나섰다가 낙소스 섬에 버려진 비운의 여인이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카툴루스와 오비디우스의 문헌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로 향하는 길에 낙소스 섬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고 이때 만난 아리아드네와 결혼했다고 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걸작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는 추종자들을 거느린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보고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펄럭이는 그의 망토와 여인의 놀란 몸짓이 화면에 생생함을 더해준다. | |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520~1522년 캔버스에 유채, 175cmx19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는 기원전 13세기경 소아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 종교가 존재했다. 그 숭배 의식의 일환이었던 비밀 야간 집회는 가히 광란의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신도들은 가면을 쓰고 정신 없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물로 바쳐진 짐승, 또는 어린아이를 산채로 뜯어먹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한다. 이는 생명의 신 디오니소스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상징적 행위로서, 일종의 신과의 합일, 즉 무한한 생명의 힘을 이어 받는다는 뜻이었다. 자연의 생명력이란 피고 지는 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도 이외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이러한 극단적인 종교 의식과 비이성적 행위는 기원전 7, 8세기 무렵 디오니소스 축제(Dionisia)로 공식화되면서 점차 순화되었다. 광란의 노래와 춤 대신 합창과 무용경연대회, 그리고 이후로는 소박한 예식이나 연극, 가장 행렬이 포함된 전국 각지의 축제로서 매년 겨울에서 초봄 사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3대 비극 시인들 역시 기원전 5세기경 절정을 맞은 이 축제의 비극경연대회 출신들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초기의 무질서한 행위가 여전히 지속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로마 시대 바쿠스 축제(Bacchanalia)로 이어졌다. 이후 기원전 2세기말엽에는 원로원의 결정으로 축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계속되어 1세기 무렵에는 매우 성행했다고 한다. | |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기와 선정성뿐만 아니라 그 특징적 면모는 많은 후대 화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대에 따라, 화가의 개성에 따라 축제 장면은 다양한 스타일로 창조되었다. 17세기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작품 [술꾼들]에서처럼 친근한 모습의 디오니소스와 함께 가난하고 투박한 농부들의 한판 술 잔치로 그려졌는가 하면, 19세기 세잔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본능이 뒤섞인 육체적 욕망의 장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올랐으며, 유일하게 인간 여인에게서 태어난 신이다. 게다가 술과 도취, 광기를 몰고 다닌다. 그렇기에 디오니소스는 흔히 이성과 현실, 빛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대비되는 신격으로서 감성과 꿈, 어둠의 신으로 간주되었다. 여느 신들처럼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숭배되지는 못했으나, 현세의 인간을 매혹하는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해 점차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이성을 중시하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디오니소스 숭배는 사실상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금 디오니소스가 부활하게 된 것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의해서였다. 과학과 합리주의,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제기된 19세기 말에 이르러 감성과 어둠의 신을 찾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다. 20세기 이후 내가 아닌 다른 것, 의미보다는 비의미, 중심보다는 주변부에 눈을 돌리게 된 우리에게도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존재는 유효하지 않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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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 디오니소스를 다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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