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김훈의 하얼빈 출간
by온기철 James OhnAug 13. 2022
https://youtu.be/zJpjyx-p0JY
김훈이 그린 안중근?
하얼빈시는 만주 헤이룽장 성의 성도 이다. 만주에서도 북쪽에 위치 하고 있다. 만주는 9000 여년 전 요하문명의 발상지 이다. 옥기 문명으로 불리우기도하는 요하문명의 한 주류는 고조선 이었다. 우리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 만주 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 지면서한 우리 민족은 이 지역을 지배 했었다. 발해가 망한 이후로 한민족의 활동 무대는 한 반도로 위축 되었다. 신라 말기에 고려, 후백제, 신라 로 분열 된 것을 통일한 고려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음을 선언 하고 이념 적이 나마 만주가 한민족의 발상지임을 확인 한다. 한민족이 만주에서 물러나 반도에 위축 된 사이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명을 멸망 시켜 중국 대륙에 청나라를 경영 하게 된다. 청 나라는 연해주(울라디 보스토크)를 포함한 방대 한 영토를 지배 했다.
노란색 청나라 영토
19세기 말 청이 약 해지자 만주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이권을 차지 하기 위한 각축 장이 되었다. 한편 조선은 세도정치, 민씨 정권의 부패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 지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주 했다. 20세기 초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길 무렵에는 우리민족이 일본 군과 싸우는 독립군의 중요한 활동 무대가 된다.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연해주 불라디보스토크에서 할빈으로 향하는 기차에몸을 실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배를 타고 일본을 출발 하여 대련에 도착, 할빈 행열차를 탄다. 이토는 한일 합방 후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주변의 이권을 어떻게 경영 할 것인 가를 러시아 외상과 상의 하기 위해서 였다. 물론 안 중근은 조국을
찬탈 한 원흉을 암살 할 목적 이었다. 1909년10월26일 두 사람은 할빈역에서 만나게 되고, 불과 5 미터 앞에서 안중근이 쏜 4발의 총알에 일본 대 제국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는 그 명을 다 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
한국 사람들은 이토가 그저 한일 합방을 주도한 원흉 정도로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인 영웅이다. 이토는 1841년10월16일 조슈번에서 태어 났다. 하급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었다. 원래 성은 하야시 였으나 이토 가문의 양자로 가면 서 이토 성을 쓰게되었다. 경제적으로 태어난 가문 보다 훨씬 나았으나 역시 낮은 계급 사무라이였다. 1857년, 16세에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었다. 요시다가 경영 하는 학교 쇼카손주쿠에서 새로은 학문을 배웠다. 막부 타도의 존왕양이 운동에 적극 참여 했다.
1863년5월에서 1864년6월 까지 다른 5명의 청년들과 영국 유학을 했다. 런던 대학 교수 알렉산더 윌리암스 교수 집에 하숙 하면서 영어와 서양 풍속을 배웠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일본이 영국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는 것을알게 되었다. 그동안 쇄국 정책을 주장 하던 그는 개국 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귀국 후에 막부 타도와 명치유신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 했다. 그리고 새헌법에 의한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천황은 의례적인 국가 수반이고 총리가 전권을 가지는 헌법하의 총리는 지금의 대통령과 같은 같은 것이다. 그 후 5,7,10대 총리를 역임 했다. 3,4,8대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지금의 국회 해당 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5년 한일 합방의 전 단계인 을사 보호 조약 후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 되었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이 이토와 한일 합방에 동의 한후 1909년6월14일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 했다. 1909년10월26일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서 할빈역에 내렸다가 안중근에게 암살 당 했다. 향년 68세였다.
<안중근>
안중근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1879년9월2일에 비교적 유복 한 가정에서 태어 났다.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 해서 사냥을 즐겼고 명사수로 유명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집안에 사병을 양성 했다. 1894년 정부군을 도와 동학군 토벌에 아버지와 같이 참여 했다. 1895년에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인이 되었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다. 천주교 학교에 입학 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 되는 것을 보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 했다.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 돈의 학교를 인수 했다. 1907년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일본군을 공격 했다. 함경북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두고 많은 일본군을 포로로 잡게 된다. 그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석방 해 버렸다. 아군의 정보가 완전히 적군에게 노출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의 군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 되었다.
1909년 초, 다른 동지 열한 명과 왼손 네 번째손가락 끝 한마디를 자르고 태극기에 혈서를 쓴 다음 "동의 단지회"를 결성 했다. 이때 부터 안중근은 왼손에 먹물을 묻혀 찍는 수인을 사용 했다. 그러던 차에 이토가 할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엘리트 였다. 동양평화론 을 펼 정도로 동북아와 세계 정세를 정확히 이해 하고 있었다. 대단한 명필이 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이기도 했다. 총과 활 둘 다 잘 쏘는 명사수 였다. 사람들을 모아 독립군을 훈련 조직하고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 역에서 이토를 노리고 안중근은 하알빈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가 채가구 역에 먼저 도착 했으나 러시아 경비병이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 방문을 열어 주지 않아 실패로 돌아 갔다. 10월26일 오전 9시30분 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서 열차에서 내린 이토를 안중근은 브라우닝
제
반자동 권총 M1900으로 저격 했다. 4 발은 이토에게, 수행하던 일본 요인 세명 에게 각각 한발 씩 명중 했다. 합 일곱 발을 발사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수감 되었고 5개월 동안 재판이 계속 되었다. 일본 정부에서 이미 사형 시키기로 결정된 재판이었다. 안중근은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의연 했다. 한국의 참모중장 으로써 적국의 지휘관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무죄임을 주장 했다. 1910년3월26일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일본 당국은 그의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기를 거부 했고 지금까지도 찻지못하고 있다.
그는 재판장에서 이토를 왜 죽였는 가? 하는 질문에 메모지 한장 없이 판사를똑바로 바라 보며 15 가지 이유를 또렷하게 대답 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18]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이 어떻게 조선의 주권을 빼앗아 가는 가를 확실히 파악 하고 있었다. 그의 동양평화론 은 역사를 돌이켜 보건 데 절묘한 생각 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이 각각 독립해서 서로 잘 지내야 동양 평화가 유지 된다고 역설 했다. 이토가 일본이 한국, 중국을 지배해야 평화가 유지 된다고 한것과 반대 되는 주장이었다.
이토 암살후 5개월 동안 옥살이 하면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 하다가 사형 장의 이슬로 사라 진다.
<뤼순 형무소 소장 구리하라 사다키치,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의 우정>
안중근은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유묵(붓 글씨)을 남 겼다. 2014년 8월14일, 일본으로 부터 "경천"이라고 쓴 유묵이 한국에 돌아 왔다.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당시 형무소 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에게 죽기 며칠 전에 준 선물 이었다. 사형장으로 떠나는 날 그를 감시하고 있던 헌병 지바 도시치의 배웅을 받는 다. 그가 5개월 간 묵었던 방에는 "위국 헌신 군인 본분"이라는 유묵이 남아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이라고 하여 자기의 행위를 일본 헌병 에게 이해 시키려 한 것이라고 생각 된다. 그가 자기를 최선을 다해서 보살 폈던 일본 헌병에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었다. 이 글씨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뤼순 형부소 소장 구리하라 사다키치는 자기나라 영웅을 암살 한 안중근 을 성의 껏 보살펴 주었다. 지바는 안중근을 직접 감시 하면서 그의 인품에 감복 되어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는 안중근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안중근은 한복을 입고 죽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한복을 만들게 하여 안중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설은 구리하라가 자기아내에게 부탁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는 그옷을 입고 형장으로 갔다.
<일본 사찰에 세워진 안중근의사의 유묵비>
지바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된 후 얼마안되어 전역 되었다. 그는 집안에 안중근의사의 위패를 모셔 놓고 향을 피워 추모 했다. 1934년 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에게 안의사를 계속해서 추모 할 것을 유언 했고 그녀는 이를 받들 었다. 아내는 양녀에게 유언 하여 추모는 계속 되었다. 일본 다이린지에 있는 절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비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인품에 감복 된 일본인 들이 안중근의사를 추모 해왔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10년3월26일, 조선의 영웅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31세의 젊은 나이 였다.
<결론>
명치유신이라는 일본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역사에 기리 남을 수 있는 거대한 개혁의 지도자 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인들 처럼 약소 국을 가차 없이 점령 하여 식민지 화 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침략정책을 "동양평화"라는 미명 아래 청일전쟁, 노일 전쟁을 서슴치 않았다. 한국을 식민지화 했다. 말은 평화지만 전쟁을 택한 것이다.
이토는 조선과 중국(청)은 비문명국이어서 일본이 다스려 문명국인 구미국가들의 침략을 막아야 동양평화가
이루어 진다고 주장 했다.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구미국가를 흉내낸 수작이었다.
안중근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을 침략하고 있는 데 왜 같은 동양 사람인 일본이 조선, 중국을 침략 하느 냐고 반문 했다. 일본, 조선, 중국이 각각 독립하여 서로 힘을 합 해서 서양인들의 침략을 막아야 동양 평화를 유지 할수 있다고 주장 했다. 이것이 그의 동양 평화론이었다.
역사를 가정에 의해서 돌이 켜 보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안중근의 주장 은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의 헤아릴 수 없는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 한다. 이토는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굴욕 적인 항복을 자초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삼국에 모두 이로운 "누이 좋고 매부 좋은(win, win situation)" 생각이었다.
안중근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영웅적인 쾌거였다. 그러나 이토가 죽었는 데도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좀 참고 기다리며 그의 넓고 깊은 지식과 전투 능력을 좀 더 장기 적이고 조직 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는 데 사용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 터에서 상대의 군인을 군인 정신으로 이해 하는 우정 어린 이야기는 우리의 심경을 울린다. 일본인 형무소장 구리하라, 간수 지바와 안중근의 일화는 이러한 예의 하나 라고 생각 한다. 일본 방송은 슬픈 테러리스트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안중근과 지바의 이야기를 방영 했다.
https://youtu.be/P-NDvHKwtYI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