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을 끼고 있는 이 지방은 해안에 접해있는 지리적인 위치로 왜와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 만 아니라 신라의 서울인 금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문물이 미개하고 풍토가 척박했던 섬사람인 왜의 노략질을 받을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왜인의 동해 침입은 수십회 이나 이 고장의 지명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몇 차례 나타나고있다. 이를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막연히 '해면' 또는 '동해'침입 경우는 제외되었음)
내물왕 38년(393) 5월에 왜인들이 쳐들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공격하였다. 이에 장병들은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엿으나 왕은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타고 깊이 사지에 들어와 있으므로 그 예봉을 가히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곧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나 저 날랜 기병 이백명을 파견하여 적의 퇴로를 끊고 뒤이어 보병 일천명을 파견하여 독산(영일군 신광소재)까지 추격하여 이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크게 격파 하엿는데 이때 적을 침획한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실성왕 4년(405) 4월에 왜병이 명활성(경주)로 쳐들어 오다가 패하여 퇴주하므로 왕은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으로 나가 복병을 하고 있다가 다시 싸워 적을 격파하고 삼백여명을 참회 하였다.
눌지왕 28년(444) 4월에 왜병이 쳐들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10일동안 있다가 양식이 다하여 그만 퇴각하였다. 이 때 왕은 군사를 내어 적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군신들이 말하기를 "병가의 설에 말하기를 궁ㅇ한 도둑은 이를 추격하지 말라" 하였아오니 대왕께서는 "이를 놓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하나이다."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친히 기병 수 천명을 거느리고 적을 쫓아 가서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적에게 패한 바가 되어 장병들을 절반이나 잃었으며, 왕은 창황히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적들은 왕을 겹겹으로 포위하며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니 적들은 이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이라 하고 곧 군사를 거둬 이끌고 돌아갔다.
자비왕 2년(459) 4월에 왜인들이 병선 100여 척으로 침입하여 동쪽 변방을 습격하고 쳐들어 와서 월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4면으로 화살과 돌이 빗발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왕은 군사들을 정비하여 가지고 성을 잘 수비하였으므로 적들은 곧 퇴주하려 하였다. 이때 왕은 군사를 내어 적을 격파하고 북으로 해구까지 추격하여 이를 격파하니 왜인들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반수가 넘었다. 따라서 중요 국경지역과 왜인의 잦은 출몰지역에 성을 쌓아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하여 지증왕 5년(504) 9월 미실성(미질부성)과 함께 12성을 축조한 것이다.
신라본기에 기록된 미질부성은 흥해의 남미질부성과 북미질부성를 총칭한 것으로 오천 고현성 신광토성(연대 미상이나 축성법으로 보아 신라 것으로 추정)과 문성산성(기계면 문성리), 만리산성(오천읍 갈평리와 진전리에 연한 장기면 경계에 있음)등이 이 고장의 고성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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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질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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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질부성은 흥해읍 남성리에 있는 성이다. 이 성은 신라에 축성된 토성으로써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이다. 축성된 서으이 둘레가 약 3천척이고 성내에는 1개의 못과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1개씩만 남아 있다. 성이 있는 지역은 흥해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산으로써 남쪽으로 약 200m 성으 ㅣ흔적이 남아있다.
흥해지역에는 삼한시대부터 인류의 삶이 형성되어 남에는 남미질국, 북에는 북미질국이 있어 북천을 경계로하여 10만 군사가 '진두들'에서 싸웠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미질부국과 미질부성에 대한 기록을 보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3에 "소지왕 3년 (481)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북쪽 변방으로 침입하여 호오성(청송)등 7성을 공취하고 다시 미질부로 진격하므로 신라가 백제, 가야에 원군을 얻어서 니하(강릉)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1천여명을 참살하였다." 라는 기록중에 미질부가 처음 나타나며 또한 미질부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호에 의하면 지증왕 5년(504년) 9월에 역부를 징집하여 파리성(삼척) 미실성(흥해), 진덕성, 골화성(영천) 등 12곳에 성을 축조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에 미실성은 미질성으로 보여진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미질국이라는 명칭은 신라건국 이전 삼한시대의 소부족국의 명칭으로 신라건국 이후는 미질부로 되었다고 생각되어지며 남미질부성은 1483년전 지증왕 5년 9월 축성되었다고 보면 타당 할 것이다. 당시 이성은 신라 동북방 육익(남미질부성, 신광토성, 하방성, 고현성, 고읍성, 북미질부성)에 속하여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흥해군 편을 보면 고려 태조 13년(930) 북미질부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 성주와 함께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두미질부를 합하여 흥해군으로 하였다고 기록된 것을 볼때 축조한지 425년 뒤인 고려 태조 13년 부터 성은 패망하기 시작하여 고려 현종 2년 (1011) 흥해읍성이 축조 되고서는 완전 패망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일설에 의하면 왕건(고려태조)이 이 성을 침으로 인하여 신라가 패망 하였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쪽 능선에는 고분 수십기가 형성되고 평지에는 인가가 이루어 졌으며, 현재고분은 거의 도굴되고 3기 정도 남아 있으나 이 분 역시 도굴의 흔적이 있다. 도굴된 고분을 보았을 대 이 지역 성주의 무덤인 것 같아지며 신라토기와 금제 장식품도 다량 출토 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찾아가는 길]
흥해 남부 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못산까지의 일대 구릉지구가 다 성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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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질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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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질부성은 흥해읍 흥안2리(일명:낚시봉)에 있으며, 남미질부성과 같은 시기 즉 1485년전 신라 지증왕 5년(504년) 9월에 역부들을 징집하여 흘긍로 축성한 토성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이 성은 곡강천이 굽이쳐 흐르다가 암벽을 깎아 50여m의 절벽을 이룬 곡강어귀 위쪽에 위치하여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서 신라 동북방 육익에 속하여 신라의 동북방 전초기지적 역할을 충분히 담당하였던 곳이며, 성의 둘레가 5,500척이고 성내에서는 일지삼저이 있었으나, 지금은 형태만 남아있다.
북미질부성은 축성된지 425년 뒤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이 성의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더불어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여 (동국여지승람 흥해동편) 고려에 속하였으나, 원종 2년(1011년)에 흥해읍성이 축성됨에 따라 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흥해군의 주변성으로서 조선시대 중엽까지 동북 해적을 막는 기지역할을 했다. 현재에는 성의 흔적만 남아 있고 성터에는 수십기의 묘지가 형성되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
[찾아가는 길]
속칭 '곡강어구'라 부르는 참포위로 솟은 절벽과 정상일대가 북미질부성터다. 곡강 최씨 시조 묘를 지나 곡강서원터를 지나 곡강을 따라 동부쪽으로 가다보면 양수장 건물이 있는 깊은 물위로 솟은 바위 절벽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