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 정공 묘갈명(監察鄭公墓碣銘) - 이재(李縡)
공의 휘는 규징(奎徵), 자는 문백(文伯)이다. 젊어서 글을 좋아하였으나 병진년(丙辰年,1676, 숙종 2) 조정에서 만 명의 무인을 뽑자 마침내 한 차례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수문장을 거쳐 사축서 별제, 전옥서 주부, 사헌부 감찰, 무신 겸 선전관, 훈련원 판관과 첨정, 중추부 경력, 도총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맹산 현감(孟山縣監)과 경상 우병영 우후(慶尙右兵營虞候)를 지냈다. 기사년(己巳年,1689), 흉인들이 화란을 만들며 남의 동정 살피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은 쫓겨난 공들을 찾아가 문안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이름난 관원이 전별하는 자리에서 눈짓하며 말하기를,
“정 첨정은 홀로 벼슬하지 않으려 하는가?”
하였다.
학사 박태보(朴泰輔,1654~1689)는 국모를 위해 간언하다 죽었다. 그 전에 공은 그의 얼굴도 알지 못했으나 날마다 의금부 문 밖에서 안부를 물었다. 그가 유배되자 노강(露江)까지 전송하고, 또 그가 죽자 몹시 슬피 통곡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여겼다.
장씨(張氏)가 왕비를 참칭하자 백관이 조정에서 경하하였는데, 공은 궐 아래에 이르러 병을 핑계대고 들어가지 않았다. 성모(聖母 인현왕후)가 사가(私家)에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종종 말에서 내리지 않았는데, 공은 문을 바라보기만 하면 종종걸음으로 갔다. 공의 직임은 비록 낮았으나 나랏일이 망극하다는 이유로 매번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공은 포은(圃隱) 문충(文忠) 선생의 10대손이다.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겨, 모친이 병들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바쳤다. 상을 치를 적에는 슬픔을 다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으니, 집안에서의 행실이 이와 같았다. 기일에는 시골에 가묘(家廟)가 있었기 때문에 한데서 슬피 곡하였다.
당시 한질에 걸려 땀을 내고 있었기에 집안사람들이 굳게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내 병이 심해져 갑술년(甲戌年,1694) 3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 선영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여 일이 닥쳐도 함부로 목소리와 낯빛을 바꾼 적이 없었고, 평소 이야기할 때는 절대 남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귀천에 관계없이 정성으로 대하여 이웃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매번 선비의 학문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자제들에게 글공부를 권했다.
또 의복을 검소하게 하고 재물을 구차하게 취하지 않았다. 어떤 부자가 공의 장원을 지키는 종을 죽이고 수백 금으로 보상하려고 했는데, 공은 그 이익을 물리쳤다. 영남 병영에 있을 때 고을에 네 관아가 있었는데 각기 백정을 두고 민가의 개를 잡아서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공이 불쌍히 여기며,
“저것도 혈기가 있는 부류인데 날마다 죄 없이 죽이니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자제들이 상자를 꾸미려고 가죽 한 장을 청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밖에 백성을 해치는 정사를 일절 혁파하니, 돌아갈 적에 전별하는 백성이 수백 명이었다. 정씨는 영일(迎日)에서 나왔다. 부친은 휘 공한(公翰)이며, 조부 휘 길(佶)은 사과, 증조 휘 종선(從善)은 현감을 지냈다. 고성(固城) 이즙(李檝)이 외조이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다.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천준(天峻)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찬선(纘先)이고 사위는 사인 이희귀(李喜龜)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부친이 만령(萬齡)이며 아들 찬서(纘緖)를 두었다. 측실 소생은 찬흥(纘興), 서종육(徐宗錥)과 권씨의 아내이다. 장남의 아들은 심(鐔), 환(鋎), 건(鍵), 수(鐩)이며, 딸은 이징봉(李徵鳳), 한광보(韓光輔)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유(鎏)이다. 심(鐔)의 아들은 민제(民濟), 인제(仁濟)이고, 환(鋎)의 아들은 응제(應濟), 세제(世濟)이며, 건(鍵)의 두 아들은 익제(翼濟), 이제(頤濟)이다. 찬서가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평소에는 / 夫士平居
독서하고 도의를 말하다가도 / 讀書談道義
터럭만한 이해를 만나면 / 而遇毫髮利害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피하기도 하네 / 或一趨而一避
누가 공처럼 의연히 의리를 낯빛에 드러내랴 / 孰如公毅然義形於色
위험한 세상 낮은 자리에서 내 마음 다하여 부끄러움 없었네 / 雖處危世居下位而能盡吾心而無愧
이는 하늘에서 타고나고 효성에 근원하며 / 是固得於天而源於孝
그대 조상의 유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네 / 亦爾祖遺風之所自
어찌하여 하늘은 수명을 늘려 / 胡天不與以年
우리의 복심으로 삼고 간성의 직임을 맡기지 않았나 / 爲我腹心干城之寄
문수산에 서 있는 몇 자의 비석이 / 文秀之山數尺之石
평소의 뜻을 드러내기 충분하네 / 猶足以表素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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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감찰 정공 묘갈 :
이 글은 정규징(鄭奎徵)의 묘갈명이다. 정규징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문백(文伯)이다.
1637년(인조15) 태어나 1694년(숙종20) 3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