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여행길
0314/01/11-12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자.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삶이란 걸 이끌고 나가는 건 현직에 있을 때만이라고 하더라만 우리들 모두 세월이 가면 그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어 있는 것을. 그렇다고 퇴직이 우리들의 사라짐이 아니고 엄연히 오늘도 우리는 지구인으로 남아 있는 걸. 지구인이 아닌 그날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자. 나는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언제부터인가 애착이 간다. 나 역시 사라짐의 동행자이기에. 1박2일 우리들의 동행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게야. 누구의 노래처럼 고래 잡으러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를 잡으러 가자 동해바다로.
태백의 도계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고갯마루에서 겹겹이 철옹성을 만든 산을 바라보면서 그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이어져 가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한다. 우리는 그 삶들을 비집고 지나가면서 그들의 삶에 깃든 시공간의 의미에 감동하려 한다. 어느 골짜기라도 사람들은 길을 만들고 삶의 꼬투리를 만들어 마을을 이루고, 작은 역사를 이어간다. 우리는 한 세대이나 대를 이어가는 연들이 맥을 잇고 시공간에 존재하는 게다. 우리는 그런 고개들을 넘어 가고 있다.
신기리의 환성굴과 대금굴을 가는 삼거리를 지나 자연사 박물관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을 하면서 개인이 세운 거대한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꿈으로 다져진 의지와 집념이 커다란 흔적을 남기는 이야기를 만든 거니 우리도 세상이 영원히 지닐 이야길 만들 수 있지 않으랴.
동해시로 가는 길에서 삼척항으로 방향을 돌린다. 해변을 따라 동해의 파도소릴 더 많이 품고 싶어서, 해변의 군상을 제대로 간직하고파서 바닷가 길로 들어선다. 바다는 바람 한점 없는 듯 조용하고 토요일인데도 외지인들의 발길이 거의 닿을 기미가 없어 어물전이나 어시장들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해변에 늘어선 횟집도 주인만 가게를 지키고 있을 뿐 삼척항 전체가 낮잠에 빠진듯하다. 사람들은 메스콤에 민감하다더니 후꾸오까 방사능 소식에 수산물을 보기조차 꺼리는가보다. 항구는 파업중인 공장처럼 썰렁하다. 우리는 항구를 스쳐가면서 항구에 묶인 배들의 작은 흔들림이 어부의 타는 가슴속을 흔드는 것 같아, 동햇물이 바위에 부딪쳐 내쏟는 허연 물거품같은 안타가운 마음을 갖는다.
삼척항을 벗어나 해안을 따라 북행하니 해파랑길이라 하여 해변 산책로가 멋있다. 승용차가 아니라면 작은 바랑 하나 동여매고 바다소리를 담으며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군데군데 명소에는 전망대를 만들고 과거 철조망 대신 나무 테크 산책로가 새로운 명물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갈까. 제주 올레길이 발단이 되어 지방마다 둘레길이니 탐방로니 하여 숱한 길을 만들지만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길을 가고 있을까.
해변로를 따라 멋진 풍경에 취해 쉬지않고 추암에 닿는다. '아지매 꼬꾸레미 꾸워 주니껴.' 투박한 안동 사투리로 횟집 문을 두드린다.'아이고마 있니더. 우짠 일루 안동 고향 사람이 오니껴. 반갑구로.' 객지에선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더니 일행 중 안동인과 횟집 안동댁이 안동 마당을 만든다. 지글지글 고향 손으로 구운 양미리와 오징어회 한접시에 안동노래가 한참동안 떠들썩하고 소줏잔이 오락가락이다. 추암 입구 횟집에서 목을 축이고 목적지인 주문진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린다.
주문진항은 항구 특유의 비린내와 함께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 같지만 숙소를 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역시 소문만큼 관광객이 많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창을 열면 파도가 금방이라도 와락 방문을 차고 들어올 것같은 해변가 민박집에 숙소를 정하고 항구 탐방에 나선다. 싱싱한 생선들이 시장 곳곳에 즐비하게 깔려 있고 억측스런 엄마들의 손길이 생선을 다듬으면서도 손님부르기에 바쁘다.
시장의 싱그러운 북적거림이 항구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아 장돌뱅이처럼 저잣거리를 쏘다니는 우리마저 기운이 난다. 에라 이럴 게 아니라 생선 굽는 냄새가 발목을 잡으니, 구이집에서 한잔이다. 여러가지 생선구운 것 두 접시에 소주가 몇순배 도니 시장에 보이는 것마다 입맛을 다신다. 겨울바다에 대게가 대세이니 먼저 게와 문어를 골라 삶는 집에 맡기니 1시간여 걸린단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해 해삼 한 접시를 쓸어 가지고 게삶는 집 안방을 전세내어 기다리는 동안 다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나는 잠시 시장안의 수족관에 눈을 돌린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킹크랩이나, 연근해 어장에서 잡힌 홍게와 대게 모두가 누구의 손에 잡히고 삶길지 모른체 좁은 수족관에 갇혀있는 게 어쩌면 우리를 보는 또하나의 시선으로 여겨져 부담스럽지만 사온 게는 찜통에 들어 있다. 멀뚱멀뚱한 수족관 여러가지 게들의 눈망울을 의식하면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그 눈동자를 무시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커다란 우주나 자연의 법칙에 의해 오늘도 먹고 먹히는 우리네 삶이 어디에서도 이어져 가고 있겠지. 자꾸만 번득이는 게의 눈망울이 다가와 수족관에서 멀어진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삶아온 게와 문어를 안주로 소주 몇잔을 기울이면서 삶에서 묻어나온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식에 관한 이야기, 평생 직업으로 삼은 퇴임전 이야기, 지금부터의 삶에 대한 이야기, 친구와 얽힌 이야기 등으로 자정을 훌쩍 넘긴다. '우리 이제 버릴 것만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악을 쓰며 모으기에만, 가지려고만 한 세월은 가고 어떻게 가진 것 버릴까도 멋진 삶의 일부 이려니 홀가분하지 않은가.' '지금처럼 이렇게 먹어 버리기보다 좀더 보람있게 버리는 게 어떠랴.' ' 아 좋지.' 그러잔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잔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꼬투리를 만드는 이야기인가. 술 한잔에 다짐 한번 그렇게 밤이 간다. 바다도 천천히 밤 속에 잠기고 멀리 고깃배도 조는 듯 불빛을 깜박인다. 멀리 아프리카와 우리네 땅 북녘의 어두운 밤에 조그마한 촛불이라도 보탬이되는 우리네 삶으로의 여생을 꿈꾸세나.
일출을 보고자 하나 구름이 해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아 등대 광장에 한참을 서 있다가 구름 속에 숨은 태양을 상상만 한다. 바다도 일출을 꿈꾸지 않은듯 회색 구름만 안고 아침을 보낸다. 이미 해는 중천에 있고 어촌의 일상은 시작된 것이니 주문진 중간 광장의 식당에서 곰치국으로 해장을 하고 다시 어시장으로 들어선다.
일과가 벌써 시작되어 고기를 손질하는 엄마들의 손길이 바쁘다. 일행 중 한사람이 금방 들어오는 배에서 잡어를 몽땅 사서 회로 뜨고 있다. 조그마한 배에 부부가 근거리 바다로 나가 잡아온 어획량이 우리가 먹을 만큼이라니 거친 바다가 너무 적게 준 게 아닌가 하나 부부의 얼굴에는 함께 살아온 미더운 미소가 서려있다. '오늘 적게 잡히면 내일 좀더 많이 잡을 꿈을 꾸면 되는 거고, 바다가 주는 게 고마운 게지.'라는 여유가 보인다. 부부가 잡아온 고기를 손질하는 동안에도 일부는 안주삼아 해장 술을 기울이고, 나는 대게를 사서 포장한다. 아내가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대게 이야기를 하기에 어부가 금방 배에서 내리는 싱싱한 게를 포장하여 차에 싣는다. 항구는 이미 공판이 시작된지 오래이고 배들은 출항준비로 그물손질이 한창이다. 우리는 주문진 항의 구석구석까지 다니면서 어촌 사람들의 삶에 끼어 노니다가 오대산 월정사로 방향을 돌린다.
오대산 우러정사 가는 길바닥은 빙판이나 흙을 뿌려놓아 통행에 지장이 없어 보이기에, 상원암까지 가려다 중간에 공원관리인들의 저지로 되돌아 내려와 월정사의 전나무 가로수길을 지나 멋진 탑이 있는 광장에 선다. 오래 전 월정사에서 도자기 진사 밥 공기 두개를 산 게 두고두고 기본 좋은 밥그릇으로 사용해온 기억이 나는 것은 사찰이 가진 평민과의 소통자리가 인상깊었던 탓일 게다. 종교가 종교인 만을 위해서라면 이미 종교가 아니지 않을까. 월정사 광장에는 사진 작가들 단체인듯한 사람들이 카메라들을 메고 서성인다. 우리는 월정사 탑을 한바퀴 돌면서 사방의 건물들을 눈에 담고 일주문을 나온다. 주차장에서 타를 몰고 고속도로 나들목 쪽으로 오다가 막국수 집에 들어선다. 강원도의 특산 막국수에 아침 고깃배에서 떠온 회를 비벼 먹으니 일품점심으로 손색이 없다. 돌아오는 영동고속도로가 막혀서 국도로 돌아돌아 온다. 1박 2일 짧은 일정이지만 우리들의 사라짐보다 새로 피울 삶의 꽃 이야기는 시작된 게다.
첫댓글 풋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진하게 전해옵니다. 멋진 여행길이 아름답기도 합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여행은 꿈꾸고 있기에 '꽃보다 할배'라는 작은 이야기에 귀가 기울어지지만
혼자보다 동행이 있어 더욱 빛나는 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