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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5 - 산 마르틴이 리우데 라플라타 (아르헨티나와 칠레) 를 해방시키다!
스페인은 중남미를 멕시코(누에바 에스파냐), 페루,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리우데 라플라타
부왕령(아르헨티나등) 등 4개로 나누어 식민통치를 했는데.....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으로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권이 약화되자 남미 독립운동이 시작되니,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킨게 시몬 볼리바르 라면 리우데 라플라타를 해방시킨 인물은 산 마르틴 San Martin 입니다.
호세 데 산 마르틴 (Jose de San Martin) 은 스페인에 맞서서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주도한
인물로 177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성장한 이후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고,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년 이상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우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산 마르틴은 1812년 라플라타 부왕령(아르헨티나) 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고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마누엘 벨그라노와 '북부군', '안데스군' 을 지휘했는데... 산마르틴은 상(上) 페루
(볼리비아)를 통해 진군하는 기존의 공격 방식이 별 효과를 얻지 못할 거라 여기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하고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페루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산 마르틴은 국경도시 쿠요의 행정관으로 부임해 1817년 초 안데스 산맥을 넘었고
샤카부코 전투(1817년 2월 12일) 에서 스페인 왕당파군을 공격해서는 승리
했으며.... 칸샤 레야다 전투(1818년 3월 19일) 에서 패배해 후퇴하지만 이어
마이푸(1818년 4월 5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칠레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
했지만 산 마르틴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이후 영국 백작 토마스 코크런을
해군 지휘관으로 초빙하여 육해군 합동 작전을 실행해 1821년 7월 28일에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 라는 호칭을 얻어 페루 국가원수 자리에 앉습니다.
이후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논의하기 위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시몬 볼리바르와 회담을 진행했는데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 군대와 합류하는 것까지 제안했지만 볼리바르는 거부했으며, 식민지 독립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체제에 대해 산 마르틴은 유럽의 왕족을 초빙하여 군주가 통치하는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고, 볼리바르는 공화정에 입각한 미국처럼 연방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란 콜롬비아(콜롬비아 + 베네수엘라 + 에콰도르)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볼리바르
와는 달리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로 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을수 없는
입장이라 모든 정치적 입지를 포기하고 은퇴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는데 프랑스에
입국하려 했지만 거절당하고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을 떠돌며 쓸쓸하게 중년을 보냅니다.
도중에 몇번 귀국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당시 아르헨티나 정치 지도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실행되지 못했으며.... 1830년 벨기에의 벨기에 혁명 때 혁명군 지도자로 참가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고, 이후 1848년 다시 불로뉴쉬르
메르로 간 다음 2년후 사망해 시신은 188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 못지않게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세 나라의 독립에 공헌했고
그 자신의 이름을 딴 훈장은 아르헨티나의 최고 훈장이며 아르헨티나 어딜 가도 동상을 보는
인물인데 과야킬 회담 당시 44세였으니 아르헨티나에 더 머물렀다면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
의 시몬 볼리바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처럼 오랫동안 정치지도자로 남았을 인물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남미 각국 행보를 볼 때 산마르틴이 유럽으로 안가고 모국
인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독립후 국가원수의 자리에 올랐었다고 해도 대콜롬비아 공화국,
칠레 독립 이후 각각 모국들의 초대 대통령이 된 시몬 볼리바르처럼 독재정치를 펼치며 반대파 세력들
과 대립하며 실권하거나, 오이긴스 처럼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으로 축출당했을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1. 아르헨티나(1-A : 자력으로 독립전쟁)
아르헨티나 공화국(스페인어: 레푸블리카 아르헨티나) 는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에 자리하며 수도
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이고 동쪽의 대서양과 서쪽의 안데스 산맥 사이에 한반도의 12배인 277만
km2 의 면적을 차지하여 브라질에 이어서 두번째로 넓으며,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큰 나라 입니다.
여러차례의 대량 이민으로 이탈리아계등 백인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르헨티나는
또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인정되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극의 일부인 아르헨티나령 남극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하고 있으며 남미에서
1인당 GDP 3위, 구매력을 고려한 GDP는 세계에서 23위로 G-20에 속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부에 위치하며, 브라질에 버금가는 넓은 국토를 가진
남아메리카에서 두번째로 큰 나라로 러시아, 미국, 브라질, 캐나다, 중화인민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다음 8위의 넓은 면적을 가진 나라니 서쪽은 칠레에 접하고,
동남쪽은 대서양에 잇닿아 있으니 남쪽의 최장 거리는 3,700km 이니 만리에 가깝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남극에서 아르헨티나령 남극이라는 97만 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일부는 칠레(칠레령 남극)와 영국(영국령 남극)
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치니 이 주장은 1961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예되어 현재까지 실효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 없이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해서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으니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고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은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킵니다.
1516년 유럽인들이 찾아왔으니 스페인은 1542년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아우르는 페루 부왕령을 설립
했으며... 아르헨티나에 처음 정착한 것은 1527년 파라나강 근처로, 1535년에는 스페인 탐험가들이
16척 배에 1,600명으로 들어와 1536년 라 플라타강 근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
했으나 원주민들에게 파괴되자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다시 건설합니다.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 라는 그들의 후손들과 혼혈인 메스티소,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는데.....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 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 라고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고 그 나머지 지방에는
원주민들이 살았으며 파타고니아와 그란차코의 대부분 지역은 원주민 지배하에 남았습니다.
1776년 페루 부왕령의 영토였던 지역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여 페루 부왕령하의 일부지역
과 함께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으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및 볼리비아로
포루투갈의 전초기지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가 있음에도 수도를 국경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한
것인데.... 그후 "영국" 이 1806년~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에 걸쳐 침공했으나 후에
대중적 지지를 얻어 총독이 되는... 프랑스 장교 산티아고 리니에르에 의해 두번 다 저지 당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왕위를 찬탈한후 친형 조제프를 국왕으로 임명했으니 이 놀라운
사건이 아르헨티나로 전해지자 1810년 5월 25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차 의회(5월 혁명)
를 조직하면서 현재 아르헨티나를 이루게 되는 두 나라가 생겼으니, 남아메리카 합주국(1810년)
과 자유 연맹(1815년)이었는데, 다른 주들은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견해차로 통합
국가에 귀속되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파라과이” 는 1811년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해 나갔습니다.
1811년 아르헨티나 독립 선언후 왕당파 군대를 라스피에드라스에서 격파했고 1812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포위해 3년간의 기나긴 포위 공격 끝에 1814년에 스페인 부왕령을 멸망시켰으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호세 데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데...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와 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
했으나 1820년 자유 연맹(Liga Federal) 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결국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습니다.
1825년 “볼리비아” 가 아르헨티나와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1826년에 아르헨티나는 브라질로 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결과 브라질의 속주였던 시스플라티나주
의 독립을 막으려는 브라질과 무력으로 충돌하여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아르헨티나 - 브라질
전쟁으로...... 1828년에는 정전을 맺고 시스플라티나주는 “우루과이” 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나갑니다.
1852년 로사스 총독이 축출되자 중앙집권당과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의 내분을 미리 막게 되고 1853년 헌법이 통과되니 법학자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가 초안을 썼으며, 프란체스코회 수사 마메르토 에르키우가 설교를
통해 헌법과 국가 통합을 변호했으며 1865년 전쟁으로 국가 통합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870년대부터 해외 투자와 이민자들이 밀려 들어오며 농업 등이 근대적으로 발전했고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 새롭게 재편되어 국가 통합이 강화되었지만 그러나 1870년대 "사막의 정복"
이라 불리는 남부 팜파스와 파타고니아 토착 부족들을 탄압하여 1,300여명의 토착민이 죽었습니다.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쇠고기를 수출하면서 당시 세계적
으로 부유한 10개국중 한 나라였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는데 유럽에서 이민자
들이 늘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군부는 대통령을 축출했으니 그리하여 십여년간 보수주의자
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경제 정책을 보호주의로 선회했는데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대전때
중립을 지켰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런 태도를 보였으며, 연합국의 식량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으니 그는 사회 및 교육 정책을 폈으며, 노동
조합에 가입한 조합원의 수가 늘어나서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였고 그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 로
잘 알려졌다.)은 페론의 두번째 임기까지 영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그녀는 페론의 성공으로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거물이었으며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실시합니다.
후안 페론 대통령 정부는 아르헨티나 최초로 정부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게된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수 없는 것이었는데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 로 여겨졌으니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는데
1952년 에비타가 33살의 나이로 죽고..... 페론은 1955년 쿠데타가 일어나 스페인으로 망명합니다.
군부 독재정권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써 정치적 소요가 확대되자... 망명지에서 페론은 학생과 지식인으로
구성된 시위대를 동원하니 군사정권은 1973년 자유선거를 실시하였고 페론은 스페인에서 돌아와 대통령
이 되었지만 1974년 7월에 죽고,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 이사벨 페론은 남편의 뒤를 승계했으니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위기가 일어나자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축출됩니다.
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게 두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탱고이고 두 번째는 "가우초" 인데.... 스페인어
가우초 Gaucho 는 목동을 뜻하니 남아메리카의 팜파스 전역에 분포한 카우보이를 말하니 어원의
유래는 불분명하나 가장 유력한 설은 남미 원주민의 언어에서 '고아' 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가우초가 야네로나 바케로, 차로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목동 집단과 차별화되고 유명해진 이유는
팜파스가 광활했던 점이 하나이고 다음은 보르헤스 등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들의 문학을 통해
가우초를 일종의 리오플라텐세 국민문화로 전통 가운데 하나로 재해석한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로 브라질에 삼바가 있다면 아르헨티나에는 "탱고" 가 있으니 스페인어는 '땅고' 라고 하는데 가슴
과 가슴을 맞대고 서로 안은채 음악에 맞춰 걷는 춤으로 리드와 팔로우로 이루어지며, 상하체 분리와
시간차를 이용해 다양한 발동작이 이루어지니 리더와 팔로어 사이 오가는 에너지와 커넥션이 핵심입니다.
1910년대 아르헨티나 보카에서 유래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개했는데 특징적인 것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만 탱고가 만개했지, 아르헨티나의 다른 지역으로는 잘 퍼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밤새 춤추고 놀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치안이 보장된 도시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본질적으로 도시 문화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밀롱가' 라는 탱고 전용 무도장의 문화가 따로 있고 공연이 끝나면 무용수들도 일반탱고인
들과 어울려 밤새 춤추고 이야기하고 술도 마시는 분위기가 일반적으로 밀롱가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관리하는 오거나이저와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의 이름을 걸고 운영됩니다.
특히 디제이는 따로 워크샵을 개최하고 유명한 디제이는 국제 페스티발에 초청되기도
하니 그만큼 디제이가 중요한데 춤추는 사람들의 컨디션과 기분을 음악으로
조절해 주어야 하기 때문으로 디제이란 '이쯤에서 다리엔소가 좀 나왔으면...'
이라고 생각했는데 때맞추어 다리엔소를 틀어주는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2. 칠 레(1-A : 자력으로 독립전쟁)
칠레는 남북으로 긴 나라로 북쪽으로 페루, 동쪽으로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와 국경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태평양과 맞닿는데 국경이 맞닿지 않는 브라질과는 좋은 관계이고
반면에 세계 여러나라들 처럼 국경이 맞닿는 나라들과는 영토와 역사문제로 불편한 관계입니다.
모아이로 잘 알려져 있는 이스터 섬에다가 가격대비 품질이 좋은 칠레산 포도주와 로빈슨 크루소
의 모델이 살았던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 마젤란 해협과 그 옆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로 세상
의 끝 도시라고 불리는 푼타아레나스 등이 있으며 15소년 표류기의 배경이 된 아노벨 섬
(하노버 섬)도 남쪽 해안 끝에 있으며 남극대륙이 근처에 있으며 세게 최대의 구리 수출국 입니다.
남미에서 우루과이와 함께 선진국 수준에 가장 근접한 국가이며 남미에 2개밖에 없는 OECD 회원국으로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25,000 달러가 넘어 남미에서 국민의 평균
적인 생활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고학력 인텔리전트 이민자들이 많은덕에 타 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인력의 질적수준이 높으며 금융업에서 멕시코, 브라질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3대 금융시장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칠레 북중부 일대는 15세기 들어 잉카 제국에 정복되었지만 중남부 일대는 마푸체,
알랄카루페, 우이지체, 피쿤체, 셀크남등 잉카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남미 원주민이 부족 단위
로 터를 잡고 살았으니 칠레 북부는 안데스 문화권의 연장으로 잉카 문명이 꽃피던 곳이었습니다.
16세기 초 스페인 제국이 이 일대 지역들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는데 스페인 제국은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에 비해 유럽 본토와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개발에 관심이 적었을 뿐더러 원주민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고 스페인 식민시절 칠레는 가장 가난한 식민지로 남았으니 1810년에 독립합니다.
아르헨티나 페루와 함께 칠레의 독립 영웅은 콜롬비아나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킨 볼리바르와 달리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인데 산마르틴은 상(上) 페루(볼리비아)를 통해 진군하는
기존의 공격 방식이 별 효과를 얻지 못할 거라 여기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산 마르틴은 1817년 초 안데스 산맥을 넘었고, 샤카부코 전투(1817년 2월 12일)에서 스페인
왕당파군을 공격해 승리했으며 칸샤 레야다 전투(1818년 3월 19일)에서 패배해 후퇴
하지만 이어 마이푸(1818년 4월 5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하지만 칠레에서 '해방자(El Libertador)' 라고 하면 산 마르틴이 아니라 초대 지도자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를 가리키는데,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이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 정부 수반으로 추대했지만 산 마르틴
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했고 오이긴스가 초기 칠레를 이끌었기 때문 입니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세 나라의 해방자를 자처했으나 갑자기 유럽으로 떠나
버리고 페루는 대콜롬비아를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가 아르헨티나는 마누엘 벨그라노,
그리고 칠레는 베르나르도 오히긴스가 각각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후 1818년 정식
으로 독립국이 되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던 스페인은 1844년에야 칠레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1851년과 1924년 사이 칠레는 유럽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으니 스페인의 식민지
였던 시절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중 유럽 본토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잉여의 땅에
불과했지만 칠레가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는 적극적인 개발을 추진했는데 당시
유럽인들의 주요 이민 목적지는 대서양과 마주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었습니다.
대서양과 접하지 못한 칠레의 경우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에서 다시 칠레로 이민하는
사람들을 주로 받게 되었지만 단점만 있던것은 아니었으니, 열대/아열대성 기후
를 띄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들과 달리 칠레 남부는 지리적으로 극지방인
남극과 가깝고, 유럽인들이 정착해서 살기좋은 온대 및 한대기후를 띄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후반에 정착한 8000여명의 프랑스인 이민자들은 칠레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오늘날
칠레가 세계적인 와인 양조국가로 거듭나는데 기여하였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레바논인 이민자들에게 밀려난 팔레스타인인 출신 이민자들이 칠레로 재이주 정착
하기도 했으니 칠레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준 이민자 그룹은 19세기 도착한 3만여명에
달하는 독일계 이민자들과 58,000여명에 달하던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들수 있습니다.
독일계/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은 그동안 백인 인구가 희박하던 칠레 남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현지 원주민들을 소탕하면서 빠른 속도로 동화시켰는데 독일계 이민자
들의 영향으로 원주민 인구 비율이 높았던 칠레 남부에 메스티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으니 그 때문인지 원주민에 대한 잔혹한 탄압과 학살극이 극심했습니다.
태평양 항구와 인접한 초석 광산에 영국인 및 아일랜드인 광산업자들이 정착하기도 했으나
1차대전 종전후 초석 광산의 사업성이 낮아지자 칠레를 떠나기도 했으며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부르주아의 성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멕시코시티나 리마와 같은
스페인 제국의 대도시보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자립하기에 여의치 않았던 칠레에서 나타납니다.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러시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칠레의 농산물 시장에
큰 수요를 창출했고 한편 유럽은 칠레의 초석과 구리 광산을 개발하여 대량으로 가지고
갔으니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국과의 아타카마 사막에 매장되어 있는 "초석"
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페루는 남부지역을 상실합니다.
페루 및 볼리비아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 는 발파라이소를 중심으로 태평양 무역을
지배하게 되어 국가적으로 거대한 "부" 를 얻었고 자유주의적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구리와 초석에 과도하게 의존하니 세계시장의 가격 변동에 따라서 칠레의 운명 또한 부침합니다.
인접국인 볼리비아와는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이후 사이가 극악이 되었으니 칠레가 안토파가스타주
등 볼리비아 땅이던 태평양 해안가 지역를 뺏아 볼리비아가 바다 출입구를 잃은 내륙국가가 되었기
때문인데, 볼리비아는 티티카카 호수와 아마존 밀림 지대 내륙 하천에 소규모지만 해군을 두고 있습니다.
과거 볼리비아령이었다가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전해 빼앗긴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한 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칠레와 대립하는데 바다를 잃고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 입장에서는
해양진출을 주장, 칠레에 영토 반환과 항구 사용권을 요구하며 외교적으로 맞서지만
군사력과 국토면적도 칠레가 크고 강대한데다가 지역주민들 대다수가 칠레령 잔류를 원합니다.
주민들이 야속하게도 볼리비아로의 귀속을 거부, 반대하고 있어 분쟁의 양상이 전반적으로
칠레에게 유리한 실정이며 게다가 칠레는 안토파가스타를 돌려달라는 볼리비아의
요구에 볼리비아가 파라과이와 브라질로에게 빼앗긴 그란차코, 아크레 지역부터
먼저 돌려받고난 다음에 오라며 무시하고 있으니 약소국 볼리비아는 할 말이 없습니다?
1930년대까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상인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이끈 보수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비교적 일찍 정치 안정을 이뤘는데 안데스 산맥
일대에 위치한 국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에는 잉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면서도
상당히 장시간 동안 백인지배층에 의해 원주민인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도 소외되어 왔는데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더불어 원주민 비율이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독립 이후 마푸체족과 알랄카루페족 등 원주민들이
살던 칠레 중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유럽계 이민을 정착시킨 일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으니 우리 땅 내놓으라고 시위하는 마푸체족을 경찰이 죽이거나 폭행하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지금은 1989년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1970년대~ 1980년대
에는 군부독재로 악명이 높았으니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가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당시 민선 대통령이던
좌파 살바도르 아옌데는 저항 끝에 자살하고 반란군은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합니다.
곧바로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되었는데, 독재도 그렇지만 무자비한 철권통치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칠 정도였는데
아르헨티나도 지독한 군사독재국가였지만 칠레인들은 아르헨의 정신 못차리는
조금은 느슨한 비델라가 철두철미한 피노체트 보다는 덜 무섭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정치적 망명이 대거 이뤄진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프랑스, 스웨덴이나 바티칸의 칠레 주재
대사관이 칠레인 망명자들을 받아들여서 다른 나라로 피신시켜 주었으니 여기에는
가톨릭이 종교적 주류인 칠레의 특성 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때에 호주,
뉴질랜드로 칠레인들이 이주하게 되어 시드니에서 칠레계 호주인들을 흔히 볼수 있습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는 16년간의 독재기간 동안 무자비한 살인, 고문, 구금 등을
저지르며 반인륜적 폭정을, 학정을 벌였는데 당시 정보기관이자 비밀경찰인 칠레 국가정보부
(DINA)가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으니 경제적으로는 GDP를 상당수준 상승시키긴 했으나
빈부격차 확대와 국채 급증 등의 부정적 결과도 상당히 끌어온 것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칠레하면 초석으로 유명했지만 오늘날에는 유럽 와인을 대체할수 있는 신 와인으로 유명하니 포도재배
에 이상적인 자연환경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등
구세계 보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한 와인이 생산되고 있으니 한국은 2004년 FTA협정이 맺어진후
와인의 수입이 늘고 있는데 칠레의 와인산지는 대부분 골짜기 같은 분지이자 평원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차가운 해풍이 서쪽 해안가 산맥에 적당히 차단되면서 골짜기에 불어오며, 동시에 동쪽 내륙에서
해발고도 6,000m의 안데스 산맥을 넘어오는 공기도 들어오나 차가운 공기와 더운 공기가 밤낮
을 주기로 적당히 순환되고, 일조량이 좋기 때문에 포도재배에 아주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이 내린 기후와 토양 덕분에 포도나무에 해로운 필록세라와 같은 해충이나 식물병의 예방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칠레는 상하로 매우 긴 국가이기 때문에, 적도 부근과 남극에 가까운 곳을
제외한 중간 정도의 지역에 와인 산지가 분포되어 있으니 북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메마르고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이, 남쪽으로는 화산 지대와 남극 대륙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 서쪽으로
는 태평양의 푸른 물결이, 동쪽으로는 해발 6,000미터에 달하는 안데스 산맥이 버티고 있습니다.
미국, 호주, 아르헨티나 등과 신세계 와인으로 취급받지만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의 역사는
460여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포도재배는 16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
되며, 포도나무는 1554년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데 아귀레에 의해
도입되었고 1520년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로 스페인의 포도나무를 가져온
이래로 페루에 포도밭을 형성하였고 이 포도나무를 칠레에 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댓글 허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너무 오랜만에 들럿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네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고 몇일 남지않은 계묘년도
잘 마무리하시길빕니다.
안녕히계십시요.
수원에서 김성길올림
아...... 이제 연말인가 합니다.
세월은 참으로 상처럼 흐르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