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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 夏 王 朝 世 家
大夏(대하) (983)AD, 1038∼1227 종족 탕구트족 위치 감숙성 성 李(이)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중국식)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추존 | 子丘(자구) | 銀川(은천) | 甘肅省 寧夏 | |||
추존 | AD, 983∼AD, 1004 | 太祖(태조) | 李繼遷(이계천) | 이덕명의 부친 | 興慶府(흥경부 | 감숙성 영하 |
추존 | AD, 1009∼AD, 1032 | 太宗(태종) | 李德明(이덕명) | 이계천의 아들 | ||
제 1대 | AD, 1038∼AD, 1048 | 景宗(경종) | 李元昊(이원호) | 이덕명의 아들 | ||
제 2대 | AD, 1048∼AD, 1067 | 毅宗(의종) | 李涼祚(이양조) | 이원호의 아들 | ||
제 3대 | AD, 1067∼AD, 1086 | 惠宗(혜종) | 李秉常(이병상) | 이양조의 아들 | ||
제 4대 | AD, 1086∼AD, 1139 | 崇宗(숭종) | 李乾順(이건순) | 이병상의 아들 | ||
제 5대 | AD, 1139∼AD, 1193 | 仁宗(인종) | 李仁孝(이인효) | 이건순의 아들 | ||
제 6대 | AD, 1193∼AD, 1206 | 桓宗(환종) | 李純佑(이순우) | 이인효의 아들 | ||
제 7대 | AD, 1206∼AD, 1211 | 襄宗(양종) | 李安全(이안전) | 이건순의 손자 | ||
제 8대 | AD, 1211∼AD, 1223 | 神宗(신종) | 李遵頊(이준욱) | 이안전의 조카 | ||
제 9대 | AD, 1223∼AD, 1226 | 獻宗(헌종) | 李德旺(이덕왕) | 이준욱의 차남 | ||
제 10대 | AD, 1226∼AD, 1227 | 南平王(남평왕) | 李晛(이현) | 이덕왕의 조카 |
이계천(AD, 963∼AD, 1004)
서하의 추존 황제,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의 초대 황제였으며, 경종 이원호의 조부이며 부친은 李光儼(이광엄)이다.
이계전의 5대조인 拓跋建重(탁발건중)은 당나라로부터 안무평화번락사에 임명되었으며, 종고조부 탁발 사공(李思恭, 이사공)이 정난군 절도사에 임명된 뒤 그 작위를 세습했다. 이때 탁발사공이 당나라 황실 의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되어 후손들은 이씨가 되었다.
탕구트족 平夏(평하)부의 수령이며, 족장이자 이계천의 8촌 족형이었던 李繼捧(이계봉)이 북송에 귀순 했다(982년). 그러자 이계천은 AD 983년, 친동생 李繼沖(이계충) 및 측근 張浦(장포)와 함께 여기에 반 발하여, 북송으로부터 독립하고 거란족의 요나라에 귀부했으며, 거란으로부터 하국왕에 봉작되었다. 또 한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던 성종의 딸 의성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AD, 985년, 북송 의 장군 曹光實(조광실)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銀州(은주, 금 산시성 위린 남쪽)를 공략했으며, AD 996 년, 浦洛河(포락하)에서 북송의 군대를 격파한 후 靈州(영주, 금 닝샤 자치구 링우)를 포위하고 공격했 다. 북송은 군대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서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西涼府(서량부)를 공격하여 토번의 수령인 潘羅支(반라지)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이계천은 곧 죽었다.
이덕명(AD, 982∼AD, 1032)
이덕명은 송나라의 탕구트족(黨項, 당항) 출신으로 부친 이계천의 지위를 이은 뒤 송나라와 요나라 사 이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송 진종에 의해 西平王(서평왕)에 봉해졌으며, 5년 후인 AD 1009년에는 요나라에 의해 夏國王(하국왕)에 봉해졌다.
그는 興州城(흥주성)을 쌓아 도읍을 정하고 하서주랑을 겸병하여 서하의 기초를 다졌다. 아들 이원호가 서하를 건국하자 묘호는 태종, 시호는 光聖皇帝(광성황제)로 추존되었다.
(흥주성은 금 銀釧(은천, 영하회족 자치구)이다
제 1대 경종(AD, 1003∼AD, 1048)
서하의 초대황제며, 묘호는 경종이며 시호는 무열황제이다, 탕구트어로는 嵬理(외리)/曩霄(낭소)이다.
아버지 이덕명이 사망한 이후 그의 작위를 이어받아 하국왕이 되었으며, 이후 탕구트족을 병합하는 등 국력을 신장하여 AD 1038년, 칭제건원하여 국명을 大夏(대하)로 하고 수도를 흥경부로 하였다. 이원호는 재위 초부터 북송과 전쟁을 벌여, 칭신을 조건으로 막대한 공물을 받아냈으며(AD 1044년, 경력의 화의), 관영 무역장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허가 받아 서하의 국부를 크게 신장시키는 업적을 이룩했다. 이에 멈 추지 않고 난주와 오르도스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감숙성 서부의 독립세력이던 절도사들을 평정하 여 서하에 복속시켰다. 또한 토번까지 영토를 넓혔다. 한편 경종은 한족 인재들을 많이 등용하여 제국의 정치적 행정적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한자 서적들을 탕구트어로 번역하여 문화의 진흥에도 힘쓰기도 하 였다.
그러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무엇보다도 말년에는 후계문제와 관련하여 나라를 혼란케 하였으며, 장기적으로는 외척의 세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먼저 황자 이경명을 처형하였으며, 이어서 영 령가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태자의 모친인 한성황후 야리씨를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선목혜문 황후 몰장씨는 그의 오빠 몰장와방과 모의하여 그의 소생 이양조를 태자로 만들고자 공모하여 헌성황후 의 소생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한편 경종은 태자인 태자인 영령가의 부인인 몰이씨를 부인으로 맞아들 여 황후에 봉하였고 이에 분노한 영령가는 자신의 외가 및 몰장씨와 결탁하여 경종을 시해한 후 황위를 본인이 계승하고자 하였다. AD 1048년, 영령가는 만취한 상태의 부친을 습격하였으나, 코를 베는 데에 그쳤고 이에 영령가는 도주한 후 결탁한 내용에 따라 몰장씨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으나, 몰장씨 세력에 배신당하여 결국 처형당했다. 이틀 후 경종 역시 상처로 인해 사망하였고 결국 어린 나이의 막내아들 이 양조가 뒤를 이어 서하의 2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제 2대 의종 황제(AD, 1047∼AD, 1068)
생모는 황후 沒藏氏(몰장씨)이다. AD 1048년, 아버지 경종이 자신의 형이자 그의 장남인 영령가에 의해 갑작스레 살해 당하고 주범인 영령가도 처형되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당시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모친 몰장태후와 그의 친 인척이 국정을 장악하고 농단하였다. 한편 경종의 상을 틈타 요 내에서는 서하를 정벌하자는 의견이 개의되었고 결국 AD 1049년, 서하를 공격하였다. 요나라는 서하 공격에 앞서 서하의 하정사를 본국에 억류시켰고 북원추밀부사 소유신을 북송에 파견하여 서하 정벌 소식을 알렸다. 이 해 7월 요 흥종이 친정을 시작하였고 8월에는 황하를 도하했다. 하지만, 하남으로 진군하는 소혜의 군사가 서하군에게 패배하는 등 처음에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10월 야율적고가 조복군을 이끌고 서하군을 賀蘭山(하란산)에서 굴복시켰다. 이때부터 서하는 거란에 조공을 바쳤다. AD 1056년, 실질적으로 서하의 1인자였던 몰장태후가 보세식다기와 사통한 것이 또 다른 사통관계에 있던 이수귀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오빠이자 국상 沒藏訛龐(몰장와방) 은 분노에 차 이수귀를 죽이고 실권을 차지했다. 이때 의종은 12살로 정치에 참여하게 되지만 전권은 외 삼촌에게 있었기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물장와방과 그의 아들은 두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의종은 지식을 겸비하였고 아는 것도 많아졌다. 결국 AD, 1061년 의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의종은 물장와방과 그의 딸을 죽인 후 양씨를 황후로 삼아 외척세력을 근절하였다. 1044년에 경종 이원호가 송 인종과 경력화의를 맺 았지만 의종은 송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하고 노략질하였다. AD, 1066년 북송과의 전투중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이에 상처가 깊어 다음해에 22세로 사망하였다.
제 3대 혜종(AD, 1060∼AD 1067)
AD 1067년, 의종이 송과의 전투 도중 날아온 화살을 맞고 그 상처로 사망하자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오르 게 된다. 이로 인해 모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양을매외 3명이 국상이 되었다. 재위 당시 송나라와의 충돌 이 잦아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AD 1077년, 송나라와의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다가 어머니 황후 양씨와 국상 梁乙埋(양을매)에 의 해 유폐되었지만, AD 1084년에 복귀하였다. 복위 후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AD, 1086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제 4대 숭종(AD, 1083∼AD, 1139)
아들을 네명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이 태자 李仁愛(이인애)이며, 삼남이 양종의 아버지인 越王(월왕) 李仁 友(이인우)이다.
부친인 혜종 이병상이 복위 흐 26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는 바람에 어린 태자였던 이건순이 4살의 아이 에 황제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AD, 1086년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할머니인 황태후 양씨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황태후 양씨는 그 전부터 실권을 차지한 후 공공연이 권력을 휘두리고 있었고 특 히 그 친가인 양씨 일족도 덩달아 전횡을 부리는 탓에 황궁에 온갖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게 되어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그러다보니 북송군이 침입할 때 서하가 피해를 입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AD 1099년에 송종은 친정을 하여 실권을 가졌고, 반역죄나 진배없는 짓을 저지른 양씨 일가를 예외없이 숙청시켰다. 이후 관료 제도를 정비하여 과도한 부역을 경감시키는 한편 이 인력들을 노동력으로 이용, 황무지를 개척함으로써 식량증산에 성공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북송과 요나라가 쇠퇴하고 있었다. 요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며, 송종은 요나라와 동맹을 맺는 후에 송나라를 침공하여 어렸을 적에 조국을 짓밟은 복수를 단단히 하였다. 그리고 AD 1125년, 금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하자 당시 요나라의 국왕이었던 천조제가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를 무시해 버린다. 아무튼 이 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켜 만리장성 서쪽 지역의 땅, 즉 비단길을 확 보하는데 성공하여 외교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룬다.
AD 1139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 5대 인종(AD, 1124∼AD, 1193)
부황은 제 4대 황제인 숭종 이건순이며, 형제로는 영종의 부친인 이인우가 동생이며 아들이 제 6대 환종 이순우이다. AD, 1139년 7월 그의 나이 16세에 즉위하였다. 이웃나라와는 전쟁이 아닌 화친을 맺어서 평화을 유지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금나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인재를 양성할때도 민족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는데 특히 한족들을 중용하였다고 한다. 인재들을 위해 학당을 정비하고 교 육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그의 치세기간에는 과거를 시행하여 필요한 이재를 요직에 앉혀 서하의 안정에 도 심혈을 기울이는 등 내정에 있어서는 명군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사후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 이후 성립된 몽골 제국이 서하 정복을 위해 끊임없이 공략해 왔 고 이에 속절없이 휘말리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겪게 된다.
제 6대 환종(AD, 1177∼AD, 1206)
부황이 전임 황제인 인종이며, 모후는 장헌흠자황후 羅氏(라씨)이다.
AD 1193년, 부황 인종이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서 서하의 황제로 즉위하게 된 다. 선황이 추구하였던 문화정책과 경제력의 안정을 계승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금나라 및 남송과는 친교 를 다지는데 주력하였다. AD 1194년, 금나라로부터 하국왕에 봉해졌는데 서하의 황제 자리를 인정받은 셈이다. AD, 1205년까지 별 탈없이 지내다가 이 해에 몽골이 침입하게 된다. 부황 인종 때부터 있었던 군사력 약화 문제가 잔재해 있었음에도 환종 본인 역시 적의 침입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는 무기력한 모 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서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서하를 6차례 침공하였고, 그 동안에 여러 곳의 성이 털리거나 약탈당하였으며, 서하 주민들과 낙타를 뺏기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AD 1206년, 결국은 보다 못한 모후 나씨와 사촌 형인 이안전에 의해서 황제에서 폐위되고, 이안전에 의 해서 향년 30세에 목숨을 잃는다.
제 7대 양종(AD, 1170∼AD, 1211)
서하 제 4대 황제 숭종 이건순의 손자이자, 제 5대 황제인 인종 이인효의 조카이며, 부친은 월왕 이인후 이다. 형제는 제국충무왕 李彦宗(이언종)이 형이며 그 아들이 바로 후에 황위를 찬탈하는 이준욱이다. 이 안전과 이준욱은 숙질간이나 이준욱이 7살 연상이다.
서하는 원래 금나라와 친교가 있었던 국가였다. 선황이었던 환종 이순우는 친금파였다. 그러나 무슨 연유 였는지 알 수없지만, 이안전 본인은 금나라를 고깝게 보고 있었다. 자신과 정치 성향이 완전히 다르고 몽 골과의 전쟁에서 무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환종을 폐위시키기로 하고, 환종의 모친인 태후 나씨와 협력하 여서 환종을 옥자에서 끌어내리고, AD 1206년에 자기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즈음에 몽골 고원에서 통일이 된 이후 영토 확장을 노리는 칭기즈 칸의 군대가 내려오던 때였다. 그런 만큼 이안전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AD 1207년,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에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놓였고, 초기 몇 차례는 맞서 싸워서 방어에 성공하나 결국은 패배하여 서하는 징기즈 칸의 지배를 받게된다. 항복한 이후 많은 양의 공물과 황여 차 카를 몽골로 보내게 된다. AD, 1208년 서하가 몽골의 침입을 당할때에 구원요청을 거절한 금나라와 전 쟁을 계획했다가, 다른 황족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딧혔다.
AD 1211년, 이준욱의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폐위된지 한 달만에 향년 42세로 숨을 거둔다.
제 8대 신종 황제(AD, 1163∼AD, 1226)
할아버지가 월왕 이인우이고, 부친이 제국충무왕 이언종이며, 숙부가 양종인데 이준욱 자신이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숙부인 양종 이안전보다 나이가 7살 더 많았다
AD, 1203년에 부친으로부터 제국충무왕의 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이준욱은 특이한 면이 있는데, 역대 중 국의 여러 왕조들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다. AD 1203년. 본 과거에서 급제하여 진 사가 되었다.
AD 1210년 쯤, 당시 황제였던 숙부 양종이 금나라에 대해 강경 외교책을 쓰고, 몽골 제국에 패배하여 복속당해 황녀와 공물을 넘긴 것에 대하여 큰 불만을 갖고, 황제에게 언성을 몇차례 높였다. AD 1211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도모하고 있었던 선왕 양종을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를 하게 된다. 그리고 폐위된 양종은 한달 만에 죽고 만다.
호라즘 원정에 앞서 몽골은 서하에게 병력 제공을 요구하였으나, 서하의 재상 야사 캄푸는 당시 황제이 던 신종에게” 저들이 혼자 호라즘을 상대할 여럭이 없으니 병력을 요구하는 것”이라 간언 하였고 신종 자신이 무엇보다 몽골과 서하의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했다. 서하는 출병을 거절했다. 그러자 몽 골은 군사를 일으켜 서하를 공격했다. AD 1223년, 신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물러나며 황위를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가 헌종이다.
제 9대 헌종(AD, 1181∼AD, 1226)
서하는 전임 황제인 양종과 신종의 현명하지 못한 국정으로 인하여 멸망 일보 직전에 처하고, 새로운 황 제인 헌종의 즉위로 서하가 망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헌종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징키즈 칸이 西征(서정)한 틈을 노려서 몽골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사전에 정보가 몽골군에 새어나가 AD 1224년, 몽 골군에 의해 수도 銀川(은천)이 포위되자, 몽골에 투항하고, 인질을 조건으로 멸망을 면한다.
AD 1226년, 헌종이 병사하고, 그의 조카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다음 해인 AD 1227년, 7월에 이 현은 몽골에 투항했다가 그해 8월에 암살되어서 서하는 명실공히 멸망한다.
제 10대 말제(AD, ?∼AD, 1227)
서하의 제 10대 황제다, 정식으로 추숭된 묘호와 시호가 없으며, 헌종의 조카이며, 헌종의 동생인 청평 군왕의 아들이었다.
헌종이 황제로 재위할 때 이현은 남평왕으로 책봉되었다. AD 1226년, 제6차 침공 와중에 헌종이 사망 하자, 그 뒤를 이어서 이현이 즉위했다.
AD 1227년 6월, 몽골군이 서하의 수도 중흥부를 공격하자 중신들과 서하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도성 안에 물이 마르고 식량이 바닥나자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과 중과부족의 수세에 몰린 이현은 나중에 황 실이 끝장날 것을 두려워해 도성의 문을 열고 몽골에 항복하여 멸족은 면했다.
그러나 징기즈 칸이 AD, 1227년 7월 12일에 육반산에서 세상을 떠나자 몽골의 장수들은 서하의 반격을 우려했고, 결국 AS 1227년 8월 28일, 이현은 몽골군에 암살당했으며, 서하는 북송으로부터 독립한 지 10대 만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