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님의 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60. 8. 30 : 전남 광주 남동 출생 1989. 2. : 가톨릭대학교 졸업 1989. 2. 4 : 사제서품 1989. 2. : 중림동 약현 성당 보좌 1991. 2. : 해외유학 1994. 9. : 구파발 성당 주임 1997. 2. : 사제평생교육원 교무담당 2002. 10. : 해외연수 2004. 9. : 삼성동 성당 주임 2009. 2. : 휴양 2010. 8. : 목5동 성당 주임 2012. 2. 3 : 선종
이영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장례미사 다녀왔습니다
오늘 아침 집에서 8시30분에 출발하여 명동성당에 도착하니 9시 반이 조금 못되었습니다. 미사시간은 10시였습니다.
성당으로 들어 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이미 성당 안은 뒷자리까지 교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 있는 자리 조차 없었습니다. 간신히 옆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조문객이 왔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요.
윤말가리다와 만나기로 했는데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끝난 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미사에 집중했지요.
주례는 정진석 추기경께서 하셨고, 사제단이 함께 하셨습니다. 사제들도 추측컨데 서울교구 사제의 절반은 오신것 같았어요. 사제단 앞 좌석만 해도 100여분이 넘었고 뒤에 서 계신 사제들도 헤아릴 수 었었지요.
시작성가가 울리며 미사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운구가 들어오며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고 모두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추기경께서는 강론 말씀에서 "우리는 지금 이영춘 세례자요한 신부님의 고별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금요일 오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편안히 잠드셨습니다. 이제는 고통 없는 곳에서 안식을 얻으셨습니다. 누구보다 주임 신부님을 잃은 목5동 신자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그동안 시목했던 여러 본당의 신자들에게도 위로를 드립니다. 교구장으로서 젊은 사제를 보내는 것이 아들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 전에 신부님을 만났는데 식사를 할 수 없어서 걸쭉한 액체를 혈관에 맞는 것을보았습니다.
팔뚝에는 살이 하나도 없이 앙상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니까 신부님이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아프느냐 식사도 못하고 잠잘 때도 불편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면해 주시도록 기도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 육체적인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52세 밖에 안됐고 아직 열정이 식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임지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 성탄 축제도 교우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모든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야윈 모습으로 미사 드리는 모습을 신자들은 바라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보다 신자들을 먼저 돌보는 착한 목자, 책임감이 강하고 정이 많았던 신부였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사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 사제다운 사제였습니다. 이영춘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사가 세계사에 어떻게 접목되는지 연구해왔습니다. 이제는 유언이 되어버렸는데, "참된 신앙인에게는 시련의 때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씀.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머무는 자리가 꽃자리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 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병의 아픔을 무엇으로도 달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주는 말씀이 있으니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라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접목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희망을 갖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신부님의 명복을 빌며 신부님을 잃고 애통하는 가족들과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를 주시기를 빕니다. 이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라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최 베네딕도 친구 신부님께서 고별사를 하셨습니다.
"영춘아 이십여 년 전에 서품을 함께 받았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뭔가를 하던 너의 모습.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도 흔들림이 없던 모습. 때로는 지나친 단호함이 버겁기도 했다.
중략... 3년전 강남성모병원에 가보니 피를 쏟고 쓰러져 있었다. 위암 수술 받고 힘들어 하던 너의 모습. 그러면서도 사목 현장을 떠날 수 없다고 하던 너. 네가 명동지하성당에 오던 날은 우리가 서품 받은 지 23년이 되고 그 밤에는 눈까지 휘날리더구나. 너의 추억과 말못할 너의 고통까지 받아 주시는 듯 했다. 이십여년 간 사제 생활 하면서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겠지.
동반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다 나눌 수는 없었다. 함께이면서도 지향이 달랐으니까. 무언가를 늘 지향하던 너였지.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본당으로 갈 수 있음을 기뻐했었다. 열심을 다하던 너는 본능적으로 마지막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남보다 두 배의 열정으로 살았던 너. 아직은 이라는 긴 여운이 우리들에게 진하게 남아 있는데.
아직 세상을 살아 가야할 우리이기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린다. 영춘아, 이제 그만 주님 품에서 편히 쉬거라."
이어서 고별식이 이어지는데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나며 신부님의 생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천재성의 열정에 아쉬워 했을겁니다.
목5동 본당 신자들은 물론 전 주임이셨던 삼성동 성당 교우 그 밖에 구파발 신자들, 우리 교리신학원의 동문들 그 많은 교우들을 뒤로 하시고 운구 행렬은작별을 고하고, 신부님께서는 영원히 머무르실 주님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 이영춘 신부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위한 정의의 목소리이셨으며 지나칠 정도로 교회사에 관한한 남다른 정의감으로 항상 힘찬 주장을 마다 않으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아직 52세라는 젊으신 나이에...그렇게 빨리 가시려고 항시 조급하셨나 생각해 봅니다.
암투병 후에 건강해 지셔서 2010년 8월부터 목5동 주임사제로 사목하셨었는데...
52세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가시지만 많은 교훈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43동기님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 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 편히 쉬십시오.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잠드십시오.
성가대의 아름다운 고별성가가 우리를 더 슬프게 합니다. '하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
주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이 영혼을 부르신 그리스도님 이 영혼을 받아들여 주소서.
주님 이 영혼을 받으소서.
주님,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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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니 역쉬 생은 다르십니다.. 그 경황에 언제 이렇게 메모하셨는지....부지런히 날아와 새끼들을 먹여주는 어미새처럼...
올만에 반가웠구요..수고하셨어요..다음에 또 만나용^&^
꼭 가고픈 자리였는데... 모든 일이 그런가봅니다. 내 뜻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엮어지는 우리의 인생길에 반드시 주인은 그분이라는 것을,,, 언니는 정말 보물입니다. 언니, 늙지 마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일 날, 꼭 가야할텐데 기도해주세요,,,
가지못한 마음을 이렇게 함께 하네요. 지금 함께 한듯 너무 자세히 전해주셨네요! 문자로 알려주시고 ... 그리고 이처럼 애써주신 마음에 눈물이 나네요~
우리들을 위해 너무 큰 배려에 그저 감격과 고마움 간직하며 수고의 갚음을 그분께서 가득가득 채워 주시라고 마음 모아봅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마워하는 동기들이 있다는 것에 그저 용기가 납니다.
할 수 있는 한은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하렵니다.
언니!!! 10년전에 모든 열정을 쏟아 가르치시는 신부님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데 사진까지 실어 주시니 확실히 기억납니다. 언니의 열정도 대단하네요... 감사해요. 언제나 신학원의 일에 발벗고 나서는 언니가 존경스럽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구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