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양식’ 개념으로 정보화시대 분석 시도
-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964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충격적 언명을 담은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가 발간되긴 했지만 미디어, 즉 매체가 현대적 의미의 철학적 주제 영역에서 나름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90년 이후라 할 수 있다. 마크 포스터가 ‘푸코, 마르크스주의, 역사’(1984, 국역본 1990)에서, 시대를 진단하는 데 포괄적인 힘을 발휘했던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이라는 개념 대신 ‘정보양식’을 내세워 이른바 정보화시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새 시대를 분석하려는 데서 현대적 의미로 본 매체철학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정보양식’은 전자적 커뮤니케이션에 기초를 둔 사회관계의 확산과 그에 따라 생기는 현대사회의 조직과 구조의 변형을 분석하기 위한 포괄적 개념이다.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의 과정에 연결되는 각종 사회적 장치들이 사회구성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매체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의 감각과 추리 및 인지능력을 대신하는 디지털혁명에 의한 뉴미디어의 출현과 급속한 확산이야말로 사회구성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반이라는 것이다.
뉴미디어 출현과 급속한 확산이 사회구성의 성격규정
그러니까 매체철학은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대대적 개발과 확산이 현대사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제까지 중시해온 철학적 개념들, 예컨대 반성, 주체, 본질적 형상, 이성, 휴머니즘 등으로는 매체의 시대 장악력에 의해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도무지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매체철학은 은근히 포스트-구조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포스트-구조주의가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매체철학자라면 적어도 뉴미디어적인 매체환경이 대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를 사회구성의 근간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뉴미디어적 환경은 종전의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를 둘러싼 비판적 관점을 더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미디어적 환경은 그 바깥에서 철저히 다원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확산된다. 또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위상학적이고 복합병렬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블랙박스와 같은, 주체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개인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매체철학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 푸코나 들뢰즈나 데리다 또는 보들리야르나 리오타르 등의 철학자들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크 포스터는 아예 뉴미디어적 시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것이라 말하면서, 예컨대 뉴미디어의 데이터베이스는 푸코가 말한 팝옵티콘을 넘어 초팝옵티콘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매체철학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여러 철학적인 개념들을 동원해서 뉴미디어의 시대 환경을 분석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매체철학적인 접근이야말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실질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대목은 볼츠와 같은 매체철학자가 현재 상태에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과 하버마스를 위시한 비판이론가들이 각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각성을 함으로써 양 진영 사이에 서로 사고를 열어놓을 수 있다는 길이 열릴 것이라 예측한다는 점이다. 즉 매체철학은 그저 현대사회의 구성적인 차원을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회를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열어나가는 데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사유의 범위를 넓히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볼츠는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이론이 아직까지는 신학에 기대고 있음을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비판한다. 그런 비판이 가능한 것은 그가 냉엄하게 뉴미디어적인 매체철학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부터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대륙에서도 아예 ‘매체철학’ 또는 ‘매체이론’이라는 제목을 단 철학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매체철학은 형성중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확하게 매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 담론계를 국제적으로 장악한 저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뉴미디어에 관련된 기술들이 그 종착점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철학은 지금도 형성중
그런 가운데 사이버스페이스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마이클 하임이 저술한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는 매체철학이 어떤 형태로 사유를 펼쳐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뉴미디어 기술의 원리와 실제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과연 가사현실을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펼쳐질 미래의 뉴미디어적 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사유와 의식 그리고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뛰어난 설득력으로 논의를 펼친다.
마이클 하임의 구체적 영역에 대한 매체철학적 접근은 보들리야르가 제시하는 초현실 내지 시뮬라크르 이론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보이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가 뉴미디어적인 매체철학적 관점을 정확하게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매체철학적 관점에 대한 각성은 아직 대단히 미흡한 실정이다. 일군의 철학자들이 이룬 연구성과를 모은 ‘매체의 철학’(나남출판, 1998)은 ‘매체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다만 전체적 구도에 있어 ‘매체철학’을 근본적으로 정립하겠다는 의지가 약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체철학의 성격상 욕되는 매체 기술에 관련된 근거 제시가 빈약하다는 점에서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찍이 뉴미디어에 관련된 기술적 측면을 조명한 이인식의 ‘사람과 컴퓨터’(까치, 1992)는 매체철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과 유사한 방식의 매체기술에 관련된 지식들을 동원하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매체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 배식한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책세상, 2000)이다. 이 책은 뉴미디어적인 매체상황이 어떤 철학적 함축을 가지는가를 간략하나마 조명하고 있다.
한때 ‘철학아카데미’의 기관지인 ‘아카필로’ 7호(산해, 2001)에서 ‘매체와 사유양식의 변환’이라는 주제로 특집을 꾸민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이뤄지는 매체철학적인 사유는 실험적으로 대중문화 분석이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을 다루는 데서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중요한 국내 저작이 하나 나왔다. 앞서 소개한 ‘매체의 철학’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이기현이 매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구체화하여 ‘미디올로지’(한울, 2003)라는 야심만만한 저서를 출간했다. 만약 국내 철학계가 매체가 지닌 철학적 의미의 중대성을 인지한다면, 아마도 이 책은 국내에서 매체철학적 담론의 시발점이 되리라 생각된다.
전통적인 철학분류의 구도를 대대적으로 바꿔놓을 가능성
현대적 의미를 띤 매체철학은 기본적으로 다음 몇 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성립한다. 첫째, 뉴미디어의 발달과 확산에 의거해 어떻게 사회구성이 급변하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 둘째, 그런 가운데 근대 이후 흔히 철학의 중심주제가 된 주체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지는가? 셋째, 구체적으로는 철학적 사유를 비롯한 인간의 사유와 그에 따른 글쓰기 및 제반 표현의 방식이 어떻게 급변하는가? 넷째, 그래서 결국 전통적으로 진리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던 사태 자체 또는 전 포괄적인 현실성 혹은 실재성이 갖는 존재론적인 또는 인식론적인 위상이 어떻게 급변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매체철학은 일종의 위기 또는 파국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물질적인 상품 생산에서 비물질적인 상품 생산으로의 대대적 전환, 하이퍼텍스트적인 망조직의 사회 전체로의 확산, 가상현실을 비롯한 인공적인 사이버스페이스가 발휘하는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환경에 대한 지배와 전복, 대대적인 복제기술로 인한 배타적 소유로부터 공유적 향유로의 전환, 신경망 시스템의 기술적 발달과 확산에 의한 인간의 뇌와 컴퓨터프로그램간 호환에서 빚어지는 실재성에 대한 인식의 근원적인 대변화 등등 어느 하나도 기존의 모던한 삶의 방식을 대대적으로 뒤집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뉴미디어적인 전체 상황에서 이제 매체철학은 가장 선진적인 철학으로서 그 소임을 떠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까 매체철학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론, 인식론, 사회철학, 정치철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과학철학 등을 포섭하게 될 것이다. 모르긴 해도 어쩌면 이러한 전통적인 철학 분류의 구도를 대대적으로 바꾸어놓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분류 구도를 몰아내고 예컨대 인터페이스론, 하이퍼 리얼리티론, 감정론, 로보틱스론, 사이버리즘 등의 새로운 철학 탐구 분야가 자리를 잡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 사이 한동안은 전통적인 철학 장르에 의거해 매체철학은 길을 모색할 것이다.
매체철학을 근대 이후의 전통 철학과 관련지을 때,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언명 중 하나는 “주체는 매체다”라는 것이다. 매체를 도구로 여길 때, 당연히 도구를 다루는 사람은 매체에 대해 주체가 된다. 그래서 주체/매체의 이분법이 성립하게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니클라스 루만은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했다.
이를 일반화시켜 말하면, 매체가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매체가 매체의 주체가 된다. 그럴 때, 그동안 매체를 사용하면서 매체와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겼던 인간 주체가 오히려 매체의 매체가 된다.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언명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매체 자체가 제 스스로 메시지가 된다는 것은 매체가 매체를 전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매체가 오히려 매체를 사용하는 인간 주체를 매개, 즉 매체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인간 주체를 매체로 여길 때,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실체로 여겨오던 영혼, 자아, 정신 등의 거점은 일종의 신화적이거나 신학적인 거품이 되어 터져버린다. 그러한 것들이 일종의 매체로서 기능을 가질 수 있는/있었던 지평으로서의 체계가 무엇인가 하는 쪽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제아무리 리비도적인 무의식이 인간 존재의 심층에 강렬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일종의 매체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리비도적인 무의식이 일종의 매체 기능을 갖고 있는/있었던 지평으로서의 체계가 무엇인가 하는 쪽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매체에 대한 매체, 매체를 위한 매체, 매체를 통한 매체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고는 하지만, 매체가 은폐된 형태로 전달되는 매체자신인 매시지 속에 흔히 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매체가 바뀌면 당연히 그 속에 담긴 메시지도 바뀐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영화의 한 장면을 TV 광고에 쓰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서로 다른 매체들은 서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 다르게 만든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기존의 매체는 당연히 그 기능이 달라진다. 매체는 서로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 주체를 매체라고 할 때,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인간 주체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정된 인간 존재의 본질에 고나한 담론 체계는 여기서 거품이 되고 만다. 매체에 대한 매체, 매체를 위한 매체, 매체를 통한 매체 등의 구도가 존재 전반을 관통하는 것이다. 이같이 매체철학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일종의 매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신조차도 하나의 매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매체철학은 모든 존재를 무한복합의 행렬, 즉 매트릭스의 무한복합으로 보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 ‘매트릭스’가 잘못 설정하여 황당하기까지 한 무한복합의 매트릭스를 창조한 자와 같은 형이상학적 전제조차 아예 거품 내지는 찌꺼기로 보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이제 무한복합의 매체적 매트릭스의 바깥을 기웃거리지 말고 매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매체들간 구조가 짜여지는지, 그 속에서 여전히 문제가 될 인간 주체인 매체는 어떤 위상에 있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인간 주체인 매체가 전체의 매체 매트릭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향유하는 특이한 매체로서 존립하는가를 분석하고 포착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질 것이다.
아직은 매체철학의 주된 향방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이제 막 걸음마의 단계를 넘어선 전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매체철학을 논의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매체철학이 커뮤니케이션이론과 긴밀히 연결된 상태에서 아직 명료하게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정보화사회의 이론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론이든 정보화사회의 이론이든 매체철학적인 기반이 없이는 난관에 봉착할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매체철학이 담론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